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59)화 (59/282)

<59화>

종종종.

토끼가 달린 슬리퍼를 신고 걸으니, 마치 토끼 두 마리가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남관으로 향하는 긴 회랑에는 유난히 석상들이 많아 올 때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볼거리가 많았다.

드디어 남관 건물에 다다르자 루시엘은 이상함을 느꼈다. 굳게 잠겨 있어야 할 갈색의 커다란 문이 열려 있던 터였다.

‘오늘 청소라도 하는 날일까?’

루시엘은 살금살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남관에 들어섰다.

입구부터 쏴아아, 하고 쏟아지는 커다란 분수가 시원했다. 그리고 액자들과 무공 훈장이 걸린 브라운 톤의 벽면이 보였다.

갈색의 가죽 소파와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 구석에는 갖가지 검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던 찰나 층계를 내려오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

하얀 가운을 걸친 채 내려오는 여성의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두 눈에는 예기가 서려 있었다.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고 반짝이는.

늘씬한 체구에 긴 팔다리, 움직임이나 곧은 몸이 예사롭지 않았다.

루시엘은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못 보던 얼굴이구나. 이렇게 어린 나이의 시녀도 있었나?”

딱딱한 말투와 낮은 목소리에서 루시엘은 그녀가 혹시 기사가 아닐까 싶었다.

“아…… 저, 저는. 죄송해요. 길을 잃어서……!”

루시엘이 그녀의 기세에 눌려 살짝 뒷걸음질을 치자, 소파에 털썩 앉은 그녀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위스키 잔을 들어 올렸다.

루시엘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뒤로한 채, 볼이 붉어졌다.

“시녀장에게 이르진 않으마. 아가, 그만 가 봐.”

“앗, 네에. 감사합니다.”

루시엘이 몸을 돌려 가려는데 다시 발길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성안이 무척 조용하더군. 에바가 돌아오는 대로 와 달라고 해 줄래?”

“……아, 그게.”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도착한 건 그냥 말하지 마라. 잠시라도 조용히 있고 싶으니.”

“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소파에 푹 쓰러져 누웠다.

루시엘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는 다시 회랑을 건너왔다.

‘누굴까, 대체.’

에바를 불러 달라고 말할 정도면, 높은 사람이 분명했다.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굉장한 미인이었다. 루시엘은 양 뺨을 감싼 채 도도도 본관까지 돌아왔다.

보석을 숨길 곳은 다른 후보지를 찾아야겠다.

열심히 뽈뽈거리면서 돌아다녔더니, 약간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먹지 않았구나.

루시엘은 혼자서 모닝용 작은 식당으로 가 보기로 했다. 그곳에는 마침 레오니의 식사를 챙기러 온 사샤가 있었다.

“세스 주방장이 특별히 아가 마님을 위해 준비한 메뉴라고 전해 달라네요.”

요리를 본 순간, 루시엘은 아무래도 방에 올라가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윽, 보기만 해도 벌써 맛있어 보여. 여기서 먹으면 위험하겠어.’

“……저어. 그냥 방에서 먹어도 될까요? 책 보면서 먹고 싶어서요.”

“예? 물론입니다. 곧 방으로 가져다드리지요.”

분명 바지런히 올라왔는데도 루시엘과 거의 동시에 식사가 도착했다.

커다란 새우와 버섯, 파프리카, 양파를 볶아서 레몬향이 나는 간장 소스를 뿌린 요리였다. 옆에는 소고기와 야채를 바삭한 밀가루 반죽 안에 넣어 구운 요리와 오렌지를 갈아 넣고 동그란 얼음을 동동 띄운 음료도 있었다.

모양새부터 식욕을 잔뜩 돋우는 요리였다.

아까보다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루시엘은 포크로 새우 속살부터 가져왔다.

앙 하고 입안에 넣는 순간 황홀한 즐거움이 입안에 퍼졌다. 탱글한 새우의 하얀 속살이 가득 씹혔다.

“와아, 너무 맛있다.”

요리를 맛본 감동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그리고 이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끝나지 않으면 좋겠어.

심장 안에 모여든 마력이 뽀글뽀글 거품처럼, 허공 위로 보석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또롱, ……또롱!

“앗.”

토파즈 말고 처음 보는 보석이었다.

에메랄드보다 연하고 훨씬 밝은색.

마치 식물의 잎사귀처럼 연두색의 보석이었다.

무슨 감정으로 생긴 걸까?

방금 요리를 먹으면서 정말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보석인지 알고 싶어.’

루시엘은 이 세상에 어떤 보석들이 있는지 알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이 어떤 감정으로 생기는지는 직접 알아내야겠지만.

‘도서관에 가서 보석에 대한 책이 있는지 봐야겠어. 가능하면 보석 상점에서 직접 보는 게 더 좋으려나?’

루시엘은 우선은 이 행복함을 만끽하기로 했다.

“너무 잘 먹었다.”

통통해진 윗배를 쓰다듬은 루시엘은 만족감에 웃었다. 사르륵 낮잠이 쏟아지며 눈이 감기고, 고개가 떨어질 때쯤 루시엘은 뒤늦게 눈을 반짝 떴다.

“그러고 보니, 마법 테스트가 멀지 않은데 계속 연습을 하지 못했어.”

마법은 수련을 게을리하면, 실력이 훅훅 줄어든다고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늘 성실함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하려고 했는데, 최근에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다가 그동안 쌓아 온 실력이 흐트러지고 말 거야.

비록 엄청난 실력은 아니지만 말이다.

‘마법 연습을 마저 하러 가야겠어.’

루시엘은 낑낑대며 옷장을 겨우 열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노란 원피스와 레이스 달린 양말도 벗어서 한쪽에 잘 개어 두었다.

루시엘은 거울 앞에 서서 파란색 리본을 입에 문 채로, 양손을 이용해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았다.

‘이리 와.’

자신의 지팡이를 소환해서 들었다. 언제나 봐도 예쁜 지팡이였다.

‘……어? 왜 이렇게 반짝거리지?’

순간 반짝이던 지팡이가 잠시 투명해져서 루시엘은 기겁했다. 지팡이가 사라질까 봐 겁이 났던 터였다.

‘아, 안 돼!’

루시엘은 양손으로 지팡이를 절대 잃을 수 없다는 듯, 꼬옥 붙잡았다.

다행히 지팡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에 루시엘이 보는 앞에서 지팡이의 모양이 살짝 변하기 시작했다.

지팡이의 가장 꼭대기를 이루던 부분에 동그랗고 투명한 구슬이 하나 생긴 것이다.

딩딩딩.

처음 루시엘이 마나를 연결하던 마나페어링 때처럼, 지팡이가 소리를 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루시엘은 서둘러 수련장으로 향했다. 지팡이에 문제가 생긴 건지 알고 싶었다.

수련장에 도착하자마자 지팡이를 들어 연습에 몰입했다.

힘을 각성한 후라 그런지 마나를 끌어모으면서 심장이 두근거리던 증상은 사라졌다.

게다가 지팡이의 효능이 더 좋아진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더욱 안정적으로 마나를 모았고 마법의 위력도 훨씬 강해졌다.

‘뭔가 달라.’

파앗!

슈우욱!

곡선으로 길게 뻗어 나간 매직 애로우의 마법 화살이 첫 번째 허수아비부터 가장 끝에 있는 열 번째 허수아비까지 모조리 타격을 주었다.

루시엘은 빠르게 다음 구역으로 넘어갔다. 이제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맞추어야 했다.

열 개중 하나를 제외하고, 허수아비들이 픽픽 쓰러졌다.

다음 구역은 굴러오는 지푸라기 공을 피한 후에 날아오는 허수아비를 맞추는 거였는데 여기선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오늘은 제발, 성공하기를.”

그러나 이미 진이 빠져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조금만 쉴까?’

루시엘은 잠시 짚더미에 기대앉아 수련장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벨슈타인가의 가족들만 따로 사용하는 마법 수련장이었는데, 공격 마법은 안전을 위해서 이곳에서만 연습하게 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물리적, 마법적 실드와 함께 복원 마법이 겹겹이 쌓여 있어 어떤 마법을 발현해도 10분 후면 다시 원상복구가 되는 멋진 곳이었다.

아무래도 가족 대부분이 마법을 쓰니까 이렇게 마련해 놓은 모양이었다.

무속성 마법도 충분히 강하긴 하지만, 원소 마법은 여러 가지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더 쉬운 건 사실이었다.

‘보석에 담긴 원소의 힘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제 보석을 연구해 냈던 마도사 에리카.

그녀가 황태자의 밑에서 연구를 시작한 건, 루시엘이 막시무스와 파혼 후 그의 후궁이 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아직은 그녀가 황성에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나이대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녀는 분명 그 당시 황태자보다는 나이가 많았고 항상 푸른색의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숄을 걸치고 있었다.

‘떠올려 보자, 루시엘. 또 뭐가 있는지…….’

망토의 문양이 뭐였더라.

얼굴은 또, 어땠지?

그녀는 언제나 망토와 숄로 머리를 푹 가리고 있어서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입술에 점이 있었고, 손등에 문신 같은 게 있었다. 그것 역시 마찬가지로 정확한 모양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루시엘.”

숨을 몰아쉬며 기억을 짜내려는데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와, 루시엘은 얼른 뒤로 돌았다.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할아버지!”

“테스트를 위해서 연습 중이더냐?”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 테스트였지. 한데, 내일은 내가 용무로 바쁠 것 같구나. 테스트는 조금 더 미루어도 되겠니?”

“앗, 물론이에요. 사실 아직도 많이 부족해서 걱정 중이었어요.”

루시엘이 괜스레 팔뚝을 긁적이며 대답했지만 사실 아직도 에리카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를 찾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쉬워질 텐데.’

“너무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충분히 잘할 수 있을 테니.”

“네에. 힘낼게요. 근데 무슨 일이 있나요?”

루시엘이 염려하자 길리아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다. 마탑에 다녀올 일이 생겼단다. 부탑주 녀석에게 일을 전부 맡겼더니, 장로들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일이 좀 엉망이 되어서.”

“……부탑주? 장로?”

루시엘의 얼굴에 물음표가 잔뜩 띄워졌다. 길리아트는 웃으면서 말했다.

“제국에는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마탑이 있지. 그중 북쪽의 마탑이 우리 벨슈타인가의 소유이자, 내 소유란다. 마탑의 주인인 마법사를 마탑주라고 칭하는데 그게 바로 나다.”

“아아…… 책에서 봤어요. 할아버지의 업적이 나온 책에서.”

“그런 것도 읽었니?”

“네……. 그럼 할아버지가 가장 강한 마법사이신 거예요?”

“공식적으로 북부에선 그런 셈이란다.”

“공식적으로요?”

그렇다는 건 비공식적으로는 아니라는 이야기일까? 그러고 보니 시아빠도 강한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