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마침 집무실에 도착하니, 루이비드 혼자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문까지 미리 열어 두고 있었다. 마치 루시엘이 오기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문이 열려 있네요.”
“네가 올 것 같아서.”
“……앗, 어떻게 아셨어요?”
루시엘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잔뜩 띄우자, 루이비드가 입매를 올리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네 슬리퍼 소리가 특이하니까.”
그가 고갯짓으로 루시엘의 토끼 슬리퍼를 가리켰다. 루시엘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슬리퍼의 소리가 유독 잘 들린다고 하셔서 소리가 안 나는 것으로 바꾸었던 터였다.
‘시아빠는 청력이 남다르신가 봐.’
사실은 레오니의 방으로 선물을 들고 아장아장 가고 있는 루시엘의 뒷모습을 복도에서 이미 봤다.
그래서 자연히 자신의 차례를 문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순진하게 그 말을 믿어 버린 루시엘이 분홍 눈을 도로록 굴리고 있자, 루이비드가 루시엘의 통통한 볼을 쭉 잡아 늘렸다.
“이아바(시아빠)?”
“우리 새아가는 귀여워서 그냥 둘 수가 없군.”
“아아요(아파요).”
아프다는 말에 루이비드가 얼른 손을 놓았다. 아주 살짝 당겨서 아플 줄 몰랐는데, 토끼처럼 연약한 아이에겐 그것도 제법 센 힘이었던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앞으로 볼은 안 당기마.”
루시엘이 제 양 볼을 자그만 손으로 매만지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우, 약속 절대 지키셔야 해요.”
“알았다. 그러니 나도 줘야지. 선물.”
공작이 루시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 큰 어른이 저렇게 선물을 기다릴 줄은 몰랐다. 근데 어떻게 아셨을까.
“앗, 비밀이 없네요.”
“적어도 이 성에선 내가 모르는 게 없지.”
“아, 잠시만요.”
루이비드가 커다란 손바닥을 내밀었다. 루시엘은 가방 안을 한참 뒤적거리더니, 카드와 흰색 상자를 그에게 주었다.
그는 선물보다 카드부터 먼저 펼쳐 보았다. 카드를 읽은 공작의 입술이 보기 좋게 호선을 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잘생긴 시아빠, 항상 감사하고 사랑해요. 저한테 딸이 되라고 말씀하셨을 때 정말 이 집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지금 이대로도 만족해요. 루시엘은 행복해요.」
카드를 읽은 공작이 조용히 루시엘을 향해 팔을 벌렸다. 루시엘은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품에 살그머니 안겼다.
“루시엘, 네가 딸이든 며느리든 상관없다. 너는 벨슈타인가의 아이니까.”
벨슈타인가의 아이.
루이비드의 그 말이 루시엘의 심장을 챠르르 울렸다.
키제프와 결혼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 주시겠다는 말 같아서 루시엘은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순간 루시엘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보석을 만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시아빠…….”
공작이 루시엘의 자그만 등을 토닥이고는 시선을 하얀 상자로 옮겼다.
“뭘 샀지?”
“……아, 별것 아니지만.”
루시엘이 그에게 건네기도 전에 쭉 뻗은 공작의 팔이 하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앙증맞게 달린 리본 상자를 열자, 뜻밖의 물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톱보다 자그만 하얀 장미 부토니에.
“시아빠께서 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제 존경의 마음도 담아서요.”
그의 시선이 부토니에로 향하더니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내가 받은 가족의 날 최고의 선물이다, 루시엘.”
“헤헷.”
루시엘은 겨우 위기를 넘기고 나와서 진땀을 흘렸다.
‘하마터면 각성을 들킬 뻔했어.’
아무리 봐도 공작의 취향이 아닌 아기자기한 액세서리였지만, 그날부터 공작의 재킷에는 하얀 장미가 항상 자리했다.
공작의 방을 나오다가 마주친 엘링턴에게는 마음이 촉촉해지는 시집을 주며 ‘여자들은 시를 좋아한대요. 도움이 될 거예요.’ 하고 카드를 건넸다.
그는 연애하고 싶은 제 마음을 루시엘이 어떻게 아는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시아빠는 연애할 시간도 안 주시는 분이니까요.”
잘 웃지는 않지만 미소가 예쁜 에바에게는 손거울을 선물해 주었다.
“에바는 웃는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아셔야 해요. 석양보다 붉은 머리칼도요.”
한참 동안 선물 순회를 다녔더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길리아트 할아버지와 이벨린 할머니께 드릴 차례였다. 두 분께는 받은 게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의 날 선물이에요.”
루시엘이 선물과 카드를 내밀자, 이벨린이 활짝 웃으면서 루시엘을 안아 들었다.
“너야말로 우리 선물인걸. 하지만 예쁜 마음이 고맙구나!”
“아니 여보, 내가 할 말을 당신이 다 했어요. 우리 루시엘, 정말 고맙다. 이 할아버지는 가족의 날 선물은 딱히 준비를 못 했는데.”
길리아트가 허허 웃으면서 루시엘이 준 선물을 받아 보며 말했다.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언제나 제게 많은 걸 주시잖아요.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 마법도 배우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요즘 루시엘의 마법 실력이 부쩍 늘었지. 돌아오는 다음 수업 시간에 테스트를 해 보는 건 어떠냐?”
“테스트요?”
루시엘이 놀라서 토끼 눈을 했다. 길리아트의 붉은 눈이 루시엘을 응시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팡이도 생겼고 네 실력을 한번 볼까 한다.”
“어, 어떤 테스트예요?”
“3서클 마법사를 불러서 대련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괜찮지?”
3서클 마법사라면, 루시엘보다 서클이 두 개나 높았다. 서클 하나만 차이가 나도 차원이 다르다고 들었다.
게다가 루시엘처럼 무속성이 아니라 속성을 발현해 낸 마법사일 것이 틀림없었다.
루시엘에게는 자신을 시험해 볼 기회가 될 터였다.
“……네, 해 볼게요.”
“그날은 나도 참관해야겠구나.”
이벨린의 말에 길리아트가 장난스레 말했다.
“이벨린이 오면, 내가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는데. 거기만 바라보느라고.”
“아유, 그만해요. 애 앞에서.”
이벨린이 부끄러운 듯 길리아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녜요. 두 분 보기 좋은걸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 루시엘이 준 선물을 풀어 보죠.”
분홍색의 긴 상자에는 똑같은 커플 실 팔찌가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니셜 사이에 하트를 넣은 팔찌였다.
“응? 이게 무엇이니?”
“로즈가 그러는데 사랑하는 사람끼리 같은 걸 하는 게 요즘 유행이래요. 두 분이 함께 나눠서 끼시라고 같은 거로 구했어요.”
“이런, 우리가 끼기에는 너무 앙증맞은데.”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길리아트가 먼저 이벨린의 팔목에 팔찌를 채워 주고, 남은 하나를 차 보곤 나란히 팔목을 대 보았다.
둘의 얼굴에 어느새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귀엽구나.”
“잘 어울려요, 두 분.”
“고맙다, 고마워.”
두 사람이 루시엘을 꼭 안아 주면서 동그란 이마에 뽀뽀를 해 주었다.
마음이 잔뜩 하트로 채워진 기분에 루시엘은 빈 가방을 들고 히히 웃었다.
* * *
이튿날은 공작이 접경 지역으로 시찰을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루시엘이 그간 보내 줬던 쪽지들을 쭉 모아서 읽고 있던 공작은 저도 모르게 큭,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중 가장 마지막 것은 루시엘이 어제 준 것이었다.
내용을 쭉 읽은 루이비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문장력이 보통 뛰어난 게 아니야.”
아무래도 제국 제일의 작가가 탄생한 것 같은데. 감탄을 거듭하던 루이비드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편지들을 액자에 넣어 루시엘의 이름으로 발표하면 모두가 놀랄 것이다.
루이비드는 정찰 준비로 바쁜 제 부관을 호출했다.
“엘링턴.”
“예?”
“두 달 후 열리는 그 귀찮은 모임.”
“예, 각하. 아, 황후 전하께서 주최하시는 여름밤 살롱, 말입니까?”
“그래. 거기에 루시엘의 작품을 발표하러 가야겠군.”
“아가 마님의 작품이요? 어디 저도 봅…….”
“루시엘이 아무래도 문학에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나? 혹시 천재 아닐까?”
루시엘이 쓴 편지와 쪽지들을 읽던 엘링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잘 쓰긴 했지만 귀여운 수준의 문장들이었다.
‘천재까지는 아닌데…….’
그러나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면 큰일 날 것 같아, 엘링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 말 들리나?”
“옛? 아, 예에. 아가 마님 필력이 아주 훌륭하시군요. 하핫.”
“그렇지?”
공작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출발하지. 준비는 다 되었나?”
“물론입니다. 말은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좋다. 바로 가지.”
공작이 집무실을 나서려는데, 루시엘이 레오니의 손을 잡고는 나타났다.
“시아빠, 북부 끝자락으로 정찰 가신다고 에바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몸조심하시고 잘 다녀오셔야 해요! 레오니도 인사드려.”
루시엘이 아직 졸음기 가득한 레오니에게 말했다.
“잘 다녀오데요.”
“오냐. 곧 돌아올 거니 걱정하지 말고.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네.”
자신에게 배웅 인사를 와 준 아이들이 기특해서, 공작은 뒤돌아 가려다가 다시 멈칫 섰다.
“돌아오는 길에 아빠가 뭐 사다 줄까?”
“…….”
루시엘과 레오니 두 아이가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너무 친근하게 말했나? 머쓱해진 공작이 그냥 다시 돌아서려는데, 레오니가 옷깃을 쪼물거리며 답했다.
“눈사람이요.”
“꼭 사다 주마.”
사다 주기엔 곤란한 것이라 잠시 망설이던 공작이 이내 아들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그러곤 루시엘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루시엘은?”
“음…… 저는 종이접기를 할 수 있는 종이요.”
“종이접기?”
루시엘이 수줍게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취미가 생겼군. 알았다.”
두꺼운 겨울 외투를 걸친 공작이 떠났다.
길리아트 할아버지도, 이벨린 할머니도, 사용인들도 모두 그대로인데 공작이 자리를 비우자 어쩐지 드넓던 공작성이 묘하게 허전하고 안정감이 없었다. 쓸쓸하기도 하고 하루빨리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