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55)화 (55/282)

<55화>

“음…… 이렇게 칙칙한 마차에 예쁜 널 태울 수가 없구나.”

이벨린이 벨슈타인의 새카만 마차를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마법을 사용해, 마차의 디자인을 바꾸었다.

까만색 일색이던 대형 마차는 어느새 하얀색의 우아한 나들이용 마차로 변신했다. 내부 역시 하얗고 폭신폭신한 쿠션이 깔려 있었는데, 마차에 달린 가문의 인장만은 그대로였다.

“이제야 우리 새아가에게 어울리는구나. 이건 이 할미 선물이란다.”

“와아, 이렇게 예쁜 마차는 처음 봐요. 감사해요, 할머니.”

이벨린이 살짝 윙크하며, 루시엘을 마차에 태웠다. 마차는 어느새 시내 쇼핑가에 다다랐다.

분명 전에도 왔던 곳 같은데. 이벨린 할머니와 함께 오니 다른 곳 같았다.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끊임없이 줄지어 있었고 달콤한 디저트 가게들도 무척 많았다.

“루시엘, 네 드레스를 보러 가는 게 어떠니?”

“아, 저는 플로린 부티크에서 드레스를 많이 샀어요.”

“아아, 네 소유라던 그곳?”

“네.”

“그래도 맨날 한 가게에서만 만드는 옷을 입을 수야 없지.”

“그치만 옷은 많아요.”

“원래 옷은 많아도 막상 입으려고 옷장을 열면 없는 법이지. 시즌별로 유행 아이템 하나씩 갖추는 건 나를 위한 투자란다.”

이벨린은 루시엘의 자그만 손을 잡고, 고급 오트쿠튀르에 들어갔다.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진열된 미색의 드레스를 본 이벨린이 양손을 잡고는 말했다.

“저 드레스는 정말 아름답구나. 루시엘이 저걸 입고, 키제프와 첫 춤을 추면 정말 귀여울 텐데…….”

이벨린이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 루시엘에게 사 준 드레스는 자그마치 5만 틸링에 달했다. 넥 라인에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빛나는 드레스로, 성인 드레스지만 특별히 아이용으로도 따로 제작이 가능하다고 했다.

“……루시엘, 정말 예쁘지 않니?”

“예뻐요.”

저렇게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보고, 예쁘지 않다는 말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예쁘고 고급스러웠다. 루시엘은 자신에게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가 어울릴까 의심이 들었지만.

이벨린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이용 고급 양산, 햇빛을 가려 주는 컬러 안경, 부츠와 모자까지.

루시엘이 쇼핑가를 나설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새 이벨린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깜찍하구나, 루시엘.”

이벨린의 눈동자가 사르르 녹으며 루시엘을 품에 와락 안았다.

“이 할머니와 놀아 줘서 고맙구나. 손주 며느리가 생기면 함께 하고 싶은 것도 해 주고 싶은 것도 무척 많았단다.”

루시엘은 이벨린의 품에 꼭 안겨 대답했다.

“저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다정하고 세련된 할머니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 그럼 앞으로도 자주 놀아 줄 거지?”

“네!”

루시엘의 상기된 뺨을 이벨린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귀여운 손주 며느리.”

이벨린은 드디어 애정을 듬뿍 쏟을 손주 며느리를 만나 들떠 있었다.

며느리인 솔리페는 가문의 일보다는 전장에 나가 있는 일이 많고, 무뚝뚝하고 싸늘한 성격이라 늘 대하기 어려웠다. 이런 오붓한 시간은 꿈꿀 수도 없었다.

딸 같은 며느리가 늘 소원이던 그녀에게 루시엘은 단비 같은 존재였다.

“이제는 다른 가족들 선물을 사러 가요, 할머니.”

루시엘은 용기 내어 처음으로 가족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다.

할아버지와 시아빠, 레오니의 선물을 고른 후, 루시엘은 이벨린 할머니가 주신 용돈으로 로즈와 베시에게 줄 작은 선물을 샀다.

‘모두에게 늘 받기만 했어.’

루시엘은 벨슈타인에 와서야 진짜 가족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았다.

이벨린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중, 루시엘의 눈을 사로잡은 상점이 하나 있었다.

루시엘이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가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알록달록 예쁜 카드와 편지지가 가득 있었다.

“할머니, 저 여기 구경하고 싶어요.”

안에 들어가니 더욱 예쁜 종이들이 많았다. 접힌 카드를 펼치면, 성이 우뚝 세워지는 입체적인 카드도 있었고 예쁜 해바라기 꽃이 그려진 카드도 있었다.

“이거 전부 주세요.”

예쁜 카드와 편지지들을 잔뜩 산 후에야 루시엘은 부자가 된 얼굴로 상점을 나왔다.

‘빨리 돌아가서 편지 써야지.’

편지를 받고 기뻐할 사람들 생각에 루시엘은 벌써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준다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이었어.

‘소소하지만 행복해.’

물론 그 탓에 자꾸 숨어서 보석을 만들어 내야 했지만 말이다. 이제는 두 손에 가득 찰 만큼 보석을 만들어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성으로 돌아오니 로즈와 베시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눈치 빠른 로즈는 루시엘에게 속삭였다.

“아가 마님, 벨이 창가에 도착했어요. 도련님에게 편지가 왔나 봐요.”

“앗, 정말?”

루시엘이 토끼 눈을 하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는 냉큼 제 방으로 호다다 올라갔다.

“저렇게 좋으실까?”

로즈의 말에 베시가 중얼거렸다.

“어머, 당연히 좋지.”

“아직 우리 아가 마님은 그런 것 모르실 나이야.”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대화가 오가는 것도 모른 채. 루시엘은 토끼가 그려진 분홍 슬리퍼를 신은 채 계단을 겨우 올라갔다.

“휴, 숨차.”

열려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벨이 얌전히 앉아서 발을 톡톡 두드렸다. 빨리 편지를 확인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답장은 굉장히 간단명료했다.

「아카데미에 잘 도착했어. 막시무스도 아이들도 모두 무사해. 교수들도 아무 말 없는 걸 보면, 그때 건드렸던 제단은 아버지가 잘 수습하신 것 같아.

선물은 잘 먹었나? 여기 여자애들이 전부 좋아하는 거라던데. 꼬맹이, 네 생각이 나서.

나는 너에게 잘해 준 게 없으니까. 또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해, 루시엘.」

“전부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네.”

사실 시아빠께 피닉스와 아카데미, 쿠엔트의 일까지 전부 말씀드리고 나서 며칠 후, 시아빠는 아카데미에서 불의 제단에 관련된 일은 손을 떼겠다는 각서를 받아 오셨다고 했다.

루시엘만이 자격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해서인지, 아카데미가 제법 순순히 나와서 그 점은 다행이었다.

루시엘은 오늘 산 카드와 편지지들을 꺼냈다. 키제프 말고도 편지를 보내야 할 대상이 잔뜩이었다.

루시엘은 한참 동안 꼼지락거리며 가족들에게 줄 카드를 작성했다. 보낼 사람이 많아서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다 적었다!”

루시엘이 자그맣게 외치자 베시와 로즈가 들어와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배가 고프시진 않으세요?”

“실은 조금. 그치만 저녁을 먹어야 하니까 간식은 참을래.”

“아잉, 우리 아가 마님은 안 참으셔도 되는걸요.”

애교 많은 로즈가 루시엘을 폭 껴안았다. 루시엘이 헤헷, 웃으면서 말했다.

“잠깐만. 두 사람에게 줄 거 있어.”

언제나 가장 먼저 자신을 항상 살뜰하게 챙겨 주는 두 사람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내일이 가족의 날이라서 준비했어. 로즈도, 베시도 나에겐 가족 같은 사람들이니까.”

루시엘이 수줍게 웃으면서 둘에게 카드와 함께 준비한 작은 선물을 건넸다.

연애를 시작한 로즈에게는 상큼한 향수를, 검은 생머리에 늘 액세서리 하나 없이 밋밋하게 다니던 베시에게는 예쁜 리본 머리핀을.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두 사람은 눈이 커다래져선 루시엘의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좋아하는 두 사람을 보니 루시엘도 뿌듯함에 기분이 좋았다.

“꺅, 아가 마님께서 골라 주신 선물과 직접 쓴 카드라니. 평생 간직하겠어요. 향이 너무 좋잖아요.”

“저도요. 예쁜 머리핀 감사해요, 아가 마님. 그렇지만 다음에는 이런 거 주시지 않아도…….”

베시의 입술에 루시엘이 앙증맞은 손가락을 갖다 대더니 말했다.

“주는 것도 내겐 기쁜 일이야. 다음에도 받아 줘. 또 줄 거야. 베시랑 로즈가 나에게 주는 사랑만큼 채우려면 한참 멀었는걸.”

“이잉, 아가 마니임.”

“우리 아가 마님은 말씀도 똘똘하게 참 잘하신다니까요.”

두 사람은 어린 아가 마님의 말에 감동해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루시엘의 카드를 보고 마법사를 찾아가 보존 마법을 걸겠다는 그녀들을 뒤로한 채 루시엘은 선물이 든 가방을 들고 총총 방을 나섰다.

사실 곧 보석을 만들어 낼 것 같아서였다. 루시엘은 얼른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빈 방으로 들어가 갓 만든 보석을 미리 준비한 주머니에 쏙쏙 넣었다.

‘언젠가는 이 보석도 줄 수 있기를.’

‘다음은 누구에게 줄까.’

방이 가장 가까운 순서대로 선물을 챙겼으니까, 우선 레오니부터였다.

루시엘은 레오니의 방문 앞에 서서 가방에서 꼬물꼬물 하늘색 상자를 꺼냈다.

“레오니, 안에 있어?”

루시엘의 물음에 사샤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의 치마폭 아래로 레오니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루씨에 뉴나? 무순 일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루시엘이 선물을 꺼내는 모습을 문틈으로 훔쳐보고 있던 레오니였다.

“선물이랑 카드 주려고 왔어.”

선물이라는 말에 귀가 쫑긋해진 레오니가 루시엘이 들고 있던 하늘색 상자를 보고 석류알 같은 눈동자를 크게 키웠다.

그 자리에서 포장을 벗기자 루시엘이 거리의 상점에서 산 조그만 장난감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레오니가 좋아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미 값비싸고 훌륭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뚱한 얼굴로 배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레오니가 말했다.

“배 조아해. 고마어, 뉴나.”

“응? 정말?”

“웅. 이거 저기 둘 거야.”

레오니의 오동통한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최고로 아끼는 장난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침대 옆 시계탑 모양 서랍장이었다.

그야말로 영광의 자리를 30틸링짜리 장난감이 차지하다니 루시엘은 조금 감동했다. 그러나 레오니는 카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저기, 레오니. 누나가 카드도 썼는데 안 봐?”

루시엘이 카드를 팔랑 흔들자, 레오니가 그걸 슥 빼앗고는 귀가 빨개졌다.

“……그건 혼자만 이쓸 때 볼 꾸야.”

“그래?”

“웅.”

레오니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졸린 듯 하품을 했다. 꼬꼬마라 오후 낮잠을 잘 시간인 모양이었다.

“알았어. 누나는 이만 가 볼게.”

“웅, 이따 바.”

포동포동한 손을 흔드는 레오니의 포슬포슬한 금발을 쓸어 주고 나서 루시엘은 다시 당근 가방을 둘러맸다.

“이제 다음은…… 시아빠하고 에바랑 엘링턴.”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