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어? 피닉스의 장미! 얻었어. 꿈이 아니었어.”
루시엘은 활짝 웃으면서 기쁜 낯으로 중얼거렸다. 에메랄드가 또로로롱, 또로롱. 잔뜩 만들어져서 루시엘은 얼른 서랍장에 넣어 놓고, 방문을 열었다.
밖에 있던 세 남자가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새아가!”
“꼬맹아!”
“루시엘, 괜찮니?”
루시엘은 배시시 웃으면서 손안에 쥐고 있던 피닉스의 장미를 내밀었다.
“제단 아래에 가서 진짜 피닉스를 만났어요. 피닉스의 장미도 얻었고요.”
“제단에서 기절을 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제단에서 피닉스를 만나고 나서, 정신이 들고 나니까 방에서 깨어났어요.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아요.”
루시엘의 말에 길리아트를 비롯한 모두가 경이로운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알면 알수록 루시엘은 신비한 아이였다.
“허…… 신비로운 일이로군. 어찌 되었든 루시엘, 네가 해냈다. 장하고 대견하구나. 피닉스의 장미를 구했어. 이건 정말 축복받은 일이다.”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자, 루이비드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고생 많았다, 루시엘. 우리 새아가는 정말 하늘이 내린 건가 싶군.”
“아, 그나저나 어서 서탑으로 가야겠어요. 이벨린 님을 깨우려면요.”
“나랑 가자, 루시엘.”
“네, 할아버지!”
두 사람은 서둘러 서탑으로 향하는 이동포탈을 타고, 탑에 도착했다. 드디어 이벨린을 마주한 루시엘이 말했다.
“우선 인사부터 드려야겠어요.”
루시엘은 이벨린에게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이벨린 님, 안녕하세요. 저는 루시엘이라고 해요.”
“…….”
“여기 피닉스의 장미를 가지고 왔어요!”
루시엘이 이벨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숨결에 닿게 장미를 내밀었다.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이번엔 효과가 있었다.
순간 두 사람의 손 주변으로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마나가 스멀스멀 안개처럼 차올랐다.
심장이 또 두근거렸다.
“……이건?”
루시엘이 길리아트를 돌아보자 그가 말했다.
“이벨린의 드래곤 마나로군.”
곧이어 이벨린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눈을 반짝 떴다. 심해처럼 아름답게 일렁이는 푸른 눈동자였다. 마치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빨려 들 듯 아름다웠다.
“앗!”
“이벨린!”
그녀가 정말로 깨어났다. 루시엘은 놀랐고 길리아트는 이벨린에게 다가갔다.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한참 주변을 둘러보다가 루시엘과 길리아트의 얼굴을 발견하곤 생긋 웃었다.
여신처럼 우아한 미소였다. 그야말로 빛이 탁 켜진 것만 같았다.
“깨워 줘서 고맙구나, 아가야. 여보, 나 좀 일으켜 줄래요?”
“어어, 알겠어요!”
놀라서 바라보기만 하던 길리아트가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삼 년이나 잤더니 온몸이 뻐근하군요.”
아직 나른한지 기지개를 길게 켠 그녀가 하암, 하고 하품을 했다.
길리아트가 울컥한 표정이 되었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다니……. 이벨린, 항상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어요, 길리아트.”
마주 보던 부부가 서로를 와락 껴안았다. 깊은 포옹을 마친 이벨린은 루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여보, 이 아이 덕분에 당신이 잠에서 깨어났어요.”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활약과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그렇구나, 정말 정말 고맙다. 어쩌면 길리아트를 다신 만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고맙구나. 아가야.”
두 분을 만나게 해 드려서 진심으로 기뻤고 애틋했지만, 감정을 참느라 루시엘은 기절할 뻔했다.
무엇보다 또 다른 벨슈타인가의 사람인 이벨린 님이 무서운 분이 아니신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이벨린이 루시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 역시 늘씬하고 키가 커서 길리아트 할아버지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루시엘에게 닿았다.
“……정말 작고 귀여운 아이구나. 이름이 뭐니?”
“루시엘이라고 해요. 이벨린 님.”
“루시엘이구나. 고맙다, 책갈피에 넣어 둔 드래곤 마나를 알아채고 피닉스까지 만나 귀한 꽃까지 얻어 오다니 정말 특별한 아이구나.”
“아…….”
“보통은 느끼지도, 알아듣지도 못하거든. 넌 드래곤은 아닌 것 같은데…….”
루시엘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기 곤란해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녀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길리아트도 루시엘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벨린, 우리 루시엘은 순수하고 강한 마력도 가지고 있어요.”
이벨린이 잠시 눈을 감고 마나의 흐름을 느끼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새 그녀의 주변을 떠돌던 드래곤 마나는 대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여전히 그녀의 마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이벨린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정말로 그렇네. 맑고 산뜻한 마나를 가지고 있구나, 루시엘. 나는 힘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수면이 마음대로 조절되지가 않거든. 깨워 줘서 정말 고맙다.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단다.”
“아……. 도움이 되어서 기뻐요. 이렇게 뵙게 되어서 좋아요.”
루시엘은 무슨 말인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건 진심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단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손주 며느리를 얻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이벨린이 루시엘을 반갑다면서 와락 껴안았다. 몽실몽실, 부드럽고 따스한 품이었다.
루시엘은 얼떨떨한 채로 그녀와의 포옹이 끝나자 물었다.
“그런데…… 그동안 주무시고 계셨는데 저에 대해 어떻게 아셨어요?”
이벨린이 길리아트를 슬쩍 바라보며 웃었다.
“그이가 들를 때마다 자는 나에게 말해 주었단다. 수면 중에도 내 청력은 열려 있거든.”
들을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드래곤이란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라고만 어렴풋하게 들었을 뿐이라 루시엘은 아직도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루시엘은 챙겨 온 나비 책갈피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벨린 님, 여기 이 물건 가지고 왔어요.”
“오, 고맙구나.”
책갈피를 건네받은 이벨린의 시선이 루시엘이 가져온 책에게도 닿았다.
“이벨린 님, 이제 계속 뵐 수 있는 거지요?”
“그럼. 네가 나의 잠을 깨워 주었으니까 이제 서탑을 떠나 공작성으로 갈 거란다.”
이벨린이 빙긋 웃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성으로 함께 이동했다. 돌아온 이벨린은 벨슈타인가의 아이들과 공작, 사용인들과도 진한 인사를 나누었다.
한편 키제프는 그동안 푹 쉬었다며 아카데미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내내 아카데미를 관둘지 말지 공작과 상의를 했지만 결론적으로 이번 달까지는 마치기로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왠지 아쉬웠지만 곧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아카데미 일을 처리한 엘링턴이 부엉이 벨과 함께 상자도 가져다주었다. 키제프는 그걸 루시엘에게 주었다.
“이별 선물. 다음 달에 다시 만나자.”
“으응. 잘 가.”
그가 건넨 노란색 상자에는 달콤하고 몽실몽실한 딸기 맛 솜사탕이 들어 있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달콤함에 루시엘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별 선물이라기엔 너무 달콤해.
서탑의 큰 마님이 돌아온 기념으로 그날 저녁에는 성대한 만찬이 열렸다.
이벨린이 돌아오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에바를 비롯한 공작성의 사용인들은 왠지 더 섬세하고 꼼꼼하게 일 처리를 하는 듯했고, 루시엘의 방과 성의 곳곳을 단장하느라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길리아트 할아버지는 완전히 사랑꾼이 되어 온종일 이벨린과 산책을 하고, 뱃놀이를 하면서 여가를 보냈다.
레오니는 자신을 예뻐하는 할머니 덕분에 더 신이 났다.
유독 달라지지 않은 건 공작뿐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를 대하는데도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 없이 엊그제 그녀를 만난 것처럼 평이했다.
‘하긴, 원체 그런 성격이시긴 하니까. 근데 왜…….’
정답게 서로 시를 읽어 주는 이벨린과 길리아트 부부 사이에 앉아서 밀크티를 마시던 루시엘은 문득 어제 공작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모처럼 그가 루시엘의 방에 방문하더니 슬쩍 책상을 보면서 이렇게 물어온 것이다.
“요즘은 편지를 쓰지 않나?”
“편지요? 가끔 쓰곤 해요.”
루시엘이 전서구를 가리키며 생긋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빼앗겼나.”
“네?”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 말한 공작이 루시엘의 책상에 로즈가 꽂아 준 하얀 장미를 흘깃 바라보더니 물었다.
“하얀 장미는 꽃말이 뭐지?”
“……아, 존경이라는 뜻이 있대요.”
그러자 공작은 말없이 하얀 장미의 향을 맡았다.
“마음에 드시면…….”
루시엘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하얀 장미는 그대로 공작이 가져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요 며칠 동안 꽃도, 꽃말이 적힌 편지도 보내 드리지 않아서 서운하셨던 것 같은데.
키제프에게만 편지를 보내느라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내지 못했다.
‘평소 시아빠 성격을 보면 그렇게 정이 많은 성격은 아니라 헷갈리기도 해.’
루시엘은 아리송한 물음을 매달은 채, 아직 온기를 머금은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루시엘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자 이벨린이 아이에게 수제 쿠키를 쥐여 주면서 말했다.
“아가야, 루시엘. 내일 이 할머니랑 함께 쇼핑을 가지 않으련? 가족의 날이니까.”
“좋아요, 할머니.”
아직 할머니라는 호칭이 입에 붙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벨린은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할머니라고 부르기가 약간 죄송했다.
하지만 할머니라고 부르면 그녀의 안색이 훨씬 밝아졌다.
‘가족의 날. 그런 날도 있었구나.’
루시엘은 있는지도 몰랐던 소소한 기념일이었다. ‘가족’이라고 여겼던 사람은 죽은 언니뿐이었기에 루시엘에게 가족이란 존재는 평생 가져 보지 못한 ‘양말’ 같았다.
루시엘은 늘 맨발이었다.
시린 발을 감싸 줄 가족은 없었다.
‘이젠 나도 가족이 생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