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흐음, 이걸 동시에 빠르게 밟으면 문양 전체에서 빛이 나겠군?”
루시엘 역시 문양이 빛나면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 직감이 들었다.
“루시엘, 너는 이쪽에서, 나는 저쪽 끝에서 시작할까?”
“아뇨. 이거면 될 거예요.”
루시엘이 마음속으로 자신의 투명한 지팡이를 불러 소환했다. 지팡이를 양손으로 꼭 붙잡은 루시엘은 마나를 끌어모아 마법을 시전했다.
“매직 볼트(Magic bolt).”
루시엘의 순수한 마력이 출렁이며, 이노센트 지팡이에 머금어져 마법이 발동되었다.
파앗, 파, 파바밧!
여러 개의 빛 덩어리가 돌 위를 때렸다.
가장 기본적인 마법이지만 그만큼 마나 소모도 적고 단련이 쉬웠다. 무엇보다 아직 루시엘은 속성을 발현하지 않아, 무속성 마법만 사용하고 있었다.
“허허헛, 루시엘. 이렇게 매운맛 매직 볼트는 처음 보는구나.”
길리아트는 호탕하게 웃었다.
“할아버지도 같이 해 주세요.”
두 사람이 그렇게 마법으로 바닥 돌을 때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양이 모두 빛났다.
쿠구구궁!
절로 찡그려질 정도로 눈부신 빛이었고, 숲을 진동하게 할 만큼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놀란 새들도, 짐승들도 달아나면서 울었다.
바닥의 돌들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더니 아래로 향하는 계단과 함께 길이 나타났다. 유적이었다. 불꽃 모양의 기호가 적힌 걸로 보아, 분명 불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할아버지.”
놀란 루시엘이 그를 바라보며 불렀다.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손을 잡아 주고, 다시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거 예삿일이 아닌 것 같구나. 안에서 아주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아까부터 느껴진 기운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 모양이야.”
자신은 워낙 마나를 단련했기에 아무렇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견디기 버거울 정도로 강한 기운이었다. 아까 아이들이 기절한 것도 아마 이것 때문이리라.
루시엘 역시 강하고 순수한 마나를 지녀서 기절하진 않은 것 같지만, 길리아트는 불안감과 기대감이 반쯤 섞인 얼굴로 심호흡을 한 번 길게 후우 내뱉었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토록 강한 기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구나. 어쩌면 이 안에 들어가면 전설적인 존재, 피닉스를 정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도 강렬한 기운이 느껴져요. 심장이 마구 뛰어요.”
루시엘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만일 저 안에 정말로 그 전설의 존재 피닉스가 있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험을 벌여야 한다.
한편으로는 또, 그러한 전설을 마주할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 벅차오르기도 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루시엘을 데리고 들어갈 수야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책임져야 마땅하다. 그리 마음을 정리한 길리아트가 루시엘에게 말했다.
“루시엘, 너는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내가 다녀올 터이니.”
하지만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키제프를 찾지 못했는걸요. 그리고 할아버지만 두고 돌아갈 수는 없어요.”
루시엘의 투명한 눈동자에서는 두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할아버지도, 키제프도. 내가 두 사람을 지킬 거야.’
길리아트는 루시엘에게 소중한 가족이었고, 키제프는 자신을 지켜 주려고 결혼까지 해 준 사람이었다. 그와 친해지기는 어렵지만 그대로 둘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루시엘이 자그만 주먹을 쥐고는 굳게 결심했다. 그 순간, 루시엘의 심장이 두근두근 커다랗게 박동을 시작했다.
“……왜, 이러지?”
루시엘이 갑작스레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털썩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놀란 길리아트가 달려와, 루시엘을 살폈다.
“루시엘! 괜찮으냐?”
“아. 전 괜찮아요. 갑자기 심장이 너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서.”
그 말에 길리아트는 더욱 염려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이의 숨결이 아직 불규칙한 것이 영 불안했다. 자그만 몸은 바짝 긴장했는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루시엘, 안 되겠구나.”
“아뇨. 키제프를 구하고 이 안의 어떤 비밀이 있는지도 알아내러 가 볼래요.”
루시엘은 심장이 조이는 느낌 때문에 걷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이걸 사용해야겠군. 잠시만 기다리렴.”
“네.”
길리아트가 푸른색의 통신구를 꺼내 공작에게 연락했다.
―아버지? 별은 잘 보이십니까?
루시엘과 별 보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자못 심술궂은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비드.”
―어디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신 게지요?
“그렇단다.”
―당장 루시엘을 데리고 안전하게 귀가…… 아니, 그럴 상황이면 통신구를 사용하지 않으셨겠죠. 솔직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루시엘을 데리고 와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에 상당히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루시엘도 괜히 바짝 졸아 조마조마했다.
“사연을 다 말하자면 길다. 키제프가 아카데미 금지 구역에서 사라져서 찾는 중이다.”
―예? 농담이시죠? 거긴 왜?
“이벨린의 잠을 깨울 피닉스의 장미를 찾다 보니 이리로 오게 되었군. 그리고 우린 어마어마한 기운을 가진 유적을 발견했다. 불의 제단처럼 보인다. 어쩌면 진짜 피닉스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잠깐만요. 지금 피닉스라고 하셨습니까? 피닉스가 옆집 오리도 아니고……
“그래, 확실하진 않지만…… 이토록 강한 기운은 내 평생 처음이야.”
―당장 갈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그럴 시간은 없다. 어서 키제프를 찾아야 하니까.”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뚝, 하고 길리아트가 통신을 먼저 끊어 버렸다. 통신구가 몇 번 더 반짝거렸지만 그는 주저 없이 주머니에 넣었다.
“이만 들어가자, 루시엘.”
“할아버지, 근데 그 통신구로 키제프에게는 연락할 수 없나요?”
“통신구를 서로 연결하려면, 직접 만나서 서로의 통신구에 상대의 마나를 일부 연결해야 하지. 루이비드가 내 건 쏙 빼놓고, 제 마나만 연결해서 키제프에게 보냈다더군. 고얀 놈.”
“아, 그러면…… 시아빠께 키제프에게 연락해 보시라고 말할 걸 그랬어요.”
“이미 시도했을 거란다.”
“여기 위치는 안 알려 드려도 되나요……?”
루시엘의 질문에 길리아트가 걱정 말라면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물론이다. 루이비드는 말이지. 추적 마법에는 일가견이 있단다. 사실 내가 통신을 보내지 않았어도 여길 찾아왔을 거다. 아주 무서운 집……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흠흠.”
“아…… 네엣.”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순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이비드의 집요함은 모르는 게 약이니까.
* * *
한편 루이비드는 길리아트와의 통신 한 번에 골이 띵해졌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문제 덩어리들. 거미줄처럼 엉킨 그것들을 어느 것부터 풀어야 할지.
우선 그는 제 하나뿐인 부관부터 호출했다.
그러곤 싸늘하게 핏기가 가신 얼굴로 물었다.
“왜 보고 안 했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엘링턴은 등골이 싸늘해졌다. 뭔가 아주 기분 나빠 보이시는 게, 큰일이 생겼음이 틀림없었다.
“아가 마님께서 별 구경하러 가신 것 말입니까?”
“…….”
공작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식어 가자, 엘링턴은 재빨리 다른 것을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키제프가 행방불명되었다.”
“예에?”
엘링턴이 화들짝 놀라 그 자리에서 납작 엎드렸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도련님께 통신을……!”
“연락이 되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됐으니 이동부터 하지. 키제프와 루시엘을 추적한다. 5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을 대기시키고, 이동포탈 준비해. 불의 제단으로 이동할 것이다.”
“예, 검은 날개도 배치할까요?”
“아니. ……1순위 목표는 키제프와 루시엘, 아버지의 안전 탈환이다. 2순위는…… 어쩌면 아주 특별한 것을 사로잡게 될지도 모르겠군.”
루이비드가 턱을 문지르며, 핏빛 눈을 빛냈다.
피닉스라면 황가에서도 눈독을 들일 만한 진귀한 존재였다. 그런 것이 아카데미에 숨겨져 있었다니…….
피닉스의 깃털은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었고, 피닉스의 심장은 영생을 살게 한다고 들었다.
그런 것이 정말 아카데미에 존재했다면, 교장이 가장 먼저 탐을 냈을 것이다.
루이비드는 조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금껏 피닉스라고 모습을 드러냈던 새들 중에 진짜는 없었으니까.
* * *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하얀색 돌을 쌓아 만든 입구였다.
입구를 통과하자 보인 석판에는 불꽃 모양이 그려져 있었고, 고대 문자가 적혀 있었다. 길리아트는 그걸 한참 들여다보더니, 겨우 해석해 냈다.
“불의 첫 번째 제단. 불을 자라게 하는 것을 바쳐라.”
평평하고 너른 바닥 위에 항아리처럼 생긴 검은 그릇이 놓여 있었다.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문이 굳게 닫힌 걸 보니, 이 수수께끼 같은 것을 풀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불을 자라게 하는 것?”
“……장작일 테지.”
“바람일지도 모르겠어요. 키제프가 여길 통과한 걸 보면요.”
키제프는 바람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길리아트도 4서클 정도까지는 바람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했다.
“그렇겠구나. 이 항아리는 화로인 것 같다.”
그는 화로 안에 ‘윈드’ 마법을 발동시켜 바람을 채웠다. 그러자 화로 안에서 화르륵 하고 불씨가 튀기 시작하더니 화로 밖까지 샛노란 불이 올라왔다.
이내, 막혀 있던 문이 쿠구궁 소리를 내며 열렸다.
“와, 맞았어요!”
생각보다 간단히 풀리자 둘은 기뻐하며 다음 층으로 내려갔다.
두 번째 층에는 세 개의 화로가 놓여 있었다. 불씨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길리아트가 석판을 살펴보았다.
“불의 두 번째 제단. 꺼지지 않는 불.”
“그게 전부예요?”
꺼지지 않는 불이라니…….
“그렇구나. 이 불들을 꺼 보라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아요. 불을 끄려면 물을 뿌리거나, 공기를 차단해야 해요.”
“그렇지.”
길리아트는 곧장 워터를 발동시켰다. 촤르륵! 화로 위로 시원하게 물이 쏟아졌지만, 불은 그대로였다.
“이건 아닌 모양이군. 다음은 공기를 차단해 볼까.”
“하지만 화로의 불이 꽤 커요.”
“담요를 소환해서는 어림도 없을 것 같고, 모래가 필요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