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48)화 (48/282)

<48화>

“아무래도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루시엘이 입술을 꼭 깨문 채 그의 손을 잡았다.

“일단 우리 둘이서만 다녀오기로 하자. 공작이 이 사실을 알면 널 데려갔다고 나도 혼이 나겠구나.”

“메모를 남기고 갈까요?”

“그게 좋겠다. 모두 걱정할 테니.”

「할아버지와 별 보러 다녀올게. 걱정하지 마.」

루시엘은 제 방 테이블 위에 메모를 남긴 후, 가방을 둘러매고 망토를 걸쳤다.

“루시엘, 이만 가도록 하자.”

“네!”

길리아트가 루시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길리아트의 서재로 들어가서 이동하기로 했다.

“아카데미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어서 내가 만든 이동포탈을 이용할 거란다.”

길리아트는 그리 말하더니, 허공에서 기다란 초록빛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월계수 잎 모양의 에메랄드가 잔뜩 박힌 지팡이였다. 길리아트가 마나를 모아 초록색 마법진을 자신의 옆 허공에 세로로 생성시켰다.

파아앗!

마법진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것이 점차 커다랗게 원이 되어 이동포탈이 되었다.

문처럼 통과해 들어갈 수 있는 듯했다.

지난번 반지의 이동 마법도 멋있었지만 이동포탈이 더 웅장한 느낌이었다.

“루시엘, 내가 먼저 들어가서 주변을 살필 테니 너는 천천히 따라오렴.”

“네!”

루시엘도 자못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지팡이를 불러냈다. 손에 지팡이를 꼭 붙잡은 채, 루시엘은 길리아트가 먼저 초록빛 이동포탈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이내 길리아트의 등이 완전히 초록 물결에 잠긴 것처럼 보이다가 사라졌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안고, 루시엘이 눈을 감고는 이동포탈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치 일렁이는 호수 안에 들어온 것처럼 피부에 닿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루시엘, 이동이 끝났단다. 긴장했니?”

길리아트가 몸을 숙여 루시엘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눈을 꼭 감고 있는 아이가 귀여워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루시엘이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아카데미 건물이 보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인근의 거리였다.

깊은 밤이라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사히 도착했네요.”

길리아트가 고개를 주억이고 나서 루시엘과 시선을 맞추곤 물었다.

“자, 이제 솔직해질 때가 된 것 같구나, 루시엘. 그 친구가 바로 키제프니?”

“앗…… 어떻게 아셨어요?”

루시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자그맣고 말랑한 코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니. 그건 그렇고 우선 기숙사실로 가서 키제프를 찾아보자꾸나. 지팡이는 도로 넣고.”

“네에.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기숙사 사감에게 물어서 찾아갔지만 키제프는 기숙사에 없다는 말만이 돌아왔다. 루시엘과 길리아트의 얼굴에 더욱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그 아이의 할아버지요. 아이의 방을 보게 해 주시오.”

키제프의 방에 가 보니 부엉이가 없었다.

“편지를 보냈을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루시엘은 당근 가방에서 벨을 데려올 때 사육사에게 받은 피리를 꺼냈다. 그러곤 창가로 가서 힘껏 불었다.

휘이이.

피리의 맑은 음이 창밖에 퍼졌다.

어디선가 부엉, 부엉 하고 벨이 울었다.

“앗! 벨의 울음소리가 맞아요! 분명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아요. 벨! 벨!”

“밖인가?”

길리아트가 창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루시엘이 고개를 돌리다 무심코 키제프의 책상을 보게 되었다.

무언가가 적힌 종이가 있었는데 금지 구역 숲이라고 적힌 글씨에 동그라미가 여러 번 그려져 있었다.

“이것 보세요. 키제프는 벌써 거기로 간 게 틀림없어요.”

“그런 것 같구나. 늦기 전에 금지 구역을 찾아야겠군.”

두 사람이 입구로 내려오자 기숙사 사감이 다가와 말했다.

“기숙사의 다른 아이들 네 명도 사라졌어요.”

“막시무스라는 학생도요?”

루시엘의 물음에 사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막시무스의 방에 가 보니, 가엾게도 벨이 침대에 다리가 묶인 채 날개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루시엘이 오자 고개를 들며 부엉, 하고 울었다.

“벨!”

“이 애들이 전부 어디로 사라졌지?”

사감이 당황해 중얼거렸다.

“루시엘, 키제프와 연락을 주고받은 지 얼마나 지났지?”

“최소 하루는 넘은 것 같아요.”

“그렇다면 오늘이 지나면 이틀이 다 돼 가는데 그동안 아이들이 없다는 걸 모른 거요?”

“빠져나가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수업이 없는 휴일이라 몰랐습니다.”

길리아트의 날 선 물음에 사감은 대답을 잇지 못했다. 게다가 어제 하루는 개인 약속이 있어 자리를 비웠던 터였다.

아이들이 없어진 걸 알면 아카데미에서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기에, 사감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사감에게 루시엘이 한 발 다가가 눈을 맞췄다.

“이, 이를 어쩌나…….”

“한 가지 질문에 답해 주면 이 일은 아카데미 측에 말하지 않을게요.”

그가 숨을 꼴깍 넘기며 물었다.

“질문?”

“아카데미의 금지 구역 위치를 알려 줘요.”

“그…… 그건.”

“우린 사라진 학생들을 찾으려는 거요.”

금지 구역에 대해서는 누구의 질문이든 답하지 말라는 윗선의 지시가 있었기에 사감은 고민했다. 하지만 학생 여럿이 사라진 이상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아카데미의 서쪽 문으로 가서 길을 따라가면, 가벽이 하나 있습니다. 그 벽 너머가 금지 구역이에요.”

“고맙소. 루시엘, 어서 가자.”

“네, 할아버지.”

과연 사감이 알려 준 대로 가 보니, 으슥한 곳에 가벽이 세워져 있었다.

화재가 난 곳을 가벽까지 세워 막아 놔야 할 이유가 있을까?

루시엘이 의아해하는 사이 길리아트가 다시 월계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의 펄럭이는 망토 역시 짙은 초록빛이라 잘 어울렸다.

길리아트가 한쪽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

“이 벽을 부술까, 아니면 넘어갈까?”

잠시 벽 주변을을 관찰하며 뽈뽈 돌아다니던 루시엘이 말했다.

“할아버지, 그것보다 평화로운 방법이 있어요.”

“응? 어떻게 말이냐?”

“여기, 개구멍이 있어요. 분명 아이들이 자주 들락거린 모양이에요.”

“위험한 곳을 들락거리다니 말썽꾼 녀석들이군.”

길리아트가 혀를 차자, 루시엘이 속으로 생각했다.

‘막시무스라면 그럴 만해. 그럼 전부 저 안에 들어간 걸까? 키제프는 평소에 그 애들과 어울리지 않았는데…….’

모든 의문은 저 벽 너머로 들어가면 풀린다.

“할아버지, 어서 들어가요.”

루시엘이 길리아트를 향해 따라오라 손짓하면서 먼저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엘, 그 구멍은 내가 들어가기엔 너무 좁다. 나는 마법으로 넘어가지.”

그리 말한 길리아트는 텔레포트를 사용해, 벽 너머로 순간이동 했다. 루시엘이 구멍 안을 빠져나오길 기다리던 그는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 먼저 이동하셨었…….”

루시엘 역시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숲이었다.

숲 전체가 빛으로 휩싸인 듯, 기묘했다.

그리고 바닥에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낯이 익은 걸 보니 지난번 아카데미에 왔을 때 막시무스와 함께 있던 그들이 맞았다.

그러나 정작 키제프와 막시무스는 보이지 않았다.

‘둘은 어디로 갔지?’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나도 모르겠구나. 다만…… 이 숲 전체에 영향을 끼칠 만큼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이 정도의 기운이라면 무언가가 있는 게 확실하다, 루시엘.”

길리아트 역시 긴장감에 입술을 혀로 축였다.

루시엘은 조용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강력한 기운이라니, 어쩌면 정말로 전설의 그 동물, 피닉스의 흔적이라도 있는 것일까?

“루시엘, 우선 아이들이 괜찮은지 살펴보도록 하자.”

“네.”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서 한 아이에게 다가갔다. 코에 손을 대 보고 맥박을 재 보니 다행히도 박동이 뛰었다.

“살아 있어요. 기절한 것 같아요.”

“그런 것 같군. 루시엘, 어떻게 하겠니. 여기서 이 아이들을 지킬래? 아니면 실드를 걸어 놓고 같이 이동할까?”

주변을 둘러보던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읽은 모양이었다.

“눈빛을 보니 후자로군.”

루시엘이 수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아트는 아이들을 조심스럽게 한곳으로 모아 눕혀 놓았다. 그러곤 바닥을 향해 시동어를 외쳤다. 초록색 마법진으로 지면이 물들기 시작했다.

“트리 실드(Tree Shield).”

커다란 녹색의 나무줄기가 쑥쑥 자라더니 아이들을 보호하는 움막처럼 둥그렇게 형태를 잡았다.

“와아.”

입을 벌리면서 감탄하고 있던 루시엘을 향해 길리아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단해요.”

“이제 안전할 거다.”

두 사람은 조금 더 깊은 숲속으로 수풀을 헤치면서 들어가 보았다.

얼마쯤 갔을까. 마치 폐허처럼 보이는 낡고 바랜 건축물이 하나 있었다.

루시엘은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화재로 다 타 버렸다는 식물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을린 자국도, 검게 탄 흔적도 없었다.

내부에는 수없이 많은 화분이나 조형물, 화단과 식물의 이름표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어 이곳이 과거 식물원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 근처에 막시무스가 기절해 있었다.

“여기, 막시무스라는 아이는 있는데 키제프만…… 안 보여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루시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키제프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키제프는 어디 있을까요?”

“근처에 있을 텐데. 탐지 마법으로 한번 찾아보마.”

길리아트가 탐지 마법으로 근처에 마나를 뿌려, 무언가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루시엘, 잠깐만 바닥에 뭔가가 그려져 있다.”

루시엘이 멈칫하고 아래를 보았다.

꽃잎을 연상시키는 둥그런 문양이 바닥 돌에 그려져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개는 되는 돌에 전부 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지?’

루시엘은 바닥이 안전한지 확인하려고 조심스럽게 돌 위로 발을 콩콩 굴러 보았다. 그러자 문양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어? 할아버지, 두 번 밟으니까 빛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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