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루시엘과 길리아트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길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도 동감이다.”
“보통 화재가 났다고 해서 그곳을 아예 없애 버리지는 않으니까요.”
“그렇지.”
“피닉스의 장미가 있었던 공간이니 약간의 흔적이라도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그치만 더 이상 친구에게 부탁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이벨린의 잠을 깨울 방법이 있다면 무슨 방법이라도 찾아봐야지.”
길리아트는 굳은 결심을 한 듯 보였다. 루시엘이 물었다.
“이벨린 님을 그대로 두면 혹시 언제 깨어나실 수 있나요?”
“그건 나도 모른단다. 드래곤의 잠이라는 것은,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도 가니까.”
“그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네요.”
루시엘이 회귀하기 전, 벨슈타인가의 드래곤 마님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아마도 그녀는 억지로 깨우지 않는다면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잘 터였다.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루시엘은 길리아트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꼭 이벨린의 잠을 깨우기로 결심했다.
“루시엘, 우선은 그 친구에게 아카데미 내의 금지 구역이 어디인지, 확실히 있는지 물어보자.”
“그게 좋겠어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방싯 웃었다.
* * *
「여러 가지로 알려 줘서 고마워. 화재로 사라진 식물원이 있던 금지 구역의 숲 말이야.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어?」
편지를 받은 키제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위치를 묻는다는 것. 직접 가려고 하는 건가?’
키제프는 테드가 걱정되었다. 금지 구역은 아카데미에서 엄격하게 출입을 금하는 곳이었다,
걸리면 퇴학을 당할 수도 있을 만큼.
키제프도 늘 궁금하긴 했었다. 그곳에 무엇을 꽁꽁 숨겨 놓았길래 그리 가지 못하게 하는지 말이다.
이내 키제프의 곁으로 스르륵 검은 안개를 풍기며, 레이븐이 모습을 드러냈다.
「표정이 심각하네?」
키제프는 마침 잘됐다 싶어 레이븐에게 물었다.
“너, 거기 가 봤지? 아카데미의 금지 구역 숲.”
키제프의 물음에 레이븐이 움찔하면서 눈이 가늘어졌다.
「거기는 왜?」
“거기가 옛날에 식물원이 있었는데 화재로 사라졌대.”
「근데?」
“피닉스의 장미를 찾고 있어. 마법 식물이라는데.”
「식물원에 화재가 났으면 가도 아무것도 없지 않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조사할 가치는 있겠지. 게다가 금지 구역은 한 번쯤 가 보고 싶었어.”
키제프의 말에 레이븐이 웬일이냐는 듯 물었다.
「드문 일이네. 네가 무언가에 관심 갖는 거.」
“그 부엉이 주인, 곧 만날지도 몰라.”
「헥, 정말? 나도 보러 가도 돼?」
레이븐의 해맑은 미소에 키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네놈이 언제 내가 막는다고 안 한 적 있던가 뭐.”
레이븐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무하네. 하나밖에 없는 친구한테 맨날 구박이야.」
“친구? 누가?”
그 말을 들은 키제프가 질색을 했다.
「그럼 가족 할까? 형이라고 해 봐.」
레이븐의 얼굴로 베개가 날아왔다.
“선 넘지 말라고 했다.”
키제프가 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레이븐은 베개를 끌어안으며 키제프를 놀려 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오구오구. 넌 성질부릴 때가 제일 귀엽다니까.」
“……죽여 버린다.”
키제프가 낮은 음성으로 외쳤다. 끅끅 소리 내며 웃던 레이븐이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주변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잠깐만. 근처 어디선가 수상한 기운이 느껴져.」
“……근처라니?”
키제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지만, 검은 안개로 변한 레이븐은 대답도 없이 사라졌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키제프는 레이븐의 기운을 쫓아 기숙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신의 힘을 빌리게 된 이후로, 레이븐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 어둠의 기운이 실처럼 키제프의 정신과 이어졌다.
마력에 집중해 어둠의 실을 따라서 가던 키제프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막다른 길. 임시로 만든 통나무 가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벽 너머는 금지 구역으로 지정된 숲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근처에서 레이븐의 기운이 가깝게 느껴졌다.
“여긴…….”
화르륵!
불씨를 소환해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지만, 숲으로 가는 다른 길은 없었다.
그때 벽 안쪽에서 환한 불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벽으로 가로막혀 어떻게 넘을지 고민하던 찰나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나가 아니고 여럿.
키제프는 얼른 근처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네 명 정도의 아이들이 벽 옆에 작은 구멍으로로 나왔다. 그러곤 뒤도 안 돌아보고 후다닥 도망가기 시작했다.
“……야, 저거 어떻게 해?”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튀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노마와 막시무스의 목소리였으니까.
“저거…… 큰일 나는 거 아냐?”
“우리만 입 다물면 괜찮아.”
막시무스의 마지막 말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아이들이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은 안개가 되어 레이븐이 나타났다.
그가 비척대면서 키제프에게 기대듯 쓰러졌다.
“레이븐……? 너 괜찮은가?”
「키제프. 나 일단 여기 떠나야겠어.」
“안에 무슨 일이지? 방금 막시무스 패거리들이 저 안에서 뭔가를 벌이고 나오는 걸 봤는데…….”
「몰라. 아주 강력한 기운이 숲에 깔려 있어. 이상하게 저기 들어가면 내 힘이 약해져서.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
키제프는 일단 레이븐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와서는 그를 기숙사 침대에 데려다 놓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레이븐이 이불을 덮고 웅얼거렸다.
「키제프, 나 아파. 초콜릿 좀 사다 주라.」
키제프가 드르륵, 서랍장을 열어 미리 사다 놓은 초콜릿을 하나 건네주었다.
레이븐이 이 정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의 속성은 어둠.
아무래도 어둠과는 정반대 속성의 무언가가 저 숲에 있는 모양이었다.
키제프는 막시무스의 방을 찾아가 두드렸다. 그 패거리는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아까 너희들. 금지 구역에서 뭘 하고 나온 거지?”
잠시 놀라긴 했지만 막시무스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뭐야. 너도 거기 있었냐? 우린 그냥 거기에서 놀았던 것뿐이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막시무스가 제게 순순히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어제는 왜 그렇게 도망쳤지?”
“그냥 돌아간 건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때 벽 너머에서 이상한 빛을 봤는데…….”
키제프의 말에 아이들이 일제히 놀라는 얼굴들을 했다.
“……힉.”
그러자 막시무스 옆에 있던 노마가 겁먹은 얼굴로 술술 불었다.
“그게…… 이상한 마법진이 있었어. 우리가 그걸 건드린 것 같아.”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저놈이 일러바칠 거야.”
막시무스가 성질을 버럭 내면서 노마를 발로 걷어찼다.
“마법진을 건드렸다는 게 무슨 말이야?”
“…….”
키제프의 재촉에 노마가 실토하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최근에 금지 구역으로 아지트를 옮긴 아이들은 숲속을 드나들며 놀았다.
그러다 오래된 폐허를 하나 발견했고 그곳에 들어서자 바닥에 있는 마법진이 발동했다고 한다. 그 순간 이상한 빛과 함께 숲 전체가 울려 대서 아이들은 놀라서 곧장 도망 나왔다고.
키제프는 아무래도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전에 테드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줘야 하는데…….
하지만 그 아이가 가기 전에 위험한 곳인지 아닌지 먼저 확인을 해야 한다.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려 줘. 뭔지는 몰라도 건드리면 안 되는 걸 건드린 것 같으니까. 마법진을 해체하는 방법이라면 나도 알고 있어.”
노마가 반색하며 물었다.
“……정말 해결할 수 있겠어?”
“해 봐야지. 하지만 그 전에 교수님들께 먼저 알려야…….”
키제프의 말에 막시무스가 펄쩍 뛰었다.
“미쳤어? 들키면 우리 그럼 전부 퇴학일걸.”
“그럼 잠깐만 기다려…….”
키제프는 얼른 방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먼저 금지 구역을 확인하고 오겠단 쪽지를 써 부엉이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막시무스가 몰래 다른 아이를 시켜 부엉이를 붙잡아 두면서 쪽지는 결국 전달되지 못했다.
“쉿,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지면 안 돼.”
그 사실을 모른 채 키제프는 막시무스와 아이들과 합류해 금지 구역으로 떠났다.
* * *
‘왜 아직도 답이 없는 거지? 키제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루시엘은 온종일 방 안을 왔다 갔다 서성거리면서 편지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날도, 그다음 날도 벨은 날아오지 않았다.
초조함에 눈망울만 댕그르르 굴린 채였다. 좋아하는 간식도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아가 마님이 딸기 케이크를 거부하시다니, 어디 아프신 게 틀림없어…….”
“아가 마님…… 혹시 제가 뭘 잘못 만들었을까요, 흑흑.”
“뉴나가 그롤 리 엄눈데…….”
루시엘이 딸기 케이크를 먹지 않았다는 소문이 그날 공작성에 널리 퍼져 모두가 걱정을 하고 말았다.
정무 회의 중이던 공작과 엘링턴, 가신들의 귀에까지 이르렀다.
“딸기를 너무 오래 먹긴 했지.”
공작이 운을 떼자,
“암요. 질리실 만도 합니다.”
“그럼 브, 블루베리 케이크는 어떻습니까?”
“이 사람아. 그것도 같은 베리류이지 않나?”
다들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엘링턴은 그래도 딸기를 고집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접시에 딸기 케이크를 든 채였다.
“루시엘, 정말 안 먹을 거니? 한 입만 먹어 주면 많은 사람에게 평화가 올 거 같구나.”
길리아트를 발견한 루시엘이 그의 옷깃을 붙잡고는 걱정스레 말했다.
“할아버지, 답장이 안 와요.”
루시엘의 눈동자가 촛불처럼 일렁였다. 길리아트는 아이를 진정시켜 주기 위해서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친구가 걱정되니?”
“네…….”
“걱정하지 마라. 별일 없을 거란다. 오늘 저녁까지만 기다렸다가 이 할아버지와 함께 친구를 도우러 가자꾸나. 이제 좀 안심이 되지?”
“감사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위로에 루시엘은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그러나 끝끝내 부엉이는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