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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45)화 (45/282)

<45화>

“루시엘, 나는 잠시 저쪽을 둘러보고 있을 테니, 너도 책을 편히 찾아보렴.”

“네!”

마침 마법 서가에 못 보던 책이 꽂혀 있었다.

“엇, 이게 새로 나온 책인가 봐!”

『전설의 마법 식물』

마법과 식물, 두 가지 주제로도 충분히 루시엘의 흥미를 끌 만한데 마법 식물이라니.

루시엘은 홀린 듯이 그 책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책장 위치도 루시엘의 키와 비슷해서 꺼내기 쉬운 곳에 있었다.

녹색의 표지에는 금색 테두리에 덤불이 그려져 있었다.

책의 첫 장을 열자마자 책갈피 하나가 툭 떨어졌다.

푸르게 빛나는 나비 모양의 얇은 책갈피였다. 루시엘이 얼른 그걸 주워 들었다. 책갈피에 손이 닿는 순간, 루시엘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너로구나. 새아가라는 아이가.

난데없이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루시엘은 깜짝 놀라 눈이 댕그래졌다.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유…… 유령?’

무서워진 루시엘이 손을 달달 떨면서 얼른 다시 책갈피를 끼워 넣고 가려 하자,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귀여운 아이구나.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단다. 나는 서탑의 이벨린이란다. 아무래도 네가 나의 잠을 깨워 주어야 할 것 같구나. 나를 좀 도와주렴. 단서는 이 책에 있단다.

“……네? 제가 어떻게.”

나비 모양 책갈피는 이내 빛을 잃어버렸고,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벨린은 누구지?’

왠지 어디서 들어 본 듯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때마침 길리아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할아버지!”

“응……? 그 책갈피는!”

그의 시선이 루시엘이 가지고 있던 나비 책갈피에 닿았다. 루시엘이 먼저 책갈피를 보여 주며 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 책갈피를 아세요?”

“알다마다. 이벨린의 물건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길리아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자, 루시엘은 그의 입술에서 나온 이벨린이라는 이름을 듣고 살짝 멈칫했다.

“……그 이름이요.”

“왜 그러느냐?”

놀라는 루시엘을 보고 길리아트도 물었다.

“이 책갈피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서탑의 이벨린이라고 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아시는 분인 거죠?”

길리아트 역시 눈이 커지면서 루시엘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네, 잠 깨는 걸 도와달라고 하셨어요.”

그의 아내 이벨린은 분명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루시엘에게 말을 걸다니……. 의문을 살짝 접은 채 그가 말했다. 일단 루시엘에게 설명을 해 줄 필요가 있었다.

“허, 그렇구나. 이벨린, 그녀는 나의 아내란다. 벨슈타인을 나와 함께 처음으로 세웠지.”

“정말요? 서탑은 어디에 있어요? 이벨린 님은 거기에 살아 계신 거지요?”

루시엘의 물음에 길리아트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말했다.

“그래, 공작성에는 숨겨진 서쪽 탑이 있단다. 이벨린이 있는 곳이지.”

살아 있다는 말에 루시엘은 안도했다. 정말로 유령인 줄 알았으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제게 말을 걸었다는 건 혹시 마법 같은 걸까?

“이상하구나. 이벨린이 너를 불렀다는 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루시엘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혹시 수면기에서 깨어날 시기가 된 건가?”

“수면기……요?”

“드래곤은 잠을 자는 시기가 있단다. 이벨린은 하프 드래곤이지만.”

“넷……? 이벨린 님이 드, 드래곤이셨어요?”

길리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벨린의 이야기를 하는 그는 내내 애틋한 눈빛이라, 애정이 진하게 느껴졌다.

“그렇단다. 벨슈타인의 문장을 드래곤으로 정한 것도 그녀를 지키고 사랑한다는 의미이지.”

“로맨틱한 이유가 있었네요. 그렇지만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에요.”

벨슈타인에 와서 계속 놀람의 연속이라 더 놀랄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 드래곤이셨다니.

“루시엘, 너는 정말 특별한 아이인 것 같구나.”

‘수면 중인 이벨린이 루시엘을 알아보고 전언까지 보냈다니……. 루시엘은 대체.’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드래곤과 비등한 초월적 존재임을 직감했다.

루시엘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의 부인이라니, 그녀를 도울 수 있다면 돕고 싶었다.

“아, 할아버지. 저를 서탑으로 데려다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다. 지금 가자.”

“네!”

루시엘은 나비 책갈피와 책을 함께 챙겼다. 포탈을 타고 이동하자, 공작성의 성채가 멀리 보이는 우거진 가문비나무 숲에 둥근 탑이 있었다.

으슥한 주변 분위기에 루시엘은 걱정이 되었다.

“이벨린 님께서 여기 혼자 지내시는 건가요?”

“내가 가끔 드나들기도 하고, 에바가 보살펴 주었단다.”

“그렇군요.”

곳곳에 자리한 고풍스런 가구들과 금빛 장식물들.

탑의 내부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무엇보다 들어서자마자 흐르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드래곤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일까.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심장을 뛰게 했다.

탑은 인간이 살기에는 넓었지만, 드래곤이 잠들기에는 좁지 않을까 했는데, 인간의 모습인 이벨린을 마주한 후에야 이해가 되었다.

커다란 침대 위의 그녀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루시엘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주무신 걸까. 그나저나 엄청 미인이셔!’

칠흑 같은 머리카락에 희고 고운 피부를 가진 중년의 여인이었다.

누군가 말하지 않으면 드래곤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우아하고 기품 어린 귀부인.

그런 그녀를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 길리아트가 애틋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 모습이다. 두 분 정말 사이가 좋으신가 봐.’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여보, 이벨린. 여기 루시엘을 데려왔어요…….”

길리아트는 마치 깨어 있는 사람을 대하듯 그녀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마치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루시엘. 혹시 여기 들어오니 이벨린의 목소리가 또 들리거나 하지는 않니?”

그의 물음에 루시엘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뇨. 들리지 않아요.”

루시엘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어떤 신호라도 줄까 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지만 변화는 없었다.

이내 길리아트가 말했다.

“보통 드래곤이 수면기에 들어가면 수십 년에서 수백 년까지도 무슨 짓을 해도 일어나지 않거든. 그런데 이벨린이 먼저 깨워 달라고 했다니, 루시엘 너라면 그녀를 깨워 줄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어떻게……. 아!”

문득 이벨린이 제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루시엘은 책갈피를 꽂은 채 가져온 책을 펼쳤다.

“이벨린 님께서 이 책이 단서라고 말씀하셨어요.”

“이건 마법 식물에 대해 정리해 놓은 책이로구나.”

길리아트가 책을 촤르륵 펼쳐서 살펴보았다. 잠자코 있던 루시엘이 물었다.

“마법 식물이 뭐예요?”

“말 그대로 마법이 깃든 식물이지.”

그의 간결한 대답에 루시엘은 길리아트와 함께 마력을 품은 나무를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지난번에 보여 주신 달빛 이슬 나무처럼요?”

“그렇지. 하지만 전설의 마법 식물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귀하고 강한 마법 식물이란다. 구하는 곳과 쓰임, 효능은 전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전설적인 존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

“아…….”

들으면 들을수록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전설적인 존재라고 하니, 루시엘은 머릿속에 여러 가지 전설이 떠올랐다.

바다 깊은 곳에 산다는 인어, 인간의 피를 마신다는 뱀파이어, 뿔을 가진 유니콘…….

어쩌면 요정도 그런 전설 속 존재 중 하나일 테지.

왠지 그런 존재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건가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요, 할아버지. 식물들이 전설적인 존재와 관련이 있다는 건…… 그 존재를 만날 수도 있나요?”

“그건 확신할 수 없지. 그런 특별한 존재들은 세상에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단다. 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겠지.”

루시엘도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아트가 잠시 턱가를 문지르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벨린이 잠들기 전 어쩌면 수면기를 조절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다고 그랬단다. 하지만 다음 날 잠들고 말았지…….”

길리아트의 표정이 흐려졌다. 루시엘도 덩달아서 강아지처럼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어떤 방법인지 알 수 없게 되었네요.”

“안타깝지만 그렇단다.”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루시엘은 다시 기운을 내며 커다란 책을 품에 안았다.

“저는 돌아가서 이 책을 자세히 살펴볼게요. 무언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요.”

“우선은 그게 좋겠구나. 이벨린의 잠을 깨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그동안은 드래곤의 수면기를 조절할 방법이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도 다른 마법사들에게 좀 더 물어봐야겠구나.”

“네, 부탁드려요!”

루시엘은 책을 안고는 소파에 앉아 정독하기 시작했다.

‘수면’이나 ‘잠’에 대한 식물은 제법 많았는데, 정작 깨우는 식물은 없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던 루시엘은 몇 장 뜯긴 부분을 발견했다. 목차로 돌아와 보니, ‘피닉스의 장미’라는 마법 식물에 대한 내용이었다.

“……피닉스의 마법 장미? 하필이면 왜 이 부분만 없는 걸까?”

루시엘은 장서관 지기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마법 식물에 대한 자료는 그것뿐이라고 했다.

피닉스라면 고대의 불사조를 뜻하는 상상의 동물이었다.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식물인 것 같았다.

‘피닉스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그사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길리아트가 다시 장서관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제가 찾아보니 그 책에 찢어진 페이지가 있었어요. 피닉스의 장미라는 식물이 나와 있는 페이지였어요!”

“피닉스의 장미라고?”

“네!”

“허, 그래. 역시 그것뿐이구나!”

“앗, 알고 계세요?”

“그렇단다. 마법사들에게 피닉스는 불과 생명력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불사의 존재이지. 그래서 모두 피닉스를 찾고 싶어 한단다.”

“피닉스의 힘이 그만큼 강하니까……!”

루시엘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하는 말에 길리아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피닉스는 그 존재 자체로도 강력한 힘을 가졌단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깃털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고 피닉스의 심장을 먹으면 불사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고 하지.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힘을 얻고자 피닉스를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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