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자신을 놀려 대는 레이븐을 뒤로한 채, 키제프는 어기적 움직여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시 편지를 펼쳤다.
「안녕. 네가 알려 준 덕분에 약초를 잘 심었어. 고마워!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니 조금 기쁘네. 그치만 비밀이야. 나중에 조금 더 친해지면 알려 줄게. 참,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 힘든 일 같은 건 없고? 누가 괴롭힌다거나?
나는 요즘 마법을 배우고 축제를 즐기고, 신나는 하루만 계속되는 것 같아. 내 주변엔 다들 좋은 사람만 있어서 행복해.
정말, 다들 너무 좋아. 내 진짜 가족들은 아니지만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니, 진짜 가족보다 더. 너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니? 네 소식 궁금해. 아 참, 벨에게 밥은 잘 주고 있지? 굶기면 안 돼!」
정말이지 쓸데없이 두서없고 발랄한 편지였다. 뒤에서 편지를 훔쳐보던 레이븐이 중얼거렸다.
「이런 말투로 편지 쓰는 애가 남자애라고? 소름 돋는데.」
“…….”
「진짜 남자앤지 알아봐 줄까?」
“……아니.”
키제프는 호기심이라고는 없는 무신경한 붉은 눈으로 대답했다.
「가끔 보면 인간이 아닌 것 같다?」
레이븐이 아는 인간들은 호기심이 너무 과해서 목숨까지도 내다 버리는 족속들인데. 눈앞의 이 소년은 모든 일에 무신경하고 태연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인간을 고를 걸 그랬나? 나 심심해 죽어.」
레이븐이 침대에 거꾸로 누워서 징징거렸다.
“……부탁인데 나한테 관심 좀 꺼 줘.”
「계약자한테 관심 끄라니, 어차피 네 영혼은 내 건데.」
“아직은 아니잖아. 내가 죽어야 네 거가 되는 거지.”
「그 조건만 있는 건 아니지. 네가 죽기 싫으면 사람 셋을 죽여도 돼.」
레이븐이 생글거리면서 미친 계약 조건을 다시 한번 읊어 주자 키제프가 영혼 없이 대답했다.
“꺼져.”
「너희 아버지와 계약했어야 하는 건데. 그럼 일찌감치 내가 사신의 굴레를 벗어났을 거 아냐.」
“…….”
벨슈타인 공작이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는 건 키제프도 알고 있었다.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키제프는 대충 편지를 적어서 부엉이를 날려 보냈다. 편지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꼬박꼬박 날아왔다.
그가 할 말이 없어 빈 종이를 보낼 적에도 답은 왔다.
어느 날은 감정을 노래하는 감성적인 시가, 어느 날은 예쁜 꽃말이 날아왔다.
그 편지들이 어느새 수북하게 서랍에 쌓이기 시작했을 때, 키제프는 테드라는 이름의 아이가 정말 누군지 알고 싶어졌다.
* * *
―부엉.
열두 시가 넘은 한밤중, 벨이 루시엘의 창문으로 파드닥 날아왔다.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잠시 꾸벅꾸벅 졸았던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책을 베개 삼아서 자다가 일어나 하품을 하아암, 늘어지게 했다.
기대하지 않아서일까.
예상보다 빨리 날아온 키제프의 답장에 루시엘은 가볍게 웃었다.
사실 키제프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고 싶었는데, 벨이 돌아오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역시 답장이 와서 좋았다.
루시엘은 벨의 발목에 묶인 편지를 어서 풀어내고, 벨을 쉬게 해 주었다.
그다음 편지를 읽으려고 했는데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쪽이었다.
“……응?”
루시엘이 다가가자 레오니가 문을 살짝 열고는 얼굴을 반쯤 가리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수줍은지 고개는 아래를 향해 있었다.
“레오니, 안 잤어?”
“……뉴나.”
머리가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고, 눈에도 졸린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걸 보니 자다가 깬 모양이었다. 게다가 자기 몸 크기만 한 드래곤 인형까지 질질질 끌고 왔다.
헐렁한 하늘색 파자마를 입은 포동포동한 뒤태가 너무나도 귀여워 엉덩이를 토닥여 주고 싶었다.
“자다가 깼어?”
“……웅. 무셔운 꿈 꿔써.”
레오니가 꿈을 떠올리는 것조차 싫었던지 흐린 얼굴로 루시엘의 품에 안겼다.
루시엘이 레오니를 안아서 다독였다. 아이의 자그만 등이 파르르 떨렸다. 영락없이 아직 아기구나 싶었다.
“괜찮아. 꿈일 뿐이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루시엘이 어르고 달래 주자 레오니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파고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엘은 말없이 한참 레오니를 도닥여 주다가 말했다.
“레오니, 오늘 누나 침대에서 같이 자자. 이리 와, 재워 줄게.”
“웅…….”
그러나 루시엘의 침대를 보던 레오니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부농색 시른데. 여자 색이자나.”
“……레오니, 색에는 남자, 여자 같은 게 정해져 있지 않아. 분홍색이 얼마나 고운데. 레오니도 분홍색 옷을 입으면 더 잘생겨질 거야.”
“그러엄 부농이 입으문 잘생겨져?”
“그럼.”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농이 이부레서 코 자믄?”
“완전 멋지고 잘생겨지겠지?”
루시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레오니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이불을 덮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귀여워.’
레오니가 이내 새근새근 잠들었다. 손에 분홍색 이불을 꼭 쥔 채로.
‘잘생겨지고 싶은 욕심이 대단한걸.’
레오니를 재운 다음 편지를 읽어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잠들어 다행이었다.
루시엘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편지를 조심스레 펼쳤다.
잠든 레오니를 위해서 마법 램프의 밝기를 가장 약한 단계로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테드에게.
네 전서구는 이상해. 답장하지 않는다고 날아가지 않는다니……. 그래서 답장하는 거야. 오해는 마.
네 부엉이에게 벌레를 열두 마리도 더 잡아 주었으니 걱정하지 마. 걔 집에 가서도 밥 달라고 안 할걸?」
그러고 보니 벨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은지, 오자마자 얌전히 고개를 파묻고 잠들었다. 벨을 위해서 벌레를 잡았다니, 그건 생각 못 했다. 갑자기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벌레를 잡으러 다녔을 키제프를 생각하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루시엘은 다시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아카데미 생활은 따분해. 하루라도 빨리 졸업을 기다릴 뿐이야. 여긴 감옥 같아. 미칠 듯이 시간이 안 가거든.
약초를 심었다니 제법이군.」
키제프가 이렇게 길게 편지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제게 조금 마음이 열린 걸까? 루시엘은 조그맣게 웃음이 났다.
「어쩐지 벨이 포동포동해진 것 같아. 네 덕분이야.
돌아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 있을 거야. 지금도 순간이 될 거고. 언제나 너의 하루를 응원할게.
―기쁜 부엉이 주인」
얼른 답장을 보낸 다음, 루시엘은 레오니의 옆으로 가서 사르륵 잠을 청했다.
벨은 바지런히 날아 동이 트기 전 키제프의 창문을 두드렸다.
“뭐지. 오늘은 편지가 짧네.”
답장을 읽은 키제프는 문득 제 하루의 낙이 이 편지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유난히 흘겨 쓴 글씨를 보니, 아무래도 무척 졸린 상태에서 쓴 모양이었다.
돌아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가 있을 거라니. 마치 자신보다 훨씬 나이 든 어른 같은 말투라고 키제프는 생각했다.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은 키제프는 그것을 서랍에 넣었다. 그러곤 부엉이로 시선을 옮겼다.
“네 주인 말마따나 너 좀 살쪘다?”
벨이 자그만 머리를 까딱까딱 움직이자, 키제프가 하하하 하고 나지막이 웃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웃어 보는 것 같았다. 혼자 있으면 웃을 일이 거의 없으니.
그러고 보니 루시엘, 그 아이는 참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키제프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신록이 눈부신 오월, 다음 달이면 유월이었다.
결혼식이자 루시엘의 생일.
‘곧 다시 만나겠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약속을 했으니 그거까진 어쩔 수 없었다.
부엉이 때문에 잠이 깬 키제프가 온갖 벌레를 모은 통을 열어 먹이를 준 다음, 다시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다.
* * *
“아 참, 루시엘. 장서관에 새로운 서적들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한번 다녀오렴.”
“앗, 정말요?”
루시엘이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래, 장서관지기가 알려 주었다. 아니면 오늘은 함께 가 볼까?”
“좋아요.”
루시엘은 길리아트와 함께 장서관에 들어섰다. 장서관지기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길리아트 주인님, 그리고 아가 마님.”
“루시엘에게 새로운 책이 들어왔다고 알려 주었더니 곧장 이렇게 오는군.”
“책을 좋아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으십니다. 큰 마님이 계셨더라면 귀애하셨을 테지요.”
“흠흠, 자네도 참.”
장서관지기가 꺼낸 큰 마님 이야기에 루시엘이 조심스레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엘의 그런 기색을 알아차렸지만 길리아트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루시엘도 먼저 묻지 않고 조용히 서가를 훑었다.
루시엘은 이내 길리아트의 손을 잡고 항상 자신이 즐겨 읽었던 구석진 서가 쪽으로 끌었다. 그곳에 있던 자그만 소파를 발견한 길리아트가 미소 지었다.
루시엘이 말했다.
“엘링턴이 저를 위해 가져다준 소파예요.”
“키제프의 소파였는데, 이제 루시엘 것이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키제프와 돌아오는 유월에 결혼을 한다고 들었다.”
“아…… 네.”
‘시아빠께서 말씀하신 모양이야.’
“잘되었다, 루시엘. 이제 정말 손주 며늘아기가 되었구나.”
“네…….”
길리아트의 따사로운 눈빛이 사붓이 내려앉았다.
“키제프를 만나 보니 어떻든?”
“아…… 두 분을 쏙 빼닮아서 잘생겼어요.”
“다행히 얼굴은 합격인 모양이고, 성격은?”
“…….”
루시엘이 입술을 열기 전에 길리아트가 먼저 선수 치듯 턱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 녀석 성격이 그래 놔서 빨리 친해지긴 어려울 게다. 너무 상처받지 말렴. 루시엘 너라면, 누구와도 친구가 되겠지만 키제프 그놈은 아니란다.”
“……하, 할아버지?”
손주를 두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웃는 낯이었다.
“그래도 너희들이 진심으로 좋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니란다. 그 녀석이 괴롭히면 나에게 꼭 일러라.”
“네? 네…….”
길리아트의 말에 루시엘은 살포시 웃음이 나오면서 안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