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키제프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루시엘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바라고 보낸 게 아니었으니까.
사실 루시엘은 키제프의 편지를 기다릴 틈이 없었다.
마법을 배우고 약초를 돌보면서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던 터였다.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루시엘.”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던 저녁, 루시엘은 자신만의 지팡이를 가지게 되었다.
길리아트는 푸른색 벨벳 천으로 감싼 지팡이를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받아 보렴. 네 지팡이가 완성되어서 장인에게 받아 왔단다.”
“너무 기대돼요.”
루시엘은 길리아트에게서 지팡이를 받아 조심스럽게 벨벳 천을 걷어 보았다.
지팡이를 본 루시엘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쭉 길게 뻗은 지팡이는 투명한 푸른색이었다. 가장 꼭대기에는 십자로 갈라진 홈 안에 무색의 투명한 보석이 콕 박혀 있었다.
“마음에 드니?”
루시엘이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지팡이를 손에 꼭 쥐고 흔들었다.
“상상보다 더 근사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좋아! 할아버지, 감사해요.”
루시엘이 폴짝 뛰며 길리아트의 품에 안겼다.
“어이구, 녀석. 그렇게 좋으냐?”
“네.”
끄덕끄덕.
루시엘이 지팡이를 바라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이제 진짜로 저만의 마법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제힘으로.”
뿌듯함을 감추지 못한 루시엘이 방긋 웃었다. 귀여운 미소에 저절로 루시엘을 쓰다듬을 뻔했지만 길리아트는 참고, 다음을 진행했다.
“그래, 지팡이에 우선 너의 마력을 연결하는 마나 페어링부터 하자.”
“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보석처럼 반짝여서 길리아트는 허허헛,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할애비가 시범을 보이는 게 쉽겠지?”
“네, 부탁드려요.”
길리아트가 허공을 손바닥으로 쓸 듯이 하자, 손안에 지팡이가 착, 하고 감겨 있었다.
“어?”
루시엘은 순간 ‘내가 뭘 본 거지?’ 하고 살짝 눈을 비볐다.
“자, 내가 하는 걸 보고 잘 따라 하렴.”
“넷!”
“지팡이를 가볍게 쥐고, 눈을 감은 채 너의 심장에 모여든 마력을 느껴 보렴.”
루시엘은 눈을 꼭 감고 심장에 모여드는 마력을 느꼈다.
두근두근.
지팡이와 루시엘 사이로 살랑살랑 가벼운 공기가 휘돌았다.
샤락!
핑그르르 돌던 루시엘의 마력이 지팡이에 박힌 보석으로 스며드는 순간, 심장이 쿵쿵거리며 공명을 시작했다.
그러자 루시엘의 지팡이가 디잉, 하고 진동이 울렸다. 손바닥에도, 가슴에도, 머릿속으로도 그 울림이 전해졌다. 그 순간 눈을 감은 루시엘에게도 지팡이에게서 나는 빛이 느껴졌다.
길리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엘, 이제 눈을 떠 보렴. 마나 페어링이 다 되었구나. 이제 지팡이를 감추었다가 언제든 다시 꺼내서 쓸 수 있을 거다.”
“와, 편리해요.”
눈을 뜨자 손에 쥔 지팡이는 은은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성스럽고도 아름다웠다.
“마법 지팡이라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마법을 쓸 때마다 할아버지가 생각날 거예요!”
“언제든 너와 함께할 무기니까, 잘 아껴 주거라.”
“네. 열심히 할게요. 감사해요, 할아버지. 매번 귀한 것만 주시는 것 같아요.”
루시엘이 다시 한번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길리아트에게 와락 안겼다.
“너야말로 나에게는 귀한 보물이란다, 루시엘.”
그 말에 루시엘의 마음은 더욱 말랑말랑 간질간질해졌다.
길리아트가 아이의 자그만 등을 토닥이고는 설렘 가득한 분홍빛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줄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살짝 들었지만. 사실 평범한 마법 지팡이가 아니어서 시간이 더 걸렸다.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지팡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마법 무기 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난쟁이 류프델을 찾아가 비싼 값을 치르고, 순수한 마력을 담아 낼 수 있도록 의뢰한 것이다.
목숨을 구해 준 답례로 류프델이 지팡이를 제작해 준 이후부터 그와는 계속 거래를 하고 있었다.
류프델은 투명하고 순도 높은 마력만 담아 낼 수 있는 이 지팡이에게 ‘이노센트’라 이름 지어 주었는데, 길리아트도 순진무구한 루시엘과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류프델의 지팡이가 대단한 것은 사용자에 맞춰 성장한다는 점이었다. 일반 마법 상점에서 판매하는 지팡이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루시엘의 지팡이가 어떻게 변할지 기대되는군.’
루시엘에게는 아직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루시엘은 새 지팡이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과도하게 노력할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성장하는 무기라고 알려 준다면 더욱 무리를 할 것이다. 차후 무기가 처음으로 성장을 할 때쯤 조용히 알려 줄 생각이었다.
“할아버지, 저 오늘은!”
의욕에 가득 찬 루시엘의 눈이 생기로 반짝거렸다.
“그래, 오늘은 자유롭게 연습하거라!”
“감사합니다. 히힛.”
처음으로 자신만의 지팡이를 갖게 된 루시엘은 마냥 신이 났다. 자신의 지팡이를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길리아트 할아버지 말씀대로 루시엘에게 마나 페어링 된 지팡이는 언제 어디서든 함께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사라져.’, ‘이리 와.’라고 간단히 명령을 내리기만 해도 그녀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실습 때 사용하던 지팡이와는 전혀 다른 것 같아.’
다만 이 지팡이는 순수하게 아무 마법도, 속성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내 힘으로 전부 채워야지.”
루시엘은 우선 무속성의 1서클 마법 슬리프(Slip)부터 시전해 보았다. 마나 페어링 되었기 때문일까?
루시엘이 마법식을 한 번 외운 후로는 지팡이에 기록이 되는 것인지, 마법식을 외우기도 전에 슬리프 마법을 발동하는 작고 투명한 마법진이 허공에 생겼다.
굳이 목소리로 시동어까지 내뱉지 않아도 인형이 슬리프 마법으로 미끄러졌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너무 좋다.”
루시엘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그녀의 자그만 심장도 연신 두근거렸다.
* * *
수업을 마친 루시엘은 온실 정원으로 달려갔다. 화단에 심은 약초들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온실 정원 안의 돔형 천장은 온통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에바 말로는 햇빛을 흡수해 저장하는 마법이 담겨 있어서 식물에게 필요한 양만 줄 수 있게 조절이 되어 있다고 그랬다.
덕분에 햇빛은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온실 안을 비추고 있었다.
루시엘은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루가 나무는 줄기가 아주 살짝 굵어진 것도 같았다. 타테아와 티에리는 심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 싹이 나려면 멀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앗.”
특히 씨앗이 더 작고 여려서 타테아는 훨씬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연두색 싹이 조그맣게 빼꼼 올라와 있었다.
“왠지 기쁘다. 이런 기분이구나.”
루시엘이 헤실헤실 웃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비어 있던 화단도 시클라인이 심어 놓은 약초들로 가득 채워졌다. 벌써 은은하고 알싸한 약초 향기들이 풍기는 것 같았다.
‘이러다가 정말 온실 정원이 약초원이 되어 버리겠네.’
시클라인에게 도와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바뀌어 가고 있구나. 벨슈타인을 위한 일에 한 발 다가서고 있는 것 같아 루시엘은 왠지 뿌듯해졌다.
“끄응.”
고개를 돌려 보니 시클라인이 정원 안쪽으로 커다란 포대를 가져오고 있었다. 이내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은 시클라인이 잠시 팔을 주물렀다. 무척 무거웠던 모양이었다.
“시클라인 선생님, 이게 다 뭐예요?”
“아가 마님? 아아, 약초에게 비료를 주려고 농장에 가서 얻어 왔어요. 그래야 더 쑥쑥 잘 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시클라인은 약초들에게 비료를 뿌려 주고, 물도 주었다. 누구보다 정성껏 약초를 가꾸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엘은 다짐했다.
자신과 벨슈타인, 그리고 시클라인을 위해서라도 꼭 그녀를 벨슈타인의 약제사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 뒤로 루시엘은 수업이 있든 없든 매일매일 마법을 수련했다.
지팡이에 마법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일이 퍽 재밌었던 터였다.
이제 무속성 마법은 2서클까지 배운 것들을 다 기록했다.
“이걸 전부 직접 실습하고 기록했단 말이냐?”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네. 너무 재미있었어요.”
“대단하구나.”
“그래야 제 걸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길리아트는 아이의 무서운 끈기에 혀를 내둘렀다.
‘저 자그만 몸집 어디에 그런 힘이 있는 건지 궁금하군.’
처음에는 그저 뛰어난 마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루시엘의 진짜 재능은 바로 저 끈기였다.
저 아이는 강해질 것이다. 강해질 때까지 자신을 단련할 테니…….
그는 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제자를 만나 기뻤다.
“좋은 마음가짐이구나.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한다면 분명 좋은 마법사가 될 거다.”
그의 칭찬에 루시엘의 통통한 볼이 사과처럼 발그레해졌다. 그러나 이내 아이의 눈은 자신감으로 반짝였다.
“그 말씀 새겨듣고 열심히 할게요!”
예쁜 아이일수록 칭찬을 아끼고 티를 덜 내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
루시엘, 저 아이처럼.
* * *
키제프는 일과를 마치고, 기숙사 침대에 드러누웠다. 교내 식당은 저녁 시간에는 피하는 편이었다.
막시무스와 그 수하들이 거의 점거하다시피 했으니까. 하긴 딱히 식욕도 없다. 문득 키제프는 벨슈타인에서 먹었던 고급스러운 요리들이 그리워졌다.
―부엉.
‘쬐끄만 게 왜 울지?’
왠지 신경이 쓰였다. 아까 벌레도 다섯 마리나 잡아 줬는데 또 배가 고픈 건가?
그러고 보니 정말 귀찮다.
저 부엉이, 그리고 그 편지.
키제프는 건조한 표정으로 서랍장에 넣어 둔 편지를 꺼냈다. 그의 표정과는 다르게, 편지는 가지런하게 들어 있었다.
편지가 도착한 지도 일주일이 넘었는데, 저 부엉이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르륵, 나타난 레이븐이 말했다.
「아직도 전서구랑 씨름 중이야? 그냥 부엉이를 날려 버리면 되잖아.」
“……나에게서 안 떨어지는데 어떻게 버려.”
「그럼 내가 겁을 줘서 쫓아낼까?」
레이븐이 짓궂은 얼굴로 눈을 가느랗게 뜨며 부엉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키제프가 손으로 부엉이를 감싸면서 레이븐을 밀어냈다.
“뭔 짓을 하려고? 얜 안 돼.”
「치사하긴. 부엉이 주인에게 관심 있나?」
“부엉이 주인은 남자애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