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태평한 말만 늘어놓는 주군이 답답해 엘링턴이 이어 고했다.
“각하, 잘못된 소문은 바로잡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벨슈타인의 명예와 아가 마님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엘링턴의 말을 듣던 공작도 루시엘의 이름이 나오자 귀를 기울였다.
“벨슈타인이 악당 이미지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루시엘에 대해서도 안 좋은 소문이 있나?”
루시엘의 이름을 입술에 담을 때 공작의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우리 새아가를 건드려? 하는 얼굴이라 엘링턴은 조심스레 주군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예, 출신을 알 수 없는 아이라는 소문이.”
“출처가 어딘지 알 것 같군.”
아카데미의 교장은 후원 건이 잔뜩 걸려 있으니 입을 잘못 놀릴 위인은 아니었고, 그렇다면 남은 건 부티크.
일반적으로 부티크는 상류층의 소문이 도는 정보통 중 하나였다. 그러나 벨슈타인 소유의 부티크라면 달라야 한다고 공작은 일러두었다.
하여, 플로린 부티크는 고위 귀족을 상대하면서 얻는 사사로운 정보들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는 교육을 점원에게 시켰다.
그렇지만 그곳을 방문한 손님들의 입단속까지는 할 수 없었겠지.
‘무엇보다 그날 퍽 귀찮은 일이 있었으니.’
공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짐작 가는 데가 있다. 확실한지 알아봐.”
“예, 각하.”
현 공작 부인의 여동생이자,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세리안 백작 부인에게 답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각하, 답이 왔습니다.”
“그래, 누가 소문을 냈지? 카빌 후작가인가?”
“벨리타 후작가였습니다.”
부티크에서 말을 걸었던 후작 부인의 얼굴이 뒤늦게 떠올랐다.
의외라는 듯 차가운 적안이 굴렀다.
“그런가? 벨리타 후작가라면, 선박을 보유하고 있어 해운 사업으로 부를 움켜쥐지 않았던가.”
“예, 맞습니다.”
“마법사를 보내 보유 중인 선박 폭파시키고 사고로 위장하도록.”
“……예?”
“우리 새아가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린 죄에 대한 심판이다. 덕분에 평판이 떨어지게 생겼으니 이것도 많이 참은 것이지.”
“……아, 알겠습니다. 각하.”
공작은 감히 누굴 건드리냐는 듯, 맹수처럼 들끓는 분노로 주먹을 꾹 쥐었다.
사실 카빌 후작가였다면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벨슈타인의 평판은 몰라도, 루시엘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자들은 반드시 심판하겠다는 루이비드의 결연한 눈빛이 빛났다.
* * *
페넬로페는 그날 생각만 하면 바짝 약이 올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곤 했다.
저보다 어린아이로 보였는데 수도의 유명 의류점을 가지고 있다니!
속이 상하고 배가 아팠다.
페넬로페와 교류가 있는 상류층 아이들 중 그 누구도 의류점을 가진 아이는 없었다.
어머니에게는 아무리 졸라 봤자 통하지 않았고, 제게 관심 없는 오빠 막시무스에겐 비웃음만 살 터이니 지금까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버지가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아버진 다를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주시는걸.”
어린아이임에도 페넬로페의 초록색 눈동자는 욕심으로 가득 부풀어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인 카빌 후작의 귀환 마차를 발견한 페넬로페의 눈이 반짝였다.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나도 우리 딸이 보고 싶었지. 별일 없었느냐?”
마차에서 내리는 아버지의 품에 와락 안긴 페넬로페가 그 물음에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별일, 있었어요.”
서재로 자리를 옮겨 페넬로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자초지종을 듣던 카빌 후작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벨슈타인 공작이 내 딸자식 교육을 들먹였다고??”
“네…… 너무 무서웠어요. 저는 그저 드레스를 고르려던 것뿐인데……. 그치만 무엇보다 가장 속상했던 건요. 공작님이 그 애에게 시내에 있는 부티크를 사 줬대요, 아버지.”
딸애의 말에 후작 부인이 손사래를 치면서 다가왔다.
“아유, 여보. 애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겠죠? 벨슈타인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좋아요. 저는 간 떨어질 뻔했다고요.”
“시커먼 벨슈타인. 무슨 짓을 하기에 그렇게 많은 부를 축적한 건지…….”
“아버지? 그럼 저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거예요?”
“페넬로페?”
“플로린 부티크를 제 이름으로 하고 싶단 말이에요.”
열 살짜리 딸의 철없는 말이라지만 과한 요구에 카빌 후작도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얘야, 그건 말이다. 나중에 이 아비 일이 잘되면 그때…… 생각해 보마.”
“일이요?”
“그래, 이 아비가 오래전부터 찾고 있는 존재가 있거든. 그것만 찾으면 어쩌면 우리는 큰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
크리스탈 페어리.
보석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그 환상적인 존재는 보석안을 지니고 있다 들었다.
보석안을 가진 여자가 있다는 은밀한 제보를 받고 노예선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다 아니었다. 여태 아무런 소득이 없었지만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그 존재가 반드시 있을 거다. 분명히.’
그게 제 손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한 나라의 왕도 부럽지 않게 되리라.
잠시 꿈틀거리는 욕망으로 달콤한 상상에 젖어 있는 카빌 후작에게 페넬로페가 물었다.
“그게 뭔데요?”
“보석처럼 빛나는 눈을 가진 여자를 찾고 있단다. 나중에 그 여자를 손에 넣게 되면 자세히 이야기해 주마.”
“보석 같은 눈? 여자?”
페넬로페의 초록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도 눈이 무척이나 반짝거렸어요. 마치 루비처럼.”
“그 아이라니?”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벨슈타인 공작가의 아이 말이에요.”
“……그게 사실이냐?”
“네! 저만 본 게 아니라, 어머니도 보셨어요.”
딸아이의 말에 후작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눈을 번뜩였다.
* * *
이튿날 공작의 승인을 받은 엘링턴이 루시엘을 방문했다.
“엘링턴!”
“아가 마님, 유리공예 장인 하멜을 데려왔습니다.”
“빈센트 하멜이라고 합니다.”
반곱슬 갈색 머리에 잿빛 눈동자, 적당한 매부리코, 싹싹한 인상을 가진 중년 남자였다.
‘살짝 닮은 것도 같아.’
루시엘이 기억하는 그 장인은 주근깨에 더벅머리, 무뚝뚝하고 순박한 인상이었다.
“저를 찾으신다고 하기에 냉큼 달려왔습니다!”
“하멜 씨, 형제가 있다고 들었어요.”
“예, 둘째는 타지로 나갔고, 막내는 어제 돌아와서 같이 왔는데……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 그를 불러 주실 수 있나요?”
곧 하멜 형제의 막내를 만날 수 있었다.
루시엘이 기억하던 그 장인의 젊은 모습이 확실했다. 약간 어색한 기색은 있었지만 주눅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하고 덤덤한 눈빛이었다.
‘그래, 이 사람이야.’
남자의 얼굴을 본 루시엘은 확신했다.
“이렇게 와 주어서 고마워요.”
“아유, 저희를 귀한 자리에 불러 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막스, 너도 어서 인사드려라.”
빈센트 하멜이 막냇동생의 머리를 억지로 숙이며 말했다.
“……막스 하멜입니다.”
막스는 여기 왜 불려 왔는지 도통 모르겠단 얼굴로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을 부른 건 유리공예 때문이에요. 이브나크의 유리 공방이 거의 사라졌다고 해서 안타까웠어요.”
루시엘의 말에 두 형제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희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유리 공방을 곧 접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보다 발루크 상단의 물건이 잘 팔리니까요.”
“그러지 마세요. 유리공예의 아름다움을 알린다면 사람들은 다시 찾아 줄 거예요! 제가 공작님께 적극적으로 말씀드려서 공방을 지원하도록 할게요.”
“예? 저, 정말이십니까?”
두 형제가 얼떨떨한 눈으로 루시엘과 엘링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며 다가왔다.
“실력을 검증한다면 우리 새아가의 말대로 지원을 검토해 보겠다.”
팔짱을 낀 채 공작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멜 형제는 놀라서 넙죽 엎드렸고, 루시엘은 치마를 살포시 펼치며 예를 표했다.
“고, 공작님!”
“감사합니다, 각하.”
“……또 각하라고 부를 셈이냐?”
공작이 살짝 서운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루시엘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앗,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앞이라 격식을 차렸어요.”
“우린 친근한 사이이니 격 없는 호칭이 더 좋구나.”
“네, 감사해요, 시아빠…….”
“옳지.”
꿀이 뚝 떨어지는 눈으로 공작이 화답했다. 엘링턴이 뒤에서 흐린 눈으로 중얼거렸다.
“각하, 딸 바보는 봤어도 며느리 바보는 처음 봅…….”
“그게 뭐.”
루시엘을 향할 때와는 다르게 서늘한 눈빛에 엘링턴은 말을 잇지는 않았다.
공작의 허락으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두 형제는 기쁜 마음으로 공방에서 공들여 유리 공예품을 만들어 보내겠다고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공작은 루시엘의 방에 남아 말했다.
“루시엘, 다음 회의 때 가신들에게 이 일에 대해 밝히려 하는데 어찌 생각하지?”
그들에게 실력을 검증해 보자고 한 것이 공작 본인이었다. 게다가 공작은 까다롭고 의심이 많은 위인이었다. 이건 분명 자신의 신중함을 살짝 떠보려는 게 틀림없었다.
‘여기서 곧장 좋다고 하면 안 돼.’
곰곰이 생각하던 루시엘이 공작에게 고했다.
“하멜 형제가 만들어 오는 물건을 확인해 본 후에 밝혀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 자칫 잘못해 황후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유리 공예품이라면, 벨슈타인의 명예가 오히려 실추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들을 믿고 있어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공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공작이 뒷짐을 지곤 흐뭇한 얼굴로 루시엘의 방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