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39)화 (39/282)

<39화>

일반적으로 마법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무속성이라는 걸 안 자들은 대다수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한다.

그럴수록 더욱 강력한 속성 주문이 담긴 지팡이, 고위 스펠서에 집착하게 되고 말이다.

‘그런 이들은 결국 오래가지 못했지.’

그러나 루시엘은 달랐다. 결과에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것들에 하나씩 최선을 다해 임하고 있었다.

도리어 루시엘이 특별한 속성을 발현할 것이라 크게 기대하고 실망한 것은 길리아트 자신이었다.

“루시엘, 너만의 지팡이를 선물로 주마.”

자신만의 지팡이, 그 두근거리는 말에 루시엘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벌써 제 지팡이를 가져도 되나요?”

“그래, 네가 원하는 속성을 담아서 줄 생각이란다.”

“아…….”

그러나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지팡이 선물은 너무 감사하지만, 아무 속성도 담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순수하게 제 마력만을 담아 줄 지팡이도 있을까요?”

“어째서냐?”

보통은 강력한 속성이 담긴 지팡이를 갖고 싶어 했다. 루시엘이 커다란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나침반이 알려 준 것처럼 제가 가진 속성이 아무것도 없다면, 배우는 것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고 싶어요. 제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그리고…….”

루시엘이 당근 가방에서 꺼내 온 커다란 책을 낑낑대면서 가져와 펼쳤다. 자그맣고 오동통한 손가락이 책을 가리켰다.

“여기 보니까 무속성도 나중에는 강해질 수 있대요!”

루시엘이 보여 준 책에서처럼, 고서클 마법 중에도 무속성 마법이 존재했다. 길리아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과분한 힘을 욕심내지 않는 루시엘의 태도가 대견하고 기특했다.

“네 말대로 아무 속성도 가지지 않은 지팡이를 만들어 주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정히 일러주었다.

“지팡이 제작자에게 의뢰하면 일주일 정도 걸릴 거란다. 자, 이제 돌아가서 수업을 마저 하자꾸나.”

“네!”

루시엘은 기쁜 마음으로 길리아트가 알려주는 여러 마법들을 익혔다. 수업은 아쉬울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루시엘은 수업을 마치고, 자꾸만 두근거리는 가슴을 매만졌다. 마법을 쓸 때마다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커다랗게 일렁거렸다.

‘자꾸만 이상해.’

자신의 몸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 * *

“루씨에 뉴나. 아침 먹자!”

“루시엘, 오늘은 이 할아비랑 점심 피크닉을 가는 게 어떠냐?”

“루시엘, 저녁은 나랑 먹지.”

아침은 레오니와, 점심은 할아버지, 마지막으로 공작님과 저녁을 먹은 루시엘은 무언가 이상했다.

이럴 거면 다 같이 식사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제각각 들려온 대답은 이랬다.

“뉴나랑 먹눈 게 제일 조하.”

“그냥 오붓하게 우리끼리 먹자꾸나, 루시엘.”

“둘이 있는 게 불편한가?”

진짜 가족은 세 사람인데 외부인이었던 루시엘과 있는 걸 더 편안하게 여기는 듯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루시엘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가족 만찬 이외에는 보통 다들 각자 식사하는 듯했다.

루시엘이 레오니의 식사 메이트를 하고 나서 부쩍 공작님도, 할아버지도 바쁜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루시엘과 함께 밥을 먹으며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공작님이 같이 식사한다거나 하는 모습은 별로 보지 못했다.

루시엘은 그 사실이 궁금해 에바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에바라면, 오랫동안 벨슈타인 성을 총괄해 왔으니 잘 알 것 같았다.

“에바.”

“네, 아가 마님.”

“공작님과 할아버지는 함께 식사하지 않으시는 편인가요?”

“네, 두 분은 보통은 따로 드시고, 만찬 때에만 함께 드시는 편이세요.”

“왜 같이 드시지 않나요?”

“음…… 그건.”

에바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

“잔소리 때문일 거예요. 큰 주인님은 가주님께, 가주님은 큰 주인님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시면 잔소리를 하시거든요. 그게 귀찮으셔서 같이 식사하지 않으려 하세요.”

“아…….”

에바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루시엘이 말했다.

“그럼 레오니가 공작님과 식사를 안 하는 것도…….”

“그건 혼나기 싫어서 그러시는 거겠지요.”

이 집 남자들은 잔소리랑 혼나는 걸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모두에게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해서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자고 해야겠어요.”

루시엘의 말에 에바가 쿡쿡 웃으면서 꿀을 바른 복숭아를 가져다주었다.

“아가 마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네요.”

“저만이요?”

루시엘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눈망울을 굴리면서 포크로 달콤한 복숭아를 입안으로 앙 가져왔다.

루시엘은 그날 저녁에 용기를 내어 모두에게 이렇게 전했다. 발그레하게 양 볼을 붉히면서.

“다 같이 소박한 아침 식사를 하고 싶어요. 아, 몇 가지 규칙이 있어요. 식당에는 꼭 편안한 차림으로 오셔야 해요. 그리고 서로에게 잔소리는 금지예요.”

루시엘의 설득에 벨슈타인 3대가 모두 모닝용 식당에 모여 자그만 식탁 앞에 앉았다.

그것도 세수만 마치고 편안한 파자마 차림으로. 만찬이나 행사가 아닌 소박한 식사를 다 함께 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길리아트는 왠지 감회가 남달랐다.

“이리 편안한 자리에서 다 같이 모여 아침을 시작하니 좋구나. 진짜 평범한 가족 같군.”

“그쵸, 할아버지?”

자줏빛의 펄럭거리는 파자마를 걸친 길리아트가 루시엘 앞에 접시를 놓아 주었다.

오늘 아침은 에바나 다른 사용인들의 시중 없이 먹기로 약속했기에 음식도 본인이 접시에 직접 담아 먹었다.

평소보다 현저히 줄어든 메인 요리의 개수를 눈으로 세어 보던 공작은 냅킨도 두르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식탁이 너무 부실하군, 에바?”

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올라가며 에바를 부르자 루시엘이 말했다.

“앗, 시아빠. 에바는 부르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오붓하게 가족끼리 식사하기로요.”

“가주님, 필요하신 것이라도…….”

루시엘의 지적에 공작은 얼굴을 빼꼼 내민 에바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손짓을 전했다.

“……그랬지, 참. 되었다. 가서 쉬도록 해.”

“이 음식들은 전부 제가 아침 식사로 맛있게 먹었던 것들인데…… 혹시 부족하시면 제가 주방에 다녀올게요.”

루시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공작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제지했다.

“……네가 맛있다니 한번 먹어 보지.”

공작은 늘상 아침으로 나오는 이 메뉴를 처음 보는 듯했다. 루시엘이 물었다.

“이 요리들, 아침 메뉴로 드셔 보지 않으셨어요?”

“아침은 거르는 편이라 모르겠군.”

공작의 대답에 레오니의 편식이 누구를 닮은 것인지 루시엘은 알 것만 같았다.

“정무를 보시려면 영양을 골고루 챙기셔야 해요.”

“……규칙 어겼다. 잔소리.”

“합!”

루시엘이 놀라서 제 입을 막았다.

“죄송해요. 그치만 이 소고기 수프하고 버터 바른 호밀빵은 제가 사랑하는 아침 요리 중 하나예요.”

루시엘이 눈을 반짝이며 방긋 귀엽게 웃었다.

저렇게 소박한 음식을 두고 사랑이라? 공작의 입가가 잠시 씰룩거렸다.

루시엘이 바지런히 식사 메이트를 한 덕분일까. 루시엘의 옆에 앉은 레오니도 소고기 스튜와 싱싱한 야채도 골라내지 않고, 골고루 잘 먹고 있었다.

“우냠우냠.”

레오니는 일부러 더 맛있게 먹으려고 소리까지 내면서 먹었다. 이윽고 루시엘이 레오니의 가상한 노력을 포착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세요. 레오니도 아주 잘 먹어요.”

“웅, 나는 다 마싯눈데! 아부디, 편시케요?”

아들의 물음에 공작은 스푼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스튜를 먹는 모습을 두 아이가 신기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만들 보지. 체할 것 같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구멍으로 넘긴 스튜의 고소함에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어때요, 드실 만하지요? 이렇게 먹으면 더 맛있어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루시엘이 빵을 뜯어서 스튜에 듬뿍 찍어 먹었다. 공작이 대답 대신 루시엘이 하는 양을 지켜보더니, 똑같이 따라 했다.

“허허, 먹을 줄 아는 거였군.”

“…….”

길리아트도 그 모습이 못내 신기한 건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고치지 못한 루이비드의 까다로운 식성을 알고 있던 터였다.

레오니와 길리아트도 곧 따라서 그렇게 먹기 시작했다.

“마싯따!”

“오호, 정말 맛있구나. 루시엘.”

“히히.”

자그만 식당에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밖에서 차를 즐기고 있던 에바도 조용히 미소를 머금으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루시엘 덕분에 오랜만에 가져 보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 * *

요즘 루시엘은 밥을 먹을 때도, 아침에서 일어날 때도, 잠이 들 때도 온종일 습관처럼 창가를 바라보았다.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로즈나 베시에게 ‘혹시 벨 안 돌아왔어요?’ 하고 수시로 물었다.

벨이 루시엘의 방으로 돌아온 건 달과 별이 기운 밤이었다.

톡톡.

부엉 하고 벨이 울자 새근새근 깊게 잠든 루시엘이 겨우 눈을 떴다.

라이트 마법이 걸린 별 모양 등잔불이 아롱져 은은한 빛을 만들어 냈다. 창문 앞에 새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어? 벨! 왔구나!”

놀란 루시엘이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호다닥 달려가 창문을 끙끙거리면서 힘겹게 열었다.

벨의 하얀 날개는 어둠 속에서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루시엘이 양팔을 벌렸지만, 벨은 루시엘의 어깨에 얌전히 앉았다.

“잘 다녀왔어? 답장은?”

벨의 발목에 매달린 쪽지를 보고 루시엘은 기뻐서 눈이 댕그래졌다. 그러곤 벨을 안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루시엘은 그대로 침대에 퐁당 빠지듯이 쓰러졌다. 벨이 기겁하며, 날아가 새장으로 쏙 들어갔다.

“왔다. 답장.”

루시엘은 포슬포슬 웃다가 침대 모서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후 벨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키제프의 편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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