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35)화 (35/282)

<35화>

“귀여워요.”

루시엘은 손바닥 위의 유리 장식품을 연신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그런 루시엘을 귀엽게 바라보던 엘링턴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영지민들 사이에서 벌써 아가 마님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더라고요. 언제 한번 얼굴을 비추시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네!”

루시엘도 언젠가는 벨슈타인 공작령의 영지민을 만나 보고 싶었다.

“참, 길리아트 각하께 마법을 배우고 계신다면서요?”

“네, 엘링턴이 알려 주신 대로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갔는데 받아 주셨어요.”

“이야, 루시엘 아가 마님께선 복 받으신 겁니다.”

“그런가요?”

루시엘의 눈이 댕그래졌다. 엘링턴은 길리아트를 존경하고 있었기에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길리아트 각하는 아무나 제자로 들이지 않기로 유명하십니다. 황성의 마도사로 제안받으신 적도 있었지만 안 가셨는데, 지금도 황성에서는 황태자 전하의 마법 스승으로 계속 거론되고 있으시다네요.”

엘링턴의 말에 루시엘은 의문점이 생겼다.

가만, 벨슈타인 공작가가 황성과 가까웠던 적이 있었던 건가? 하지만 황태자는 벨슈타인을 적폐처럼 여겼는데…… 황제 폐하와는 사이가 원만했던 걸까?

“정말요?”

“예, 황제 폐하는 길리아트 각하를 신임하시는 편이었죠.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원치 않으셨답니다.”

“……황태자 전하라면.”

“네, 레이놀드 황태자 전하지요.”

레이놀드 황태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루시엘은 속이 뒤틀리고,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벨슈타인을 몰락하게 만들고, 자신을 벼랑 끝까지 내몰았던 바로 그 괴물.

루시엘은 저절로 바르르 입술을 앙다물었다.

‘언젠가는 황태자를 다시 만날 날도 오겠지?’

루시엘의 안색이 안 좋아진 걸 눈치챈 엘링턴이 다정하게 물었다.

“혹시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 게 아닙니까?”

“괜찮아요, 조금 고단해서 그런 거 같아요.”

“이런. 오늘은 푹 쉬시는 게 좋겠는데요. 따끈한 우유를 준비해 달라고 로즈에게 말할 테니 낮잠 좀 주무세요.”

“할 게 많아요. 마법 수업 과제도 해야 하고.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귀족분들도 많아서.”

루시엘의 말에 엘링턴이 단호하게 말했다.

“……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나 만나 주지 마세요. 공작성에 출입하는 사람은 모두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이지만 혹시 아가 마님께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아가 마님은 공작가의 귀하디귀한 분이시니까요. 루시엘 아가 마님을 곤란하게 하는 이가 있다면, 저나 공작 각하께 꼭 말씀해 주시고요.”

“아직 그런 일은 없었지만, 생긴다면 그렇게 할게요.”

어느새 루시엘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준 엘링턴은 아이를 향해 빙긋 웃었다.

“의욕이 충만하신 건 좋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입니다.”

이내 로즈가 따뜻한 우유를 가져왔다. 엘링턴이 아까 눈짓으로 전달한 모양이었다.

“자아. 따끈한 우유를 드시면 낮잠이 잘 오실 겁니다. 제가 동생들 재울 때 늘 쓰는 방법이거든요.”

“앗, 정말요? 엘링턴은 부잣집 외동아들같이 생겼어요.”

“전혀 아니에요. 동생이 밑으로 넷이나 있답니다. 놀랍죠? 그래서 더 열심히 살게 되었고요.”

엘링턴은 루시엘에게 우유를 먹이곤, 컵을 받아 내고 능숙하게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기까지 했다. 루시엘의 입가에 우유 수염이 동그랗게 났던 터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루시엘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엘링턴.”

“예?”

“언젠가 제가 보답할 기회를 주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아가 마님이 계신 것 자체가 공작성에는 보답입니다.”

뒤돌아 나가기 전 엘링턴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루시엘은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땐 사탕보다 더 반짝거리는 보석을 줄게요.’

루시엘은 엘링턴이나 벨슈타인의 사람들을 위해서 보석을 만드는 건 어쩐지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 사람들은 나에게 보석보다도 더 귀한 사랑을 나눠 주니까.’

그들이 주는 건 금화나 보석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루시엘이 이전 생에서 받아 보지 못했던 것. 이렇게 한꺼번에 받으려고 그렇게 힘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과분한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다.

우유를 먹어서일까. 사르륵 잠이 올 것만 같았다. 루시엘은 매일 잠들기 전 기도했다.

지금 벨슈타인에서 지내는 생활이 꿈이라면 절대로 깨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이다.

* * *

전날 푹 잤기 때문일까. 루시엘은 아침부터 기운이 퐁퐁 샘솟았다.

‘다음 수업 시간까지는 이제 고작 삼 일밖에 남지 않았어. 어서 해야 돼.’

마음이 급해지니 발이 동동 굴러졌다. 때마침 방으로 들어오던 베시에게 말했다.

“오늘은 바빠서 그냥 밥 안 먹을래.”

“안 돼요. 자라나는 어린이는 잘 먹어야 해요. 로즈, 어서 아가 마님 식사 가져와.”

로즈가 가져다준 아침 식사는 폭신폭신한 에그 스크램블과 베이컨, 튀긴 감자, 신선한 양상추 샐러드, 버터를 바른 호밀빵이었다.

밥을 먹지 않겠다던 루시엘은 막상 음식이 차려지자 양상추 한 장 남기지 않고, 야무지게 식사를 마쳤다.

“오늘도 너무 맛있어. 행복이 여기로 모여드는 것 같아.”

루시엘이 입안을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맛있게 드셔 주시니 좋은걸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요리들이었지만,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맛이었다.

오늘은 베시가 골라 준 간편한 의상을 골라 입었다. 하얀색 셔츠와 발목이 보이는 바지였다.

승마복처럼 보이기도 하는 옷이었는데 루시엘은 치렁치렁 늘어진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베시, 나 머리 묶어 줘.”

“음…… 오늘은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해 드릴까요? 포니테일로 묶을까요?”

“응. 포니테일이 제일 편해.”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시가 은제 머리빗으로 루시엘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살살 빗겨 주었다. 루시엘은 베시가 머리를 빗겨 줄 때면, 기분이 좋았다. 약간 졸음이 오는 것처럼 나른하기도 하고.

푸른색 리본으로 매듭을 짓자, 완성이었다. 그러나 곁에서 보던 로즈가 말을 보탰다.

“이건 목검 연습을 하시는 의상인걸. 아냐, 마법사는 로브를 입어야 해요.”

“로즈, 지금 그럴 시간이…….”

그러나 로즈가 가져온 앙증맞은 로브를 본 순간 루시엘은 마음이 사르르 녹고 말았다.

남색 로브는 카라와 모자 끝에 별이 달려 있어서 무척 귀여웠다.

진짜 꼬마 마법사나 마녀가 입을 법한 옷이었다.

“옷이 사람을 만든대요, 아가 마님.”

로즈의 기분 좋은 응원을 받으며 나선 루시엘은 장서관부터 향했다.

‘마법 주문식을 알아내야 해.’

『원소 마법 기초 편』이라는 책을 찾아낸 루시엘은 장서관지기를 불러 책을 손에 넣었다.

지팡이에 저장된 마법을 알아내려면.

‘아이스 계열과 파이어 계열에 해당되는 기초 마법은 전부 적어 가는 게 좋겠어.’

루시엘은 아이스 볼트와 파이어 볼트를 포함해서, 기초 마법을 빠짐없이 종이에 메모했다. 둘 다 합치니 열 가지도 넘었다. 이제 이 마법들의 주문식도 전부 알아내야 했다.

아쉽게도 이 책에는 적혀 있지 않아서 마법 주문식에 대한 책을 찾아 하나하나, 식을 완성했다.

“……드디어 다 알아냈어.”

루시엘은 곧장 수련장으로 가 붉은 지팡이를 먼저 꺼내 들었다.

“파이어 볼트.”

루시엘은 허수아비를 노려보며 마법을 발동시켜 보았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을 거듭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여러 마법을 돌아가면서 시도해 알아낸 정답은.

“파이어(Fire)!”

화르륵!

불씨 자체를 소환하는 파이어 마법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푸른 지팡이에 저장된 마법이었다.

푸른색이 뜻하는 속성은 둘이었다. 아이스(Ice) 또는 워터(Water).

“아이스 애로우(Ice arrow)!”

그러나 알아 온 얼음과 물 속성의 마법을 전부 사용해도 발동이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뭘까.

루시엘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물은 주변 환경에 의해 변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액체, 고체, 기체가 되기도 하고…….

그 순간 루시엘의 머릿속을 스쳤다. 간혹 호수 위에 잔뜩 낀 안개 역시 물로 인해 발생된 것이다.

“앗. 그래! 안개가 있었어. 구름도 있고.”

해답을 찾은 루시엘은 미리 알아 온 마법식에 조금씩 대입해 보면서, 주문식을 찾아냈다.

노트를 세 장이나 쓴 후에야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포그(Fog)!”

푸른색 지팡이가 빛나며, 마법이 발동했다. 루시엘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자욱한 하얀 안개가 생겨났다.

“됐다.”

루시엘은 뿌듯함에 중얼거렸다.

장서관에 들러 마법들을 전부 알아 오지 않았더라면, 몇 번 헛걸음을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보다 시간도 훨씬 걸렸을 터. 이제 남은 건 발동하는 법만 조금 연습하면 되었다.

루시엘은 신이 나서 마법을 연습했다. 해결하고 나니 재밌었다.

* * *

“루시엘은 남다른 마력을 타고났지. 저렇게 순도 높고 맑은 마력은 처음이다.”

수련장에서 열심히 마법을 연습 중인 루시엘이 테라스 너머로 언뜻 보였다.

“마법에도 자질이 있습니까?”

“그건 더 지켜봐야겠지만 확실히 습득 속도가 빨라. 어쩌면 네 아들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될지도 모르겠군. 핫핫하.”

길리아트가 뒤돌아 루이비드에게 말했다.

“뛰어난 마법사라. 루시엘이 왜 그렇게 강해지려고 하는 건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오르비아 백작이 평소에 어떤 자인지 좀 알아봤습니다.”

루이비드는 오르비아 백작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죽기 전까지 아이의 언니를 가둔 채 학대했고, 루시엘에게도 같은 짓을 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루시엘은 자신이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당했다고 생각하고, 힘을 키우려는 것 같습니다.”

루이비드의 이야기를 들은 길리아트 역시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저 어린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우드득. 손등에 핏줄이 일어났다.

“천벌을 받을 놈이로군. 아이들을 학대하다니……! 어떻게 할 생각이냐? 당장 내 손으로 가서 이놈을!”

“살려 둘 가치도 없는 자입니다만, 루시엘에게 넌지시 물어는 봐야겠습니다.”

루이비드의 핏빛 눈동자가 루시엘에게 닿았다.

“아버진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알았다. 그 분야는 네가 전문이니. 혹 필요한 일이 있으면 요청해라.”

“아…… 한 가지 필요한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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