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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34)화 (34/282)

<34화>

“……이잉.”

따듯한 말에 루시엘은 찡해져 코가 빨갛게 되었다. 애교 섞인 소리를 들은 베시가 쿡 웃었다.

처음으로 아기처럼 반응해 버렸다.

“맞아요. 그렇게 하시면 돼요. 하지만 자주 하시면 안 되겠는걸요. 제 심장이 남아나질 않으니까.”

“베시도 차암.”

루시엘은 민망하고 부끄러워져서 볼이 다 빨개지고 말았다. 베시가 입혀 준 양털 망토에 달린 귀 달린 모자를 푹 뒤집어썼다. 숨을 데가 거기밖에 없었다.

“아 참, 언제까지 저나 로즈에게 존대하실 거예요? 우리 이제 많이 친해졌잖아요?”

“그치만…….”

그러고 보니 루시엘은 벨슈타인 공작가의 사용인들에겐 전부 존대를 하고 있었다.

“하대해 주세요. 약속이에요. 아가 마님이랑 가까워지고 싶으니까요.”

여전히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겨우 루시엘의 허락을 받아 낸 베시가 활짝 웃었다. 루시엘은 점점 더 벨슈타인의 사람들이 좋아질 것 같았다.

키제프와의 계약 결혼이 이루어졌으니 이 행복을 좀 더 즐겨도 되겠지?

‘내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불현듯 공작이 스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루시엘, 며느리 말고 내 딸이 되는 건 어떠냐?’

믿기진 않지만 공작님께서 그런 말씀도 해 주셨다. 정말로 이 집 딸이 된다면…… 어떨까?

할아버지는 진짜 할아버지가 되는 거고, 레오니는 내 동생이 되고. 공녀가 되어서 벨슈타인가에서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다.

달콤한 상상이었다.

루시엘은 그날 밤 벨슈타인가의 공녀가 되는 꿈을 꾸었다. 정말로 행복한 꿈이었다.

* * *

“루시엘.”

다음 날, 약속한 것도 순번이 있는 것도 아닌 사람이 불쑥 찾아왔다.

“시아빠!”

“듣기 좋군. 푹 쉬었느냐?”

“네, 어제 드디어 마법 지팡이를 처음 썼어요. 물론 지팡이 덕분이지만, 제가 마법을 하다니 너무 신기해요.”

“잘하고 있군. 더 많은 걸 하게 될 거다.”

잔뜩 흥분해서 조잘거리는 루시엘에게 칭찬해 준 공작이 에바와 시종을 불러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빨간 리본으로 매듭지어진 순백의 상자였는데, 엄청나게 컸다.

“……?”

루시엘의 머리 위로 물음표와 호기심이 둥둥 떠다녔다. 상자가 거의 루시엘의 키만큼이나 커다랬기 때문이었다.

“수도에서 지나가던 길에 장난감 상점에 들렀다. 여자아이는 이런 걸 좋아한다더군.”

루시엘의 반응이 몹시 궁금하다는 걸 반증하듯 공작의 몸이 루시엘 쪽으로 쏠려 있었지만 시선과 말투만은 무심하게 툭 던졌다.

정말 지나가다 작은 걸 사 온 듯했다. 공작의 그런 태도에 뒤에 서 있던 에바가 슬쩍 미소 지었다.

그 장난감 상점은 지나가던 길에 결코 들를 수 없는 곳이었다.

유명한 마법사이자 장난감 장인 제르다가 한정 시즌에만 오픈하는 수수께끼 같은 상점으로 예약을 하는 데에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그만큼 뛰어난 가치를 가진 고가의 장난감이었기에 수많은 귀족 아이들의 로망이었다.

“이리 오세요, 아가 마님.”

에바가 루시엘에게 손짓하곤 리본을 직접 풀어 보라며 손에 쥐여 주었다.

루시엘이 제 키만 한 상자 앞으로 가 리본을 스르륵 잡아당겼다.

분홍색 꽃가루가 펑, 하고 터지더니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는 근사한 장난감 궁전이 들어 있었다.

장난감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섬세하게 꾸며진 궁전이었다. 정원과 연회 홀, 식당, 공주의 옷방과 침실까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안의 가구들을 직접 움직이며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제일 인기가 많은 프린세스 래빗 시리즈의 궁전이에요.”

에바가 설명을 덧붙이며, 토끼 얼굴에 깜찍한 드레스를 입은 토끼 공주와 국왕, 왕비, 아가 토끼, 왕자까지 인형 여러 마리를 나란히 쭉 세워 놓았다.

“너무 귀여워요.”

루시엘이 공주 토끼 인형을 화장대 앞에 세워 놓으며 말했다.

보고만 있어도 포슬포슬한 웃음이 날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인형들이었다.

“마법이 걸려 있어서 성의 지붕을 한 번 돌리면 사계절 풍경이 바뀌면서 프린세스 래빗의 인형극이 시작된답니다. 두 번 돌리면 멈춰요.”

설명을 들을수록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어른이 봐도 신기한 장난감이었다. 루시엘은 하얀 래빗 성 주변을 돌면서 홀린 듯 감상하다가 문득 레오니 생각이 났다.

“레오니랑 함께 구경해야겠어요. 시아빠, 매번 좋은 선물 주셔서 감사…… 어라.”

그러나 공작은 이미 조용히 방을 나간 후였다. 에바가 대신 대답했다.

“레오니 도련님께서는 마법 해적선을 선물받고, 한창 놀고 계세요.”

“아……. 선물이 마음에 든다고 편지를 드려야겠어요.”

“주인님께서는 이미 아가 마님의 미소를 보고 만족한 얼굴이셨어요.”

“정말요?”

“네. 장난감을 직접 고르시면서 무척 행복한 얼굴이셨고요. 사실 예전에는 제게 모든 것을 맡기는 분이셨는데 말이에요.”

에바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아가 마님께서 오신 후로 달라지셨어요. 그러니 재밌고 행복하게 갖고 노시는 게 주인님께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거랍니다. 아셨지요?”

“네. 그럴게요.”

이렇게 고급스러운 장난감을 가져 본 건 처음이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공작의 마음이 기뻐서 루시엘은 종종 래빗성을 지켜보면서 흐뭇함을 느꼈다.

그 후로도 가신들뿐 아니라, 귀부인과 그 자제들까지도 루시엘을 찾아오는 바람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무래도 루시엘의 이야기가 영지에 소문이 제대로 난 모양이었다.

“로즈, 손님이 또 있어?”

“네, 이번엔 부관님이에요.”

이제는 로즈와도 말을 편하게 하게 된 루시엘은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궁금했다.

과연 이브나크의 상황은 어떤지, 그 유리공예 장인을 찾았는지도 말이다.

“엘링턴. 어서 오세요.”

엘링턴이 순번이 적힌 종이를 흔들면서 루시엘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 마님, 뵙기가 어려워지셨습니다.”

“그간 서로 일이 좀 많았죠?”

루시엘이 헤헤, 하고 자그만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키제프 도련님과는 잘 만나셨는지요?”

“……네? 넷.”

“두 분이 혼인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어디에도 가시면 안 됩니다. 우리 키제프 도련님, 잘생겼죠?”

엘링턴이 루시엘을 놀리듯이 친근함과 애정을 담아 말했다.

“네, 공자는 공작님을 참 많이 닮았어요.”

“그렇지요. 처음 키제프 도련님이 태어나셨을 때는 작은 루이라고, 마님께서 부르시곤 했습니다.”

“작은 루이?”

“아…… 공작 각하의 성함이 루이비드이시고, 애칭은 루이였거든요. 외모도 그렇고 예민한 성격도 그렇고 키제프 도련님은 영락없이 작은 루이셨습니다.”

엘링턴의 말에 루시엘도 풋 하고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워낙 낯을 가리셔서 가까워지기 어렵지만, 속은 말랑한 분입니다.”

말랑한 건 전혀 모르겠던데.

키제프를 떠올리던 루시엘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왠지 고독하고 지쳐 보였어요.”

“도련님은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분이신데, 그런 곳에 있으니 많이 힘드실 겁니다.”

엘링턴 역시 키제프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지 맞장구를 쳤다. 그의 녹색 눈동자도 약간 흐려졌다.

루시엘은 사뭇 궁금한 얼굴로 화제를 전환했다.

“이브나크 시찰은 어떻게 됐나요? 제가 알려 드린 장인은 찾았어요?”

루시엘의 말에 엘링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아가 마님께서 알려 주신 정보로 찾은 유리공예 장인은 총 세 명이더군요.”

듣고 있던 루시엘이 자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브나크 출신의 하멜이라는 성을 쓰고, 유리공예 기술자인 사람이 셋이라고요?”

이브나크처럼 작은 마을에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세 명이나 될 리는 없고.

“세 사람은 형제인가 보네요.”

“예. 하멜 형제의 유리 공방으로 유명하더군요. 그들 중 장남을 찾으신 거겠지요?”

“아……그는 몇 살로 보이던가요?”

“30대 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아닌 다른 형제일 거예요.”

이전 생에서 루시엘이 만났던 장인은 지금 20대 청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장남은 아니었다.

잠시 눈동자를 도록 굴리면서 생각을 마친 루시엘이 말했다.

“그럼 그들을 모두 만날 수 있을까요?”

“이브나크에 남아 있는 하멜 씨는 장남이고, 남은 두 동생은 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고 합니다.”

‘유리공예는 저기 북부 이브나크의 하멜가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유리관을 만들라 이르겠습니다.’

장인을 데려온 황제의 보좌관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기술을 공유하고 있을 테니, 장남이라도 만나 보는 게 이득일 것이다.

“그럼 그라도 만나게 해 주세요.”

루시엘의 말에 엘링턴은 잠시 고민하다가 제안했다.

“돌아오길 기다리셨다가 세 명을 한 번에 만나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엘링턴의 의견에 루시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우선은 한 명만 만나도 괜찮아요. 유리공예는 전통적인 가업이잖아요. 그들의 아버지는 형제들 모두에게 유리공예 기술을 전수해 줬을 거예요.”

루시엘의 추측에 엘링턴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그럼 각하에게 허락을 받아서 그를 공작성으로 부르겠습니다.”

“그게 좋겠어요. 이브나크의 다른 유리 공방은 어땠어요?”

루시엘의 물음에 엘링턴의 표정이 흐려졌다.

“대부분 문을 닫고, 다른 일에 종사 중이더군요. 일단 마을에 남아 있는 유리공예 기술자는 십여 명 정도, 현재 열려 있는 공방은 총 세 군데였고요.”

“그렇군요.”

예상한 바였지만 씁쓸한 일이었다. 엘링턴이 재차 말을 이었다.

“유리공예를 활발하게 이끌어 내기엔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아 참, 아가 마님.”

그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코트에서 붉은색의 작은 벨벳 주머니를 꺼냈다.

“네?”

“하멜 씨가 이 장식품을 아가 마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앗, 제게 이걸요?”

루시엘은 엘링턴이 내민 자그만 유리 장식품을 받아 보았다. 투명한 푸른색 유리로 만든 아기 새였다.

‘이건…….’

과거 보았던 자신의 유리관보단 덜했지만 아름답고 정교한 유리공예품이었다.

일이 잘 풀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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