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어떻게 된 거지?’
이건 마치 그 느낌과 비슷했다.
처음 루시엘이 보석의 힘을 각성했을 때의 느낌.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키제프를 만난 후 생긴 변화인 거 같아.’
키제프와 마주쳤을 때 심장이 울리듯 두근거렸었다.
과거의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각성이 한층 가까워진 듯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각성 전에 마법을 더 배워야 하는데.
그래야 훗날 보석을 만들게 되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데 로즈가 들어와 대기자 명단을 건네주었다.
“이것 좀 보세요. 아가 마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이렇게나…….”
약혼 소식이 알려진 뒤로, 이제 다들 루시엘을 아가 마님으로 불러 주었다.
마음이 급해진 루시엘은 로즈가 건네주는 대기자 명단을 보고 놀랐지만, 역시 가장 먼저 길리아트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 죄송해요. 할아버지께 급히 가 봐야 해요.”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아, 그럼 단장을 해 드릴게요.”
베시의 말에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급해요!”
“아가 마님, 잠시면 되는데.”
하늘색 파자마 차림으로 총총 달려가는 루시엘을 베시가 불렀지만, 아이는 이미 저만치 달려갔다.
“아가 마님께 무슨 일이 생기신 걸까?”
로즈가 살금 다가오더니, 베시에게 정말 모르겠냐며 살풋 웃었다.
“베시, 보면 모르겠니? 키제프 도련님을 만나고 오셔서 그런 거야. 두 분의 첫 만남이 있었을 거잖아. 아아, 너무 사랑스러운 부부야!”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아냐, 이건 분명해! 사랑에 빠지신 거야.”
로즈가 손을 맞잡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녀는 요즘 정원사와 연애를 시작하더니,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이는 중이었다.
베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루시엘 아가 마님은 아직 사랑을 아시기엔 한참 어리신데.
길리아트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루시엘은 숨을 헥헥, 몰아쉬었다.
“할아버지!”
“……루시엘? 수도에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더 낮잠 자지 않고는 왜 벌써 일어난 게냐?”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빨리 마법을 배워야 해요.”
“루시엘,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저도 어서 마법을 잘하고 싶어서요.”
“……혹시 일어나자마자 달려온 게냐?”
“네.”
아이의 잠옷 차림을 본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대견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마법을 배우고 싶었으면…….”
그는 옷장에서 가벼운 하늘색 숄을 꺼내 왔다.
“자, 우선 이거라도 두르고 있으렴.”
갑작스런 요청이었지만 길리아트도 내심 기다리고 있었기에 못 이기는 척 숄만 둘러 주고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좋다, 루시엘. 그럼 마나 단련부터 시작하자.”
어느새 방 안 가득히 마나 방울을 만든 루시엘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투명한 마나 방울을 바라보던 길리아트가 감탄했다.
아무리 보아도 순수한 마력이었다. 루시엘이 마법을 발현하게 되는 그날이 그로서도 무척 기대가 되었다.
“마법은 응축시킨 마나를 소모해, 자연의 힘과 결합해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자연의 힘이요?”
“이 세상을 이루는 물과 불, 흙, 바람 같은 것들이지. 이 네 가지 원소가 대표적이란다. 물론 속성이 없는 마법도 있단다.”
루시엘은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는 경청했다. 이따금 내용을 필기하기도 했다.
길리아트가 빙긋 웃으면서 단숨에 손 위에 환한 빛을 밝혔다. 아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높은 서클의 마법사가 되면 이런 단순한 마법은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동할 수 있단다.”
“대단해요.”
“정신을 집중해 마력을 끌어모은 상태에서 마법 주문식을 정확하게 머릿속으로 외우고, 끌어모은 마력을 마법 지팡이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지. 시동어를 외치거나, 마법진을 그리기도 한단다.”
‘어라, 이거. 어쩐지 과거에 보석을 만들 때와 비슷해!’
루시엘은 마법에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길리아트가 실습용으로 평범한 지팡이 하나를 루시엘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받으렴.”
“네.”
아무 모양 없는 막대기였지만 간단한 볼트 마법이 저장되어 있어서 수식을 떠올리고, 마력을 끌어모으면 쉽게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마법 실습만을 거치고, 자신이 정말 마법을 쉽게 발현하는 줄 알고 착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지팡이를 갖게 되는 그 순간부터가 진짜였다.
루시엘은 벌써부터 자신의 지팡이로 강한 마법을 하는 상상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잘 해낼 거야. 난 강해질 거니까.’
강해지겠다는 목표에 한결 다가간 것 같아 기뻤다.
“좋아. 그럼 밖으로 나가자. 수련장으로.”
길리아트가 안내한 수련장에는 볏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인형이 하나 있었다. 공중에 인형을 매달아 놓기도 했다.
여기라면 마음껏 마법을 써도 좋을 것 같았다.
“자, 마나를 끌어모아 집중한 채로 아까 알려 준 주문식을 머릿속으로 외우렴. 그리고 그 마나를 지팡이로 모으는 거란다.”
“네!”
“마지막으로 ‘매직 볼트(Magic bolt)’의 시동어까지 빠르게 외면 마법이 발동한다. 할 수 있겠니?”
“네.”
루시엘은 그가 알려 준 대로 차분히 진행했다.
슈우웃.
루시엘은 입술을 앙다문 채 마력을 끌어모으는 일에 집중했다. 마력을 잔뜩 모아서일까. 심장이 더욱 떨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가 루시엘의 자그만 심장을 쉼 없이 두드리는 기분……. 루시엘은 동시에 마법 주문식을 외우고 손안의 지팡이로 마력을 흘려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처음이라 어색해 자꾸 손을 움직였더니 이어졌던 마력이 툭툭 끊어졌다.
‘아, 움직이면 안 되는구나.’
이번에는 움직이지 말고, 시동어까지 해 보자.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조급하지 않게 마법을 발동할 수 있도록,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잠자코 지켜봐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매직 볼트.”
루시엘의 마력을 머금은 지팡이 끝에서 작은 빛 덩어리가 팟! 하고 생성되었다.
이번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 보셨어요?”
루시엘은 신기해서 소리 질렀다. 길리아트가 말했다.
“성공했구나, 루시엘. 시작치곤 제법 잘했다. 기본 요령은 가르쳐 주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연습뿐이구나. 그리고 그 지팡이에 담긴 것은 진짜 네가 발현시킨 마법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렴.”
그렇게 말하면서 길리아트는 과제를 내주었다.
“다음 시간까지 매직 볼트를 비롯해서 다른 두 가지 마법까지 발동시키는 법을 익혀 오도록 해라.”
“네, 할아버지.”
길리아트는 색이 다른 지팡이 두 개를 더 주었다. 푸른색과 붉은색 나무 지팡이였다.
“네.”
하지만 발동을 위한 주문식을 알려 주진 않았다. 아마도 루시엘이 직접 알아내 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지팡이 색을 보아하니, 아이스 볼트(Ice bolt)와 파이어 볼트(Fire bolt)일 것 같았다.
매직 볼트의 주문식에서 활용하면 될 테니까, 그렇게 어렵지 않은 과제였다. 루시엘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는 걸 보면서 길리아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진도를 빨리 따라오는군. 하지만 과제도 잘 풀어 올 수 있을지 궁금한걸.’
“그럼 다음 시간에 보자꾸나, 루시엘. 아, 그러고 보니 간식 먹을 시간이구나?”
“아니에요, 오늘은 간식 대신 연습할래요.”
“알았다. 성에서 보자.”
“네!”
길리아트에게 인사하면서도 루시엘은 과제 생각뿐이었다. 아이스 볼트와 파이어 볼트라면 무난한 답이 되겠지만, 왠지 너무 쉽게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음 수업은 사흘 뒤야.’
일단 매직 볼트부터 완벽하게 발동시킨 후, 과제를 완성하기로 했다. 루시엘은 홀로 수련장에 남아서 연습을 계속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거듭했을까.
백 번도 넘게 반복하고 나니, 다리에 힘도 풀리고 숨도 가빠 왔다. 넘치던 마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지팡이 끝에서 매직 볼트가 쏘아지더니 따다닥, 하고 허수아비에 명중했다.
“힘들다.”
허수아비를 맞춰 오라는 과제는 내주지 않으셨지만, 기왕이면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못 할 것 같았다. 마력도 다 소진되었고, 배도 고팠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쉬던 루시엘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챙겨 온 겉옷을 루시엘에게 둘러 주는 베시였다.
“큰 주인님께서 알려 주셔서 걱정이 되어 왔어요. 얇은 파자마 차림으로 나가셨잖아요. 춥지는 않으셨어요?”
염려 가득한 얼굴에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을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굴렀을 베시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했다.
파자마 차림으로 쏘다녀 본 적이 없었던 루시엘로서는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이었다.
그녀가 둘러 준 가벼운 양털 망토가 몽글몽글 따듯했다. 방금 전까지 힘들기만 했는데, 어느새 그녀의 심장으로 모여들던 마력은 물이 차오르듯 다시 회복되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고개를 살랑 저었다.
“할아버지가 숄을 빌려주셔서 안 추웠어요. 오히려 땀까지 흘릴 정도로 더웠는걸요. 보세요.”
루시엘은 제 이마를 가리켰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땀은 거의 말라 가고 있었다. 베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땀 흘리신 후에 바람이 불어서 감기 걸리실지도 몰라요. 우리 아가 마님, 아프시면 안 된다고요.”
“이 정도로는 안 아파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걱정한 걸 알아주시네요?”
“응. 베시는 꼭 엄마 같아요.”
루시엘이 무심코 던진 말에 베시가 환하게 웃으면서 꼭 안아 주었다. 베시는 루시엘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아직 한참 엄마, 아빠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릴 아기이신데 의젓하고 어여쁜 것도 그렇고, 작게 걱정하는 것조차 고마워하시는 것도 그랬다.
분명 백작가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이나 사랑을 받지 못해 그러신 것이리라.
그래서 지금 공작가에서 받으시는 사랑도 부족해 보였다.
“아가 마님.”
“네?”
“엄마가 필요하시면 엄마가 되어 드리고, 언니가 필요하시면 언니가 되어 드릴게요. 저는 아가 마님이 더 아이답게 자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