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기숙사 방 침대에 걸터앉은 키제프는 어쩐지 루시엘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진홍 눈을 가진 하얗고 자그만 은발 소녀.
투명한 목소리와 작은 몸짓, 눈이 마주치면 보스스 짓는 눈웃음. 세상에 천사가 존재한다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게다가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 아이와 시선을 처음 마주쳤을 때의 그 눈빛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마치 날 아는 듯 묘한 눈빛이었어. 꼭 만나길 기다린 사람처럼.’
이상한 애였어.
솜뭉치 같은 여자아이의 투명한 목소리와 파드닥거리는 작은 몸짓, 눈이 마주치면 보스스 웃어 주는 상냥한 눈웃음.
절로 눈길이 가는 예쁜 아이였다.
어쨌든 계약을 받아들였으니, 이제 그 아이도 안전할 것이다. 계약상의 약혼을 마쳤고, 결혼까지 온전히 하면 더 신경 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남처럼 지내면 된다. 그 애가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
아니, 그래야만 했다. 루시엘이 자신의 비밀을 눈치채지 않게.
검은 실이 팽팽해졌다.
스르륵.
길게 드리워진 키제프의 그림자에서 키 큰 흑발의 소년이 쑤욱 튀어나왔다.
「어울리지 않게 웬 고민이야?」
사신 레이븐.
이 녀석과 함께 계약한 그 순간부터였다.
키제프는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레이븐의 뒤를 이어 사신이 되고 말 테니까.
사신이 되면 죽을 수 없다. 사신의 의무를 이행해 줄 대리자, 새로운 후임자를 찾아 계약으로 묶어 모든 것을 넘겨줄 때까지. 그건 영원한 덫이자 굴레였다.
레이븐은 죽기 위해서 자신과 계약한 것이었다.
오래전 키제프는 처음으로 사귄 친구를 잃었다. 친구의 장례식에서 레이븐을 처음 만났다. 그때 레이븐은 키제프와 눈이 마주치자 말했다.
‘넌 보아서는 안 되는 걸 보게 되어 버렸구나.’
그때부터였다. 키제프의 눈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밤이든 낮이든 유령에 시달렸고, 하인들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것도 극도로 꺼릴 정도로 폐쇄적인 성격이 되었다.
그때 레이븐이 아니었더라면 키제프는 계속 유령을 보다가 정말로 미쳐 버렸을지도 몰랐다.
레이븐이 키제프에게 끔찍한 미래를 보여 주며 계약을 제안했을 때, 어린 키제프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심약해진 키제프는 자신만이 벨슈타인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신의 힘이 필요했다.
잠시 회상에 젖었던 키제프가 멍하니 대답이 없자 레이븐의 황금빛 눈이 가로로 길쭉해졌다.
「낮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킁킁, 레이븐이 코를 벌름거리더니 늘 퀭하기만 하던 눈이 빛났다.
「이 신선한 마력 냄새는 뭐야? 너 누구 만났어?」
“아버지 만났어.”
「거짓말. 이렇게 맑고 신선한 마력은 처음 맡아 봐.」
“쓸데없는 소리 마.”
그리 말하면서도 키제프가 제 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제게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살핀 레이븐이 쿡 웃었다.
「마력 냄샌 아무나 못 맡아. 솔직히 말해, 누굴 만난 거지? 날 속이느니 차라리 귀신을 속이라고.」
“아버지가 사냥이라도 다녀오셨겠지. 난 아냐.”
키제프는 계속 둘러댔다.
사신은 일반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레이븐이 어떤 장난을 칠지 몰랐다.
언젠가는 루시엘을 알게 되겠지만 레이븐이 최대한 늦게 인식하길 바랐다. 루시엘과는 자주 마주칠 일도 없을 테고.
레이븐은 평소엔 사신의 업무를 위해 돌아다니거나, 키제프의 그림자 안에서 숨어 지냈다.
그와 이어진 검은 실을 차단해 버리면 제아무리 레이븐이라고 해도, 그림자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것도 오래갈 수는 없을 테지만.
키제프는 창문을 열어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막시무스가 키제프의 창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전교생에게 창피를 당한 일로 이를 갈고 있을 터였다.
「저 자식 정도는 내 힘을 좀 개방하면 식은 죽 먹기 아냐?」
“안 돼.”
레이븐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늘 말은 저런 식으로 해도 그는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자였다. 아무나 데려갈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이용해 누군가를 죽일 수 있었다.
「재미없는 자식…….」
따분하단 얼굴로 중얼거리던 레이븐이 다시 스르륵 키제프의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키제프에게 레이븐은 필요악이었다. 레이븐의 힘을 빌려, 어둠의 힘을 쓸 수 있었다.
키제프는 별안간 몇 년 전 보았던 그 기억을 떠올렸다.
무너진 장벽, 불에 타는 영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가족들.
레이븐이 보여 준 미래는 실로 끔찍했다. 그 미래를 막기 위해서 키제프는 그와 계약했다.
그날 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벨슈타인을 지키겠다고 어린 키제프는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이 사신이 되는 결말이라고 해도…….
* * *
백작가에 멈춰 선 마차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내렸다. 사랑하는 연인이 왔지만 백작은 좀처럼 웃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목구멍에 종이를 구겨 넣은 것처럼 속이 꽉 막혀 있었다.
루시엘, 그 계집애가 달아난 곳은 벨슈타인 공작가였다. 제국 제일의 부유한 가문이자, 동시에 악마 같은 힘을 가졌다고 소문난 가문.
그 계집애가 어떻게 벨슈타인 같은 거대 가문을 잡았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내 사랑! 내가 무슨 이야기를 가져왔게요?”
마젤란은 자신이 도착했는데도 신경 쓰지 않는 백작에게 먼저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당분간 머리가 복잡하니 다음에 오라니까 말을 안 듣는군.”
“내가 지금 뭘 듣고 왔는지 알면 이런 취급 안 할걸요?”
마젤란이 부채질하면서 불만 섞인 투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오르비아 백작의 잿빛 눈이가늘어졌다.
정말 무언가 있긴 있는 듯하기에 백작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흘렸다.
“내가 요즘 부인에게 잠깐 소홀했지. 그래, 뭘 듣기는 했어?”
“물론이죠. 마리에게 들었는데, 벨슈타인 공작이 수도 의류점에 어린 여자아이를 며느리라며 데리고 나타났다던데요. 혹시 그 아이가 루시엘 아니에요?”
“뭐? 그 이야기를 왜 지금! 루시엘은 지금 어디 있지? 그럼 수도에?”
흥분해서 핏대를 잔뜩 세우던 오르비아 백작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눈동자를 굴려 댔다. 그를 보며 마젤란이 고개를 저었다.
“벌써 며칠 전의 일이에요.”
“제길……!”
탁! 우당탕!
애꿎은 응접실 테이블을 엎어 화풀이를 한 백작이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짚으면서 생각했다.
보낸 자들이 전부 행방불명되었다. 벨슈타인 공작성을 뚫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루시엘이 밖에 있을 때를 노려서 납치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젤란은 한두 번 겪는 게 아니라는 듯, 시종에게 조용히 치우라는 시늉을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요?”
“마젤란, 공작과 루시엘이 다녀갔다는 그 의류점이 어디지?”
“……그, 글쎄요. 무슨 어린이 드레스를 파는 의류점이라던데요. 아! 게다가 더 놀라운 건 루시엘에게 그 의류점을 통째로 주었대요. 근데 그 애가 어떻게 그런 귀한 집의 며느리가 된 거예요?”
“고 맹랑한 계집애가 내 딸이라고 속였나 보더군.”
“어머, 영악한 면이 있네. 그럼 이제 당신도 벨슈타인 공작가와 사돈지간이 되는 거네요?”
“쓸데없는 소리. 루시엘은 내 거야! 결혼 따윈 절대 허락 못 하지, 암!”
“……왜요, 벨슈타인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부자인데.”
저 여자는 루시엘이 보석을 만들 힘이 있다는 걸 모르니, 저런 바보 같은 소리만 외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얼마나 부자라고.”
“소문에는 웬만한 왕국보다도 더 부자래요. 가문 소유의 광산도 있다고 하던데요!”
광산이라.
루시엘이 앞으로 만들어 낼 보석보다도 더 귀하고 많을까?
잠시 계산이 어렵기는 했으나, 어차피 공작이 제게 광산을 통째로 내어주지는 않을 터이니 루시엘 하나가 더 비싼 값어치가 있었다.
게다가 광산은 채굴하는 데 많은 인력이 들지만 달랑 여자애 한 명을 키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옆에서 조잘대는 마젤란에게 백작이 다가가 손을 잡으면서 뱀처럼 교활한 눈을 빛냈다.
“마젤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 어린이 의류점에 대해 알아봐 줘.”
“……마리도 그건 잘 모르던데요.”
“내 딸이 소유한 곳이라는데 가 봐야지. 그리고 비앙카의 드레스를 맞출 때가 되었지?”
“좋아요, 한번 알아보죠!”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 마젤란의 입이 벌어졌다.
“기왕이면 빠른 게 좋겠지.”
“아이, 알았어요. 차 한 잔만 마시고 가죠. 성질도 급하셔라.”
마젤란을 내보낸 후, 오르비아 백작은 의류점을 알아내면 어떻게 할까 궁리했다. 그런데 창밖으로 우편 마차가 도착하더니 이윽고 집사가 서신 한 통을 받아 왔다.
검은 드래곤 인장.
벨슈타인 공작가에서 도착한 통보, 아니 협박에 가까운 서신이었다.
「오르비아 백작.
그대의 딸 루시엘은 백작가의 방치와 학대에서 벗어나 우리 벨슈타인 공작가의 사람이 되기로 협의하였다.
두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도 아직 혼인을 승인하는 서명을 보내지 않았더군.
아, 그대가 보낸 깜짝 선물도 잘 전해 받았다.
이는 공작가를 향한 명백한 적의가 보이는바, 삼 일 뒤 내 부관과 호위가 서명을 받으러 갈 것이다.
그날이 마지막 기회다.」
“빌어먹을 벨슈타인! 누구 맘대로! 어림도 없지.”
아드득, 이를 갈던 백작은 부들부들 떨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루시엘을 못 데려가!”
* * *
공작성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고단함 때문이었는지 다음 날도 내내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같이 놀아 달라는 레오니, 보고드릴 것이 있다는 엘링턴, 정무 회의에 참석한 뒤로 자꾸 선물들 들고 찾아오는 가신들까지 루시엘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 아가 마님을 만나시려면 순번을 정하고 기다리셔야 해요!”
로즈가 수첩에 대기자 명단을 적고, 새로운 사람이 올 때면 이렇게 말해야 했다.
두근, 두근.
그러나 루시엘에게는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제 처음 시작된 심장의 공명이 잦아들었다가도 재차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