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31)화 (31/282)

<31화>

훈훈한 광경이 아닌가. 누구보다 무정한 제 아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작은 행동마저도 기꺼웠다.

“아닙니다. 영애가 너무 작아서 잃어버릴까 봐…….”

키제프가 얼른 손을 놓고는 말했다.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들의 변명에 공작이 쿡 웃었다.

“루시엘이 작고 사랑스럽긴 하지.”

“…….”

사람을 눈앞에 두고 그런 칭찬을 하시니, 낯이 영 간지러워서 루시엘은 가만히 있었다.

“키제프, 아카데미 생활은 어떠냐?”

“아무 문제 없습니다.”

조금 전 들은 담당 교수의 말과는 정반대의 대답이었다.

“그런가.”

“예.”

“네 수준이 높으니, 굳이 맞춰 다닐 필요는 없다고 본다.”

키제프는 의외다 싶어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아카데미에 왔었고, 졸업할 때까지는 어떤 일이 있든 얌전히 있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 말은 귀를 의심할 만큼, 이해심 깊은 말이었다.

‘담당 교수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으신 건가?’

아카데미 생활이 지루하긴 했지만, 수업에 방해가 되거나 위화감을 조성한 적은 없는데.

키제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아카데미 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아버지가 아시면, 곤란해진다.

“아뇨, 적당히 흥미롭습니다.”

공작과 루시엘이 동시에 거짓말하는 키제프를 빤히 바라보았다.

‘끝까지 괜찮은 척을 하려는 건가.’

“알겠다. 루시엘, 우린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던 루시엘이 공작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키제프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그가 말하지 않으면 자신이 계약 결혼에 대해 꺼내려는 순간.

공작이 루시엘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다.”

“…….”

“……루시엘, 며느리 말고 내 딸이 되는 건 어떠냐?”

“네?”

뜻밖의 제안에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곁에 있던 키제프도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 하면 벨슈타인을 떠나지 않아도 되겠지.”

“……아버지.”

“……공작님.”

당황한 두 사람이 동시에 그를 불렀다.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루시엘은 조금 기뻤다. 딸로 삼고 싶을 만큼, 공작님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거니까…….

“농담이실 테지만 기뻐요.”

“진담인데. 키제프가 결혼은 싫다니 남매로 지내면 될 게 아니냐.”

참으로 단순한 논리에 키제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면모였다.

“저희 결혼, 하기로 했습니다.”

“음?”

공작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둘을 보았다.

키제프가 루시엘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정말 좋아서 하는 줄 알겠다 싶어서 루시엘이 재빨리 덧붙였다.

“네, 사실이에요. 서류상 결혼을 유지하고 제가 성인이 되면 이혼하기로 했어요. 이제 공자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루시엘이 못 박듯 이야기했다.

“마음이 바뀌었나?”

“네. 영애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것뿐이다?”

“예.”

무뚝뚝한 아들의 대답에 공작은 루시엘의 귀여움을 몰라보는 그가 답답하긴 했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알았다.”

공작은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은 루시엘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함께 지내게 되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싶었다.

루이비드는 준비해 온 서류를 품에서 꺼냈다.

“여기 서명해라. 루시엘이 아직 10살이 되지 않아 우선 약혼부터군.”

약혼 계약서에는 루시엘의 이름이 이미 적혀 있었다. 키제프는 지체하지 않고 유려한 필체로 서명을 남겼다.

나란히 적힌 이름을 보며, 공작이 말했다.

“드디어 너희 두 사람이 연을 맺게 되었군. 오르비아 백작의 승인 건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아버지는 쉽게 허락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라. 루시엘.”

공작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결혼식은 돌아오는 루시엘이 열 살 되는 생일에 진행할까 하는데. 생일이 언제냐, 루시엘?”

공작의 물음에 루시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확한 생일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유월이에요.”

“유월 언제?”

“여름이 시작될 때에요.”

“…….”

공작의 안색이 잠시 굳어졌다. 키제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부자는 동시에 주먹을 쥐었다.

공작이 말했다.

“루시엘, 이제 네 생일은 6월 1일이다. 그러니 결혼식도 그날이 될 테고.”

“……네에.”

왠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공작의 말에 루시엘은 고개를 살랑 끄덕였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앗, 네.”

공작이 루시엘에게 손을 뻗었다. 루시엘은 키제프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공작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심히 가십시오.”

“연락하지.”

“예.”

루시엘이 키제프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지내.”

“너도.”

인사는 그게 다였다.

한편 루시엘은 키제프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역시 여러모로 마음이 걸렸다.

막시무스와의 일도 그렇고, 아카데미의 분위기를 보니 혼자 남을 그가 얼마나 힘들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키제프를 귀찮게 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나라는 걸 밝히지 말고 키제프의 비밀 친구가 되어 주는 거야.’

* * *

루시엘은 아카데미의 기숙사 건물 어딘가로 날아드는 새를 유심히 보더니 돌아오는 길 마차 안에서 공작에게 말했다.

“시아빠.”

“응?”

아카데미에서는 줄곧 공작님이었지만, 약혼도 성사되었으니 시아빠로 호칭을 바꾸었다. 루시엘이 방긋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전서구 한 마리만 사 주세요.”

루시엘의 귀여운 웃음 공격에 심장을 폭행당한 공작은 당장 마차를 전서구를 파는 상점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골라 봐.”

“네.”

루시엘은 조심스럽게 상점을 둘러보았다. 상점에는 풀어놓은 새들이 제법 많았다. 모두 고도의 훈련을 거친 모양인지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종류도 무척 많았다. 평범한 비둘기에서 부엉이, 종달새, 휘파람새, 까마귀, 박쥐, 심지어 아주 커다란 매까지 있었다.

“꼬마 아가씨께서 쓰실 전서구라면, 이 작은 친구가 어울릴 겁니다. 솔방울 부엉이라는 종입니다.”

쾌활한 인상의 상점 주인이 루시엘의 어깨 위로 자그만 흰색 부엉이를 올려 주었다. 솔방울 부엉이라더니, 정말 솔방울처럼 작았다.

“예뻐라.”

까만 눈이 루시엘과 마주치자 부엉이가 부엉부엉 하고 울었다.

“아가씨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군요.”

“다행이에요. 시아빠, 너무 귀엽죠?”

“꼭 자기 같은 걸 골랐군.”

루시엘이 부엉이를 보여 주자 공작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부엉이를 구입하고 전문 사육사에게 자그만 피리를 하나 받았다.

“이건 이 아이가 좋아하는 소리를 담은 피리입니다. 전서구를 보내실 분과 위치, 아가씨께서 살고 계신 곳을 여기 적어 주시지요.”

“네.”

루시엘이 종이에 폴리체 아카데미와 키제프의 이름, 그리고 벨슈타인 공작성을 적었다. 종이를 받아 든 사육사가 말했다.

“이제 가 보셔도 좋습니다. 저희가 부엉이에게 위치를 각인시킨 후, 보내 드릴 겁니다. 열흘 후에도 부엉이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 피리를 세 번 불어 주세요.”

“감사합니다.”

상점을 나서던 공작이 중얼거렸다.

“전서구라니 번거롭군. 통신구를 주문해 줄까?”

“……아, 아니에요!”

통신구는 배 한 척과 맞먹는 무척 귀하고 비싼 물건이라 웬만한 귀족들도 소유하기 힘들었다.

“전서구면 충분해요.”

루시엘은 빈 새장을 안고 말했다. 공작은 아이에게서 새장을 뺏어 들고는 함께 마차에 올랐다.

‘키제프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야겠어. 외롭지 않도록 힘이 되어 줄 거야.’

루시엘은 그렇게 다짐하며, 곰 인형을 다시 끌어안자마자 새근거리며 잠들었다.

덕분에 공작은 에바에게 통신구로 연락해 시내에 예약해 둔 고급 레스토랑을 취소해야 했지만 루시엘이 푹 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대신 마차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제르다의 마법 장난감 상점이라는 화려한 간판이 붙은 곳이었다. 공작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 * *

한편 영지에 남은 길리아트는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왠지 적적하군.”

베르가 자작을 불러 체스를 두고, 골동품 창고를 정리했다.

분주히 움직였는데도 하루가 느리게 가는 것만 같았다.

이 시간이면 루시엘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고 한가로운 오후의 티타임을 즐길 때였다.

‘그 아이가 고작 하루 없었는데 이렇게 허전하다니.’

길리아트는 웃음이 나왔다. 키제프와의 만남은 어떻게 되었을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어린 키제프는 몇 년 전부턴가 부쩍 얼굴에 그늘이 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게만은 살갑게 굴던 녀석이었는데 서운할 만큼 사이가 소원해진 터였다.

이제는 수도 아르테로 아카데미까지 다니게 되어서 방학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어야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내심 손자와 교류하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던 길리아트로서는 퍽 아쉬운 일이었다. 녀석과 즐겨 하던 체스도, 함께 마법으로 호흡을 맞추던 일도 모두 추억이 되어 버렸다.

레오니도 귀여운 손주였지만 아직 한참 어렸기에 아이를 보다 보면 간혹 진이 빠지긴 하였다.

길리아트는 책상 한구석에 놓인 꽃병의 꽃을 포근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루시엘이 성에 온 뒤로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

루시엘을 위해서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면서 자신도 마법을 처음 배우던 그 어린 날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냉정하기만 하던 루이비드도, 고집불통이던 레오니도, 구름 안에 폭 감싸진 듯 한결 말랑말랑해졌다.

늘 까다로운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까 긴장해 얼어 있던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얼굴에 여유로움이 머금어져 있었다.

공작성 곳곳에는 루시엘의 흔적이 하나둘 늘어만 갔다. 양말 놀이방과 보드라운 인형들, 꽃과 편지들. 주방에는 언제나 싱싱한 딸기가 배송되었고 생크림 케이크와 쿠키가 만들어졌다.

세상 모든 달콤하고 예쁜 것은 전부 닮은 루시엘.

“이것이야말로 루시엘 효과로군.”

길리아트가 빙그레 웃으며 제 아내 이벨린을 떠올렸다. 그녀가 활동기를 보내고 있었다면 루시엘을 누구보다 귀여워했을 텐데.

아쉽기도 하고 이벨린이 그립기도 했다. 길리아트는 오랜만에 반지에 저장된 서탑의 이동포탈을 열었다.

잠들어 있는 이벨린의 모습만 보고 돌아오는 것도 벌써 수년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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