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30)화 (30/282)

<30화>

“뭐, 뭐야!”

‘다른 기대는 없었으면 한다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니잖아.’

물론 별 뜻 없이 루시엘을 어린 동생 보듯 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왠지 그게 더 약이 올랐다.

고개를 돌리고 앞만 보며 걷는 키제프의 옆얼굴에 루시엘의 자그만 심장이 물색없이 뛰었다.

“키제프, 성격 안 좋구나.”

루시엘이 불만 섞인 말투로 양 볼을 부풀렸다. 키제프가 루시엘을 힐끗 돌아보았다. 아까보다 강한 시선.

이내 그가 픽 웃었다.

‘성격 안 좋다는 말에 정곡이 찔렸을까?’

“병아리처럼 그만 삐악대고, 가자.”

“…….”

루시엘은 왜 다들 자신에게 병아리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키제프가 고작 네 살 많은 주제에 어른인 척 굴고 있다는 건 잘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응접실로 돌아가는데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키제프와 루시엘을 힐끔거렸다.

수군거리는 것도 아니고 노골적인 불쾌한 시선이었다. 단정하지 않은 옷차림도 그렇고, 좀 불량해 보였다.

‘뭐지?’

여학생들은 호의적인 데 반해, 남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키제프를 보는 따가운 시선들, 그건 자신과는 다른 자를 향한 차별 섞인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건 루시엘도 잘 아는 종류의 시선이기도 했다.

크리스털 페어리를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보다 아닌 사람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정확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루시엘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건너편에 있던 남학생 패거리들이 앞으로 다가왔다.

그중 낯이 좀 익은 남자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긴 잿빛 머리카락, 뱀처럼 가느다란 초록 눈, 또래보다 월등하게 큰 덩치.

막시무스 폰 카빌.

회귀 전 루시엘의 전 남편이었던 카빌 후작가의 차기 가주이자 술과 도박에 미친 망나니였다.

루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자그만 주먹을 발끈 쥐었다.

‘딸꾹, 도박판에서 다 잃어도 난 걱정 없지. 예쁜아, 이리 와! 너도 한잔 쭈욱 들이켜 봐.’

‘얌전히 굴면 산책이라도 시켜 줄게.’

다른 이들이 보석 자체에 집착했다면 막시무스는 루시엘을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처럼 여기며 괴롭혔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덩치가 더 작긴 했지만, 루시엘은 어두운 과거가 떠올라 온몸이 떨려 왔다.

‘……키제프와 같은 아카데미였어?’

제 아버지보다는 다혈질에 단순한 성격이라 다루기는 쉬웠지만 반대로 자신을 괴롭힐 때는 답이 없었다.

“어이, 악마 자식!”

막시무스가 키제프에게 시비를 걸며 말했다. 기분 나쁘게 코가 막힌 목소리로 킥킥거리는 것까지도 과거와 똑같았다.

키제프가 무시한 채 계속해서 걸어가자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막시무스가 아이들을 시켜 자그만 돌을 던지도록 한 거였다. 스쳐 지나갔지만, 다음 돌이 다시 날아왔다.

하마터면 그 돌에 루시엘은 머리를 맞을 뻔했다. 다행히 스쳐 가는 정도에 그쳤지만 놀란 탓에 앗 하고 소리가 튀어나왔다. 순간 아이를 감싸면서 키제프가 뒤돌았다.

“무슨 짓이야.”

미간이 일그러지면서 그의 주변으로 어두운 기운이 훅 끼쳐 왔다.

스스슷!

이윽고 시커먼 어둠의 구체가 키제프의 한 손에 생성되었다. 다크 볼트(Dark bolt)였다.

“야,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왜, 왜 이래…….”

노마라는 아이가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캐스팅이나 마법진도 없이 저렇게 빨리?’

퍼엇! 퍼퍼벗!

“으아아!”

순식간에 아이들 앞으로 날아간 검은 구체가 바닥을 때렸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다른 아이들이 덤벼들거나, 마법을 구현할 틈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뒤로 물러났다.

막시무스는 아이들을 보면서 뇌까렸다.

“한심한 자식들.”

막시무스가 씨근덕거리면서 등에 차고 있던 검집으로 키제프가 있는 곳을 휙 가리켰다.

“……그깟 마법에 내가 겁먹을까 봐? 어디 덤벼 봐.”

스르릉!

막시무스가 목검이 아닌 진검을 꺼내 들었다.

“기분 나쁜 흑마법은 내가 처단해 주지.”

막시무스가 검을 들고는 으아아, 소리치면서 달려들었다.

파아앗!

키제프는 공격을 피하고는 검을 마법으로 튕겨 버렸다.

검이 날아가자 막시무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지더니, 키제프의 멱살을 잡고는 힘으로 밀어붙였다.

키제프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

“키제프!”

발을 동동 구르던 루시엘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법을 할 줄 알았더라면 그에게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그러나 마나 방울로 막시무스의 시야를 가리거나 시간을 버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시엘은 멀찍이 숨어 자리를 잡고는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막시무스와 키제프는 엎치락뒤치락하며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시무스의 우락부락한 덩치를 마른 몸의 키제프가 당해 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막시무스는 키제프의 배 위에 올라타며 실소했다.

“이게, 씨! 너, 내가 만만해 보이냐?”

“…….”

막시무스가 눈을 부라렸다. 키제프가 입매를 말아 올리며,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시해?”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막시무스가 주먹을 들려고 할 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푸른 방울들이 막시무스의 시야를 가렸다.

“뭐, 뭐야. 이건!”

키제프는 그 틈에 막시무스를 넘어뜨렸다. 그러곤 입술을 달싹거렸다.

“플라이(Fly)!”

단숨에 막시무스의 몸이 공중에 띄워졌다.

“어? 어어?! 이게 뭐야! 젠장.”

막시무스는 허공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볼썽사납게 허우적대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 빌어먹을 놈! 나, 난 고소공포증이 있단 말이다! 가만 안 둬!”

조금씩 상승하는 몸에 기겁한 막시무스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이리저리 날아다닌 막시무스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막시무스를 처리한 후, 키제프는 주변을 돌아보며 루시엘을 찾았다. 루시엘이 뽀르르 아기 새처럼 달려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아까 마나 방울, 네가 한 거지?”

“응.”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키제프가 말했다.

“도움이 됐어.”

그게 없었더라면 플라이를 발동할 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마나를 제법 단련한 모양이었다.

“마나를 단련했어?”

“응. 그치만 마법은 할 줄 몰라. 아직은…….”

“그렇군.”

루시엘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키제프는 어떻게 저렇게 강한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지?’

막시무스가 당하고 있는 꼴을 보니 쌤통이다 싶어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키제프의 손가락 지시에 따라 막시무스의 몸은 둥실둥실 계속 비행했고, 전교생들이 건물 옆에 둥둥 떠 있는 막시무스의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다.

루시엘은 어서 자신도 빨리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막시무스를 따돌린 채, 키제프와 함께 공작에게로 돌아가던 중에 루시엘이 말했다.

“키제프, 나 사실 아까 돌 안 맞았는데…….”

키제프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말했다.

“알아.”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도 그 애들을 공격했어?

“……맞았으면 그 정도로 안 끝냈어.”

루시엘은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해 주는 키제프에게 따뜻함을 느꼈다.

“근데…… 너.”

“응?”

“내가 오빠 아닌가?”

“오빠 맞아.”

“그럼 오빠라고 불러.”

“……으응.”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앞으로 부를 일이 있을까?

계약을 마치면 이제 자주 볼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주변에 막시무스가 있는 걸 보니 여전히 걱정되긴 했다. 물론 키제프가 월등히 강하긴 했지만.

겉으로 강하다고 마음까지 강한 건 아니니까…….

루시엘은 그를 지켜 주리라 다짐하며 다시 이어진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응접실까지는 금방이었다.

* * *

“후원 건은 비서를 통해 마무리하겠소. 그리고 키제프의 담당 교수들을 만나고 싶은데.”

“아, 예에! 알겠습니다. 매번 이렇게…… 아카데미의 발전을 위해 애써 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담당 교수가 대기 중입니다. 바로 들여보내지요.”

교장은 기분 좋게 나가면서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담당 교수더러 안으로 들어가라 지시했다.

담당 교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루시엘을 딸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흐뭇해 있던 공작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말았다.

“아드님, 키제프 공자는 너무 우수해서 모든 학업 과정을 미리 꿰뚫고 있을 정도입니다. 특히 어둠 계열 마법과 검술에 관해서는…… 아카데미의 교수들보다도 뛰어납니다. 죄송합니다만, 공자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카데미에서 더는 가르칠 것이 없다라.”

공작이 눈썹을 까딱 치켜올렸다.

“……아드님은 천재의 범주를 벗어났습니다.”

키제프는 어릴 적부터 그랬다. 너무 뛰어나서 선생을 달아나게 한 적도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아이라고 다들 같은 말을 했다.

제국 제일의 아카데미인 폴리체에서도 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사실 그가 아카데미에서 가장 기대한 것은 키제프의 사회적 경험이었다. 제아무리 폐쇄적인 벨슈타인이라지만 결국 사람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되어 있었다.

키제프는 과거 극도로 다른 사람을 꺼려 해 사용인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싫어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카데미에 보냈던 것인데.

“키제프의 교우 관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있소?”

“…….”

그 물음에 담당 교수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늘 혼자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녀석답군. 솔직한 발언 고마웠소.”

말을 마친 담당 교수는 더욱 어깨가 축 늘어졌다. 키제프의 아카데미 생활을 안 좋게 말하면 후원이 끊겨 교장에게 한 소리를 들을까 봐, 그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약속한 후원은 그대로 진행할 거요. 키제프의 학업은 당분간 유지하지.”

그 말은 즉, 이후에는 언제든 그만둘 수도 있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공작은 교장실을 나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혹여 교장이 따라올까 봐 보폭이 빨라졌다. 이래서 웬만한 건들은 엘링턴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내심 엘링턴의 부재가 주는 피로감이 크게 느껴졌다. 바로 통신구를 꺼내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응접실으로 가던 도중, 나란히 손을 잡고 돌아오는 키제프와 루시엘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요 녀석들 봐라.’

아까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는데 지금은 전혀 딴판이 되었다.

“내가 없는 동안 사이가 부쩍 좋아진 것 같은데.”

공작이 두 아이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입꼬릴 말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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