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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9)화 (29/282)

<29화>

루시엘의 말을 곰곰이 듣던 키제프는 그렇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이혼을 할 사이라면, 자신이 짊어지게 될 사신과의 계약 같은 것도 그녀에게는 비밀로 하면 되니까.

다만 제국에서 성인이 되는 나이는 열여덟이었는데 눈앞의 여자아이는 무척이나 어려 보였다.

“올해 몇 살이지? 7살은 됐나?”

“곧 10살이 되는 9살이야.”

루시엘의 말을 듣고 잠시 놀라긴 했으나 키제프가 말을 이었다.

“그럼 앞으로 8년 동안 결혼을 유지하자는 건가?”

“……응.”

루시엘이 고개를 떨구며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8년, 무척이나 긴 세월이긴 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기에는 더더욱 긴 시간.

하지만 한편으론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는 시간이자 강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키제프가 한 발짝 다가서서 루시엘의 고개를 손으로 들어 눈을 맞추었다.

“넌 왜 그렇게 결혼에 집착하는 거지? 조그만 애가.”

장난기가 슬쩍 섞인 말에 루시엘이 그를 똑바로 보며 살짝 발끈해 외쳤다.

“곧 열 살이라니까. 조그맣지 않아.”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의 포동포동한 볼살이 둥그렇게 부풀어 귀여웠다.

“예상보단 더 먹었지만, 여전히 결혼하기엔 어려. 부모님은?”

키제프의 물음에 루시엘은 이제는 어깨를 늘어뜨리지 않았다.

“……집 나왔어. 내 아버지는 공작님처럼 멋진 어른이 아니거든.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받을 곳이 필요해.”

아버지가 멋진 어른이 아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는 많은 뜻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부모가 보호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보호한단 거지?’

키제프의 고운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 아이가 자신과 결혼하려는 가장 큰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결혼을 하려는 거였군.”

“응.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으니까.”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으로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자그만 여자아이.

연민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거절하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때 자그만 손이 키제프의 옷깃을 붙잡았다.

“부탁이야. 나랑 결혼하면 다른 여자애들이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공작성에서도 가능한 네 눈에 띄지 않게 노력할게! 그러니까 계약상으로만 결혼해 줘.”

“…….”

루시엘의 간절함이 담긴 반짝이는 눈이 키제프를 향했다.

아이의 눈은 마치 도와 달라 말하는 덫에 걸린 짐승 같았다. 상처받은 연약하고 어린 짐승.

‘살려 줘, 살고 싶어.’

저 투명하고 맑은 눈을 보고 있으려니, 심장 한구석이 일렁거렸다.

저렇게 어린 아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키제프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루시엘에게 통보하듯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잠깐만 여기 있어.”

“응? 아니,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알았어.”

아직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조차 못했다. 루시엘이 은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매달렸나 봐. 휴우, 청혼하기 어렵다.”

소파에 풀썩 앉아서 작은 몸을 푹 기대던 루시엘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인생이 걸린 일인데 쉬운 일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실망하긴 이르다. 길리아트 할아버지도, 시아빠의 승낙도 받아 냈잖아.

“……왜 이렇게 안 오지?”

무료한 얼굴로 키제프를 기다리던 루시엘은 어느덧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났다는 걸 깨닫고는 소파에서 폴짝 내려왔다.

그러곤 방을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새 어디 갔을까?’

“웃, 드레스가 너무 길어.”

종종종.

하얀 드레스를 들어 올린 채 바지런히 건물의 복도를 다니면서 틈틈이 살폈다.

조금만 더 다리가 길었으면, 조금만 더 키도 체구도 컸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의 자신은 너무나도 작았다.

* * *

키제프는 아카데미 건물 복도 난간에 기대 멍하니 바람을 쐬고 있었다. 한 층 아래에 자신을 찾는 루시엘이 내려다보였다.

핑크색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두 눈, 보드랍게 흐르는 은발.

그런 외모를 가진 여자아이는 처음 보았다. 마치 요정이나 천사가 지녔을 법한 외모였다.

사랑스러움을 한데 모아 놓은 듯 솜사탕처럼 달콤한 애였다.

분명 가문에서 사랑을 잔뜩 받고 자랐을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아이가 한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주인을 찾는 강아지처럼 이쪽저쪽 둘러보던 루시엘을 보며, 슬슬 아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키제프!”

루시엘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제 이름을 부르며 뽈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지나가던 여학생 둘이 아이의 어깨를 톡톡 치며 물었다.

“어머, 귀여워라. 얘, 엄마를 잃어버렸니?”

“사람을 찾고 있어요. 키제프 폰 벨슈타인.”

“키제프라면…… 아까 본 것 같은데.”

“여동생이야?”

“……아뇨.”

“그럼?”

루시엘은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 말했다.

“……약혼자랑 비슷해요.”

“뭐어?”

“마, 말도 안 돼. 키제프에게 이렇게 어린 약혼자가 있었다고?”

“안 어린데.”

루시엘의 해맑은 말에 키제프는 이마를 짚은 채 다가왔다.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그야 사실을…… 웁.”

“얜 사촌 여동생이야.”

키제프의 손이 루시엘의 입을 막고는, 황당해하는 여학생들에게 그리 둘러댔다. 여학생들이 역시 그렇구나, 저희들끼리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하려고 했다,

“으어웁?(거짓말?)”

“쉿. 제발 여기선 아무 말 하지 말아 주라.”

루시엘이 자그만 고개를 주억이자, 그제야 입을 막았던 손을 풀어 주었다. 키제프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면서 말했다.

“손 줘.”

“응?”

“……네가 너무 작아서 잃어버릴 것 같으니까.”

루시엘이 도톰한 단풍잎처럼 조그만 손을 내밀었다. 키제프는 루시엘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키제프의 보폭이 너무 커서 루시엘은 따라가기 버거웠다.

“잠깐만. 조, 조금만 천천히 가!”

키제프가 잠시 걸음을 멈추곤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안고 가는 게 더 빠를지도 몰랐다.

“…….”

“……왜?”

“아무것도 아니야.”

키제프가 고개를 젓고는 천천히 루시엘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줄였다.

얼마 후 조용히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수련장 옆에 있는 풀밭 쉼터가 비어 있었다. 키제프는 루시엘의 손을 놓아주곤, 쉼터 벤치에 걸터앉았다. 루시엘 쪽을 힐끔 바라보자, 그녀는 넝쿨처럼 피어 있는 나팔꽃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키제프가 말했다.

“아까 했던 말 마저 하자.”

“……응.”

앉아 있는 그와 서 있는 루시엘의 시선이 그제야 적당히 비슷해져서 바라보기가 수월했다.

키제프는 루시엘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딸기 시럽처럼 맑고 투명한 분홍빛 눈망울, 은빛 속눈썹이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루시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쉬이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키제프는 아이에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겨 먼저 물었다.

“……지금 벨슈타인에선 어때?”

“응?”

“잘 지내고 있냐는 뜻이야.”

루시엘은 그제야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너무너무 잘 지내고 있어. 나에게 이렇게까지 잘해 주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다정한 분들이야.”

그리 대답하는 루시엘의 표정이 정말로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벨슈타인에서의 생활이 몹시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다정하다고?”

“응, 길리아트 할아버지도, 공작님도 다정하셔.”

“아버진 그런 성격이 아닐 텐데.”

그건 좀 의외지만.

“그렇군. 그럼 됐다.”

키제프의 손이 루시엘의 보드라운 은발을 한 번 쓰다듬었다. 자신도 모르게 뻗은 손에 소년도 흠칫 놀라 다시 손을 거두고는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결혼하자. 대신 서류상으로만이야.”

“뭐?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꾸었어?”

“벨슈타인에서 잘 지낸다며.”

“그, 그치만 내 조건 다 이야기 안 했는데.”

루시엘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하자, 키제프가 고개를 저었다.

“……너를 보호해 주기로 결정했어.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무언가 하지 않아도 돼.”

바람결에 흩날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에 담긴 건 진심 어린 연민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구해 주고 싶다는 눈빛.

“8년 후에 네가 성인이 되면, 각자 갈 길을 가는 것. 그걸로 끝이야.”

“…….”

“네가 원하는 대로 계약상 결혼은 유지할 테니까. 다른 기대는 없었으면 해.”

“……응. 무슨 뜻인지 알아. 조용히 있다가 널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떠날게.”

“그래.”

키제프의 뜻 모를 시선이 루시엘에게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이걸로 된 거겠지?’

루시엘은 그의 시선을 피해 잠시 벤치에 앉았다.

어렵사리 꺼내려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다시 접어 두기로 했다. 키제프와 함께 무언가를 해 보는 건 어려울 듯했다.

벨슈타인이 무너진다면 결국 카빌 후작이, 나아가 황태자가 자신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키제프와 서로 협력을 해야 하지만…….

일단 키제프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자. 그래도 결혼을 허락받은 게 어디겠어.

‘괜찮아. 성인이 되고, 더 강해지면 나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벨슈타인을 위해 움직일 수 있어.’

루시엘이 자그만 몸을 일으키며 엉덩이를 툭 털곤 그를 향해 말했다.

“이제 공작님께 데려다줘.”

키제프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래, 아버지께서 찾으실 테니.”

“응.”

돌아가는 길, 학생들이 까르르 웃는 모습에 루시엘은 문득 그들이 부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이 아카데미의 여학생들은 전부 키도 크고 예쁜 귀족 영애인 듯했다.

이런 영애들을 매일 보니 자신은 눈에도 안 찰 듯했다. 뭐, 상관은 없지만.

루시엘이 키제프의 손을 잡으면서도 혼잣말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들 엄청나게 예쁘다.”

루시엘이 하는 말을 듣던 키제프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차, 속으로 말한다는 게 그만…….’

“바보로군.”

키제프가 루시엘의 은빛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너 예뻐. 아카데미에 있는 어떤 여자애보다도 더.”

그의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루시엘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몇 년쯤 더 자라야 할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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