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심장이 쿵쿵쿵 울리기도 했고, 마력이 공명하는 것처럼 가슴이 떨려 왔다. 죽어 가던 루시엘이 그와 만난 그날처럼.
드디어 키제프를 다시 만났다.
자유로운 몸이 되어서.
키제프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루시엘은 그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이번에는 파멸을 맞이하지 않기를.
부디 행복하기를.
아직도 그를 마주하던 그 순간이 생생했다.
‘이번 생에서는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기 전에는 벨슈타인의 보호를 먼저 받아야겠지만…….
루시엘은 마치 오랜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갑고도 간절한 눈빛으로 다시금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또래보다 훌쩍 큰 키에 무심한 표정에는 다소 불편함이 섞여 있었다.
그 불편한 감정이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루시엘은 금세 알아차렸다.
핏빛 눈동자가 굴러 제게 닿았을 때, 그의 미간이 더 좁혀졌던 터였다.
‘역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공작과 함께 드레스까지 새로 샀는데 아무래도 이 외모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키제프의 미모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마족의 피를 이어서일까.
악마처럼 보는 이를 홀릴 만치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마신이 빚어 만든 듯한 또렷한 이목구비와 벌꿀처럼 진한 금발, 여자보다 흰 도자기 피부, 딸기 같은 입술. 그저 감탄만 나왔다.
키제프는 공작을 건조하게 보며 말했다.
“먼 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마치 남을 대하듯 무뚝뚝하고 냉정함이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온몸에 삐죽 가시 돋친 고슴도치처럼 제 아버지에게조차 거리를 두는 것 같아 루시엘은 안타까웠다.
늘 이런 식이었는지 공작은 다소 느른한 투였다.
“루시엘과의 결혼에 대한 네 의사를 물으러 왔다.”
“제 대답은 서신으로 이미 드렸습니다.”
키제프의 차가운 대답에서 루시엘은 이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키제프의 표정을 보니, 첫 만남은 루시엘이 생각한 것보다 더 최악인 것 같았다. 그가 결혼을 원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한 일이었다. 루시엘은 조용히 생각했다.
상처받을 일은 아니었다.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서신보다는 한번 만나 보고 결정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라지만, 정혼자가 누구인지는 파악해야지.”
공작의 말에 키제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문의 이점만 챙길 수 있다면 서면으로 결혼을 진행하는 시대였다. 그만큼 결혼이라는 제도는 가문과 가문이 서로의 득실을 따지는 거래였다.
그러나 오르비아 백작가라면……. 벨슈타인 공작가에 도대체 무엇이 득이 되는지 그로서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가문의 득실을 따지던 벨슈타인 공작 아닌가. 키제프는 아버지답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했다.
공작이 루시엘에게 손짓해 좀 더 가까이 다가오게 했다.
“루시엘, 이리 와라. 네가 지목한 정혼자 키제프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겠군.”
“네.”
루시엘은 상기된 얼굴로 키제프를 올려다보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어색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키제프는 눈앞의 조그만 어린 여자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레오니의 또래로 보일 만큼 자그만 은발의 여자아이.
눈토끼처럼 자그맣고 연약해 보이는 아이.
‘결혼보다는 육아를 해야 할 것만 같은데?’
투명할 정도로 빛나는 은발 아래, 선명한 진홍빛 눈은 보석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 신비로웠다.
그런데 이 아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했다. 애틋하면서도 반가운 눈빛이랄까? 자신을 알아보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빛나는 보석안은 어떤 사연을 품은 것 같았다.
‘오르비아 백작가라…….’
이곳 아카데미 역시 작은 귀족 사회였다. 온갖 소문이 들려왔지만, 아무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백작가의 아이.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계약 결혼을 시키려 한다니, 그는 아이가 조금 딱하다고 생각했다.
“키제프 폰 벨슈타인입니다.”
“……루시엘이에요, 벨슈타인 공자.”
루시엘이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쥐면서 인사했다. 그러곤 촉촉한 눈망울로 말했다.
“결혼은 갑작스러우실 거라고 생각해요. 공자의 마음 이해해요.”
인형이 말을 하네. 키제프는 잠시 눈을 떼지 못한 채 생각했다. 이 아이는 가문에서 충분히 자랄 때까지 보호받은 뒤에, 자신보다는 진짜 믿을 만한 남자를 만나는 게 좋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주려면 미리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더욱 차갑게 깔며 제 의사를 정확히 전달했다.
“이해해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미안하지만 저는 영애와 결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
계약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루시엘이었지만 단호한 거절에 잠시 말문이 탁 막혔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루시엘의 분홍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키제프는 아이가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울기는커녕 자그만 주먹을 그러쥐고는 테이블을 살짝 콩 하고 두드렸다.
“벨슈타인 공자!”
아이의 눈동자는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아직 조건을 들어 보시지도 않고 거절하는 건 너무해요.”
루시엘은 자그만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이내 앙다문 입술이 새끼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아이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버렸다.
“……결혼 조건을 듣는다고 해도 제 뜻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딱 잘라 말하는 키제프를 보며 루시엘의 작은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작이 말했다.
“유감이군, 루시엘. 아무리 내 아들이라지만 싫다는 결혼을 강요할 수야 없다.”
“……네, 맞는 말씀이에요.”
공작까지 그리 결론 지어 말하니,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벨슈타인 가문의 보호는 받을 수 없어. 내 살길은 내가 찾아야만 해.’
뭐든 살길은 있을 거야. 루시엘은 다른 계획을 생각하며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공작은 루시엘과 키제프를 보면서 턱가를 문지르더니 한참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엘을 이대로 놓치는 건 아쉬웠다.
‘키제프가 뜻을 굽히지 않을 건 예상했지만……. 루시엘을 보고도 저리 나오다니. 아니, 차라리 잘되었군. 남매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면 딸이 하나 생기는 것이니.’
혼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공작은 빙긋 웃었다. 때마침, 응접실로 교장이 찾아왔다.
“각하, 아까 미처 못 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좋소. 너희들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공작이 둘에게 말한 후, 교장과 함께 사라졌다.
루시엘은 이 어색함을 어떻게 참아 낼까 고민 중이었다. 힐끗 돌아본 키제프는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역시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해 보자.’
루시엘은 자신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큰 키제프와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발돋움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응접실 소파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그의 붉은 눈동자가 굴러 꼬물거리는 루시엘에게로 닿았다.
“영애? 뭐 하는…….”
“둘이 있을 때는 우리 반말할까?”
루시엘이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키제프는 열세 살이라고 들었으니, 네 살 차이였다. 루시엘이 열 살이 되면 세 살 차가 되겠지만.
키제프가 살짝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공작과 꼭 닮은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지으니, 그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살짝 웃음이 났다.
“……좋을 대로.”
확실히 아까보다는 덜 차가운 눈빛으로 키제프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아.”
루시엘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눈을 크게 떴다. 긴장한 손은 하얀 드레스를 꼭 말아 쥔 채였다.
처음 만난 남자애에게 결혼을 구걸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 자존심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저기, 내가 별로 예쁘지 않아서 싫겠지만!”
“……?”
기합이 들어간 루시엘은 다소 목소리가 크게 나와서 더욱 민망해졌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키제프의 시선도 더해져서 두 배는 더 창피해져 뺨이 발갛게 물들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벨슈타인을 떠나고 싶지 않으니까.
항상 자신을 귀여워해 주시던 길리아트 할아버지, 아닌 척하면서 루시엘을 아껴 주던 공작님, 어느새 친해진 레오니, 친자매 같은 로즈와 베시, 친절한 엘링턴과 에바, 달콤한 요리를 해 주던 주방장님도 루시엘에게는 전부 소중한 일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잃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벨슈타인의 파멸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루시엘 자신만이 바꿀 수 있는 미래였다.
“……일단 더 듣지, 계속해 봐.”
루시엘의 말에 호기심 어린 눈빛이 되었지만 키제프는 관심 없는 척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말했다.
“내가 결혼 상대로 싫은 거 알겠지만, 우리는 꼭 함께해야 할 이유가 있어.”
“……싫어하지 않아.”
“뭐?”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어린아이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는 한눈에 봐도 루시엘보다는 훨씬 성숙한 소녀가 더 어울려 보였다.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가 잠시 당황해 흔들렸다. 한층 눈매가 깊어진 키제프는 제법 진지한 눈을 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봤는데 싫어할 리가 없지.”
“…….”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결혼을 원하지 않을 뿐이야.”
그 짧은 순간, 루시엘은 잠시 안도했다. 자신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그럼 성인이 될 때까지만 결혼을 유지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그때는 꼭 이혼해 줄 테니까.”
키제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성인이 될 때까지만?”
“……응. 이혼을 전제로 한 계약 결혼이야. 이게 내가 말한 조건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