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7)화 (27/282)

<27화>

페넬로페가 반문했지만 루시엘은 어른들을 보면서 차근차근 그녀의 행동을 사실대로 말했다.

“제가 옷을 고른 후 말하려는 순간, 영애가 와서 저를 밀쳐 냈어요.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고 안 좋은 눈빛으로 훑어보기도 했어요.”

루시엘의 말에 분위기가 한층 싸늘해졌다. 정확히는 공작의 표정이 냉랭해졌다.

“카빌 후작 부인. 영애의 예절 교육을 똑바로 하기 바라오. 여기 있는 루시엘은 내 며늘아기, 벨슈타인 공작가의 새아가이지. 장차 벨슈타인 공작 부인이 될 몸이란 말이지.”

“……죄, 죄송합니다. 고, 공작 각하. 아이가 철이 없어서…….”

후작 부인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어머니, 도대체 왜 그러세요?”

“페넬로페, 공작 각하께 어서 고개를 숙이렴!”

천지 분간을 못 하는 딸 때문에 후작 부인은 속이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검은 드래곤의 문장을 쓰는 가문은 제국의 두 공작가 중 하나인 벨슈타인이라고 일러주었는데.

후작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페넬로페가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공작이 저벅저벅 카빌 후작 부인과 페넬로페 앞으로 다가왔다. 페넬로페의 어깨를 잡고 곱게 방향을 살짝 틀어 주었다.

공작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페넬로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루시엘이 앞에 있다는 걸 깨닫자 분한 얼굴이 되었다.

“사과는 내 며느리에게 하지, 영애.”

공작이 싱긋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지만,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페넬로페의 입술이 비틀리듯 움직였다.

“미…… 미안해.”

“다음부턴 그러지 마.”

‘이 아이가 달라지면 좋겠지만, 그러긴 어렵겠지?’

인간의 본성은 잘 변하지 않으니까.

페넬로페가 제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서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후작 부인이 페넬로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드레스는 많으니 다른 걸 고르자꾸나.”

루시엘은 잠시 가만 서서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루시엘도 얼굴도 보지 못한 엄마가 그리웠다. 페넬로페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품에 안겨서 마음껏 응석도 부려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지켜보던 공작도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채곤 물었다.

“루시엘, 괜찮은 것이지?”

“네, 저 아무렇지 않아요.”

“부당한 일을 당하면 참지 마라. 착한 아이로 살 필요 없어. 조금 못되게 살아도 된다. 너는 지나치게 착한 아이니까……. 이젠 스스로를 존중하며 이기적으로 살도록. 그게 벨슈타인의 방식이다.”

‘스스로를 존중하며 이기적으로 산다라.’

어렵지만 참으로 마음에 드는 벨슈타인의 방식이었다.

“네, 그럴게요.”

공작이 흘긋 뒤돌아 페넬로페와 카빌 후작 부인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저 시끄러운 손님들은 그만 내쫓을까.”

루시엘이 그 말에 말갛게 웃음을 터트렸다.

“벨슈타인이 악명 높다는 건 나도 잘 아니까, 조금 보탠다고 해서 지장은 없어.”

“어, 어떻게요?”

“내가 하는 걸 잘 봐.”

공작이 귓가에 그렇게 속닥이곤 루시엘을 더욱 높게 안아 올리더니, 다른 옷을 둘러보는 페넬로페와 카빌 후작 부인을 향해 말했다.

“옷은 다른 가게에서 사는 게 좋겠소. 우리 며느리가 이 부티크의 주인인데, 카빌가에는 팔 물건이 없다는군.”

그 말을 들은 페넬로페가 자신도 부티크를 사 달라고 울어 대며 드러눕다시피 했다. 창피한 후작 부인은 그대로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그제야 사방이 조용해졌다. 루시엘이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와서 거울 앞에 섰다. 점장 마리아 부인이 감탄했다.

“아가씨 몸에 꼭 맞춘 것처럼 예쁘세요. 어쩜 이렇게 앙증맞으실까.”

루시엘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까 공작님이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줘서일까. 루시엘은 아빠가 없어도, 엄마가 없어도 하나도 불행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루시엘에게는 제 편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다.

루시엘은 보시시 웃었다.

눈처럼 뽀얗고 흰 피부를 가진 루시엘은 하얀 원피스를 입혀 놓으니 신비로운 설원에 숨어 산다는 아기 눈사슴처럼 눈부시게 사랑스러웠다. 톡 건드리면 날개가 돋아나선 어디론가 사라질 것처럼.

공작의 입가에도 어느새 소리 없이 미소가 눈처럼 내려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네?”

“내 며느리지만 몹시 귀여워.”

“…….”

“루시엘, 화가에게 초상화부터 그리러 갈까?”

공작이 뜻 모를 말들을 쏟아 내자, 루시엘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지금은 아카데미에 가야 하는 걸요.”

“그건 알고 있다.”

주접에 가까운 농담이었는데 루시엘은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건 다행이었다. 그는 어색하지 않게 씰룩이는 입술을 손으로 감추었다.

옷만 갈아입어도 휙휙 이미지가 바뀌어 전부 다 입혀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까진 없었다. 그렇지만 시내에 나온 기념으로 옷을 더 사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는 공작이었다. 무엇보다 루시엘에게는 아주 많은 옷이 필요했다.

그는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가자. 옷을 실어 가려면 마차가 몇 대 더 필요하겠군. 옷들은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실어 가지.”

옷을 몽땅 사겠다는 말에 점장과 직원들이 서로 놀란 눈빛을 주고받았다.

* * *

황립 폴리체 아카데미는 제국에서 제일가는 명문 학원이었다.

한 지방에서 소문난 천재라도 이곳에 오면 평범한 학생1이 될 수도 있을 만큼, 각지에서 몰려든 왕족이나 귀족가의 자제들로 가득했다.

그런 천재들 틈에서도 키제프는 독보적으로 뛰어난 아이였다.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두 가지 원소를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어둠 속성의 힘을 사용하는 흑마법에서 정점을 찍었다.

흑마법에 있어서는 아카데미에서, 아니 어쩌면 제국에서조차 키제프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아이들은 물론 선생들마저 그를 두려워하고 경외시했다.

‘악마의 자식.’

‘머리에 뿔이 있다던데.’

‘벨슈타인에서 살인 실습을 받았을 거야.’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뒤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수군대는 말들. 경멸 어린 시선들.

「괴물」

「죽어라!」

키제프는 개인 사물함에 붙은 낙서를 거칠게 뜯었다. 아카데미에서 그에게 말을 거는 남학생은 없었다.

막시무스라는 선배에게 찍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검술부였지만, 무지막지한 덩치로 아이들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악질이었다.

지나치리만치 아름다운 키제프의 외모에 반한 추종자와 같은 일부 여학생들만 그의 뒤를 맴돌았다.

키제프는 무감정한 얼굴로 가방을 정리한 후, 기숙사 건물로 가기 위해 나섰다.

그의 뒤를 우르르 따라다니는 십여 명의 여자아이들 기척이 느껴졌지만 내버려 두었다.

키제프의 발밑 그림자에서 스르륵 빠져나온 검은 형체가 킬킬거렸다.

「심심한데 누구 죽이고 싶은 인간 없어? 여긴 짜증 나는 놈들 천지인데 말이지.」

공허한 눈동자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키제프의 눈동자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검은 형체가 쭉 늘어나더니 인간의 형체를 갖췄다. 새카만 흑발에 퀭한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키제프의 어깨 위로 다정하게 손을 얹었다.

「안 그래?」

“시끄러워. 손 치워.”

키제프가 어깨를 털어 내듯 그의 손을 거두었다.

「귀여운 나의 계약자, 키제프.」

* * *

루시엘은 왠지 세상을 건너온 듯한 기분으로 공작의 곁에 얌전히 있었다.

같은 옷을 입은 십 대의 소년, 소녀들이 삼삼오오 교정을 지나가는 낯선 풍경. 자신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다.

정갈한 슈트 차림의 중년 남성이 공작을 환한 접대용 미소로 맞이하며 신규 기숙사 건물과 후원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아마도 공작이 아카데미에 많은 후원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장실이 있는 건물에 다다를 때까지 어른들이 대화하는 동안 루시엘은 뒤를 졸졸 따랐다.

“각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그건 잠시 후 따로 하는 게 좋겠소. 우선 키제프부터 만나고 싶은데.”

공작은 딱히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아카데미에 거액의 후원을 여러 번 했었고 교장이 이야기하는 아카데미의 신규 사업은 이름만 다르고 알맹이는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벨슈타인 공작가만큼 큰 후원을 할 수 있을 만한 가문은 제국 내에서 드물었기에, 교장은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아, 알겠습니다. 키제프 공자를 불러다 드리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교장이 곧장 다른 직원을 불러 키제프를 호출하라는 말을 전했다. 곧이어 교장의 눈이 공작의 옆에 있는 자그만 여자아이에게로 향했다.

아주 작고 어린 영애지만 눈에 별이 박힌 듯 찬란하게 빛이 났다.

“한데 공작가에 어린 영애가 계셨군요. 나중에 우리 폴리체에 보내시는 것도…….”

교장이 루시엘을 보면서 넌지시 제안했다.

“……본인이 원한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호, 그럼 오신 김에 견학이라도 해 보시는 건 어떤지요?”

“…….”

공작이 루시엘의 의사를 묻는 눈빛을 보냈다. 그는 루시엘이 원한다면 아카데미가 아니라 유학이라도 보내 줄 의사가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 지금 할아버지께 배우는 것으로도 충분해서요…….”

루시엘은 아직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키제프와 같이 다니게 된다면 또 달라지겠지만.

공작이 교장을 흘긋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가 그렇다는군.”

교장은 아이가 누군지 궁금한 기색이었지만, 딱히 묻지는 않았다.

교장실 옆에 따로 마련된 응접실에서 몇 분 기다리자 문이 달칵 열리며 한 소년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마를 덮은 금빛 머리카락, 핏빛 눈동자엔 온기라곤 없었다. 공작을 그대로 닮아 고결하고 차가운 인상. 다만 훨씬 앳되고 새침했다.

또래인데도 쉬이 말을 걸기 어려운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루시엘은 키제프를 본 순간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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