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루시엘은 꿈을 꾸었다.
꿈속의 루시엘은 포근하고 아늑한 요람 같은 곳에 들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 안겼던 언니의 품속 같았다.
폐부 깊숙이 은은한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 루시엘은 자그만 코를 벌름거렸다.
‘왠지 꽃향기가 나.’
루시엘은 그 안에서 몸을 쭉 뻗고 기지개를 켠 후, 바람이 들어오는 틈새를 발견했다.
그 사이에 자그만 손바닥을 넣고 이불처럼 부드러운 요람의 윗면을 걷어 내자, 살살 말려 올라갔다.
맑고 상큼한 공기.
촉촉한 이슬이 맺힌 잎사귀.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춤추는 꽃들.
루시엘은 자신이 꽃 요람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꽃이 커진 세상에 온 것인지, 자신이 작아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루시엘.”
다정한 목소리,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언니?”
“내 동생 루시엘.”
“언니, 어디 있어?”
“네 곁에 항상 있단다.”
“언니? 정말 언니야?!”
꿈이라도 해도 믿을 수 없었다. 꿈에서 언니를 만난 건 고작 몇 번뿐이었다.
그렇게나 그리웠는데…….
그렇게나 애타게 찾았는데.
“루시엘…….”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루시엘은 문득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일을 많이 겪어 왔다. 차라리 꿈이라고 믿고 싶을 만한 일들도, 꿈처럼 기적 같은 일들도 벌어지고 있었다.
“언니, 지금 이건 꿈…… 인 거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모든 게 꿈일지도 모른다.
불행하게 살다 죽은 과거의 삶이 진짜 현실이고 새로운 삶은 꿈일지도 몰랐다.
“루시엘, 지금 너는 꿈을 꾸고 있는 게 맞아. 하지만 네가 시간을 거슬러 사는 건 분명한 현실이란다. 결코 꿈이 아니야. 미안해, 루시엘. 미리 말하지 못한 것도…… 그냥 전부 미안해.”
언니의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루시엘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지키려 했었다. 루시엘이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언니…… 나 이제 다 알았어. 언니는 나를 지켜 주려고 했던 거. 흐끅.”
기어이 감정이 복받쳐 올라, 딸꾹질과 함께 울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곧 울음을 그치고 다짐했다.
언니가 지켜 주려고 했던 자신의 삶, 이제는 스스로 지켜 낼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삶은 살지 않아. 언니를 위해서라도.
그런 루시엘의 마음을 안다는 듯, 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루시엘은 새롭고 축복받은 삶을 살 거야. 언니가 매일 기도하고 지켜보고 있어.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만든 보석이 너를 되돌렸는지도 모르겠구나.”
언니의 말에 루시엘은 죽음의 순간을 곱씹어 보았다.
그랬다. 마지막은 자유롭게 스스로의 의지로 만든 보석.
죽음이라는 감정이 만들어 낸 최후의 보석.
‘그 보석의 힘이, 날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고?’
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루시엘, 이번 생에서는 행복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언니는 정말 기뻐. 잘 성장하고 있단다. 식물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
“맞아. 달빛 이슬 나무가 있는 정원에서 소리를 들었어.”
“그건 네가 요정의 기운이 남아 있는 영역에 다녀왔기 때문이야.”
짐작한 사실이었지만, 아직 의문스러운 건 여전했다. 거긴 마계로 통한다고도 했는데…….
“하지만 거긴 마계의 영역이었다고…….”
“둘 다 맞아. 요정과 마계의 영역은 구분이 없단다. 태초에 두 종족은 같은 신의 자식으로서 형제로 갈라진 것뿐이었거든. 숲의 낮은 요정이 밤은 마족이 지켰어. 훗날 그 숲을 인간들이 차지하고 마족과 요정을 쫓아냈고, 벨슈타인 가문이 그걸 되찾은 거야.”
“……정말?”
그런 거라면 벨슈타인과의 인연도 단순한 우연은 아니었을까?
루시엘은 어쩐지 마지막 순간 보았던 키제프의 붉은 눈을 떠올렸다. 그러나 왜 하필 그가 생각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죽음으로 이어진 인연이었던 탓일까?
“그렇다면 마족과 요정은 뿌리가 같은 거구나. 벨슈타인과 나도 다르지 않은 거야.”
“그렇단다. 사랑받고 있어서 정말로 잘됐어. 따뜻하고 강한 분들이란 게 느껴져. 루시엘, 이제 언니는 가야겠어. 너를 도와줄 수는 없지만, 항상 멀리서 지켜볼게.”
루시엘이 자그만 주먹을 쥐었다. 이번 생만큼은 누구에게도 행복을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응, 그거면 충분해. 항상 지켜봐 줘. 누구보다 행복해질게.”
“고마워, 고마워, 루시엘.”
그 말을 끝으로 루시엘은 잠에서 깨어났다. 루시엘의 말랑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눈을 떴을 때는 세 사람이 자신을 에워싼 채 놀란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뉴나, 울지 마.”
“루시엘, 악몽이라도 꾸었던 거냐?”
“…….”
루시엘이 우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손을 꼭 잡는 레오니와 걱정해 주시는 할아버지, 그리고 말없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시는 시아빠까지.
루시엘은 마음이 더없이 따스해짐을 느꼈다.
돌아온 새 삶도, 새 가족도 소중하고 감사했다. 루시엘은 그들을 향해 웃어 보이며 속으로 다짐했다.
‘이젠 내 행복을 위해 살겠어.’
* * *
요즘 루시엘의 방 창가에는 매일 종달새가 와서 지지배배 지저귀었다. 창문을 열면 내려다보이는 나무들도 살랑살랑 가지를 흔들며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루시엘은 이 평화로움이 좋았다.
“좋은 아침!”
루시엘이 아침 일찍 하는 건 역시 마나를 단련하는 일이었다. 처음엔 두 시간, 세 시간씩 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10분만 집중해도 단련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마나를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동그란 방울 모양이었지만, 이제는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었다.
머릿속에 구체화시킨 대로 마나가 스스스 움직여서 꽃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했다. 토끼와 강아지, 폴폴 나는 나비나 새가 되기도 했다.
루시엘은 새 모양의 마나를 창가로 날려 보냈다. 이내 그것은 진짜 새처럼 폴짝 나뭇가지 위로 뛰어올랐다.
마나가 원활히 운용되는 걸 확인한 루시엘은 만족스레 웃으며 마나를 톡 터트려 전부 사라지게 만들었다.
문득 루시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마법을 발현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이루는 속성 중 하나를 가지고 태어난단다.’
지난 수업 시간에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알려 주신 말이었다.
이를테면 길리아트는 나무, 레오니는 불, 루이비드는 물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세 사람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속성이라 루시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살포시 웃음이 났었다.
이처럼 보통은 한 가지 속성만을 지니고 태어나는데 특이하게도 키제프만은 어둠과 바람이라는 두 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특히 어둠은 쉽게 발현하기 어려운 성질의 속성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루시엘은 그와 마주쳐 압도적인 힘을 느꼈던 때를 기억했다.
“확실히 어둠인 거 같았어…….”
루시엘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뭘까.
따뜻한 불도 좋고,
시원한 물도 좋아.
자유로운 바람도 좋고,
나무와 꽃을 키워 내는 흙도,
심지어 어둠도 좋아할 자신이 있었다. 루시엘은 얼른 속성을 발현할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젤리 병의 뚜껑을 열었다.
‘아침 식사 전이니까 한 개만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유리병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없어. 내 젤리…….”
통통한 젤리들이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루시엘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빈 병의 달콤한 젤리 향만 맡았다.
‘우우.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
공작님, 아니 시아빠에게 가서 달라고 부탁드려야 하는 날이.
“루시엘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응? 유리병이 비었네요?”
루시엘이 세상 슬픈 얼굴로 빈 유리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본 베시가 말했다.
“네…… 다 먹었어요.”
젤리 하나 때문에 저렇게 시무룩하다니 그 모습조차 귀여워서 베시는 그만 루시엘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주인님께 어서 받으러 가요. 무척이나 기뻐하실 거예요. 어쩌면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몰라요.”
“……그, 럴까요?”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단것을 지독하게 싫어하시는 주인님께서 왜 그렇게 서랍에 쟁여 두셨겠어요.”
‘그러고 보니, 두 도련님께도 그렇게 챙겨 주신 적은 없었지, 아마…….’
베시가 조용히 웃었다.
“네, 베시 말대로 공작님께 가 볼게요. 아, 그전에 잠깐만요.”
“어차피 아침 식사도 하셔야 하니까, 천천히 준비하세요. 저는 식사를 가져올게요.”
“네!”
베시가 나가자 루시엘은 책상에 앉아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아이의 손에 맞게 만들어진 초록색 펜은 이름 모를 새의 하얀 깃털이 달려 있어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루시엘은 펜에 달린 깃털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무슨 말을 적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별안간 생각이 났는지 슥슥 쓴 다음, 분홍색 종이를 접었다.
“오늘은 꽃이 없는데 뭘 드리지?”
가진 것 중 가장 쓸모 있고 따뜻하고 예쁜 소중한 것이 뭐였더라.
루시엘은 옆방에 있는 양말 나무로 뽀르르 달려갔다. 양말 나무에는 루시엘이 신기에는 무척 커다랗고 화려한 양말이 몇 켤레 매달려 있었다.
“두 짝을 다 찾느라 혼났어.”
공작과 어울리는 은사로 눈꽃 자수가 놓인 하늘색의 폭신폭신하고 커다란 양말을 골랐다. 잠잘 때 신으면 잠이 솔솔 잘 올 것 같았다.
“이게 양말 중에서는 제일 크고 화려하니까. 발은 잘 맞으실 거 같아.”
공작이 절대 신을 리 없는 디자인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루시엘이 귀엽게 눈을 휘면서 배시시 웃었다.
무언가 통하기라도 한 것일까.
식사를 마친 루시엘이 파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묶는 동안, 열려 있던 문에 비스듬히 기댄 키 큰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루시엘.”
공작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