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날 저녁 루시엘은 로즈가 가져다준 동화책을 읽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빨간색 노트를 열었다. 그림을 그리라고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주신 것이지만 루시엘은 몰래 계획을 짜고 있었다.
결혼 실패 시, 혼자가 될 것을 대비해서 지금 벨슈타인에 지낼 때 얻거나 달성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마법은 배우고 있으니까, 달성.”
루시엘은 마법 배우기라고 적힌 항목에 줄을 쭉쭉 그었다.
자연스레 다음 항목으로 시선이 갔다.
「벨슈타인가와의 돈독한 인연 쌓기.」
벨슈타인에서 나가더라도 연이 끊어지지 않게 잘 행동해야 해.
가능하면 가장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바로 가주인 공작님. 루시엘이 혹여나 위험에 처했을 때 확실히 손을 내밀 수 있을 만큼 신뢰를, 더 나아가 애정까지 얻어야 한다.
일단 지금까지는 수월하게 쌓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그렇다면 다음은 뭘 준비해야 할까?
자금? 믿을 만한 호위? 조력자?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루시엘은 자그만 주먹을 그러쥐며, 결심했다.
“전부 하나씩 하면 돼.”
물론 가장 좋은 계획은 키제프와의 결혼을 무사히 달성해서, 벨슈타인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결국 언젠가 스스로 독립할 힘을 길러야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삶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힘을 길러야 해.’
몇 번이고 마음 깊이 되새긴 말.
루시엘은 목록의 다음 항목을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다음 날 마법 수업을 위해서 루시엘은 길리아트의 서재로 바지런히 향했다. 길리아트는가 화사한 하늘색 정장을 입고 크라바트까지 맨 채로 루시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책상에는 여러 가지 마법 서적과 지팡이가 든 상자들, 마법 주문식이 적힌 두루마리들이 가득했다.
루시엘이 앉을 소파 옆 소테이블 한편에는 수업 중간 출출할지도 모를 루시엘을 위한 쿠키와 초콜릿, 무화과, 우유가 놓여 있었다.
루시엘 역시 설레는 얼굴로 당근 가방을 맨 채 자박자박 걸어 들어왔다.
“할아버지!”
“루시엘, 어서 오렴.”
“와, 오늘 정말 근사하세요.”
“첫 수업이니 분위기를 좀 내 보았다.”
길리아트는 환하게 웃으면서 크라바트를 매만졌다.
“첫 시간은 어떤 이야기부터 들려줄까 고민했단다.”
제 키에 맞춘 작은 의자에 앉아서 벌써 쿠키 하나를 집어 먹은 루시엘이 기대에 차 말했다.
“어떤 이야기든 좋아요.”
그건 정말이었다. 어떤 것이든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것 같았으니까.
“혹시 궁금한 점이 있니?”
길리아트의 물음에 루시엘은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벨슈타인 가문은 어떻게 마법에 뛰어나게 된 거예요?”
잠시 정적이 있었다. 길리아트의 입술이 쉬이 움직이지 않자, 루시엘은 재빨리 가방에서 읽고 있던 책을 꺼냈다.
“아, 여기 책을 보니까 사람마다 발현할 수 있는 원소의 속성이 다르다고 해요. 저는 무슨 속성일…….”
눈치 빠른 루시엘이 다른 질문을 던지자, 길리아트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이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 돌릴 필요 없단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생각 중이었단다.”
“아…… 불편하신 질문인 줄 알았어요.”
“벨슈타인에 대한 깊은 이야기는 언젠가 들려줄 생각이었지.”
“…….”
“루시엘, 나를 비롯해서 우리 벨슈타인의 눈동자가 왜 붉은색인지 알고 있니?”
그러고 보니 벨슈타인 가문 사람들은 전부 핏빛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였다.
처음에는 무서운 적도 있었지만, 계속 보니 매혹적이고 고귀한 눈동자였다. 무엇보다 강렬한 힘이 느껴져서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있다고 루시엘은 생각했다.
루시엘이 고개를 젓자, 길리아트가 말을 이었다.
“붉은 눈동자는 예로부터 마족의 상징이란다.”
루시엘의 눈이 놀라움으로 왕사탕만큼 커졌다. 벨슈타인을 둘러싼 소문들이 전부 헛소문은 아니었다니.
“나의 아버지는 마족의 피가 섞여 있었단다. 마족은 본래 인간보다 마법에 능하지.”
그에 준하는 종족에는 요정도 있었지만, 길리아트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벨슈타인 공작령은 과거에 마계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던 곳이었단다. 지금은 봉인해 두었지만 아직도 그 차원의 틈이 벌어져 있지. 하여 영지 구석구석에는 지난번 달빛 이슬 나무가 있던 정원처럼, 과거 마계의 영역이었던 곳들과 통할 수 있는 장소가 흩어져 있단다.”
“알수록 신기한 곳이에요. 벨슈타인은.”
“마족의 피가 섞였다는데 무섭지 않니?”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만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동질감이 느껴졌다.
‘마족의 피가 섞였다고 해도 벨슈타인은 무섭지도, 낯설지도 않아.’
어쩌면 그래서 처음부터 벨슈타인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벨슈타인의 모두가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데요. 그중에서도 할아버지가 가장이요.”
루시엘이 입술을 쫑긋하며 웃었다. 길리아트가 말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할까? 우선 이론부터 하자꾸나.”
“좋아요!”
루시엘의 눈이 다시 생기로 가득 채워졌다.
* * *
오전 일과를 마친 루시엘은 레오니의 부름에 응해, 레오니의 방에서 블록 쌓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그닥거리는 소리에 일어나 창문을 내다보았다.
창밖에 마차 하나가 도착하는 것이 보였다. 낯선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밤갈색 머리에 단정한 인상, 하얀 가운을 걸친 젊은 여성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도련님, 아가씨. 저는 시클라인 레니트랍니다. 앞으로 두 분의 건강을 책임지게 되었어요.”
단정한 옷차림의 그녀가 두 아이를 보면서 상냥한 미소로 인사했다.
“안넝. 레오니야…… 에요.”
“반가워요. 루시엘이에요.”
시클라인 레니트라면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녀는 훗날 황성의 약제사로, 루시엘이 심한 탈수 증세를 겪었을 때 그녀가 만든 약을 먹고 단번에 나은 적이 있었다. 이후로도 몇 번 그녀의 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루시엘은 약초의 간편함을 알게 되었다. 현존하는 세상의 의료 기술은 마나와 마력을 필요로 하는 치유 마법에 의존하고 있는데, 간단한 상처나 병은 약초로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훗날 벨슈타인의 의료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곁에 두면 좋을 사람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 이번 생에선 그녀와 가까이 지내자.’
게다가 그녀가 황태자에게 도움을 주었던 그 약은 루시엘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시클라인 역시 황태자를 돕다가 안 좋은 결말로 이어졌으니…….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도와야겠어.’
루시엘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생각했다.
한편 시클라인은 놀라고 말았다.
“레오니 도련님은 나이가 5살, 루시엘 아가씨는…… 9살이시라고요?”
“네.”
‘아무리 보아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 같은 아기님으로 보이는데…….’
“어디, 키부터 한번 잴까요?”
시클라인이 기린 모양의 커다란 목각 인형을 가지고 들어왔다. 레오니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우아, 기린!”
“레오니 도련님부터 잴게요. 이리 오세요.”
시클라인이 부르자 레오니는 기린 인형에 올라타려고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시클라인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타는 게 아니에요. 여기 옆에 가만히 서셔야 키를 잴 수가 있답니다.”
“나 기린 타고 시푼데.”
레오니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오자, 루시엘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시클라인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귀 좀 주실래요?”
루시엘의 말대로 시클라인이 고개를 숙여 귀를 내밀었다.
“레오니한테 얌전히 키 재면, 기린 인형을 주겠다고 해 보세요. 그럼 말을 들을 거예요. 인형은 제가 나중에 꼭 돌려드릴게요.”
루시엘의 말에 시클라인은 긴가민가하면서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제 루시엘이 나섰다.
“레오니, 키 재면 선생님이 기린 타게 해 주신대. 그렇죠?”
“그럼요. 자, 키 재면 착한 아이니까 기린 인형을 선물로 줄게요.”
“……진짜요?”
그러자 기린 인형을 괴롭히고 있던 레오니의 눈빛부터 달라졌다. 확실히 관심을 끈 것 같았다.
뚱해 있던 레오니의 귀가 쫑긋해졌다. 레오니 앞으로 루시엘이 바짝 다가와 손으로 키를 어림잡아 재 보며 말했다. 레오니의 승부욕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어디 보자, 내가 한참 더 큰 거 같은데.”
“……아니고든. 뉴나보다 내가 더 커.”
“그럼 어디 누가 더 키가 큰지 재 볼까?”
“구래!”
역시 단순한 레오니는 쉽게 걸려들었다. 이 틈을 타서 시클라인이 재빨리 외쳤다.
“누가 먼저 키 잴래요?”
“저요, 저요!”
레오니가 손을 들더니 쪼르르 기린 인형 옆에 가서 바른 자세로 섰다.
“옳지, 잘했어요.”
시클라인이 루시엘의 도움에 속으로 고마워하면서 얼른 아이의 키를 목각 인형의 눈금에 표시했다.
“103이네요.”
레오니가 얌전히 키를 쟀다.
“선샌님, 나 키 커요?”
“그럼요. 아주 크네요. 그렇지만 음식을 골고루 잘 드시면 훨씬 더 크실 거예요.”
“녜. ……뉴나도 키 재.”
레오니의 도톰한 손이 루시엘을 기린 인형으로 끌어다 놓았다. 결과는 레오니보다 한 뼘 정도 루시엘이 더 키가 컸다.
“……오어? 이상해. 저러케 쪼꼬만데.”
“내가 누나인걸. 그래도 레오니도 벌써 이만큼이나 크니까 금방 쑥쑥 커질 거야.”
“히히히, 신난다.”
루시엘은 레오니의 통통한 뺨을 만져 주었다.
한편 시클라인은 루시엘에게 한 수 배운 것 같았다. 아이의 흥미를 자극시켜 행동을 유도하고, 마무리는 칭찬까지, 말 안 듣는 어린이를 조련하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오늘 키 재기를 열심히 했으니, 약속대로 이 기린 인형은 레오니 도련님에게 드릴게요. 그리고 루시엘 아가씨, 귀 좀요.”
“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아가씨. 기린 인형은 두 분에게 진짜 선물로 드리고 갈게요. 자, 그리고 이건 코코 허브로 만든 시럽인데, 키가 쑥쑥 커지게 해 줄 테니 자기 전에 한 방울씩 드세요. 아셨지요?”
뿌듯한 얼굴의 시클라인은 방을 빠져 나갔고, 루시엘은 받은 시럽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