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길리아트의 눈이 루비처럼 반짝이더니, 루시엘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루시엘, 그전에 나와 갈 데가 있다. 아까 내가 느낀 너의 마력은 아주 강하더구나. 마력에 반응하는 나무가 있거든. 거기에 나랑 다녀올 수 있니?”
“좋아요. 저도 궁금해요.”
루시엘의 허락이 떨어지자, 길리아트가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꼭 잡으렴.”
고개를 채 까딱이기도 전에 길리아트와 루시엘은 눈 깜짝하는 순간이동 했다.
몸이 공중에 둥실 떠올라 정지되는 듯한 느낌이 잠시 들어 어지러웠다.
눈을 떴을 때는 낯선 정원으로 이동해 있었다. 정원의 중앙에는 은빛 이파리들이 길게 매달려 있는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와아.”
이동 마법의 근사함에 반한 루시엘이 재잘거렸다.
“할아버지. 방금 어떻게 하신 거예요? 마법이에요? 너무 신기해요! 저도 나중에 배우고 싶어요.”
“나의 이동 마법이 담긴 이 반지 덕분이란다. 물론 마나를 운용해 직접 이동할 수도 있다만, 가까운 거리는 이쪽이 더 편하단다. 마력의 소모도 없으니.”
길리아트가 검지에 낀 반지를 보여 주었다. 푸른 돌이 콕 박혀 있었다.
“너무 신기해요. 그치만 마법도 보고 싶어요.”
루시엘이 눈을 반짝였다.
“돌아가는 길에는 직접 이동 마법을 사용하마.”
“네! 신난다.”
기뻐하는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길리아트는 손으로 은빛 나무를 가리켰다.
“우선 달빛 이슬 나무로 가 보자.”
“이름처럼 곱고 예뻐요.”
바람이 불 때마다 은색 이파리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반짝반짝해서 꼭 은빛 눈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조금 전까지 공작성에 있을 때는 분명 햇살이 비추는 대낮이었는데 말이다. 분홍과 보라, 하늘색이 뒤섞여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마저 달콤하고 포근했다.
“할아버지.”
“오냐.”
“여긴 어디예요? 그냥 장소만 이동한 게 아닌 것 같아서요.”
“……맞단다. 여긴 다른 차원에 있는 정원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벨슈타인 영지는 두 개의 차원이 일부 걸쳐지는 영역이 있단다.”
루시엘에겐 아직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최대한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그럼 아까 그 호숫가 풀밭이 그 영역에 속하나요?”
“그래.”
“그럼 여긴 어떤 차원이에요? ……혹시 마계인가요? 그럼 위험한 곳이 아니에요?”
‘벨슈타인은 마계와 통한다는 소문이 진짜일지도 몰라.’
루시엘이 놀라서 허둥지둥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평온하고 고요한 정원에선 악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계에 속했던 적도 있었지. 그전에는 요정들이 있기도 했단다……. 하지만 보다시피 지금은 괜찮다. 이곳엔 나무의 깨끗한 힘 때문에 마물이 접근하지 못하거든.”
“아…….”
“우선 오늘은 너의 마력을 알아보러 온 것이니 나무로 가 보자.”
폭신폭신한 풀밭은 온통 연한 노란색의 통통한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밟아도 되는 걸까 고민했지만, 달리 다른 길이 없었다.
루시엘이 먼저 앞장서서 총총 달려갔다.
삐삐삐.
삐입.
“어라?”
루시엘은 깜짝 놀라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왠지 발 쪽에서 소리가 난 듯했다. 신발 바닥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루시엘이 다시 풀을 밟는 순간, 다시 삐삐삐 소리가 났다.
“루시엘, 왜 그러니?”
“삐삐 하고 소리가 났어요. 풀을 밟으면 안 되나 봐요.”
루시엘이 곤란하단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길리아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덕분에 풀밭에서 엄청나게 시끄러운 소리가 쏟아졌다.
“으아…….”
루시엘이 찡그리면서 살짝 귀를 막을 정도였다.
“나는 전혀 들리지 않는데……. 이건 병아리풀이란다.”
‘이곳의 식물은 요정과 통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길리아트는 의구심을 삼키며, 쭉 달빛 이슬 나무까지 걸어갔고 루시엘은 귀를 막으면서 달려갔다.
코앞에서 본 달빛 이슬 나무는 더욱 커다래 보였다.
길게 뻗어 내린 나무줄기에는 은빛 잎사귀들이 사각거리면서 흔들렸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루시엘,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아 보렴. 그러면 나무가 답을 들려줄 거란다.”
키가 작은 루시엘을 위해 길리아트가 직접 안아 줄기가 닿는 곳까지 올려 주었다.
루시엘은 눈을 꼭 감고, 손에 닿는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찌르르.
알 수 없는 울림이 나뭇가지를 타고 전해져 왔다. 그와 동시에 나무가 더욱 환하게 은빛을 발했다.
이윽고 그 빛은 나무줄기에 매달린 모든 나무 잎사귀들로 옮겨졌다.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장관이었다.
길리아트는 이제 의심을 거두었다. 눈앞의 이 아이, 루시엘은 가히 기적과도 같은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엘, 이 나무는 달빛과 이슬, 마나를 머금은 것에 반응한단다. 네 마력은 나무의 모든 잎사귀를 빛나게 했구나. 이런 건 처음 본다. 이게 무얼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너는 아주 특별한 아이구나.”
‘그건 제가 요정의 핏줄이라서일지 몰라요.’
루시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길리아트가 나무를 가리키며 재차 말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란다. 루시엘, 보렴. 아름답구나.”
“네, 정말로 예뻐요. 제가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루시엘은 황홀한 눈으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달빛 이슬 나무를 가만 바라보았다.
‘이 나무는 내가 요정의 피가 섞였다는 거 알까?’
속마음으로 중얼거릴 적이었다. 붙잡고 있던 나뭇가지가 다시 한번 찌르르 울렸다.
이번에는 더 큰 진동이었다.
그와 동시에 루시엘의 눈망울이 왕방울만 해졌고, 심장 박동이 커졌다.
디잉―!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리였다. 마치 악기를 건드렸을 때 날 것만 같은 튀는 음이었다.
“앗.”
“왜 그러니, 루시엘?”
루시엘은 신기해서 다른 나뭇가지를 연신 붙잡아 보았다.
딩―디리링!
“할아버지, 들으셨어요? 나무에서 소리가 났어요. 딩딩 하고 예쁜 소리.”
“글쎄다.”
귀를 쫑긋 세우면서 루시엘이 나뭇가지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천상의 악기를 연주하면 이런 소리가 날까?
루시엘이 하는 대로 길리아트도 귀를 대 보았지만, 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구나. 내가 청력은 아직 쓸 만한 편인데.”
“지금 이 소리가 안 들리세요?”
루시엘이 늘어진 나뭇가지를 마구 잡아당겼다. 그러자 높은음이 팅팅팅, 튕기듯 들렸다.
왠지 나무가 신경질이 난 것 같아서 루시엘은 그만두었다.
“앗, 미안해.”
너무 세게 당겨서 아팠는지도 몰랐다.
“루시엘, 나무와 말하는 거니?”
“아, 아니에요. 제가 바람 소릴 잘못 들었던 것 같아요.”
길리아트의 자못 이상한 시선에 루시엘은 수줍은 듯 얼버무리면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무에서 소리가 난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루시엘, 마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지만 루이비드에게도 말은 해야 될 거란다. 이 할애비랑 함께 이야기하러 가자꾸나.”
“네.”
길리아트가 손을 내밀자, 루시엘이 그 따뜻한 손을 붙잡았다. 루시엘은 기대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드디어 마법을 배우게 됐어.’
그 소식은 곧장 공작에게 전해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길리아트에게 루시엘의 마력이 나무를 전부 은빛으로 빛나게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루이비드가 책상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느다란 붉은 눈은 몹시 커져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강한 마력을 타고난 벨슈타인의 핏줄인 길리아트와 자신, 그리고 어쩌면 천재로 태어난 제 아들 키제프보다 루시엘이 더 강한 마력을 가졌다는 뜻이니까.
공작은 다시금 루시엘의 맑고 투명한 보석안을 바라보았다.
또래보다 육체적으로는 연약하지만, 머리는 훨씬 비상하고 마력도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뛰어나다.
하늘의 별을 박은 듯 송송 빛나는 예쁜 눈동자에도 뭔가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오르비아 백작이 그토록 루시엘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그것일 테고.
‘저 아이는 대체 정체가 뭘까.’
루시엘이 눈을 댕그랗게 뜨곤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저도 공작님과 할아버지처럼 마법을 하고 싶어요.”
루시엘의 발언을 들은 공작이 짐짓 장난스레 대꾸했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조건이 있다.”
그의 말에 루시엘은 또 거래를 하는 건가 싶어 당혹스러웠지만, 일단은 들어 보기로 했다.
“말씀해 주세요.”
“체중을 늘려. 까딱하다간 마법이고 뭐고 쓰러질 것 같으니까.”
“……네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루시엘이 반문하자, 길리아트도 허허 웃으며 동조했다.
“그건 나도 동감이구나, 루시엘. 마법을 배우는 데에도 꽤 체력이 드니까. 좀 더 살쪄도 되겠구나. 지금도 귀엽지만 그때는 더 귀여워지겠군.”
길리아트가 포동포동한 루시엘을 상상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어렵진 않지만…….”
“그리고 하나 더.”
공작의 입술이 움직였다. 잔뜩 긴장한 채 귀를 기울이던 루시엘이 어리벙벙하고 말았다.
“나를 공작님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루시엘이 정말 알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연신 끔벅거렸다.
“뭐가 좋을까.”
“움…… 각하?”
“……공작님이 낫겠는데.”
“그것도 아니면 주군은 어떠신가요?”
“…….”
길리아트가 공작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웃기 시작했다.
“……좀 더 가족적이고 친근한 쪽이 있지 않나.”
“……잘 모르겠어요.”
보다 못한 길리아트가 자신을 가리키면서 힌트를 주었다.
“나에게 부르듯이 하면 되지 않을까.”
“아버님……?”
루시엘의 말에 루이비드의 입가가 그제야 살짝 풀리면서 손을 좀 더 돌렸다.
“그것도 좋지만 시아빠? 좀 어색하니 아빠라고 불러도 되겠군.”
공작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뒷짐을 졌다.
루시엘은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공작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시 제 쪽을 돌아본 공작은 기다리는 중이었다. 루시엘이 아빠, 라고 불러 주기를.
“…….”
할아버지는 자상하셔서 금세 가능했지만, 공작은 차원이 달랐다.
저 형형한 붉은 눈에 서늘한 인상을 보고 어떻게 아빠라고 부르지……?
‘눈 딱 감고 한 번만 부를까?’
루시엘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도무지 목구멍 안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오질 않았다.
‘용기가 필요해. 많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을 기다리는 공작을 향해, 루시엘은 겨우 입을 뻥긋거렸다. 후자보다는 그래도 나은 차선을 선택했다.
“시, 시아빠님!”
“풉, 푸하하하!”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한 길리아트가 빵 터져 버렸고.
루이비드는 한숨을 후 쉬고는 그것이라도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보다는 한결 낫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