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다음에는 용기 내서 계실 때 가 볼까?’
루시엘은 주머니 속 전해 주지 못한 편지와 풀꽃을 만지작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무언가가 톡톡 루시엘의 자그만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심장께를 오른손으로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방금 뭐였지?”
그 이상한 느낌은 곧 사라져 버려서 루시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푹신한 침대 위로 퐁당 쓰러졌다.
그간 마나 호흡법을 꾸준히 해서일까.
루시엘은 이제 마나를 다루는 일이 점점 익숙해졌다.
실처럼 가느다란 마나를 모아 자그맣게 뭉쳐서 투명한 마나 방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동그란 마나 방울을 톡톡 터트리면서 침대에 엎드려 놀았다.
이렇게 혼자서 단련하는 것도 좋지만 진짜 마법은 아무래도 제대로 배우는 게 더 좋은데.
지금은 잠잠한 것 같지만 오르비아 백작이 자신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만일 키제프가 결혼을 거절해서 벨슈타인을 떠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필요했다. 그러니 마법을 익히게 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엘링턴의 조언대로 길리아트 할아버지에게 가 보자.’
사실 보석을 만드는 특별한 마력을 그가 알아보지는 않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아직 각성 전이니 괜찮을 거라고 위안하며, 루시엘은 연두색 망토를 어깨 위에 걸쳤다.
의류점의 봄 시즌 신상이라고 들었는데, 완두콩의 껍질처럼 갈라진 모양이라 루시엘은 거울 속 자신이 완두콩이 된 기분이었다.
가방을 둘러맨 루시엘은 양말의 방으로 가 오늘 신을 걸 직접 양말 나무에서 떼어 골랐다.
무릎까지 오는 양말을 신느라 조금 낑낑거렸지만 여기 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포근한 인형을 안아 주고 나서야 루시엘은 방을 나섰다.
“잠깐만요, 루시엘 아가씨.”
그대로 나가려던 루시엘을 붙잡은 베시가 머리를 빗질해 주고, 하나로 높이 묶어 리본을 매 주었다.
루시엘은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말의 꼬리 같았다.
“귀여운 아가씨. 준비 다 됐어요.”
베시가 루시엘을 꼭 안아 주며 볼에 뺨을 비볐고, 뒤에서 지켜보던 로즈도 이 틈을 타서 루시엘의 보송한 뺨을 만졌다.
“아아, 말랑말랑 마시멜로 같아요.”
“마시멜로?”
“먹어 보심 알 거예요. 마침 세스 주방장님이 딸기 사탕을 또 만들어 두었다고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앗, 정말요?”
실은 루시엘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더니 딸기 사탕이 똑 떨어졌었다.
그래도 루시엘에겐 아직 남은 보루가 있었다. 슥 고개를 돌린 루시엘의 시선이 곰 젤리 컵으로 향했다. 베시와 로즈에게도 나누어 주었더니, 벌써 절반밖에 남지 않았지만.
로즈의 손을 잡고 중정을 지날 때쯤, 정원사가 기다렸다는 듯 꽃이 담긴 작은 바구니를 전해 주었다. 그에게 꽃을 얻는 것도 벌써 여러 번이었다.
여러 마리의 나비가 한데 모인 것처럼 풍성하고 청초한 꽃이었다.
“예뻐라.”
“분홍색 수국입니다.”
정원사가 루시엘에게 분홍색 수국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예쁜 꽃 고마워요.”
루시엘이 감사를 표하며, 곰 젤리 한 움큼을 정원사에게 내밀었다.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이라 젤리는 고작 네 개뿐이었지만 정원사는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정원사 청년 찰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노란 수국 한 다발을 로즈에게 내밀었다.
“저어…… 로즈. 당신도 받아요.”
뜻밖의 선물에 로즈는 당황한 듯 양 볼이 붉게 물들었다. 루시엘이 재빠르게 말했다.
‘두 사람 분위기가 화기애애해. 슬쩍 빠져 줘야지.’
“로즈, 조금만 더 가면 서관이니까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아니에요, 아가씨. 제가 큰 주인님 서재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로즈가 그리 말하는데 마침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필요 없겠군. 루시엘은 나와 함께 갈 터이니.”
“할아버지!”
루시엘이 길리아트의 품으로 포르르 아기 새처럼 달려갔다.
“어이구, 우리 아기 병아리!”
“제가 왜 병아리예요?”
루시엘이 큼지막한 분홍색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보슬보슬한 은발 머리를 살살 쓰다듬은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그 모습마저 병아리 같았다.
“작고 삐악삐악 말하니까 귀엽단 뜻이란다.”
“할아버지도 차암.”
루시엘은 어쩐지 낯이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귀여움을 받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보송보송 폭신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아.’
“할아버지!”
“응?”
“같이 산책할까요?”
루시엘이 먼저 길리아트의 손을 답싹 잡자, 그도 조그맣고 오동통한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서로를 마주 보면서 빙그레 웃은 뒤, 두 사람은 연둣빛 풀밭을 걸어갔다.
루시엘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신 후, 살살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할아버지, 저요. 사실은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한참 풀밭을 걷던 길리아트의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엄마 닭을 따르는 병아리처럼 그의 뒤를 졸졸 따르던 루시엘도 걸음을 멈췄다.
“루시엘, 그 말 정말이니?”
루시엘이 눈을 빛내면서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결심에 찬 앙다문 입술이 움직이자 길리아트는 허헛,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가르쳐 주세요, 할아버지.”
루시엘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청했다. 길리아트만큼 강하고 훌륭한 마법 스승을 찾는 것도 무척 드문 일일 테니까.
“……흠, 그래. 마법이라 한번 고민해 보자꾸나.”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이었다.
길리아트는 이런 날이 언젠가 다가오리라 예상했다. 루시엘이 특별한 아이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고. 다만 그 시기가 예상보다 앞당겨졌다.
마족의 피가 섞인 벨슈타인의 핏줄이 아니고서야, 마법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도 마법을 배우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걸렸다.
보통의 아이라면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여 년 이상 수련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제자 중에는 서른이 넘어서 처음 마법을 구현해 낸 자도, 중간에 포기한 자도 있었다.
그래서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가지지 않는 한, 이제 그는 웬만하면 제자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마법을 가르치는 건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열어 주는 거나 진배없었다.
다시 돌아가기 어려운 아주 먼 길의 이정표.
댕그랗게 토끼 눈을 굴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루시엘에게 그런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루시엘, 마법을 배우는 길은 꽤 머나먼 여행이 될지도 모른단다.”
루시엘이 귀를 종긋 세우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네가 특별한 아이라는 건 알지만 마법에 재능이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니까. 물론 그럼에도 네 뜻이 확고하다면 너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거다.”
호숫가 가까이라 그런지 풀벌레들이 이리저리 윙윙 날아다녔다.
그의 대답에 실망하지 않고 루시엘이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잠깐만 저 좀 봐 주시겠어요?”
마침 보이는 그루터기에 의자에 걸터앉은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마법은 모르지만 배울 준비가 되었다는 건 보여 드리고 싶어.’
루시엘은 심호흡하곤 천천히 집중하며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나 호흡법을 보고 연습한 대로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그간 꾸준히 매일 연습해 온 보람이 있었다. 루시엘은 곧 허공으로 투명한 마나 방울들을 퐁퐁 여러 개 띄웠다.
그걸 지켜보던 길리아트는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루시엘이 마나를 모아서 풀어 놓는 순간부터 그 거대하고 강한 마력을 느꼈다.
‘……믿을 수가 없군.’
루시엘이 이런 압도적인 마력을 품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동안 이것을 자신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게다가 타고난 마력만 강한 게 아니라, 루시엘은 마나를 단련한 듯 보였다.
하늘로 둥실둥실 떠오른 마나 방울들이 그걸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길리아트는 우선 놀라서 흔들린 눈동자와 마음을 정돈하고, 루시엘을 불렀다.
“아가, 루시엘.”
“네, 할아버지.”
“그동안 어떻게 이런 강한 마력을 감출 수 있었니? 키제프를 제외하고 네 나이에 이런 마력을 지닌 아이는 처음이다.”
루시엘은 영문을 모른다는 듯 커다란 눈을 끔벅거렸다.
“마력은 어떻게 감추지요?”
“……다시 한번 마나를 끌어모아 보렴.”
길리아트의 요구에 루시엘은 손끝에서부터 모이는 바람과도 같은 마나를 심장으로 끌어모았다.
아까보다도 더 강해진 마력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마나를 해제해 보렴.”
루시엘은 끌어모았던 마나를 단숨에 공중에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러자 루시엘의 마력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루시엘은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마나를 해제하는 동시에 본능적으로 마력을 숨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마법을 사용한 후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완벽한 갈무리였다.
“허, 기가 막히구나.”
길리아트는 혀를 내두르며 루시엘의 자그만 어깨를 살짝 잡고는 감탄했다.
“루시엘. 믿을 수 없구나. 이 정도로 마나를 잘 조절하다니, 초급 마법사들도 어려워하는 일이지. 마법을 배운 적이 정말 없니?”
“……마법을 배운 적은 없고, 책을 보고 마나를 단련하고 있어요.”
“책?”
“마나 호흡법이라는 책이에요.”
길리아트도 과거에 읽은 적이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 책을 보고 따라 한다고 해서 쉽게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게 아닐 터인데.
볼수록 경이로운 아이였다.
아까 루시엘의 압도적인 마력은 7서클의 대마법사인 자신조차도 놀라게 만들었다.
아직도 루시엘의 마력을 피부로 접한 그 순간,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아이, 벨슈타인에 버금가는, 아니 더 뛰어난 마법사로 성장할 수도 있다.’
길리아트의 심장이 터질 듯 쿵쿵 뛰었다.
“할아버지, 저 그럼 마법을 가르쳐 주시는……?”
루시엘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폭 끌어안았다.
“물론이다, 루시엘. 가르쳐 주고말고! 당장 내일부터 가르쳐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