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오르비아 백작가로 보낸 동의서에 그 어떤 회신도 아직 없던 차에 겁도 없이 벨슈타인 성에 몰래 사람을 시켜 담을 넘다니, 자충수였다.
차라리 루시엘의 혼인을 대가로 거금을 요구했다면, 모른 척 쥐여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작은 예상보다 더 머리가 안 좋거나, 그도 아니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루시엘, 그 아이를 빼 가려고 했던 건가.
루시엘은 그 집, 아니 정확히는 백작에게서 도망친 것이 분명하고.
결국 백작의 목적이 루시엘에게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든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슬슬 인내심이 툭툭 끊어지고 있었다.
루이비드는 서랍장을 열어 습관적으로 불을 붙이지 않은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오래전 끊었지만 짜증이 솟을 때는 물고라도 있으면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동안 멈추고 있었던 영토 확장이라도 해야 하나. 가신들은 전쟁을 하면 영지민들의 피로도가 쌓인다지만, 자신은 그 반대였다.
그 쾌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공작이 느른하게 눈을 아래로 깔았다. 쌓아 둔 서류를 전부 처리해 달라는 재무관의 요청이 떠올라 그는 다시금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뾱뾱뾱.
집무실에 틀어박힌 지 반나절. 잠깐 눈을 붙였던 모양이었다. 느닷없이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루이비드의 가느다란 눈이 뜨였다.
“……뭐지, 새라도 왔나?”
뾱뾱, 뾱.
뭔가의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는 못내 거슬리는 듯, 미간을 좁힌 채 소파에서 일어났다.
달칵, 문을 열자 보이는 자그만 뒷모습.
새하얀 은발과 레몬색 스커트를 나풀거리면서 걸어가는 소녀가 보였다. 영락없는 소동물의 모양새가 아닌가. 발에는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 슬리퍼가 신겨져 있었다.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의 원인은 저것이었던 모양이다.
“…….”
저벅, 저벅.
루이비드가 느릿하게 걸어가는데도 루시엘의 보폭이 워낙 좁아 저만치 앞서 있던 것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는 물고 있던 시가를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느긋하게 말했다.
“잡았다.”
공작의 커다란 손이 루시엘의 자그만 몸을 달랑 들어 올렸다.
“앗…… 고, 공작님?”
루시엘은 그대로 얼어붙어서 그만 팔과 다리가 엉거주춤한 상태로 허공 위로 붕 떴다. 루시엘이 포수에게 사로잡힌 사냥감처럼 발을 파르르 떨었다.
루이비드의 서늘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여길 지나가는데 내게 인사도 안 하고 간다고?”
“아, 아. 그게요…….”
루시엘의 곤란함을 느꼈는지 그가 바닥에 내려 주었다.
“어디 가는 길이지?”
“……길을 헤매고 있었어요.”
사실 루시엘은 공작이 자리에 없으면 몰래 또 꽃과 함께 꽃말이 적힌 메모를 가져다 놓으려는 계획이었다.
마주치면 어색한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하니까 최대한 몰래.
그런데 오늘은 몇 시간째 공작의 집무실 문에 원형 패가 걸려 있었다.
검은 드래곤이 보이는 면으로 되어 있으면 안에 공작 각하께서 계시는 거라고 에바가 일러주었다. 그래서 없으실 때 몰래 갖다 두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실 줄은.
공작은 거대한 몸을 숙였다. 그러곤 아이의 낮은 시선과 맞추려 무릎을 꿇고도 몸을 더 낮췄다.
“달콤한 걸 좋아했던가?”
미리 알고 사탕이나 초콜릿 따위를 서랍장 가득 채워 놓으라고 에바에게 명해 두기까지 했지만,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넌지시 말을 던졌다.
“……네. 맞아요.”
‘내가 단것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 주셨어.’
차갑고 무서운 분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어쩌면 의외로 따뜻한 면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
아이의 맑은 눈망울을 빤히 바라보던 루이비드가 제안했다.
“들어와. 줄 것이 있다.”
“……줄 것이요?”
루시엘의 눈이 댕그래졌다. 혹여나 또 상점 문서 같은 걸 주시면 어쩌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자 제 머릿속을 꿰뚫은 것처럼 공작이 말했다.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군. ……문서 같은 게 아니다.”
공작의 집무실에 따라 들어오자, 잉크와 종이 냄새가 훅 끼쳐 왔다.
뾱뾱, 뾱.
바지런히 걸음을 옮겼지만 루시엘의 보폭으로는 한참 걸릴 만큼 넓은 방이었다.
“거기 앉아.”
“네…….”
루시엘이 갈색 소파 위로 겨우 올라가 앉았다.
공작의 부름에 에바가 미소를 머금으며 들어왔다.
“마실 것과 디저트를 가져다줘. 나는 홍차로.”
“알겠습니다. 루시엘 아가씨는 어느 것으로 드릴까요?”
“……저도 홍차요.”
공작을 따라서 루시엘이 자신만만하게 주문했다. 에바가 눈을 부드럽게 휘면서 설명해 주었다.
“홍차를 드셔 보셨나요?”
루시엘이 고개를 설레 저었다.
“아뇨, 공작님께서 항상 드시는 것 같아서…….”
루시엘이 힐끔 공작을 보자, 그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거렸다.
“루시엘 아가씨께는 홍차가 조금 씁쓸하실 거예요. 사과청으로 만든 애플티는 어떨까요? 부드럽고 달콤해서 먹기 편하실 거예요.”
“그럼 그걸로요.”
루시엘의 부푼 뺨이 분홍빛이 되었다.
“네, 그럼 애플티에 어울리는 레몬 마들렌도 함께 가져다드릴게요.”
차가 나올 때까지 공작을 독대하려니, 살짝 긴장이 되었다. 루시엘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 생각했다.
‘어떡하지. 너무 어색해……. 집무실을 구경한다고 할까? 아냐,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는 건 싫어하실지도 몰라.’
루시엘이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동안, 공작이 입을 열었다.
“……집무실에 애가 볼 만한 건 딱히 없는데.”
루시엘이 잔뜩 긴장한 채 무릎에 제 손을 올리곤,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
‘앗, 너무 강하게 거절했나.’
소심하게 속으로 생각하던 루시엘이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공작에게 재차 말을 이었다.
“도서관이랑 놀이방도 있고, 놀이터에도 다녀왔는걸요.”
“……놀이터?”
“네, 숲속 놀이터에 엘링턴 부관님이 데려다주셨어요. 그네도 태워 주시고요.”
루시엘은 그날의 기억이 정말 즐거웠던 듯,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에 같이 가지.”
“네?”
“같이 그네 타러.”
‘바, 방금 나에게 그네 타러 가자고 하신 거야?’
루시엘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루시엘의 눈에 익숙한 것이 들어왔다.
“앗…….”
꽃병에 루시엘이 놓고 갔었던 히아신스와 똑같은 꽃이 있었다.
‘새로 가져다 두신 걸까?’
새하얀 히아신스는 갓 피어난 것처럼 맑고 싱그러웠다.
“히아신스가 예뻐요.”
“마음의 기쁨이라지 않았나?”
“아…… 맞아요. 그 메모 기억하시네요.”
“여기 가지고 있지.”
공작이 슬쩍 손가락을 튕기자, 꽃병 아래 꽂아 둔 메모가 팔랑팔랑 그의 손에 날아왔다. 그는 그걸 근사하게 펼쳐 보였다.
루시엘의 서툰 글씨가 그대로 적힌 그 메모였다.
“네가 준 꽃도 그대로야.”
“어떻게 꽃이 아직도 싱싱해요?”
“보존 마법이지.”
루시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마법은 정말 쓰임이 무궁무진한 듯했다.
자신은 그저 마법을 강해질 힘으로만 여겼던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올망졸망한 루시엘의 동그란 눈코입을 보면서 공작은 역시 뭔가를 닮았다고 중얼거렸다.
루시엘은 공작의 얼굴을 보면서 키제프의 자란 모습과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키제프가 자신과의 결혼을 원하지 않아 거절당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바에야 먼저 결과를 알게 된다면 좋을지도…….
“저어, 공작님.”
“음?”
“키제프 공자와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루시엘의 질문을 들은 공작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빨리 만나고 싶나?”
“……공자가 허락해야 이 계약 결혼이 성립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혹시나 거절당하면 조금 슬플 것 같아서요.”
“왜지?”
“그야, 벨슈타인에 있는 게…… 좋아지고 있으니까요.”
“그런 걱정은 마라. 키제프는 곧 만나게 될 거다.”
“네.”
공작의 말에 루시엘의 표정은 환해졌지만, 공자가 싫다고 하면 파혼도 각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루시엘은 달콤한 애플티와 레몬 마들렌이 제법 조화롭다는 것 말고도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공작님의 얼굴이 계속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다는 것과 이제는 떨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아직도 어색해서 먹을 걸 함께해야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루시엘이 제 주먹보다 큰 마들렌을 한 입 와앙, 베어 물었다.
“그렇지. 선물 주기로 했는데.”
공작이 이번에는 마법으로 물건을 가져오는 대신, 직접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몸을 감싼 편한 셔츠 차림이 보기 좋았다.
공작이 벽면 서랍장의 문을 열더니 루시엘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서 골라.”
“……네.”
영문도 모르고 다가가 보니 서랍장 안에는 알록달록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사탕, 초콜릿, 젤리 등이 가득 있었다.
루시엘은 고민하다가 귀여운 젤리가 잔뜩 들어 있는 투명한 병을 하나 집어 들곤,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제 그만 가 봐도 좋다.”
“네!”
루시엘은 함께 있는 동안 지금이 가장 신나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귀엽게 부푼 뺨은 달콤한 걸 먹을 생각으로 설레는 모양이었다.
공작의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루시엘은 그걸 보지 못했다.
“루시엘 아가씨, 여기 계신다고 해서 모시러 왔어요.”
베시가 루시엘을 찾으러 다녔던 모양이었다.
투명한 병을 품 안에 꼭 껴안은 채 루시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까지 돌아왔다.
“아가씨, 간식 드실 거지요?”
“아니요, 이거 먹을래요. 공작님이 주신 젤리.”
젤리를 자랑하는 루시엘의 눈이 평소보다도 더 반짝거렸다.
“알겠어요. 하지만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되니까 딱 다섯 개까지만이에요!”
“네.”
베시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시엘은 헤헷 웃으면서 컵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루시엘의 엄지손톱보다 더 큰 곰 모양의 젤리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빨간색, 초록색, 주황색, 노란색, 흰색의 과일 향 나는 곰 젤리들이 사이좋게 누워 있었다.
달콤한 향기가 주는 유혹에 넘어간 루시엘이 오동통한 초록 곰 하나를 꺼내서 입에 넣었다.
쫀득쫀득한 식감에 상큼한 사과 맛이 씹을수록 입안을 가득 채웠다. 딸기 맛 사탕과는 또 다른 별천지가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 자꾸만 하나 더, 하나 더를 외치면서 계속 먹게 되었다. 하지만 베시 말대로 딱 다섯 개에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루시엘은 입을 오물거리면서 중얼거렸다.
“……행복해.”
작은 젤리였지만 선사하는 기쁨은 아주 컸다. 심장이 사르르 녹는 기분.
아까 보니 유리병이 더 있었다.
앞으로 공작님 방에 자주 놀러 갈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