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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9)화 (19/282)

<19화>

공작님의 뒤를 따라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루시엘이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공작이 한쪽 팔을 벌리며 호의를 내렸다는 눈으로 말했다.

“내가 안고 가지.”

“…….”

그 말 한마디에 루시엘은 공작의 품에 안겨서, 어깨 너머로 로즈와 베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 다녀올게요.”

“이따 데리러 갈게요, 루시엘 아가씨.”

루시엘은 낯선 이에게 들려진 강아지처럼, 온몸이 굳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낯선 환경에 놓인 기분이랄까. 길리아트 할아버님이랑은 또 달랐다.

할아버님은 자상하고 포근했는데, 공작님은 무서운 분이니 자연히 몸이 긴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공작의 너른 품은 단단하고 제법 따뜻했다. 은은하고 알싸한 나무와 이름 모를 좋은 향기가 뒤섞여 루시엘의 코를 간질였다.

이를테면 어른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였다.

‘아버지에게 안긴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낯설고 어색하지만,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포근함.

루시엘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공작은 어느새 긴 사지를 놀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루시엘은 공작의 옆에 있는 소파 위에 쿠션을 두 개나 놓고, 그 위에 앉았다.

수십 쌍의 눈들이 루시엘을 향해서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이들이 벨슈타인의 가신들이구나.’

루시엘은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았다.

“오오, 아가 마님. 아주 영특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이렇듯 작고 어린 분이었다니. 이 늙은이는 베르가 자작입니다.”

가신들에게 일일이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나이 든 가신에겐 예우를 해 줘야 할 듯했다. 루시엘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루시엘이에요.”

“길리아트 각하께도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듣던 대로 아주 사랑스러운 분이군요. 제 평생 이렇게 눈이 총명하게 빛나는 아기님은 처음 봅니다.”

잿빛 곱슬머리를 가진 베르가 자작은 루시엘의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요정들이 가졌다는 보석 같은 눈동자로군요.”

그의 말에 다른 가신들이 너도나도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정말 요정처럼 조그맣고 어여쁘신 아가 마님이군요, 허헛.”

단순히 요정 같다는 칭찬이었지만, 루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가신들을 경계했다. 요정의 핏줄이라는 정체가 탄로 날까 봐 겁이 났다. 소라처럼 자그만 주먹을 말아 쥔 루시엘이 약간 몸을 움츠렸다.

일부 가신들은 루시엘이 귀엽다며 바싹 다가와 보슬보슬한 은발을 쓰다듬으려 했다.

루시엘이 소파에 바짝 붙었다가 공작의 옷깃을 붙잡았다.

루이비드의 눈이 일순 가늘어지면서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는 가신의 손을 피해, 아이를 제 쪽으로 안아 보호했다.

“손대지 말게. 낯을 가리는 편이니까.”

“아아, 너무 귀여우셔서 그만. 죄송합니다, 각하.”

“사과는 아이에게 하지.”

공작의 가늘어진 눈이 향하자 가신이 루시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딸아이 같아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루시엘은 조용히 고개를 까딱이며 힐끗 공작을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그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루시엘을 둘러싼 가신들이 어느새 옹기종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영지민들 사이에서 아가 마님의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산사태 사건을 미리 예측하셨다지요?”

길렌 백작이라는 가신이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는 물었다. 루시엘은 눈을 깜빡이다가 답했다.

“네…….”

“루시엘이 예측한 덕분에 영지가 피해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호, 참으로 영민하십니다. 그런 것을 어찌 미리 아셨는지요?”

공작의 덧붙임에 길렌 백작과 다른 가신들도 모두 호기심 가득한 눈들이었다.

“장벽이 무너지는 꿈을 꾸었어요. 결정적으로 소리를 듣고 정말 산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알 수 있었고요.”

“소리라니요?”

길렌 백작이 물었고 루시엘은 그날의 일을 다시 떠올리며 대답했다.

“비 오는 날 흙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면 산사태의 전조 증상이라고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정찰조를 보낸 결과 그날 라파예트 산맥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었지.”

공작이 루시엘을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답했다.

“허, 그렇다면 아가 마님께선 진정 예지몽을 꾸신단 말입니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능력이 아닌지요? 벨슈타인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길렌 백작에 이어 베르가 자작까지 루시엘을 칭찬하자 가신들도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멀리 앉은 테오 자작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면서 말했다.

“혹시 우연이 겹친 것은 아닐지요? 제 안사람도 꿈이 자주 맞는 편입니다, 핫핫. 지난번 제가 낙마했을 때도 불길한 꿈을 꾸었다며 제 앞을 가로막았지 뭡니까.”

테오 자작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루시엘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 사사로운 일은 잘 모르지만 벨슈타인을 위한 정보라면 조금 알려 드릴 수 있어요.”

길렌 백작이 조심스럽지만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아가 마님, 혹여 또 어떤 꿈을 꾸셨는지요?”

역시 미리 생각해 두길 잘했구나 싶어 루시엘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벨슈타인에 큰 도움을 줄 광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광물이라니 무엇인지요?”

“미스릴이요.”

“오오, 미스릴이라면 새털처럼 가볍고 강철처럼 단단한 신의 금속이 아닙니까!”

길렌 백작을 비롯해 가신들이 흥분했다.

“미스릴은 발견하기도 힘든 희귀한 광물인데!”

회귀 전 카빌 후작과 황태자가 손을 잡은 프란델 호수 동굴의 관광 개발 사업에서 미스릴 광맥이 발견되어 한동안 제국이 떠들썩했었다. 많은 이가 욕심내는 신의 광물. 그걸 갑옷으로 만든 황태자와 황태자의 정예 부대는 큰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니 이번 일로 벨슈타인이 미스릴을 선점한다면 후에 있을 황태자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프란델 호수 옆 동굴에 미스릴이 묻혀 있는 걸 꿈에서 봤어요. 기사 아저씨들이 입은 강철로 만든 갑옷은 너무 무거워서 날렵하게 움직이지 못하니까 전투에 불리하잖아요. 하지만 미스릴은 가볍고 강하니까 움직이기 편할 거예요. 그렇죠?”

“호오, 그런 깊은 생각까지 다 하시고, 아가마님은 정말 똑똑한 아이로군요. 허허허.”

베르가 자작이 루시엘을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를 듣고 있던 공작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작이 턱가를 문질렀다. 그런 것까지 생각해 둘 줄이야. 루시엘의 말대로 그 귀한 미스릴을 얻을 수 있다면 벨슈타인의 기사는 가히 최강의 방어력과 속도를 가지게 될 터였다.

공작이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면서 회의장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눈치 빠른 길렌 백작이 지도를 냉큼 펼쳤다.

“프란델 호수라면 지금 출발해도 사나흘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각하.”

“흐음. 이번 건은 그럼 길렌 백작이 지휘해서 미스릴을 구해 오도록.”

“예,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당장 정찰대와 인부들을 꾸려서 가야겠습니다.”

길렌 백작이 목숨이라도 빚진 것처럼 감동한 눈빛으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아가 마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지요.”

길렌 백작이 몇 번이고 거듭해서 루시엘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루시엘 덕분에 중책을 맡을 기회를 얻은 데다, 백작은 내심 병력 향상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자 가신들은 너도나도 호들갑을 떨면서 루시엘에게 다른 꿈은 꾸지 않았는지 물었다. 하지만 루시엘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쏙 내밀었다.

“지금은 없어요. 다음에 꾼다면 또 알려 드릴게요.”

루시엘이 아는 정보도 한정적이니 아껴 두어야 했다. 그게 지금 벨슈타인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그녀의 무기니까.

* * *

‘아이 하나만 빼내 오면 된다. 은발에 보석처럼 빛나는 분홍 눈을 가진 계집아이지.’

어둠 속에서 명령을 내리던 오르비아 백작은 사내에게 거금을 주었다. 아이를 빼내 오면, 이것의 세 배는 더 준다고 했다.

“이게 웬 횡재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타국 용병에겐 짭짤하다 못해, 눈이 번쩍 뜨이는 액수였다.

사내는 입이 찢어져라 벨슈타인으로 향했지만 검은 장벽의 담장을 넘어가기도 전에 실드에 걸린 마법에 의해 튕겨져 날아갔다.

“으아아악!”

기절한 사내는 곧 소리도 없이 나타난 검은 망토를 걸친 자들에 의해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다.

* * *

최근 벨슈타인의 검은 장벽에는 실드가 여럿 겹쳐져 있었다.

산사태나 지진을 대비하는 게 한 겹. 장벽을 몰래 넘으려는 침입자를 차단해 튕겨 내는 게 한 겹. 그리고 마지막 한 겹은 공작과 길리아트가 힘을 다해 구현해 둔 것이었지만 어떤 힘에 대비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검은 날개 기사단의 단장이자 제1부대 소속인 자르가는 고문관에게 침입자의 정보를 캐내라는 명을 내린 후, 공작에게 고하기 위해 집무실에 들었다.

“……감히 벨슈타인의 벽을 넘으려는 미친 자가 있었나.”

실로 몇 년간 없었던 일이었다. 도적은커녕 얼치기 소매치기범조차도 벨슈타인 성은 돌아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벨슈타인의 검과 마법은 날카롭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차림새와 소지품을 보니, 타국의 용병인 것 같습니다.”

자르가가 통통한 금화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의뢰를 받고 성안에 침입하려 한 모양입니다.”

“……그렇군.”

다소 심각한 사안임에도 주군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한참 고신을 받고 있으니, 출처는 곧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자르가의 보고에 루이비드는 당연하다는 듯 짧게 답했다.

“사살해.”

“……예?”

누가 사주했는지 알아내는 것이 정석이라고 믿는 기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루이비드가 다소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두 번 말해야 듣나?”

“아닙니다. 각하.”

자르가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주군은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짐작 가는 출처라도 있으신 겐가.’

자르가가 물러간 후, 루이비드는 오도독 사탕을 깨물었다. 지독하게 올라오는 단맛에 그는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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