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8)화 (18/282)

<18화>

기다란 눈매가 휘어지며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엘링턴은 그 미소에 속지 않았다.

의심에서 위협으로 넘어가는 주군의 붉은 눈이 번뜩였기 때문이었다. 그 살벌한 눈빛에 엘링턴은 허겁지겁 고했다.

“……실은 따로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브나크는 예로부터 유리 공방으로 유명했지 않습니까.”

“과거엔 그랬다만. 왜?”

“유리공예를 다시 살릴 방법이 있습니다.”

“발루크를 족치기라고 하라고?”

“……그것보단 더 평화적인 방법입니다. 돌아오는 황후 폐하의 탄신일에 이브나크의 유리 공예품을 진상하는 겁니다.”

“……그걸 계기로 다 꺼진 불씨를 살려 보겠다?”

“예.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을 물건을 바친다면, 제국 전역에서 의뢰가 빗발치겠지요.”

황후는 제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니만큼 그 영향력이 실로 대단했다. 고작 한 번 걸친 옷과 장식들이 사교계에 불길처럼 번지고 황후 따라잡기에 나선 귀족 여인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황후의 탄신일에 귀족들이 열을 내고 온갖 귀한 진상품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황후의 눈에 한 번 들기만 해도 가장 효과적인 광고 효과를 보게 되니.

그 속에 벨슈타인이 끼어야 한다는 것은 달갑지 않았으나 그로써 이브나크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이마를 매만지던 공작이 짧게 평가했다.

“나쁘지 않군.”

주군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제법 마음에 든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무미건조한 말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쓸 만한 장인들은 발루크가 데려갔거나, 공방을 접었을 텐데.”

“우선 현황을 파악해 보고 없다면, 이제부터 모집해야 합니다. 도움을 받을 사람도 있습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공작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가늘어진 눈으로 날카롭게 물었다.

“……자네 생각인가?”

공작의 미덥지 않은 눈빛이 날아들자, 엘링턴은 속으로 ‘윽’ 신음하며 사실을 고했다.

“……실은 루시엘 아가씨의 의견입니다.”

“루시엘…… 이라고?”

“예, 제 고민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의견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루시엘 아가씨는 아무래도 보통의 어린아이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외견은 무척 사랑스러우시지만요.”

공작은 딱히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루시엘의 결연하던 그 눈망울을 떠올렸다.

‘공작님께 거래를 제안하러 왔어요.’

‘벨슈타인을 지킬 방법을 알고 있어요.’

“확실히 다른 아이와 달랐지.”

엘링턴은 주군의 눈치를 보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 아이의 가능성을 좀 더 보고 싶군. 이브나크 시찰을 허락한다.”

공작은 루시엘이 얼마나 더 빛나는 원석일지 궁금해졌다.

* * *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링턴은 서둘러 루시엘이 있을 도서관으로 걸음 했다.

오늘도 간이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은발의 작은 소녀가 보였다.

아는 체하려던 엘링턴의 녹안이 이내 흐려졌다. 딱딱한 테이블에 앉아 자기 몸보다도 더 커다란 책을 들고 있는 루시엘의 모습이 무척이나 불편해 보인 탓이었다.

보통 아이보다도 체구가 작은 루시엘에게 공작성의 모든 가구는 혼자 이용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잠시 후 엘링턴은 가구 창고에서 간이 소파를 발견하곤 해맑게 웃었다.

키제프 공자가 어린 시절 사용했던 소파였으니, 루시엘의 키에도 적당히 맞을 듯했다.

“이 소파를 도서관 안쪽으로 옮기도록.”

엘링턴의 지시를 받은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마침 도서관에 도착하니, 책을 꺼내기 위해 서가 사다리에 매달려 팔을 뻗고 있는 루시엘의 모습이 보였다.

자칫하면 떨어질라 퍽 아찔하게 보여서 엘링턴은 서둘러 다가갔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루시엘을 안아서 바닥에 사뿐 내려놓았다.

“앗……. 엘링턴?”

“도와드릴게요. 어떤 책을 꺼내 드릴까요?”

“저기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있는 푸른색 표지 책이요.”

“아, 이 책 말이군요.”

“네.”

엘링턴은 눈앞에 놓인 책을 쉽게 꺼내서 루시엘에게 안겨 주었다.

“고마워요.”

루시엘이 고른 책은, 마법학 책들 중 하나였다.

‘아가씨가 마법에도 관심이 있으신 건가?’

엘링턴의 의아한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루시엘이 재빨리 덧붙였다.

“레오니 공자도 마법을 하길래, 저도 마법이 궁금해져서요.”

“벨슈타인은 마법의 힘을 타고났기에 어린 나이부터 마법을 발현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일반 사람은 제법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마법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배우실 수도 있습니다. 후천적으로 마법을 발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까요. 길리아트 각하를 한번 찾아가 보세요.”

엘링턴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루시엘은 하인들이 테이블 옆으로 가져다 놓은 간이 소파에 시선을 주었다.

푸른색 벨벳이 덧대어진 작은 소파였다. 루시엘의 키에 꼭 맞춘 듯한 작은 크기라,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쉽게 앉을 수 있었다.

“키제프 공자님의 소파였는데 이제는 루시엘 아가씨가 잘 쓰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옮겼습니다.”

‘키제프의 소파구나.’

그 말을 듣자 루시엘은 어쩐지 소파가 더욱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작은 몸을 포근하게 감싸 주는 소파가 마음에 든 루시엘은 편하게 머리와 온몸을 기댔다.

책을 읽다가 이따금 잠들 수도 있을 만큼 편안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두 발이 닿는다는 것.

“발이 바닥에 닿아요!”

루시엘이 감격한 듯 외치자 엘링턴이 쿡, 하고 웃었다.

“잘됐습니다. 아, 루시엘 아가씨. 각하의 허락을 받아서 이브나크로 시찰을 떠날 예정입니다. 말씀하신 공방 장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주신다면, 그를 찾기가 더욱 수월할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셨다니 정말 잘됐어요. 그럼 잠깐만요.”

루시엘은 가방에서 깃펜과 종이를 하나 꺼냈다. 그러고는 장인에 대한 정보를 적어 엘링턴에게 넘겼다.

분명 하멜이란 성씨를 가진 이브나크 출신의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그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게 아쉬웠다.

그가 유리관을 제작하면서 황태자나 보좌관이 없을 때 루시엘과 짧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그는 유리공예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대단했다.

“이걸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루시엘 아가씨.”

“네?”

“늘 신세만 졌으니, 오늘은 좋은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가씨가 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응?”

엘링턴이 말을 끌면서 더듬기에 루시엘은 자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링턴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성 밖의 작은 숲속이었다.

청명한 푸른 하늘 아래를 떠도는 양떼구름, 시원한 나무 그늘과 풀꽃, 잔디가 깔려 뛰어놀기에 그만인 곳이었다.

중앙에는 원목으로 만든 그네와 미끄럼틀, 시소와 목마 등 간단한 기구들이 있었다.

“오래전 길리아트 전하께서 도련님들을 위해 만들어 주신 놀이터랍니다. 키제프 도련님이 이곳에 오셔서 가끔 그네를 타곤 하셨지요. 레오니 도련님은 방 안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하시지만요.”

“아…… 그렇군요. 이곳, 마음에 들어요. 자주 올게요.”

루시엘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아가씨께서 책을 좋아하셔서 흐뭇하고 대견합니다만, 아이들의 의무는 역시 노는 것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드신다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은 노는 게 최고라니.

그런 말을 해 주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는데. 루시엘은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졌다.

햇살 아래 녹안을 빛내면서 엘링턴이 곱게 웃었다. 그를 제 편으로 만들어 두길 잘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네 타실래요? 밀어 드릴게요.”

“네!”

“꽉 잡으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 루시엘은 그네의 양쪽 줄을 꼬옥 쥐었다.

“하나, 둘, 셋!”

엘링턴은 루시엘의 당근 가방을 팔목에 살짝 끼운 채, 그네에 올라앉은 루시엘의 등을 가볍게 밀어 주었다.

루시엘은 다리를 쭉 펴고 그네를 탄 채 높이 올라갔다. 그네를 타니, 놀이터 너머 숲속의 호수까지도 보이는 듯했다.

포로롱, 하늘을 노니는 푸른 새도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정말 동심으로 돌아간 듯 까르르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 본 적 없었던 웃음소리였다.

“자아, 한 번 더 갑니다.”

엘링턴이 루시엘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아주 살짝 밀었음에도 루시엘을 태운 그네는 저만치 높이높이 나무 꼭대기가 보일 만치 솟아올랐다.

루시엘은 아무 생각 없이 머리를 비운 채 노는 일이 좋은 거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 * *

“루시엘, 가신들이 네 이야길 더 듣고 싶어 하더군.”

아침 일찍 찾아온 공작의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저를요?”

“그래. 산사태를 예측했던 일에 대해 영민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이들도 있지만, 반신반의하는 이들도 있지. 결혼 후엔 벨슈타인에서 지내야 하니 이참에 그들과 안면을 익혀 두는 것도 좋을 거다. 오늘 오전 정무 회의에 같이 갈 테냐?”

그리 묻는 공작의 얼굴도 내심 루시엘이 같이 가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갈게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벨슈타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몇 개 더 알려 주면 될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있는 것들. 그렇지 않아도 후작가에서 들은 것들이 좀 있었다. 카빌 후작은 골동품이나 경매소만 들락거린 것이 아니라, 도둑 길드도 운영했고 암흑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도 관련이 꽤 있었다.

그가 이룬 부의 대부분은 불법적인 행위로 이루어진 자금이었다.

그 과정에서 밀수꾼들이 물어다 주는 고급 정보도 많았다. 후작의 집무실에 손님이 올 때면 사용인 대신 루시엘에게 차 심부름을 시켰는데, 티룸에 귀를 대면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곤 했다.

‘뭐가 좋을까?’

루시엘은 문득 문 앞에 서 있는 호위 기사의 갑옷을 유심히 살폈다. 투구와 부츠를 제외한 몸통과 팔, 다리 부분이 금속판이 하나로 이어진 갑옷은 강해 보였지만, 무척 무거워 보였다.

루시엘은 기사에게 다가갔다.

“기사님? 그 갑옷 어떤가요? 실제 그걸 입고 싸울 때 좋은가요? 너무 무겁지 않아요?”

“아… 확실히 무게가 꽤 나갑니다만 이만큼 튼튼한 갑옷은 없답니다.”

루시엘의 뒤로 다가온 공작이 기사를 보며 말했다.

“플레이트 아머는 강철로 만들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웬만한 검으로는 찌르지도 못한단다.”

“아…… 그치만 망치로 맞으면 찌그러질 거 같아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강철 갑옷이 최선이다. 이만 갈까, 루시엘?”

“네…….”

루시엘은 기사를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래, 그게 있으면 벨슈타인 병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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