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9)화 (9/282)

<9화>

놀라는 모습만큼은 두 사람이 참 닮았다. 두 부자는 충격적이었는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홉 살이면 마냥 어리진 않은 것 같아요.”

루시엘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겉모습은 아무리 봐도 예닐곱 살 어린아이로 보이는데 가끔 어른처럼 말하니 신기할 노릇이었다.

“어쨌든 벨슈타인 성에 머무르게 되었군. 환영한다, 루시엘. 그리고 고맙다. 네 덕분에 미리 대비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할아버님 덕분이에요.”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보며 빙긋 웃어 주었다. 그러나 공작이 그 틈에 슥 끼어들었다.

“아직 좋아하긴 일러. 미리 말해 두지만, 네 정혼 당사자는 지금 아카데미로 떠나서 이 성에 없다. 결혼하는 당사자의 의견도 물어봐야겠지. 당연한 사실이지만 만일 그 애가 반대한다면 결혼 계약은 언제든 취소될 수 있다.”

루시엘이 자그만 어깨를 살짝 늘어뜨렸다.

당사자의 거절이라면.

그건 루시엘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아직 어리니까 결혼을 하기 싫어할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홀로 살았다고 들었다.

어쩌면 독신주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벨슈타인을 떠나야겠지.’

그러나 키제프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자신 때문에 모든 걸 잃었던 그에게, 이번 생에서는 어쩌면 자신이 그의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만나면 잘 보여야지.’

얼굴이 예쁘지 않으니 상냥하게 굴어야 할까? 짧은 고민을 마치면서 루시엘이 말했다.

“알아 둘게요. 그럼 저, 여기에서 지내도 되는 거지요?”

“그래, 일단 계약은 산사태 건부터 마무리 짓고 하도록 하지.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얼마든지 지내라. 보호해 주겠다. 에바, 밖에 있나?”

잠시 후, 대기하고 있던 그녀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예, 가주님.”

“저 아이에게 동관의 방을 내어주도록.”

“알겠습니다.”

동관이라면, 둘째 공자와 이따금 방문한 손님들이 머무는 건물이었다.

공작은 루시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선 사람 꼴부터 좀 만들어 놔. 밭에서 구르다 온 강아지가 따로 없군.”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루시엘에게서 나는 냄새에 그는 괴로웠다.

“예. 알겠습니다.”

공작은 지나치게 청결에 집착하는 결벽증이 있었다.

서재에 루시엘을 들여놓았다는 사실부터 그가 아이에게 얼마나 큰 관대함을 베풀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링턴이 성에 도착하는 대로 불러 주게.”

“예? 엘링턴 부관님은 이틀 정도 자택에서 휴가를…….”

그러자 공작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진 반납했어.”

“……그, 그러셨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만드신 것 같은데,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에바는 정신을 추어올렸다.

똑똑.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작이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엘링턴 스튜어트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각하.”

“내일 와도 되는데.”

입에 침 한번 안 바르고 그런 말씀을?

지켜보던 모두가 공작의 능청스러운 거짓말에 혀를 내둘렀다.

“루시엘, 모르거나 어려운 것이 있다면 나에게 물어보렴. 앞으로 잘 부탁한다.”

길리아트가 루시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루시엘은 그 따뜻한 손을 맞잡았다.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루시엘의 단풍잎 같은 손이 노공작과 악수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공작은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있었다.

“지켜보겠다, 루시엘.”

“앗, 네. 저 많이 노력할게요.”

루시엘이 자그만 손을 맞대면서 말했다. 공작의 곁에서 갈색 머리의 청년이 루시엘을 보고 저 꼬마 아가씨는 누굴까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시엘.”

“네…….”

“소개하지. 이쪽은 내 부관 엘링턴 스튜어트.”

“엘링턴, 이쪽은 나의 임시 계약 며느리 후보.”

“허, 임시라는 말로도 충분하지 않으냐. 게다가 루시엘 말고는 없는데 후보라니?”

길리아트의 물음에 공작이 딴청을 피웠다. 지켜보던 엘링턴이 재빠르게 말했다.

“아아, 그렇습니까. 정말 사랑스러운 영애십니다. 저는 공작 각하를 보필하는 직속 보좌관이자, 부관 엘링턴 스튜어트라고 합니다.”

엘링턴이 한 걸음 다가와서 루시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아, 저는 루시엘이에요.”

계약 전이지만, 오르비아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루시엘의 태도가 공작은 마음에 들었다.

곧 엘링턴의 우려스러운 말이 돌아왔다.

“하지만 각하, 며느리로 들이기엔 어린 분이 아닙니까.”

엘링턴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공작이 다소 우쭐거리듯 말했다.

“저래 보여도 루시엘은 아홉 살이다.”

“예에?”

“……엘링턴 자네도 놀랍지?”

엘링턴 역시 눈이 두 배는 커졌고, 길리아트와 에바도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예, 좀. 아아, 아가씨. 너무 놀라서 죄송합니다. 이상해서 놀란 게 아니라, 너무 작고 귀여우셔서 그렇게 자라셨을 줄 모르고.”

횡설수설 변명을 둘러대는 갈색 머리 청년도 마음에 들었다.

“……자주 있는 일이에요. 괜찮아요.”

루시엘은 어쩐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세간에는 마족과 결탁한 범죄의 온상, 악의 소굴로 알려진 벨슈타인 공작가지만…….

막상 와 보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에바의 안내를 받으면서 루시엘은 총총걸음으로 뒤따랐다. 머릿속으로는 위치를 외우는 중이었다.

공작의 서재와 집무실, 회의실이 있는 이곳은 성의 본관이었다.

에바가 뒤를 돌았다. 루시엘은 실내화에서 뾱뾱뾱 소리를 내면서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그만 아기 오리 같았다. 에바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루시엘 아가씨. 다소 정신없으셨지요?”

한꺼번에 많은 어른을 만나 아이로서는 피곤했을지 몰랐다. 게다가 벨슈타인 공작과 노공작은 성인도 상대하기 버거운 상대이지 않은가.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다들 밝고 화목하신 것 같아요.”

평소 공작성의 살벌한 분위기만을 겪어 왔기에 에바는 그저 미소로 답했다.

‘실은 하루가 멀다고 원수처럼 싸우던 분들이에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루시엘 아가씨가 벨슈타인 성에 머무르게 되셔서 다행이에요.”

마님께서 돌아오시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모르겠지만……. 에바는 우선 이 꼬마 숙녀가 만들어 주는 몽글몽글한 분위기를 믿고 싶었다.

‘제발 평온하기를.’

루시엘의 자그만 고개가 까닥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다행이라고. 저 그런데…….”

“네?”

“아까 남긴 파르페, 다시 먹어도 될까요?”

에바를 올려다보면서 아주 진지하게 묻는 루시엘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방으로 안내해 드린 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루시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 * *

“안 들어가시나요?”

“앗, 네.”

루시엘이 한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방이었다. 아이보리와 베이지 톤으로 맞춰진 인테리어, 코코아색 가구들과 중앙에 커다랗게 자리한 침대 아래에는 부드러운 러그가 깔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따스하고 말랑말랑, 포근해지는 느낌.

“임시로 마련해 드린 방이라 루시엘 아가씨가 사용하시기엔 불편한 점이 많으실 테지만,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요. 전용 시녀는 바로 배치될 예정……. 왜 그러세요?”

“정말 여기에서 지내도 돼요?”

“물론이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우선 목욕부터 하고 편안하게 쉬시는 게 좋겠어요.”

에바가 방에서 나가자 루시엘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몸이 자유로운 상태로는 이렇게 좋은 방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내 방…….”

백작가와 황궁의 호화롭던 방은 유리관 바깥에 있는 풍경일 뿐이었다. 루시엘의 손으로, 발로 직접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곳은 아니다.

‘마음껏 만질 수도, 누울 수도 있어.’

루시엘은 침대로 다가가서 앉아 보았다. 루시엘 같은 아이는 여덟 명이나 누워도 될 정도로 넓고 폭신폭신한 침대였다.

‘눕기만 해도 사르르 잠이 올 것 같아.’

손을 대기만 해도 부들부들 촉감이 좋은 이불에선 갓 세탁한 좋은 향이 났다.

에바가 시녀들과 함께 돌아왔다.

“아가씨를 돌봐 드릴 시녀들이랍니다. 파르페는 여기 둘 테니, 목욕 후에 드세요. 카스테라와 데운 우유도 함께 가져왔어요.”

시녀들이 모두 루시엘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요. 저는 로즈.”

“전 베시라고 해요.”

“아, 전 루시엘이에요.”

“그럼 초면이지만 목욕부터 도와드릴게요. 아우, 시원하겠다. 그쵸?”

커다란 수건을 들고 있던 로즈가 생긋 웃으면서 애교스럽게 말했다. 베시는 욕실이 있는 방향으로 루시엘을 안내했다.

“이쪽이에요, 아가씨.”

욕실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대리석 욕조가 준비되었다.

“……저 혼자서 할 수 있어요.”

루시엘은 목욕이 싫었다.

시녀들이 제 마른 몸을 보고 만지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나중엔 다리가 불편해져 시녀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고통스러웠다.

루시엘의 그런 반응에 베시가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춰 오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부끄러우신가요? 그럼 잠옷을 입으신 상태로 씻겨 드릴게요. 그건 괜찮으실까요?”

루시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입고 있는 거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루시엘은 곧 시녀들에게 둘러싸였다. 로즈와 베시의 배려 덕분에 루시엘은 목욕을 잘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루시엘의 걷어 올린 옷 소매 사이로 언뜻 비치는 작고 앙상한 몸을 보게 된 로즈와 베시는 루시엘 몰래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귀족가의 아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루시엘에게 더욱 상냥하게 대해 주어야겠다는 무언의 눈빛을 나누었다.

“다음에는 거품 목욕을 하시면 재미있을 거예요.”

루시엘은 오랜만에 씻어서 무척 개운하고 기분이 좋았다.

베시가 루시엘의 몸을 부드러운 마른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처음에도 귀여웠지만, 깨끗이 씻고 나니 루시엘은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다.

젖은 은발 위로 수건을 뒤집어쓴 채 진홍빛 눈이 깜빡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눈밭을 뛰어다니는 아기 눈토끼 같았다.

“우리 아가씨. 어쩜 이렇게 토끼 같으신가요? 귀여우셔라.”

붉은 머리의 로즈가 크흑,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눈은 정처 없이 흐물거렸다.

검은 머리의 베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엘 아가씨는 어쩜 눈도 정말 반짝반짝 예쁘세요.”

두 사람의 칭찬에 루시엘은 쑥스러워서 아무 말 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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