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이동 게이트를 지나 마차는 계속 달렸다.
정신이 든 루시엘은 차창에 달린 커튼을 걷고, 조심스레 밖을 살폈다.
‘언제 도착할까?’
이상했다.
분명히 낮이었을 시각인데, 왜인지 밖은 사방이 어두웠다.
“꼭 밤인 것 같아요.”
놀란 루시엘이 말하자 길리아트는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벽의 경계를 지나면 해가 빨리 진단다.”
루시엘은 여전히 겁이 나 몸을 움츠렸다. 자신도 모르게 자그만 손이 길리아트의 옷깃을 슬쩍 붙잡았다.
“무서우냐?”
“조, 조금요.”
“마물이 가끔 나타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한다.”
“네. 할아버지 공작님.”
안심한 듯 고갤 끄덕이는 루시엘의 대답에 길리아트는 가벼이 웃었다.
“이제부터는 그냥 할아버지로 불러라.”
“……네?”
그렇게 편한 호칭으로 부르라니, 뜻밖의 말이었다. 그러나 의문이 길어질 것 없이 마차가 금세 벨슈타인 영지로 들어섰다.
어느덧 깊어진 어둠의 숲, 땅거미가 졌다.
밤의 벨슈타인 영지는 낮과는 달랐다.
그중에서도 마법에 걸렸다는 이 어둠의 숲은 밤마다 온갖 마물이 모여들고, 가시덤불이 행인의 길을 막는다.
밤이 되기 전에 장벽을 넘어야 안전하게 공작성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가시덤불이 장벽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가시덤불이 그 범위를 넓힐 것이다. 마차를 멈추며, 마부 도슨이 고했다.
“주인님, 가시덤불이 길을 터 주지 않습니다.”
“벌써 해가 지고 있구나. 어쩔 수 없지.”
길리아트가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쥐면서 루시엘에게 일렀다.
“잠시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네.”
오랜 마차 이동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루시엘은 꾹 참았다.
길리아트는 그런 기색을 알아채고는 물었다.
“밖에 나가고 싶니?”
루시엘이 머뭇거리다가 자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할아버지가 망을 보고 돌아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
길리아트는 마차 밖으로 나가 주위에 마물의 기척이 있는지 살피고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제 나가도 되겠구나.”
“네.”
길리아트는 한쪽 팔을 벌려 아이를 안아 들었다.
루시엘은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싱그러운 바깥 공기를 마시니, 어지럽던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벨슈타인 공작령에 왔어.’
소문보다는 덜 무서워 보이지만, 어둠이 깔려 오는 숲은 스산해지고 있었다.
잿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 위로 손톱 달이 떴다.
암녹색 덤불 너머에 높다란 검은색 장벽이 보였다. 어찌나 긴지 육안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안아 든 채, 가시덤불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불씨를 소환해 덤불을 태울 생각으로 지팡이를 들려고 할 때였다.
스스슷.
나무뿌리처럼 두꺼운 가시덤불이 절로 움직여 길을 터 주었다.
길리아트는 흠칫 놀랐다.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덤불이 스스로 길을 내주다니. 루시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 덤불이 움직였어요…….”
루시엘은 조금 무섭다는 생각에 길리아트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길리아트는 안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루시엘이?’
그는 루시엘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왠지 덤불이 네게 길을 터 주는 것 같구나, 루시엘. 덤불 쪽으로 한번 가까이 가 줄 수 있겠니? 무섭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
“……제가요? 그럴 리 없는데.”
“지금껏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말이다.”
그의 말에 루시엘은 약간 무섭긴 했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해 볼게요.”
“내가 있으니 걱정 말고.”
루시엘은 조심스럽게 덤불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스슷.
그러자 커다란 가시덤불의 줄기가 뒤로 물러나듯 움직였다.
루시엘과 길리아트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놀랍구나.”
“……! 할아버님도 한번 해 보세요.”
루시엘의 제안에 이번에는 길리아트가 덤불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지만,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나는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럼 제가 앞장서서 갈게요.”
“부탁한다.”
“네.”
루시엘이 총총걸음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사방으로 길을 터 주었다.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너비였다.
루시엘의 뒤를 따르면서 길리아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미소 지었다.
‘먼 옛날 이 숲의 주인은 요정이었다는데, 저 조그만 아이는 마치 요정 같군.’
“……아흔여덟, 아흔아홉, 백.”
루시엘이 백 발자국을 입으로 세면서 가자, 어느새 커다란 장벽에 이르렀다. 검은 장벽은 겹겹이 쌓여 그 층이 다섯 개나 되었다.
높이는 고개가 꺾일 정도로 높아서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새가 되어서 날아간다면 모를까.’
누구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 곳이었다.
입을 벌린 채 장벽을 올려다보던 루시엘의 뒤로 길리아트가 다가왔다.
“누가 생각했는지 참으로 대단하지 않니?”
루시엘의 입에서 멋지다, 대단하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그가 가슴을 더욱 폈다.
루시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초대 공작인 길리아트가 지었다는 이 검은 장벽은 아주 유명했으니까. 이 장벽 덕분에 마물과 다른 적으로부터 벨슈타인 공작성과 영지민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원하지는 않았다. 검은 장벽이 무너지는 날, 벨슈타인도 같이 무너졌으니까.
‘나중에 저 장벽을 보강하는 제안을 드려야지. 후일에 대비할 수 있게.’
루시엘은 얼른 생각의 고리를 접고, 그가 기대하는 말을 해 주었다.
“제 평생 본 건축물 중에 최고로 멋있어요! 이런 걸 생각해 낸 사람은 분명 천재겠죠?”
루시엘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리 말한 순간, 길리아트는 입가에 포실한 웃음이 맺히고 말았다.
“……훗, 천재라. 아무렴 천재고말고.”
마차는 총 일곱 개의 문을 통과해 공작성을 향해서 달렸다. 장벽 안으로 들어오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가지런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농장과 목장들, 커다란 물레방앗간, 끝없이 늘어진 번화가.
수없이 오가는 마차와 사람들까지.
마치 하나의 작은 나라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질 좋은 의복을 걸치고 카페나 광장 계단에 앉아 한적하게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겉으로만 봐서는 누가 귀족이고, 누가 평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여유로운 그들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루시엘이 창가에 바싹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길리아트는 루시엘에게 시내 구경을 꼭 시켜 주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마차가 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뾰족한 첨탑으로 가득한 공작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 건물의 테두리에는 하늘색 타일이 장식되어 있었다.
‘멋지다.’
동화 속에 나오는 곳 같았다.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성이라서 루시엘은 그만 마차 의자에서 일어나려다가 몸이 기우뚱했다.
키가 작은 루시엘에겐 마차 좌석도 너무 높은 탓이었다.
루시엘은 아차 싶으면서도 여전히 발그레한 볼로 공작성을 내다보았다. 길리아트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아가, 조심하렴. 마차 안에선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한단다.”
“앗, 네…….”
루시엘이 다시 의자에 올라앉았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은 고정되지 않아서 마차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거렸다.
공작성이 가까워질수록 길리아트는 노파심이 들었다.
제 아들이자 현 가주인 루이비드는 루시엘에게 차갑고 무심한 반응을 보일 것이 뻔했다.
‘녀석은 냉정하고 성질이 고약하기가 짝이 없는데……. 루이비드가 루시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어쩌긴. 내가 나서서라도 루시엘을 보호해야지.’
길리아트가 홀로 고민하고 있을 때, 루시엘은 생각보다 아름다운 벨슈타인 영지와 공작성의 풍경에 안심했다.
쿵쿵쿵.
자그만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설렘과 기대감.
‘아주 오래전에 이런 감정은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루시엘은 입꼬릴 살짝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크게 소리 내서 웃고 싶은데, 그녀는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입 모양으로 웃을 뿐…….
* * *
노공작의 귀환에 단정한 의복을 갖춘 총 집사장 에바가 달려왔다.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벌써 20년째 공작성의 집사로 일하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큰 주인님.”
에바의 시선이 주인의 뒤에 따라온 자그마한 여자아이에 닿았다. 행색은 초라하지만 아이는 정말 자그맣고 귀여웠다. 특별한 눈 색도 이목을 끄는 데 한몫했다.
“큰 주인님, 이 아이는.”
“아, 여기 있는 이 꼬마 숙녀는 손님이다. 가주를 만나러 왔다는구나.”
루시엘은 분명 무시받을 것이라 예상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백작저에서는 사용인을 포함한 모든 어른이 그랬으니까.
그러나 이어진 것은 뜻밖의 눈 맞춤이었다. 붉은 단발머리가 인상적인 집사장은 다소 딱딱한 인상이었지만, 루시엘에게만은 상냥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루시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공작성에 이렇게 어린 숙녀가 오신 것은 처음이에요. 저는 벨슈타인 공작가의 본성을 총괄하는 집사장 에바입니다.”
“저는 루시엘이라고 해요.”
“그렇군요, 루시엘 아가씨. 우선 응접실에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곧 가주님께서도 내려오실 거예요.”
에바의 안내를 받은 루시엘은 응접실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길리아트도 그런 루시엘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루시엘은 고개를 들어 응접실 천장에 매달린 원형의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외관만큼 실내 역시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기품 있고 깔끔한 인테리어에 루시엘은 이곳이 꼭 마음에 들었다.
검과 방패 위 검은 드래곤 휘장들, 흰색의 사슴 조각상, 응접실 가운데에 졸졸 흐르는 하얀 실내 분수 따위를 구경하면서 루시엘의 눈동자는 쉼 없이 굴러갔다.
열심히 성을 구경 중인 루시엘은 호기심 많은 다람쥐 같았다. 길리아트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루시엘, 이곳이 마음에 드냐?”
“네. 할아버님만큼 멋진 곳이에요.”
루시엘이 눈망울을 빛내며 말했다.
“크흠, 그… 그러하냐?”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이래서 다들 손녀가 최고라고 했던 건가?’
자신이 하는 모든 말에 귀 기울이는 귀여운 아이의 모습에 길리아트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가신들이 왜들 그리 손녀가 최고라며 자랑하는지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의 주름진 눈이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저벅, 저벅.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한 남자의 등장에 루시엘도, 길리아트도, 곧 자리로 돌아온 에바도 모두 동작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