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5)화 (5/282)

<5화>

“그게 정말이냐?”

“네. 꿈에서 봤어요. 제 꿈은 잘 맞거든요. 조금 후, 카빌 후작님이 도자기에 50만을 걸 거예요. 그다음 70만을 걸으시면 돼요.”

“음. 알았다. 네 말대로 해 보마.”

아이의 놀라운 말에 그는 쉬이 믿기지는 않았지만, 속는 셈 치고 넘어가 주기로 했다.

루시엘의 말대로 날렵한 수염을 가진 자, 카빌 후작이 말했다.

“집에 하나 두면 좋겠소. 50만 틸링이면 충분하지!”

노공작이 놀란 눈동자로 루시엘을 본 후, 손을 들어 말했다.

“70만 틸링.”

“네, 70만 틸링 나왔습니다. 다음 없으십니까?”

카빌 후작은 돈을 더 쓸 생각은 없는지 잠자코 앉아 있었다. 다음 경매에 전부 쏟아부을 모양이었다.

“70만 틸링 낙찰입니다!”

루시엘은 그에게 약간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뿌듯해졌다.

이어서 다음은 모두가 고대하던 화가 마르노사의 작품이 화려하게 등장했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모두가 기다리던 세계적인 화가 마르노사의 최신작 <두 개의 문>입니다!”

실제로 기어서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크기의 그림이었다.

두 개 중 왼쪽 문은 황금으로 이루어진 독수리와 사자, 월계수, 아름다운 남녀가 조각되어 있었고. 오른쪽 문은 아무런 무늬 없는 검은색 문이었다.

“두 개의 문은 각각 천국과 지옥을 상징한다지요. 자, 그럼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100만 틸링부터 시작된 금액은 200만, 500만, 1000만을 훌쩍 넘어갔다.

“5000만 틸링 부르겠소!”

이만하면 낙찰받겠다 싶은 모양인지 카빌 후작이 외쳤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누군가 1억을 외쳤고, 카빌 후작이 다시 1억 5천을 외쳤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곁에 있던 노공작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5억 틸링.”

“무려 5, 5억 틸링 나왔습니다. 다음 누구 안 계십니까?”

엄청난 금액에 모두가 입이 쩍 벌어졌다.

다른 경매를 입찰하는 바람에 카빌 후작의 수중에는 1억 8천 틸링의 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림은 노공작에게 낙찰되었다.

“그림 한 점에 5억 틸링이라니 과해요.”

“과연 벨슈타인가다운 재력이야!”

경매가 끝나자 카빌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루시엘은 그의 눈에 띄기 전에 얼른 모자를 눌러썼다.

‘후작은 이 시점에도 보석안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몰라.’

영문도 모르고, 노공작이 루시엘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 집에 데려다주겠다. 어디로 가면 되겠니?”

“이, 이따 말씀드릴게요.”

루시엘이 얼른 그의 뒤로 숨어 버렸고, 그를 주시하고 있던 카빌 후작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보았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밖에는 벨슈타인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에 걸린 은빛 휘장에는 검은색 드래곤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마차를 모는 말도, 바퀴조차도 전부 검은색이었다.

마왕 벨슈타인, 이라는 말이 절로 어울리는 크고 웅장한 마차였다. 어른 열 명이 타도 부족하지 않을 크기였다.

‘굉장해. 황성에서도 이렇게 큰 마차는 보지 못했는데.’

경매에서 낙찰받은 그림과 도자기는 이미 마차 안으로 옮겨져 있었다.

마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마부가 고개를 숙이며, 노공작과 루시엘을 맞이했다.

“아가야, 네 덕에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구했구나. 고맙다.”

“……아, 아뇨!”

아직 그 가치를 알 수 없을 텐데도 그는 감사를 표했다.

‘진짜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어쩌면 벨슈타인의 어마어마한 금고에는 티도 안 날 금액이겠지만.

“일단 타거라.”

루시엘은 노공작과 마주 보듯 앉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더 위압적이고 눈매가 매서웠다. 하지만 아까도 느꼈듯이 따스한 분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루시엘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자그만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내가 무서우냐?”

“넷? 아, 아뇨. 달콤하고 따뜻하신 분 같아요. 무척이나.”

루시엘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끝장내던 키제프 폰 벨슈타인의 그 눈과 똑같은 붉은 눈이었다.

일렁이는 붉은 눈은 시선만으로도 상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묘한 기운이 있었다.

“허허, 달콤하다라. 그런 말은 평생 처음 들어 보는구나.”

노공작이 참지 못하고 한참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니 다소 딱딱해 보이던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 보였다. 왠지 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곧 고양감을 접은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루시엘을 보며 말했다.

“그래, 네 집이 어디라고?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

“……아, 그건. ……저는 갈 곳이 없어요.”

꼬질꼬질한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던 루시엘은 모자를 벗었다.

‘할아버지 공작님에게는 내 눈을 보여 줘도 될 것 같아.’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은 맑은 눈망울로 그를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절 벨슈타인 공작가로 데려다주세요.”

그의 눈동자가 몹시 커졌다. 그제야 아이가 특별한 눈을 가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눈이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군.’

“아가, 네 이름이 무엇이지?”

“루시엘이에요. 오르비아 백작가의 루시엘…….”

오르비아 백작의 이름을 대고 싶지 않았지만, 신분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이런 몰골을 하고 있으니……. 그 역시 루시엘의 행색에서 이미 어느 정도 사정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렇군. 좋은 이름이구나.”

“벨슈타인 공작님을 만나서 꼭 드릴 이야기가 있어요.”

“이런, 작위를 넘겨준 게 아쉽기는 처음이구나.”

낯선 아이에 대한 경계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드는 아이였다.

‘그 근거 없는 확신이 나쁘지 않다고까지 느껴지니 신기하군.’

게다가 그간의 경험과 세월로 인해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난 자신이었다.

그가 나직이 말을 덧붙였다.

“난 길리아트다. 가자. 현 가주에게 안내하지.”

길리아트는 이후 루시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렇게만 말했다.

길리아트 폰 벨슈타인.

그는 벨슈타인가의 초대 공작이었다. 유희 나온 드래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는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이런저런 참견을 하거나 취미 생활로 노년을 보내는 중이었다.

“저, 정말로요?”

루시엘은 믿기지 않아서 눈을 더욱 동그랗게 떴다. 뒤늦게 루시엘이 자그만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어……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공작님.”

루시엘이 일어나 허리까지 숙였다.

멀뚱한 표정과 어색하고 뻣뻣한 인사에 우스꽝스러운 호칭까지. 길리아트는 아이의 순수한 모습에 그만, 웃어 버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왜 웃으시는 걸까?’

루시엘은 영문을 몰라 눈동자를 끔벅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리아트가 마부석을 향해 말했다.

“출발하게.”

“예, 주인님.”

그의 명이 떨어지자,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덜컹거림이나 흔들림 하나 없이 푹신하고 편안한 착석감이었다.

루시엘은 커다란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아늑해서 금세 잠이 솔솔 올 것만 같았다.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릴 줄은 몰랐지만.’

드디어 벨슈타인으로 가게 되었다.

목적을 달성하니 긴장이 풀려서일까. 자그만 몸은 노곤함으로 가득 찼다.

루시엘은 편안한 마차 의자 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그만, 꿈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 * *

아이는 아주 평온하게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들었다.

‘어린것이 얼마나 곤했으면 불편한 잠자리에서도 저렇게 행복하게 잠들었을까?’

문득 길리아트는 저 아이 또래의 손주 녀석을 떠올렸다.

‘그 녀석도 잘 때만큼은 온순했지.’

뜻밖에 만난 자그만 여자아이는 참으로 맑고 순수하고 영특했다.

아이의 눈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을 만큼 고귀하게 빛났다.

설화에 등장하는 요정의 눈이 꼭 보석 같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이의 눈도 비밀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저 아이라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던 차가운 손주 녀석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에 길리아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슬며시 지워졌다.

‘오르비아 백작가의 아이라고 했나.’

오르비아 백작은 최근 떠오르는 신흥 부자 반열에 올랐는데, 아이는 도무지 그런 부유한 백작가의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

평민의 아이라고 해도 저것보다는 나은 물건을 걸쳤을 것이다.

낡고 해진 원피스와 신발, 엉겨 붙은 긴 은발.

행색뿐 아니라, 디저트를 먹을 때도 평소 그런 것은 겪어 보지도 못한 듯 신기해했다. 무엇보다도 아이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양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흐음, 분명한 건 오르비아 백작이 질 나쁜 몹쓸 놈이라는 거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사정은 짐작되지 않지만, 아이가 왜 집을 나오려고 결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벨슈타인은 수도 아르테에서 훨씬 북쪽이다. 라파예트 산맥만 넘어가도 매서운 추위에 살이 에일 텐데. 저런 옷차림으로는 데려갈 수 없었다.

길리아트는 마부에게 말했다.

“도시를 떠나기 전, 상점가부터 들러야겠다.”

* * *

루시엘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나 포근하고 아늑해서 푹 자 버리고 말았다.

‘……응?’

루시엘의 몸을 따뜻하고 두툼한 담요가 감싸고 있었다. 머리에도 작은 쿠션이 받쳐져 있었고 마차의 좌석은 루시엘이 사용하던 작은 지하실 방 잠자리보다도 안락했다.

‘진짜로 푹신해. 아까는 없었는데 배려해 주신 걸까?’

루시엘은 건너편에 지팡이에 손을 얹은 채 앉아 말없이 눈을 감고 있는 초대 공작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면 무뚝뚝하고 무서운 인상인데, 저렇게 계시니 퍽 친근한 할아버지 같았다.

‘실제로도 따스하고 자상하고, 또 배려 넘치는 분이야. 할아버지 공작님은.’

코와 턱에 매달린 흰 수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밀크티 위에 얹어져 있던 그 몽글몽글한 우유 거품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거 맛있었어. 또 먹을 수 있을까?’

벨슈타인가의 다른 사람들도 할아버지 공작님처럼 좋은 분일까?

현 벨슈타인 공작님은 어떤 분일까.

사실 온갖 무서운 소문 쪽은 그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퍼진 소문은 전부 거짓일지도 몰라.’

루시엘은 벨슈타인가의 사람들과 공작성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 몸이라 그런지 자꾸 피곤해지는걸.’

그런 핑계를 대며 루시엘은 다시 담요를 푹 뒤집어썼다. 또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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