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4)화 (4/282)

<4화>

그렇게 수레에 몸을 숨겨 들어오는 것까진 좋았는데.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벨슈타인 공작가의 사람을 어떻게 찾느냐가 관건이었다.

다행히 경매소 안은 제법 어두워서 테이블 밑으로 잘만 다니면 누군가에게 들킬 일은 없어 보였다.

루시엘은 급히 테이블 좌석 아래에 몸을 숨긴 채 생각해 보았다.

카빌 후작이 분명 ‘늙은이’라고 칭했으니까, 나이 든 사람일 것이다. 벨슈타인 공작가의 공작은, 루시엘이 성인이 되었을 때도 그리 나이 들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공작의 아버지일까?’

황성에 있을 때 황태자는 루시엘의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한때 장식품처럼 데리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귀족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폐쇄적인 현 공작과는 다르게, 전대 공작은 외부 출입이 잦다고.

어쩌면 예술품 수집이 취미일지도 모른다.

그때 루시엘이 숨어 있던 테이블 좌석에 누군가가 앉았다. 뚱뚱하고 살집이 많은 남자였는지, 코끼리처럼 굵고 튼실한 다리가 루시엘의 코앞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루시엘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몸을 옹송그렸다. 기회를 봐서 이동해야겠다.

탱그르.

그러나 순간 남자가 떨어뜨린 반지가 루시엘의 발 옆에 멈췄다.

“제길!”

욕설과 함께 남자의 머리가 테이블 아래로 향했다. 루시엘의 모자가 위로 들려졌다.

“꺅!”

우악스러운 손길이 루시엘을 끌어내 멱살을 낚아채 바둥거리는 꼴이 되었다.

“이런 좀도둑이 여기 숨어 있다니! 대체 내부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요? 내 반지를 훔쳐 갈 뻔했잖소!”

남자가 떨어진 반지를 들고, 소리를 바락 지르는 바람에 루시엘은 꼼짝없이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하지만 하지 않은 일까지 모함당하고 싶진 않았다.

“훔치지 않았어요. 아저씨가 그냥 떨어뜨린 거였잖아요.”

“거짓말이야!”

“어머머, 세상에. 어디서 저런 거지 아이가 들어왔을까.”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루시엘은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 많은 사람 중에 벨슈타인의 노공작도 계실까?

그렇다면…….

“난 거지가 아니에요! 벨슈타인가의 시종이란 말이에요!”

‘벨슈타인’이라는 말에 사람들의 이목이 더욱 쏠렸다.

“너 같은 것이 감히 벨슈타인가의 이름을 들먹여?”

경매소 지배인과 경호원들이 급히 달려와 뚱뚱한 귀족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리, 죄송합니다. 이런 일은 없었는데……. 다들 저 애를 끌어내!”

그 순간.

뚱뚱한 남자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모자를 벗으면서 말했다.

“잠깐. 실수하는 것 같은데. 귀족이라는 자가 부끄럽지도 않나?”

유달리 날카로운 붉은 눈이 인상적인 노신사였다. 커다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있던 신사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노인임에도 결코, 무르지 않은 단단하고 수려한 인상.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몸에 흐르는 기품.

누구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분명 대귀족일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 기세에 눌린 남자가 물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아까부터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네. 자네는 실수로 반지를 떨어뜨렸지. 아닌가?”

“그. 그건… 어쨌거나 신사께서 대관절 이 아이랑 무슨 상관이길래 이렇게 편을 드시오?”

“그 아이, 내가 데리고 왔다네.”

루시엘은 뜻밖의 말에 고갤 들었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던 노신사와 눈이 마주쳤다.

노신사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루시엘은 알아듣고 크게 말했다.

“이제 이거 놔주세요!”

노신사의 눈동자가 일순 짧게 흔들리더니, 남자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만 아이를 내려놓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을 겪을 걸세.”

“……예? 상관 마십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노신사가 곧장 움직였다.

우두둑.

“으아악!”

순식간에 남자의 관절을 꺾어 버린 노신사가 남자의 손에서 루시엘을 벗어나게 만들었다.

노신사가 남자를 놓아주곤 루시엘의 자그만 몸을 달랑 안아 들었다. 어찌나 키가 큰 거구인지, 루시엘은 마치 나무 위에 올라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짜로 크다.’

노신사가 귀족을 노려보면서 덧붙였다.

“벨슈타인을 건드리면, 누구든 용서치 않는 게 우리의 방식이고 철칙이라네.”

‘벨슈타인’이라는 말에 루시엘도, 남자도 모두 깜짝 놀랐다.

“베, 벨슈타인 고, 공작가? 히익! 딸꾹! 그럼 공작 전하십니까?”

노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과거엔 그랬었지.”

너무 놀란 나머지 남자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주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벨슈타인이래요.”

“벨슈타인 눈에 한번 찍히면 끝이라던데…….”

그러나 그 말소리도 노공작이 주변을 갈무리하는 시선 한 번에 모두 사그라들었다.

겁에 질린 귀족이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으로 분위기는 정리가 되었다.

노공작은 루시엘을 자신의 옆자리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루시엘은 처음으로 받는 타인의 친절에 어리둥절한 눈이었다.

“아가야. 이럴 땐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거다.”

“고…… 고맙습니다.”

루시엘의 눈이 더욱 댕그래졌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벨슈타인가의 시종이라고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그리하지 않았다면 모두 너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겠지. 하지만 다른 가문의 이름을 댔더라면 위험한 일이었다. 앞으론 그러지 말아라.”

“……아.”

드디어 벨슈타인의 노공작을 만났다. 그러나 뭐라고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서, 루시엘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혼자 온 거라면 잠시 여기 있다가 가렴. 그게 안전할 거다. 자, 먹고 싶은 것을 골라라.”

그는 자신 앞에 있던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루시엘은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지만 고를 수가 없었다.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루시엘은 다양한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 백작가에서는 물론이었고, 카빌 후작가에서도, 황궁에서도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더 투명한 보석을 만들려면, 맑고 투명한 걸 먹어야 한다!’

크리스털 페어리의 존재를 아는 자라면 믿고 있는 잘못된 사실이었다.

그 탓에 죽기 전까지 투명한 차나 액체, 건더기가 거의 없는 죽만 먹었다. 소량의 빵이나 고기를 먹는 일조차 매우 드물었다.

이런 화려한 디저트는 연회에서 구경만 해도 감시하는 시녀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니 알 수 있을 리가.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잘 몰라 금세 루시엘의 볼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따, 따뜻한 거로요.”

“그럼 따뜻한 밀크티가 좋겠구나. 생크림과 딸기를 얹은 타르트도 하나 주문하지.”

곧이어 홍차향이 우러나온 밀크티 두 잔과 생크림 딸기 타르트가 나오자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는 더욱 커졌다.

“몸을 녹여 주는 데는 따뜻한 밀크티가 최고지.”

노공작이 루시엘 앞에 밀크티가 담긴 머그잔을 놓아 주었다.

“뜨거우니 조심해라.”

“……네.”

루시엘은 양손으로 컵을 감싸 쥐고, 안에 든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얗고 몽글몽글한 거품이 올려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노공작이 먼저 컵을 들어 마시자, 그의 입가에 하얗게 우유 거품이 묻어났다.

루시엘도 따라서 머그잔을 들어 조심히 맛을 보았다. 우유 거품이 혀에 닿자 사르르 녹았다.

‘부드럽고 달다.’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쿡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알려 주었다.

“거품 아래에 진짜가 숨어 있단다.”

그러곤 티스푼을 건넸다.

스푼을 받은 루시엘이 살살 조심스럽게 하얀 거품을 걷어 냈다. 그러자 연한 갈색의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하고 달콤한 풍미가 났다. 티스푼으로 그걸 떠먹은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너무 달콤하고 맛있어.’

루시엘이 말했다.

“이렇게 달콤한 건 처음 먹어 봐요. 사르륵 잠들 때처럼 행복한 맛이에요.”

“처음 듣는 독특한 표현이구나. 저것도 먹어라. 네 몫이다.”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가 가리킨 접시를 보았다.

짧은 순간이나마 루시엘은 밀크티로 인해 행복함을 느꼈다. 그러나 딸기 생크림 타르트에 비하면, 밀크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포슬포슬한 구름처럼 부드러운 생크림과 상큼한 딸기, 바삭바삭한 타르트 과자를 한 입, 또 한 입 바지런히 깨물었다.

루시엘의 양 볼이 절로 부풀었다.

먹을 때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하모니란, 그야말로 천국에서 천사가 나팔을 부는 듯 황홀한 맛이었다.

타르트를 입안에 우걱우걱 채우고 있는 아이는 흡사 자그만 다람쥐 같았다.

“네 얼굴을 보니 하나 더 시켜야겠구나.”

노공작의 배려로 루시엘은 배불리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수 있었다. 곧바로 경매가 시작되었고, 루시엘은 곁에 앉은 노공작을 힐끗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지만 진짜로 만났어. 벨슈타인의 할아버지 공작님.’

루시엘은 살짝 식은 밀크티를 홀짝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말을 걸지? 우선은 경매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경매는 한참 동안 진행되었다. 진귀한 물건들을 이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하나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카빌 후작, 과거 그녀의 시아비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경매에 많이 참여하고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루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러던 중 루시엘이 익히 보던 물건이 경매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저건…….’

카빌 후작이 서재에 고이 모셔 놓았던 고대 왕국 이스카일의 도자기였다.

그러나 지금 경매소에서는 아무도 그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감정 마도구가 일상에서 쓰이게 되는 것은 훗날의 일이니까.

“어느 자작가의 뒷마당에서 나온 물건으로서 세밀하고 아름다운 도자기입니다. 20만 틸링부터 시작합니다.”

후작은 저걸 50만 틸링에 낙찰받았다. 거의 주워 간 수준의 낮은 가격으로 본래 가치는 1000배의 가격을 훌쩍 넘을 것이다.

루시엘은 옆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

아이의 시선이 느껴지자, 노공작이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잠시 귀 좀 주시겠어요?”

수줍게 건네는 루시엘의 말에 그는 흔쾌히 귀를 내주었다.

“제가 부자가 되게 해 드릴게요. 저 도자기에 입찰하세요. 70만 틸링으로.”

“……으음?”

“나중에 가격이 1000배는 넘게 뛸 거예요. 장담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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