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96화 (296/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96화

Last EP–프롤로그

한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숲이다. 나무 하나가 바뀐다고 숲이 변하지 않는다.

숲도 그럴진대 사람의 마음이 그리 쉽게 변할 리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편벽하고, 유전자에 지배되며, 그 유전자는 생존을 위해 타인을 포식하라고 명령한다.

인간도 동물이다. 인간의 사회는 짐승의 생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사람 또한 생존을 위해 뭐든지 하는 동물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당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한 수도권 난민운동권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 난민, 경기도 난민, 인천 난민은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하던 사람이! 북한 난민들은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헌터로 만들어 주겠다고까지 합니다! 이게 정상입니까!”

9시 생방송 뉴스 인터뷰에 출연한 경제관료는 이렇게 말했다.

“각성촉진제는 국가의 자산입니다. 그걸 멋대로 민간에 풀어버리겠다고 공언하는 건 책임 있는 공직자의 태도가 아니죠···”

부산 국회의사당 앞에 결집한 시위대를 이끄는 빨간 머리띠 행동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 거덜나게 생겼는데 빨갱이 난민이 웬 말이냐! 주사파 몰아내고 청정국가 건설하자!”

그 날 이후, 당장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북한 난민을 포함한 모든 난민을 서울시에 전격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서울시 당국의 결정을 향해 어마어마한 비난이 쏟아졌다.

이는 수십 년 동안 반공을 국시로 삼은 나라의 관성이었고, 동시에 생존을 위해 밥그릇을 챙기려는 사람들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국민적 반대는 원옥분 행정부가 난민 정책을 주도적으로 펼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전 국민의 과반수 이상의 단일된 의견이 앞으로 이어질 청와대의 판단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그게 뭐가 됐든 반쯤 미쳐 폭주하는 한승문보다는 낫겠다는 판단이다.

민주국가의 권력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정치인이 가진 권력의 총량은 언제나 유동적인 법.

바로 지금, 원옥분 대통령은 수십 년의 정치인생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

그렇게 칼자루를 손에 쥔 노인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서 책상 위에 놓인 넥타이핀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 * *

유재경이 전해 준 녹음기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건 이 나라를 위한 최선이었다.

하지만 한승문이 대체 왜 그걸 위해 자신의 정치인생을 내던졌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긴 안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없다.

대체 왜 지금까지 쌓은 모든 것을 내던졌는지, 대체 왜 잠재적 반란분자들에게 동정을 베풀었는지, 대체 왜 자신의 정적에게 칼자루를 넘겼는지…….

구시대의 잔재인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하여간 요즘 젊은 놈들 머리통 속이란 이토록 복잡기괴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한 젊은이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세상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삶을 불태우며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가 장례식장에서 흉이라도 덜 들으려면, 젊은이를 방해하지 않는 덕목을 보여야 할 것이었다.

한때, 자신도 이처럼 인생을 불태우던 시절이 있었음을 추억하는 노인이 피식 웃었다.

“어이, 이 실장.”

“말씀하십시오, 각하.”

이미숙 대통령 비서실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통령의 하교를 받들었다.

“지하철이랑 강북에 거주지 조성하고 이북 난민들 단계적으로 수용 시작해. 대신 충청방어선 아래로는 한 놈도 내려보내지 말고.”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이산가족 상봉도 좀 틀어주면서 분위기 만들고, 뭐……. 맨날 하는 그거 있잖아?”

“국정원 심리전단 테스크포스 가동하겠습니다.”

“댓글알바 풀겠다는 말을 뭐 그리 거창하게 해. 아무튼 적절하게 조치하고. 그리고, 그, 뭐냐…… 빨갱이들 있지? 국정원에서 파악하고 있는 진또배기 빨갱이들.”

“잠재적 반란분자들 말씀이십니까?”

“문제 일으키기 전에…… 응?”

“신속히 조치하겠습니다.”

* * *

국회 연설에서 눈물을 흘리는 서울시장을 보며 전직 대통령 양모 씨는 한국대학교 연극동아리의 저력에 감탄했지만.

대부분의 정계 종사자들은 한승문의 정치적 생명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가 가해졌음을 깨닫고 경악했다.

수많은 이들이 한승문과의 친분을 부정하며 손절을 시작했고, 새롭게 등장한 한승문주의-‘전인류 초인화’는 이단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국민당의 원내대표, 아니, 전직 원내대표 이호정은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계산이 있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결국 사람들은 받아들이게 될 거야.’

국방당의 탄핵 소추에 이은 한승문의 자진 사임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계가 극한 대립을 이어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감철 정무부시장이 권한대행을 맡은 서울시 시정부와 세종정부청사가 중심이 된 중앙정부는 한 몸처럼 난민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내려오는 난민들은 지하철을 통해 강북에 정착했다. 그리고 무너진 도시를 빠른 속도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맨땅에서 일구는 토목사업과 강제징용에 아주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이미 수도권에서 쏟아지는 1천만 난민들을 감당해본 적이 있던 세종시 관료들은 3백만 명도 되지 않는 북한 난민들을 서울 일대에 효율적으로 정착시켰다.

그리고 헌터 업계는 그런 정부에게 전적으로 협조하며 서울의 치안을 유지했다.

이렇듯 한승문의 행보와 원옥분 행정부의 조치는 기이할 정도로 착착 맞아 떨어졌다.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국가 재건을 위해서라도 북한 난민 수용은 생산 인구를 늘리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다…….’

‘언젠가 북한 난민들이 참정권을 얻게 된다면, 그들이 누구에게 표를 던질지는…….’

지금은 한승문이 모두에게 욕을 먹지만, 북한 난민들이 이 나라에 섞이는 날이 온다면 평가가 완전히 뒤바뀔 것이다.

물론 그날이 오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어쩌면 10년, 20년 이상이 소모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만 한다면…….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북한 출신인 아이는 부모로부터 한승문에 대한 찬양을 들으면서 자랄 것이다.

지금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다음 세대는 별다른 고뇌 없이 얄팍한 시각으로 한승문을 찬양하며 자신의 도덕성을 뽐낼 것이다.

한승문의 결단은 실책이 아니라 선견지명으로 포장될 것이며, 그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은 한승문을 선지자로 추앙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상관없다. 10년이 지나도 한승문은 40대고, 20년이 지나도 한승문은 고작 50대다.

‘그날’은 반드시 온다.

그때, 한승문은 대통령이 된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이호정은 그 옆에 반드시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얻고서 양일호를 찾아갔다.

“야, 호정아……. 한 형 지금 괜찮은 거냐? 연락도 안 되는데 이거 너무 막나가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빨리 따라와 봐!”

이호정과 양일호는 국회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며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호정과 양일호의 양복바지가 같은 호흡으로 움직이며 나풀나풀 펄럭거렸다.

“난민운동권을 포섭해야 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북한 난민을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과 수도권 난민을 포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거의 똑같아. 힘을 합치면 목소리가 더 커지지만, 서로 싸우면 자기 먼저 챙겨달라는 지리멸렬한 구도가 된다고. 지금 난민운동권이 북한 난민을 배척하는 건 자살행위야. 그 두 세력을 하나로 묶어서 거대한 이익집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성적으로 따지면 그렇긴 한데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게 되나? 서울 출신 난민들 은근히 괄시받은 거 맞잖아. 근데 북한 난민들 갑자기 챙겨주니까 뿔난 거 아냐.”

“팔랑귀들은 조금만 약 쳐주면 우리 식대로 끌고 나갈 수 있어. 문제는 정치인들이야. 운동권 온건파들이랑 지금이라도 입을 맞춰야 해.”

“김목윤?”

“지금은 그 양반이 제일 낫겠지.”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김목윤 목사는 충청도가 유재경계에게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개인 팬덤과 기독교 난민들의 지지로 당선되어 국회에 사무실을 차리고 있었다.

이호정과 양일호는 긴장한 표정으로 김목윤 의원실 문에 노크했다. 지금 협상에 수도권-북한 난민의 통합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호정이 김목윤의 의원실에 들어선 순간,

그녀의 냉철한 표정에 빠직- 핏대가 섰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호정 전 원내대표님. 그리고 양일호 전 장관님…….”

“하하! 이거 새로운 손님들이 오셨군요!”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하는 김목윤 의원의 옆에 청중엽 전 대표가 앉아 언제나처럼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호정은 그 호탕한 웃음에서 ‘넌 이미 한발 늦었다’는 비웃음을 읽었다. 이호정이 다소곳이 웃으며 독설을 날렸다.

“어머, 청중엽 대표님. 여긴 어쩐 일로…….”

그녀의 말에서 ‘여기’는 표면적으로는 김목윤 의원의 사무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회를 의미하며, 따라서 ‘네가 여기 왜 있냐’는 말은 ‘너 낙선했잖아’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청중엽은 웃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며 대범하게 대꾸했다.

“제가 이번에 외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유권자분들의 결정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 나라에 더 헌신할 길이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요.”

청중엽이 자연스럽게 김목윤 목사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김목윤도 거기에 기분상해하지 않는 기색을 보아하니 둘이 의기투합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그러던 참에 여기 김목윤 목사님이 참된 마음으로 국민들께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제가 후원회장을 맡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놓이더군요. 하하!”

“아이고, 대표님. 이렇게 띄워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하하! 아닙니다! 제가 또 독실한 신자 아닙니까. 장로 직분까지 있는 사람이 목사님 안 밀어주면 하나님께서 이놈! 하셔요. 정치적인 후원이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제가 목사님 사역하는 데 봉헌한다고 생각해주십시오.”

“하하…….”

이호정은 청중엽 당신 저번에 절 가지 않았냐고 구차하게 따질 자신이 없어서 아득바득 이를 갈았다.

양일호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국민당 당내 투쟁이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이호정의 속쓰림도 말이다.

* * *

세종시의 공무원들은 오랜 난민 구호 경험으로 난민들의 신변을 일일이 파악하고 의식주를 제공하는 게 오만이라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중요한 건 치안이다.

일단 치안만 빡세게 잡아 놓고 식량을 주기적으로 살포하면 난민들이 알아서 분배하고 알아서 암시장을 형성해 경제를 돌린다.

그 판단은 적절했다.

서울의 지하철은 여러 난민들이 증명했듯 생각보다 안전했고, 공적 자본이 투입되니 지하에 거주지와 농장까지 들어섰다.

그러나 경찰도, 검찰도, 초인지원청도, 이미 한계까지 몰린 상황. 사상 최악의 인력난 속에서 서울의 치안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서울시장 권한대행을 맡은 감철 정무부시장은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에게 도움을 청했다. 용돈 50만 원을 엄마 몰래 찔러준 것이다.

“지윤아…… 아빠가 요즘…….”

“응. 선아 언니랑 진운이 오빠한테 말은 해볼게.”

이에 평양을 거점 삼아 검은 괴수들을 소탕하던 압구정파와 동대문파의 거두는,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1세대 헌터들의 거취에 대한 영수 회담을 진행했다.

유엔군 사령부 구내식당 구석에서 떡볶이를 퍼먹던 홍선아가 핸드폰을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얀 머리카락이 머리의 움직임에 맞춰 찰랑거렸다.

그녀가 퀭한 얼굴로 단팥빵을 우물거리던 설진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야. 설진운.”

“왜요, 누나.”

“지윤이가 서울에 사람 딸린다는데?”

설진운이 독수리 타법으로 단톡방에 공손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모두가 한승문을 욕하는 와중에도 그의 연설에 고무되어 있던 1세대 헌터들은 이를 일종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압구정파와 동대문파의 주요 1세대 헌터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SOS 요청이 뜨자마자 꽃집, 주유소, 스튜디오, 지하철 출근길에 있던 퇴역 헌터들이 다시 결집했다.

고위 헌터들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기관은 초인지원청 공안관리국뿐이었다. 치안관 특유의 검푸른 코트를 입은 헌터들이 서울 곳곳에 투입됐다.

정부는 갑작스럽게 규모가 몇 배로 늘어난 치안관 조직을 경찰 간부가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최근 치안관을 둘러싸고 일어난 여러 사건도 그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

“뭐야, 시발.”

그 결과, 초인지원청 공안관리국장으로 여도연이 임명되었다.

조정식이 여도연의 개고생을 예감하며 음습하게 웃고, 여다솔이 별생각 없이 해맑게 웃으며 박수를 치는 와중, 여도연은 넋 나간 얼굴로 자신의 새로운 사무실과 멋들어진 크리스탈 명패를 바라보았다.

“아니, 씹…….”

“축하해요, 도연 씨! 아니, 국장님!”

“도연이는 믿을 수 있지. 암!”

“뭐야, 도연이 국장 됐어?”

국장에 대한 존경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헌터들이 검푸른 코트를 입고 우르르 몰려와 국장실을 점거하고 맥주캔을 까는 가운데,

여도연은 커다란 가죽 의자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며 빌어먹을 동생 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사달을 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어휴…….”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동생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어줘야 할 사람이 세상에 한 명 있다면, 그건 누나인 자신이어야 할 테니까.

오늘도 초인지원청은 평화롭다.

* * *

검은 괴수는 과대평가되었다.

정확히는, 동북아시아 위기 자체가 일종의 생존자 편향의 오류(Survivorship bias)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은 생환한 전투기의 상태를 분석하고 총탄을 가장 많이 맞은 부위에 철판을 둘러 보강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살아남은 전투기에 총탄 자국이 많이 남았다는 정보는, 그 부분은 총탄을 많이 맞아도 무사하다는 뜻으로 분석해야 했다.

오히려 총탄을 맞지 않은 부분에 철판을 둘러야 하는 것이 맞다. 그곳에 총탄을 맞은 전투기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한국의 상황 또한 이와 비슷하다.

망한 나라는 조용하지만, 망하지 않은 나라는 시끄럽다.

전 세계가 동북아시아 위기로 중국과 한국이 망한다고 경악하는 이유는, 중국과 한국이 아직 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며, 망하는 순간 세계 경제에 큰일이 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소국이 멸망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외신을 보았는가? 라고스의 2천 8백만 생존자들이 도시에 갇혀 죽어갈 때 누가 그 소식에 주목했는가?

자바 섬의 내전으로 4천만 명 이상이 기근에 시달렸을 때, 하이데라바드와 벵갈루루가 전면전 위기까지 갔을 때, 미국의 감염확산이 벨리즈를 휩쓸었을 때…….

국제사회는 조용했다.

전략적 침묵이다. 쓸데없는 소식까지 일일이 전달하면 사람들이 지나치게 불안에 떠니까.

하지만 동북아시아는 만주 탈환이라는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 세계의 이슈를 끌어모았고, 모든 카메라가 주목하는 와중에 대참사가 발생하며 전략적 침묵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언론에서 광고를 팔아먹기 위해 무절제하게 동북아시아 위기를 조명하는 것이다··…….

―라고 천금순은 생각했다.

“흐음…….”

천금순의 시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증시는 실제보다 훨씬 저평가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국이 망하기 직전이라고 평가하는 중이었으니 공포가 국가신뢰도를 무너뜨린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지금껏 입은 피해는 딱히 없었다. 생산성이 거의 없는 인구가 소폭 감소한 것은 그녀의 계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개문 사태 이전에도 한국은 서울이 중심이 된 도시국가에 가까웠다. 지금 한국은 4개 도시의 연합체다.

공업의 부산,

농업의 광주,

행정의 세종,

금융의 제주.

그중 하나라도 무너진 곳이 있나?

설령 대도시 하나가 검은 괴수로 인해 침식되더라도 열 받은 헌터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다 때려잡고 다닐 나라가 한국이었다.

어지간하면 안 망한다.

그런데 4개 도시 중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음에도 한국 금융이 붕괴한 건 금붕어들이 패닉 셀을 한 덕분이었다.

천금순은 금붕어가 아니었으므로 한국 내에 있는 자산을 매입하고, 코스피 상승에 베팅하며 주가를 방어했다.

쓸데없이 유재경이 감동한 목소리로 ‘네가 드디어 개과천선을 했구나’라는 내용의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했지만 천금순은 딱히 애국심이라고는 없이 투자할 만한 곳에 투자했을 뿐이다.

하지만 권력 있는 사람의 환심을 사두면 좋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뭘요. 나라가 어려운데 작은 손이라도 도와야죠…….”

[아……. 내가 천 사장님을 지금껏 잘못 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역시 한승문 시장 동료라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었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금붕어들 같으니.

천금순은 싸늘한 눈빛으로 통화가 끊어진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당연히 도움을 줘야 한다는 태도로 나서는 걸까?

천금순은 돈만 있으면 아내가 둘이어도 경찰이 눈을 감는 나라, 아이가 골프채로 맞아 죽을 지경이어도 어른들이 외면하는 나라가 딱히 아깝지 않았다.

그런 나라에는 가치가 없다.

그리고 가치가 없는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녀의 원칙은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승문은 그녀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가치가 높은 사람이었다. 이번에 북한 난민들을 포용하면서 언젠가 대통령이 될 것을 확정 지은 사람이었으니까.

친구기도 했고.

“흐음…….”

그녀가 한승문의 결단이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헌터로서의 양심에서 비롯된 일이었는지 고민하던 중,

“사장님.”

비서실장의 보고가 그녀의 상념을 깨뜨렸다.

“무슨 일이죠?”

“뒤폰에서 물에 섞인 검은 괴수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용해제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잘만 응용하면 수트에 적용해서 전용 갑옷을 만들 수도 있고요.”

“그래요? 잘됐네요.”

“저어……. 자칫하면 뒤폰이 헌팅디바이스 사업에 뛰어들 수도 있을 듯합니다. 혹 검은 괴수를 상대할 수단을 개발하는 데 자본을 투자하심이 어떠신지요?”

“됐어요. 우리는 실드코어만 잘 만들면 돼요. 박 이사가 옆구리 찔러서 온 거죠? 흔들리지 말고 실드코어 용적이나 늘리라고 해요. 스텔스 기능 프로토타입도 안정화에 서두르고요.”

“예,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은 충성스럽되, 납득하지 못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국제 헌팅디바이스 시장의 주도권을 뺏길 수도 있는데 실드코어에만 올인하는 모습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금붕어 같은 생각이다.

실드코어는 그깟 괴수들 상대로 몸이나 지키자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괴수로부터 착용자를 지킬 수 있는 역장을 점점 더 거대하게 개량하고, 마침내 그곳에 스텔스 기능까지 추가한다면…….

그 실드코어를 컨테이너선에 장착하는 순간, 해양괴수는 배를 습격하지 못하게 된다.

바다가 다시 인류의 손에.

아니, 그녀의 손에 들어온다.

“후후후…….”

천금순은 GS그룹의 지주회사이자 천씨가문의 근본인 천목해운, 그 회사의 이름을 GS 오션으로 바꾸는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악하게 웃으며…….

* * *

서울의 대부분은 폐가에 가깝다.

상대적으로 재개발이 더뎠던 강북은 더더욱 그렇다. 여전히 게이트가 곳곳에 널려 있고, 잔해 더미에서는 심심찮게 소형 괴수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북한 폐가에 비하면 남한 폐가는 대갓집이고, 북한 괴수에 비하면 남한 괴수는 치와와다. 총 들고 세금 걷으러 다니는 군벌이 없다는 점에서부터 이곳은 천국이었다.

문제는 도심지에서 농사가 불가능해 식량을 구할 길이 없었다는 점이지만, 그건 남한 정부의 지원으로 어느 정도 해결됐다.

14세 소녀 리은혜는 유리창이 죄다 박살난 고층 빌딩의 26층에 있는 빈 방을 찾아내서, 안에 있던 소형 괴수를 물대포로 쏘아죽이고 그곳에서 숙면을 취했다.

“엄마…… 아빠…….”

꿈속에서, 리은혜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났다.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부모님은 커다란 한옥에 머물고 계셨다. 리은혜는 부모님의 품에 달려가 안긴 뒤 마당을 뛰놀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누님, 이 녀석 웃는데요?”

갑작스런 목소리에 리은혜는 잠에서 깨어났다. 음침하게 생긴 청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은혜가 청년을 향해 손을 들었다.

푸슉-!

“아, 씹!”

리은혜의 손에서 쏘아져나온 물줄기를 청년은 너무나도 가볍게 막아냈다.

판단은 빨랐다. 리은혜는 곧장 뒤돌아 짧은 다리로 다다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도주는 비상계단에 다다르기도 전에 저지됐다.

치안관 조정식이 발버둥치는 소녀의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놔라! 놓으라! 이 변태 같은 종간나 새끼야!”

“이 녀석 입이 좀 험하네.”

한참이나 거친 말을 내뱉던 리은혜는 조정식이 어떤 여자 앞에 그녀를 내려놓자 입을 꾹 다물었다.

험상궂은 얼굴과 더러운 눈매, 그리고 마치 하얀 눈호랑이를 보는 듯한 기백에 리은혜는 벌벌 떨었다.

“……살려주십시오!”

여도연은 개구리처럼 바짝 엎드린 리은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야. 네가 이 구역에서 물 판다는 꼬맹이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물 판 돈에서 반절을 갖다 바치겠습니다!”

“귀한 하이드로키네시스를 물 장사나 하게 둘 순 없지. 넌 이제부터 강제 등교다.”

“예?”

“넌 이제부터 헌터 아카데미 1학년이다. 교복 사줄 테니까 순순히 따라와.”

리은혜, 아니, 이은혜는 체포됐다. 이제 외로운 소녀는 학교라는 교도소로 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위기와,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삶을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다.

용기 있게.

* * *

빅토르 리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나타샤 프리마코프의 눈동자였다.

“나…… 타샤…….”

“당신! 정신이 들어요?”

“내가…… 얼마나 누워 있던 거지?”

폭탄 테러 이후 정신을 잃었던 빅토르 리는 부산의 VIP 병실에서 일어나자마자 극동군벌이 반쯤 해체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쩔 수 없었어요. 선양 게이트 사태가 속수무책으로 만주를 무너뜨리는 바람에…….”

“핵……! 핵무기는! 핵무기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지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제가 목숨을 걸고 지켜냈어요, 그리고 블라디미르 야고슬라비치 제독이 캄차카의 미사일 기지를 수습했지요.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던 자였지만 막상 위기가 찾아오니 의리를 지키더군요.”

빅토르 리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진 사이 세계가 불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놓고 웃었다.

“거 봐. 그 친구는 믿을 만하다니까. 자네가 평소 의심병이 너무 심했던 거야…….”

“그럼 뭐해요. 다른 인간들이 대부분 배신했는데.”

“이 차가운 시베리아에서 배신할 곳이 어디 있다고. 결국 다 모닥불 곁으로 모이게 되어 있어.”

“글쎄요. 남한 정부가 북한과 서울을 개방하니 블라디보스토크의 인구 상당수가 도시를 떠나던데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빅토르 리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사이 일어난 일들에 대해 듣고서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이 인공적인 게이트를 열고, 검은 괴수가 동북아시아를 휩쓸고, 유엔군 사령부가 조직되어 연합군이 출격하고…….

“게이트를 닫을 수가 없다고?! 그럼 검은 괴수는 어떻게……!”

“처음에는 정말 암담했죠. 하지만 용해제가 개발되고 놈들을 상대할 방법이 생기면서 그럭저럭 봉쇄선은 유지하고 있어요. 본의 아니게 북부방위선 계획이 성공했네요. 그게 평양-블라디보스토크 라인이 될 줄은 몰랐지만…….”

“하바롭스크……. 하바롭스크는 어떻게 됐지?”

“그 새끼들이 가장 먼저 배신했어요. 죽든 말든 맘대로 하라죠.”

“나타샤.”

“중국의 보급이 끊기면서 헤이룽장성에서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인 걸로 알아요. 알렉산드르 놈이 도시의 정권을 장악했고, 검은 괴수들은 미 공군의 도움을…….”

빅토르 리는 자신의 세력이 반쯤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다. 느슨한 군벌 체제를 유지하는 믿음이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나타샤의 분투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캄차카라는 두 핵심을 지켜냈지만, 동북아시아의 환경 자체가 너무나도 열악해진 상황.

하지만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면,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하는 건 쉬운 일이다.

어떻게든 세력을 다시 구축하려던 빅토르 리가 ‘한승문주의’라는 신흥 사상에 대해 주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사람을 헌터로 만든다고……?”

암울한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모두가 평등하게 기득권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특히, 러시아는 이런 사상이 꽃피기 아주 좋은 곳이었다. ‘평등’과 ‘협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혁명의 수도였으니…….

“이 사상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어디 가서 사회주의 짝퉁 아니냐고 이야기하지는 말아요. 남한은 반공국가니까.”

“흐음…….”

사회주의는 독재와 부패에 물들며 몰락했다. 그 이미지 또한 우스갯소리로 소모되는 게 아닌 이상 굉장히 부정적이다.

하지만 한승문의 사상은 부의 분배와 같은 민감한 정치적 사안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인류 공동의 번영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세련됐다’.

사람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이 생각은 이념으로서의 조건을 충족했다. 그 가능성에 주목한 빅토르 리는 곧장 행동에 착수했다.

그러나 빅토르 리가 유엔군 사령부의 전선기지가 위치한 평양에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한발 늦었음을 깨닫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평등’과 ‘협동’을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러시아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평양의 민주 시민 여러분! 우리 모두 헌터가 되어서 괴물들과 맞서 싸웁시다!”

“총폭탄 정신으로 무장하고 맞서 싸우면 이 세상에 깨뜨려 부수지 못할 것이 없습네다!”

“경애하는 한승문 지도자 동지의 영도에 따라 번영대국에로의 길을 지향하자!”

* * *

“그놈의 반동, 반동, 반동! 따지고 보면 우리네도 반동 아니었습니까? 대체 언제까지 옛 사상을 추종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잡아다 매달아야 한단 말입니까!”

“이건 우리네가 바라던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지나친 숙청으로 혁명 동지들도 회의감을 느끼고 이탈하고 있습니다…….”

“시민군을 징집할 권한을 받은 이상, 언제까지고 각성자들이 비각성자를 통제하는 체제를 유지할 순 없습네다. 평양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해요…….”

평양의 민주화 혁명정부는 반민주주의자 진압의 끝에는 붕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끝없이 사회주의자들을 때려잡아야 했으며, 정치-외교적으로 이 난관을 돌파하려 해보아도 그들이 가진 국제적 위상은 남조선의 괴뢰국이라는 위치뿐이었다.

심지어 위에서 내려오는 검은 괴수들까지 상대해야 하는 현 상황에서, ‘한승문주의’는 인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좋은 타협안이었다.

그렇게 평양 민주화 정부는 수립 이후 처음으로 외교 무대의 주체로 나섰다. 그들을 가장 먼저 환영한 것은 평양 유엔군 사령부의 다국적 헌터들이었다.

“괴수를 때려잡는 데에는 국적이 없지.”

“맞아요, 헌터가 아니어도 싸울 수 있습니다.”

“니들이 바가지만 안 씌워도 우리가 괴수 잘 잡을 자신 있다고.”

평양의 시민들이 괴수 토벌을 명분으로 외세에 고분고분해진 것은 유엔군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다.

특히 한승문에게 인간적 호감이 있는 사람이 유엔군의 사령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존경하는 평양 시민 여러분!”

“잠깐, 저 여자 설마……!”

단상을 멀리서 올려다보던 빅토르 리는 은은한 후광을 두른 여성이 연단에 올라서는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노아 뤼미에르가 연단 위에 올라 평양 시민들에게 외쳤다. 그녀는 한참 전부터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니, 시민들 또한 감탄스런 시선으로 그녀의 연설에 집중했다.

“저의 친애하는 벗인 한승문 장관은 평생을 괴수를 처단하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 사람이 이제 평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삶은 자신이 거머쥐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서울로 보내십시오! 평양의 사람이 평양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헌터가 되어 세상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시다!”

노아 뤼미에르가 평양에서 ‘민심 장악’을 시도한 게 한두 번이 아닌 듯, 평양 시민들은 그녀에게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사실, 그들의 도시를 지키고 있는 샛노란 방어막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당연히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빅토르 리는 그 모습에서 조금 다른 가능성을 엿봤다.

“오호…….”

그것은 블라디보스토크-평양-EU의 연계였다. 이러한 외교적 구도는 모스크바를 고립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심지어 러시아 극동군벌이 북한 지역에 대대적으로 침입한 지금, 이 땅에 조화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새로운 길이 열린 듯한 기분이었다.

“나타샤, 나한테 좋은 생각이 났어.”

“제발 저 연단에 올라가서 한승문 어쩌고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겠다는 말만 아니길 빌어요.”

“나도 그 양반이랑 옛날에 한 번 마주친 적 있잖아? 그럼 친구라고 봐야지.”

“제발…….”

빅토르 리는 씨익 웃으며 연단을 향해 걸어갔다.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광대 노릇도 할 수 있었다.

* * *

“한국이 각성제를 무한정으로 푼다고!”

중국의 총통 자오펑이 충혈된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국가안전부의 리슈잉은 조금 기가 질린 듯이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한국의 유력한 정치인이 그렇게 주장했을 뿐이지요. 실질적인 영향이라고는 서울초인육성대학의 입학 제한이 조금 낮아진 게 전부입니다.”

“그게 어딘가!”

<북부방위선> 계획의 실패, 선양 탈환의 실패, 단둥 핵폭격의 실패로 정말 끝까지 몰린 자오펑 총통은 한 줌의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국 또한 자체적인 각성촉진제 레시피가 있고, 필요하다면 즉시 개발이 가능한 산업기반이 있지만, 5명에게 주사하면 1명이 죽어나가는 괴악한 품질이었다.

이는 비밀 생체실험에서 수차례 증명된 바 있다. 심지어 한국 각성제보다 초상능력자의 수준도 현저히 낮았다.

“한국이 당장 각성제를 무제한으로 공급한다면 억만금을 줄 수 있다고 전하게!”

“감청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내부적으로 각성제 레시피를 공개하자는 논의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렇다면 더 좋지!”

“CIA에서 개입하며 강제로 무산시켰다고 하더군요. 미국 내부의 초거대 PMC들이 각성제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하면 안보상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모양입-”

“이런 씨팔-!”

자오펑 총통에 벽에 크리스탈 잔을 집어던졌다. 유리 조각이 리슈잉을 향해 튀었지만, 그녀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국가안전부의 제복에 유리 조각이 박혔으니, 리슈잉은 조금 불쾌한 얼굴로 눈매를 찡긋거렸다. 하지만 그 표정을 즉시 숨겼다.

발톱을 드러내도 되는 순간은, 언제나 상대의 목에 비수를 꽂아넣을 때뿐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총통 각하.”

“후우…… 후우……. 아니, 아닐세. 내가 너무 흥분했군.”

자오펑은 약에 취한 사람처럼 한참을 헐떡이다가 떨리는 손을 휘저어 리슈잉을 쫓아냈다.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왕관의 무게로 인해 그의 눈빛에서 총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만 가보게. 잠깐 쉬어야겠어…….”

“알겠습니다.”

리슈잉은 고개를 푹 숙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결행하면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남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이다. 국가안전부를 온전히 손에 넣기 전까지는 발톱을 감춰야 한다…….

즉, 리슈잉이 국가안전부와 그곳에 소속된 헌터들을 완전히 장악한 순간, 그날이 자오펑 정권의 끝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버텨 줘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리슈잉은 호위병들의 경례를 받으며 어둑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복도의 그림자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 * *

시간이 갈수록 검은 괴수를 상대하는 전선은 점점 안정되어 갔다. 인류의 모든 과학력이 이 불가해한 재앙에 맞서기 위해 투입된 덕이다.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면 달러를 쓰는 나라가 있어야 한다. 한국과 중국이 무너지면 이제 달러를 쓰는 (나라 다운)나라는 유럽과 미국뿐이다.

아니, 이 세상에 남은 선진국이라고는 EU와 미국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멸망 시나리오가 구체화될수록 미 정부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점점 깨닫게 됐다. 한국과 중국이 증발하는 순간 세계 GDP가 얼마나 없어지는지에 대한 보고서는 세계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건 동북아시아 증권가에 만연한 공포를 심화시키기도 했지만, 동북아시아 위기를 해결하려는 세계인의 관심도를 더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그럴수록 검은 괴수를 상대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동북아시아 위기를 일종의 광고판으로 사용했다.

어느 회사가 검은 괴수로부터 착용자를 안전하게 만드는 전신 수트를 개발했고, 어느 회사가 강물에 섞인 검은 괴수를 융해시키는 친환경 독극물을 개발했는지를 두고 다투는 것이다.

이러한 기조를 고의로 부추기는 세력이 한두 곳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전 세계의 눈이 동북아시아로 향하게 됐다.

그리고 그곳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는 가장 화려한 광고판에게는 수많은 러브콜이 쏟아지게 되었다.

“또 뭘 걸치라고요……?”

이미 온몸에 각종 브랜드 제품을 걸치고 있는 설진운은 얼핏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다. 그런 설진운에게 추가적인 협찬을 제안하는 한국 공무원은 이미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이 회사가 아무래도 제주초상산업단지에서 영향력이 아주 강해서요. 아무래도 정부로서는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 협찬에 긍정적으로 응해주셨으면 하는 소망이…….”

“정말 그게 정부의 공식 입장인가요? 당신 부서가 아니라?”

“으으. 죄송합니다……!”

허리춤에 제각각 다른 회사에서 만든 검을 세 자루나 차고 있는 설진운은 멋들어진 마크가 박힌 장갑을 낀 손을 흔들며 공무원을 안심시켰다.

“아, 말이 너무 공격적이었네요. 짜증을 내는 게 아니라 정부의 공식 입장을 여쭈는 겁니다. 만약 정말로 정부가 저에게 이…… 양말을 신어주기를 바란다면 저는 얼마든지 신을 겁니다. 양말을 손에 끼고서 싸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협찬은 중간에서 누군가 리베이트를 받고 저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려는 것 같네요. 열심히 싸우는 사람을 불러내서 이런 일로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죄, 죄송합니다…….”

“물론 저에게 제안을 전하러 오신 분은 당연히 결정권이 없는 말단이시겠지요. 하지만 저한테까지 이런 제안이 쏟아지는데 다른 헌터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모두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익은 제쳐 두고 조금만 더 헌터들을 전격적으로 지원해 주세요.”

설진운은 반쯤 도망치다시피 떠나가는 공무원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대체 왜 욕심 많은 인간들은 이 시국에서까지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설진운의 어깨 위에 홍선아가 손을 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패션 감각을 절찬 활용한 덕택에 설진운과는 달리 뒤죽박죽인 협찬 제품을 걸치고도 세련된 옷맵시를 유지했다.

“우리 진운이, 이제는 공무원 상대로 말도 똑부러지게 하네?”

“갑갑해서요.”

“뭐가?”

“이 와중에도 협찬이나 리베이트가 끼어드는 이 바닥도. 그리고 비장하게 모여서는 협찬이나 받고 있는 우리들도.”

헌터의 상업화가 극단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세계 시장의 추세다.

그러나 설진운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모인 헌터들의 투쟁을 기억한다.

이렇게 상업화된 헌터 업계는 가끔 그 시절의 영웅들을 언뜻 모독하는 것처럼 비추어지기도 했다.

그런 설진운의 의문에 홍선아는 태연한 기색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괴수만 잘 때려잡으면 됐지 뭘 더 바래?”

“……하긴. 그렇죠.”

“영웅 대접 받으려고 싸우는 거 아니잖아. 네 소중한 사람들을 잡아먹은 괴수들을 떠올려봐. 개문 사태 당시에 튀어나왔던 놈들, 지금 생각해보면 좆밥들이지? 그치?”

“…….”

“네가 힘이 있어서 그런 여유까지 부리는 거야. 장비빨이든 현질이든 뭐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괴수부터 때려잡겠다는 독기를 다시 충전해 봐. 그때 네 친구들을 먹었던 ‘그 새끼’들을 떠올려 보라구.”

“후우…….”

“아핫! 이 정도면 동기 부여가 됐을까?”

설진운은 장난스럽게 웃는 홍선아의 얼굴을 찜찜한 눈빛으로 보며, 평소 못 미덥다가도 가끔씩은 믿음직한 이 인간의 오묘한 이면을 생각했다.

홍선아는 설진운의 그 표정마저도 재미있다는 듯이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깔깔거렸다.

설진운은 벌써부터 이 사람 밑에서 교육받을 새내기 헌터들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헌터 아카데미 가시는 날이 내일이었죠?”

“응!”

“이 동네는 제가 잘 막고 있을 테니까, 애들 살살 가르치세요.”

“알겠어!”

* * *

“에……. 그리고 뭐냐. 헌터가 총을 안 들고 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굉장히 위험한 마인드라고 봅니다! 꼭 적이 괴수라는 법도 없잖아요? 사람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코너에서 튀어나오자마자 기관단총으로 드르륵 긁어주면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

“그렇다고 총 들고 다닌다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고통받는 동료의 숨을 끊어주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아주 멍청한 마인드입니다! 힐러하고 엘릭서가 있는 이상 헌터는 어지간하면 안 죽는 초인이거든요! 제 경우에는 핵폭탄을 맞아서 피부가 다 벗겨지고 빨간 근육이 너덜너덜하게 드러난 데다 뼈까지 노출된 적이 있었는데, 여기 귀빈석에 계신 뤼미에르 씨가 중추신경을 되살려주신 덕분에 말 그대로 뼈가 끊어지는 고통을 겪어가며 가까스로 회생에 성공한 적이 있었죠. 그때 뱃가죽이랑 내장이 터져서···”

서울 헌터 아카데미 입학식의 훈화연설은 심약한 학생 몇 명이 울음을 터뜨리며 부모 손에 들려 나갈 지경이 되어서야 끝났다.

교장, 홍선아는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대강당에 모인 새내기 헌터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한승문이 주장한 각성제 무제한 보급은 국회의 결사반대로 무산되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서울 헌터 아카데미의 정원은 원래 계획되었던 인원의 다섯 배로 늘어났다.

남한, 북한,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등, 마력 적성 검사를 통해 선별된 우수한 학생들이 말끔한 교복을 차려 입고 줄지어 있었다.

이들 모두가 고위 헌터가 될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들이다. 오직 한 명, 강시호만이 이 쟁쟁한 아카데미에서 부정입학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 어떤 권력자도 서울 헌터 아카데미에 자신의 아이를 꽂아넣지 못했다. 강시호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감지윤의 멘탈 관리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제주 아카데미에 다니던 학생과 교사가 대거 전학했기 때문에, 강시호는 입학식에서부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느껴야 했다.

“쟤는 빽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1세대 헌터들 중에 성골들 있잖아…….”

“쉿! 여기 고위 헌터가 몇 명인데 뒷담이야……!”

최근 여론의 뭇매를 지독하게 맞아본 감지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 위축되어 강시호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나마 아이들 사이의 정치질에 익숙한 미사키 또한 일본인이라는 점에서 이지메 대상자였기 때문에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강시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뒷짐을 지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자신은 분명히 제주 아카데미에서 각성제를 주사 받았으니, 아직 그 능력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을 뿐 절대로 무능력자가 아니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은 아직도 강석호가 살아 있다는 굳센 믿음에 비견될 정도로 단단했다.

그러나 태어난 직후부터 얼마 전까지 단 한 차례의 기회도 받지 못한 소녀, 하이드로키네시스 이은혜는 그런 강시호를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감지윤, 이은혜, 그리고 강시호.

언젠가 선양 게이트를 토벌할 세 사람의 인연은 시작부터 조금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었다.

* * *

헌터 아카데미의 교장은 화염술사 홍선아지만, 아카데미의 이사장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비각성자였다.

그러나 그 어떤 고위 헌터도 아카데미 이사장을 괄시할 수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대통령 경호처에서 파견된 경호인력이 이사장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이유와 일맥상통했다.

무궁화와 봉황으로 장식된 화려한 나전칠기 명패는 어느 나라의 대통령에게나 어울릴 법했지만, 명패에는 <이사장 양판석>이라는 여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카데미 이사장 양판석은 텅 빈 응접실을 바라보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학생들이 입학한다고 해서 다과도 준비해 놓았는데……. 혹시 애들이 보기에는 내가 좀 어려워 보이나?”

“아뇨, 정말 친근해 보입니다만.”

“자네는 아부 좀 그만해…….”

“아부라니요. 절대 아닙니다.”

“허허…….”

양판석은 방금의 대화에서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그건 오래 전 언젠가, 관용차를 운전하던 수행비서와 나눈 대화와 비슷했다.

그 수행비서는 이제 아무런 공직도 없는 야인이 되어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앉은 자세에서는 일개 야인이라고 볼 수 없는 품격이 느껴졌다.

“그래……. 우리 전직 시장님께서 서울 헌터 아카데미에 일자리라도 구하려고 오셨나?”

“제가 여기서 일하면 욕먹습니다.”

“지금 나라에서 욕을 가장 많이 처먹어놓고 욕 먹는 게 무서워?”

“욕은 언제나 무섭죠.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요.”

공직도 없는데 무슨 정치냐-고 물어보는 건 너무 초보적인 대화였기 때문에, 양판석은 그를 보며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한승문은 지팡이를 들어 이사장실 구석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게임기나 몇 개 갖다 놓으십시오. 나이 어린 애들이 이사장이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가끔 놀러와서 놀 겁니다. 지윤이는 알면서도 올 거고요. 아마.”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만.”

한승문은 슬쩍 웃으며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양판석은 벌써 돌아가냐며 만류했다.

“아니, 벌써 가려고? 밥도 안 먹고?”

“여기 너무 오래 있다가 기자한테 찍히면 곤란해져서요.”

“하긴 뭐, 깽판 친 거 사이즈 보면 몇 년은 잠수 타야 돼. 내가 유학이나 보내줄까? 미국 대학에 교수로 꽂아줄 수도 있고.”

“영어를 잘 못해서 안 됩니다.”

“에잉. 구몬이나 먼저 끊어야겠구만.”

“하하.”

다행히 조만간 한국에 있을 것으로 보이니 양판석은 내심 안심했다.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서 양판석은 이제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한승문의 발길을 질문으로 붙잡았다.

“아, 여기는 늙은이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건가?”

“겸사겸사죠.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을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그랬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

한승문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떠나갔다. 양판석은 그가 떠난 이후에 혼자서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징그럽게 컸어…….”

불평하는 와중에도 양판석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의자를 젖혀 창문 너머의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지켜낸 하늘이었다.

“브이로그 찍기 딱 좋은 날씨구만…….”

* * *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지나간다. 갈매기는 짝을 찾아 울고, 파도는 조용히 모래사장으로 밀려든다.

바다는 고깃배 한 척 없이 한산했고, 부두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이 고요했다.

내가 알던 고향은 본래의 색을 잃고 이렇게 변해버렸다.

버려진 배에 녹이 슬었고, 바위에 엉킨 그물은 들러붙은 해조류로 가득하다.

이곳을 떠나간 사람들은 차선을 택한 대가로 버려진 사람들이었다.

쌀값 동결과 부동산 위기가 서민의 삶을 파괴했다. 그 누구의 악의도 없었건만 생존을 위해 차선을 택한 대가는 업보처럼 찾아온다.

그러나 이제는 이 풍경에도 상실 이상의 무언가가 있음을 안다. 갈매기와 파도, 그리고 사람이 떠나 재생되는 자연 따위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곳을 떠나서라도 계속되는 사람들의 삶이다.

일단 살아만 있다면 내일은 온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선택한 차선책에는 의미가 있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그리고 공동의 생존과 최대한의 선을 위하여.

비록 그 방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찾아왔을지라도, 그 질곡의 세월에는 분명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그것을 위해 스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부둣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파란 하늘이 붉은 석양으로 서서히 물들고, 너울 치는 바다는 그 빛을 받으며 별처럼 반짝거렸다. 구름 또한 하얀 고래가 아닌 선홍색 연기처럼 느릿하게 퍼져나갔다.

또 한 번의 하루를 가슴에 묻은 나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피채원이 내 뒤에서 나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머릿결이 바닷바람에 휘날린다.

“갈까?”

피채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나를 졸졸 따라왔다. 그러나 내가 운전석의 문을 열려던 순간, 내 손목을 잡으며 나를 제지했다.

“제가 운전할게요.”

“뭐라고?”

“저, 면허 땄거든요.”

피채원이 살풋 웃으며 면허증을 수줍게 보여줬다. 말 그대로 잉크도 마르지 않은 면허증이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저절로 웃음을 터뜨리며 녀석을 힐난했다.

“나 참. 비서 노릇 하면서 운전을 다 나한테 떠맡겨 놓고 이제 와서 면허를 따?”

몇 년 전이었으면 수줍게 입을 다물고 신발 바닥으로 땅을 비볐을 녀석은 이제 뻔뻔한 무표정으로 차갑게, 하지만 따뜻하게 대꾸했다.

“이제라도 땄으면 됐죠.”

“괘씸한 놈…….”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웃으며 조수석에 올랐다. 엔진 소리와 함께 차량이 움직이고, 과거의 트라우마도 슬며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피채원은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정면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내 심정을 읽고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세요?”

“뭐, 이 정도면 합격선이다.”

거짓말이었다. 녀석의 운전은 서툴고 거칠었으며, 차량이 덜컹거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거렸다.

하지만 피채원이 나를 해칠 리가 없다는 것. 그 믿음 덕분에 나는 조수석에서도 안심하고 차량 의자에 몸을 기대고 힘을 뺄 수 있었다.

피채원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그래. 그러니까 운전에 집중하렴.”

모처럼 운전대를 잡지 않고서 차에 타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심은 여전히 황량했다. 최근 화천에서 발생한 침식 사태가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모양이다.

아무리 검은 괴수를 상대할 방법이 많이 나오고 있다지만 대기권을 떠도는 낙진은 때때로 지상에 내려와 참사를 일으킨다.

거기에는 어떠한 악의도, 욕망도 없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재앙일 뿐이다. 게이트 사태 또한 그러하고, 갑작스럽게 횡단보도에 뛰어드는 아이 또한 그러했다.

책망할 길 없는 슬픔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도 연약하다. 운명과 우연의 장난에 너무도 쉽게 꺾여 버린다.

그런 생각을 하며 노을이 내려앉은 도시의 풍경을, 주홍색 하늘에 흘러가는 마알간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문득 피채원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 끝난 걸까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문득, 피채원이 차 안에서 울던 날이 생각났다. 분명 그날도 지금처럼 노을이 차 안에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운전대를 잡은 피채원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작게 흠칫거리는 녀석의 진동 사이로 불안으로 가득한 마음이 스며들어왔다.

그곳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이,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선양 사태로 인한 공포가,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대한 착잡함이, 북한 난민들의 삶을 바라보는 동정심이, 그리고 이 세상의 일부가 된 게이트 사태를 향한 원망이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각성제를 나눠주자는 주장이 고작 서울에 있는 학교의 입학 정원을 조금 늘린 데에서 끝나 버리고, 기껏 품기로 한 서울의 난민들은 차별과 멸시에 시달리며 범죄로 빠져드는 현실을 향한 절망이 있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고작 이곳에서 끝나 버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그래. 이 세상은 가혹하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이 불어오는 시대다.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의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서로를 향한 믿음을 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것이 이 겨울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채원아.”

“네, 의원님.”

“믿는다.”

“…….”

겨울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 겨울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

위대한 초인의 발걸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손길을 인도하는 것.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이어, 믿음과 신뢰를 통해 세상을 다시 재건하는 것.

거기에는 무언가를 덜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품에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앞으로의 세상에는 그런 부품이 필요했다. 기계적으로 제 임무를 수행하는 게 아니라 톱니바퀴와 톱니바퀴 사이에 몸을 던질 기름 같은 사람이.

가장 어두운 순간, 내일은 비가 그치고 해가 뜰 것이라고 선동하는 게 아니라,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차악과 차악의 갈림길 속에서 최선을 바라보는 순수함이.

나는 그것이 봄을 가져오리라고 믿는다.

“집에 가자.”

“……네!”

그러니 너에게 걸겠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해맑게 미소지었다.

* * *

초상사회.

게이트와 헌터의 시대. 정체 모를 괴수가 사람을 먹는 시대. 마석이 에너지가 되는 시대. 각성자가 어마어마한 부를 얻는 시대.

무너진 서울의 생존자들이 과거 재산 복구를 위해 화염병을 던지는 시대. 모든 부자와 권력자가 안전한 제주도에 모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를 만들어낸 시대.

초능력자가 TV에 나와 마법 같은 묘기를 선보이고, 어린 아이들은 검기를 휘두르며 괴수를 베어가르는 기사를 꿈꾸는 시대.

그리고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재앙에 시달리고, 거대한 위기 앞에서조차 단결하지 못하는 인류가 핵무기를 쥐고 서로를 노려보는 시대.

그런 시대에 정치를 한다는 건,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니, 자기야, 한 번만 들어봐요. 이거 정말 괜찮은 생각이라니까?”

“아카데미 애들로 헌터 아이돌 그룹을 만들자는 생각이 어디가 괜찮다는 겁니까!”

“아니, 딱 한 번만 애들 빌려주면 내가 진짜 뭔가 제대로 보여줄게요.”

“걔네 미성년자야 이 미친 인간아!”

때로는 서로의 생각이 부딪히기도 하고, 최악과 차악의 갈림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기도 한다.

정체 모를 재앙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의 삶을 짓밟으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남을 다치게 할 때도 있다.

“하늘에 있는 저 불꽃……! 홍선아다! 홍선아 헌터가 왔다!”

“기사회입니다! 부상자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아주세요!”

“치안관들을 전부 투입해! 테러리스트를 격멸하고 인질을 모두 구출해라!”

하지만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사람에게 이어지는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을 밀어내고 삶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노력은 영원히 이어진다.

“국회는 오랜 논의를 거쳐 ‘한승문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로써 모든 국민들은 본인의 선택에 따라 각성제를 주사받을 권리가 있으며…….”

“S급 염동술사, 감지윤 헌터의 공격대가 선양 게이트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지난 6년 동안 동북아시아를 파괴했던 검은 괴수가 무력화되었습니다!”

“유재경 대통령과 리슈잉 총통이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최종적으로 승인함에 따라 동북아시아에 마석본위 경제체제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승문 국무총리는…….”

앞으로 이어질 게이트와 헌터의 시대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Last EP

프롤로그

END

-작가 후기-

헌터와 게이트를 주제로 한 소설은 주인공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오면서 시작됩니다.

삶을 바꾸는 마법 같은 순간이 찾아오고, 주인공은 그 능력을 의지하며 세상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지요.

주로 깽판을 치곤 합니다.

돈에 미친 재벌과, 권력에 미친 정치인을 시원하게 무찌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영광과 명예, 그리고 부를 거머쥐지요.

그런데 그런 주인공에게 핍박 아닌 핍박을 당하는 정치인의 시점에서 헌터 소설을 바라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라는 생각이 이 소설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게이트가 열린 지 19년이 지난 세계를 배경으로 <그 헌터 세계의 정치가>라는 소설을 썼고, 그 소설을 조금 더 개량해서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라는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생존물입니다. 게이트와 헌터라는 설정을 파고들수록 세상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결과 주인공은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결국 살아남는 것, 생존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그것이 여러분에게 잘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여러분 각자의 방식대로 이 이야기를 충분히 즐겨 주셨다면 좋겠습니다.

이 소설의 후기를 쓰며, 몇 차례의 장기 연중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겠습니다.

연중의 사유는 한 차례 가정이 파괴되며 글을 쓰기 위한 원동력인 동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그 동심이란 오타쿠가 애니메이션을 볼 때 느끼는 두근거리는 마음, 웹소설 독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웹소설을 밤새 읽으며 느끼는 몰입감,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이겠습니다.

특히 1년이 넘는 장기 연중은 저에게도 참으로 고독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가족을 괴롭게 하고, 저를 괴롭게 하고, 무기력과 우울에 빠져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제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눈에 띄게 늙어버린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아 현실로 돌아왔지요.

다행히 제가 다시 소설을 쓰게 되면서 어머니의 스트레스성 탈모가 싹 없어졌고, 피부도 다시 좋아지셨으며, 흰머리가 없어지고 원래의 동안 미모를 되찾으셨습니다. 요즘은 마카롱과 우영우에 꽂히셨네요.

제가 이렇게 일상을 되찾고, 소설로의 길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 여기에 대해 감사드릴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이끌어주신 매니지먼트의 담당자님, 우울증에 걸린 아들을 정성껏 돌봐주신 어머니, 항상 응원해 주신 동료 작가 여러분, 저를 이 길로 이끌어주신 소천하신 아스트랄로 작가님,

그리고 제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해주시고, 또 그리워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ps. 외전은 현재 계획 중이지만, 대략 임첫게안, 임기아카, 임첫좀 등을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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