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94화
EP 44–개문 開門(13)
국가의 붕괴는 아주 서서히 이루어진다.
경찰이 범죄자에게 꾸중을 듣고, 화폐의 가치가 추락하여 기업들이 떠나가고, 국민이 정부를 미워하게 되면 공동체를 이루는 근간에 금이 간다.
경찰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이 종이쪼가리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우리의 정부가 국민을 위한다는 믿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무너진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아주 느리고, 그렇기에 고통스럽다.
그러한 사회에 속한 이들은 악이 서서히 공동체를 잠식하는 모습을,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함께했던 무언가가 서서히 말라 비틀어지는 모습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절한 심정으로, 그러나 아주 가끔은 피로한 심정으로 지켜보며 고통을 함께한다.
이렇듯 하나의 국가가 무너지는 것은 대개 아주 지난하고 장기적인 침체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러나 그날 아침, 한반도 남쪽에 태어나 살아가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국가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사색이 되어 뉴스 화면에 뛰쳐나온 아나운서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붉은 자막 위에서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속보> 선양게이트 폐문 불가…….]
[유엔군 사령부, 일시적 후퇴 결정.]
문이 닫혔다.
공포가 모든 신뢰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 * *
유재경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숫자와 함께하는 인생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수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 졸업만으로도 이 사회의 특권층에 발을 들일 수 있는 대학교를 나와서.
나랏돈을 다루는 일에 평생을 바치다 그 재주를 요긴히 써먹으며 권력을 잡았으니, 국무총리와 국회의원을 거쳤어도 그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정치인이 아닌 경제관료였다.
따라서 그는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패닉에 빠진 상황에서조차, 반쯤은 습관적으로 이 시국의 인과관계를 분석했다.
“각하, 2단계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조기 폐장입니다. 개문 사태 이후 처음으로 3단계가 발동되면 한국 증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됩니다……. 지금 당장 경제관료들을 소집하시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미국과 중국에서 국채 매입을 중단했습니다! 일시적인 조치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정부 차원에서 결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충청도 일대에서 소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폭도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지역 경찰 차원에서 대처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군대를 투입하는 것을 고려하심이…….”
모든 것이 합리적인 일이다.
지금껏 이 나라가 유사 강대국 행세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게이트 사태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 믿음은 국방력이 보장한다. 각성제와 헌터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근간이 위협받고 있으니 금융의 펀더멘탈이 무너지고, 거기에 의존해 추진해 왔던 수많은 부동산 정책과 국책 사업이 무너진다.
이 나라에 망명한 해외 투자자의 자본이 겁에 질려 떠나가고, 투자금이 끊긴 기업은 도산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무너지면 실업자가 양산된다. 그들은 사회적 혼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정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제까지의 일이다.
선양 사태에서 시작된 동북아시아 위기는 이 나라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살얼음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발표된,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소식은 그 얇은 얼음판 위에 던져진 커다란 돌멩이다.
살얼음판에 돌이 떨어지면, 얼음은 깨진다.
그저, 그뿐인 이야기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인간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로 이 모든 것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서.
회의장의 고위 관료들이 고성을 지르며 책임을 전가하고, 허공에 날아다니는 서류 위의 숫자가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그 순간 유재경은, 이 모든 순간이 어떠한 악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 *
항거할 수 없는 재앙이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상황은 사람이 살면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과 몇 년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바 있다.
하늘에 갑자기 열린 구멍에서 정체 모를 괴물들이 튀어나와 세상과 일상을 무너뜨린 일.
바로 개문開門 사태다.
게이트와 헌터의 시대는 어느 날 갑자기 모두에게 평등하게 찾아온 재난이었으므로, 다시 말해 모든 이는 개문 사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따라서 두 번째 멸망을 겪게 된 시민들은 이전과는 달리 기민하게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늦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부에게 달려가 도와달라고 하소연하는 대신, 마트에서 생수통 하나라도 더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 개개인의 노력은 정부의 입장에서는 폭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돈 준다잖아! 돈 준다고! 왜 안 파는데!”
“소, 손님……! 정말로, 정말로 남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니가 숨겼지? 알바가 마트 물건 멋대로 숨겨도 되는 거야? 어?! 빨리 내놓으라고 X발!”
“정말입니다! 정말입니다! 손님!”
“이 X발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아르바이트생이 손님의 무자비한 폭언에도 존댓말을 잃지 않는 것은 서비스직으로서의 직업 윤리에 철저했기 때문이 아니라 손님이 들고 있는 검고 길쭉한 막대기 때문이었다.
알바생은 저 막대기가 불을 뿜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개문 사태 당시,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투입된 군대는 당연히 총과 실탄을 소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시신만큼은 총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총이 자연스럽게 증발한 것은 아니다.
그 총은 무정부 상태에 놓인 (징병제 국가의) 선량한 시민들의 손에 들어가 이차원에서 넘어온 괴수 혹은 탐스러운 음식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 사용되었다.
정부는 그 당시에 풀린 총기를 회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상당수의 난민들은 이 총이 언젠가 다시 쓰일 일이 있으리라고 믿으며 총기를 고이 보관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수년간 그 믿음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온갖 공익광고와 사회적 캠페인을 벌였지만, 애석하게도 결과적으로 난민들의 믿음은 적중했다.
총체적 아노미anomie가 다시 찾아왔을 때, 총은 아주 훌륭한 협상 수단이었다.
“그, 그러면 이거, 여기 커피 우유라도 가져가십시오…….”
“역시 이럴 줄 알았지! 장사 똑바로 해 X발!”
“도, 돈은 안 주셔도…….”
“내가 무슨 깡패인 줄 알아?! 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총기를 숨기고 있던 수도권 난민들이 북괴 잔당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의 붕괴를 획책하던 빨치산은 아니다.
그들은 가족이 먹을 식량을 확보하고, 가족을 태우고 도망칠 때 차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일 뿐이다.
따라서 총기를 소지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총을 위협용으로 들고 있기만 했지, 실제로 사용한 건 소수였다.
그리고 총기를 사용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총을 허공에 위협용으로 발사했지, 사람에게 사격한 건 소수였다.
하지만 사람을 쏜 사람 중 극소수는 자기방어나 실수로 인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광기를 해소하기 위해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그것만으로도 충청도 일대의 경찰력은 이미 마비됐다.
“폭동입니다! 이건 폭동이라고요!”
“아무리 계엄시국이라도 그렇지 경찰이 아니라 군이 치안을 유지하는 건 최후의 수단이야! 조금만 더 버티게!”
“지금 그 최후의 수단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대한민국 경찰은 마트를 습격하는 수많은 군중과, 그 속에 일부 섞인 총기 소지자와, 총기 소지자 중 일부가 터뜨리는 끔찍한 총기 난사를 진압할 역량이 부족했다.
강력한 힘을 손에 쥔 경찰이 수십 년 전에 저지른 원죄를 아직 씻어내지 못했다는 국민들의 의심 섞인 시선이 그 이유일 수도 있겠고,
혹은 검찰 대통령 치하에서 최전성기를 맞이한 검찰이 검경수사권 조정의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승리를 따내기 위해 경찰을 의도적으로 약화시켰을 수도 있겠으나.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현시점에서 경찰이 국내의 치안 혼란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원옥분 대통령은 아직까지 전국에 떨어진 비상계엄 명령을 취소하지 않았다.
* * *
원옥분 대통령은 권한대행 시절까지 포함하면 헌정 사상 계엄령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랜 기간 선포한 대통령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치하에서 계엄령은 그 의미 그대로 군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로 투입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시국 선언과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일종의 정치적 문법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지금 당장 충청도 일대의 혼란을 제어하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단둥 핵폭격 당시 상승기류에 휩쓸려 퍼져 나간 낙진이 아직도 대기권을 떠돌고 있었다.
이는 한반도 전역에서 검은 괴수의 침식이 시작될 가능성을 언제나 0%가 아니게 만들었다.
치안이 붕괴한 상황 속에서 침식이 시작되면 이 나라는 경제적 붕괴가 아니라 물리적 붕괴를 먼저 맞이하게 될 터.
그러한 판단이 원옥분 대통령을 움직였다.
“선양게이트 폐문이 수포로 돌아간 이상 그 너머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정부의 사명입니다.”
“…….”
“따라서 나는 대통령으로서 여러분에게 주문합니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국내의 혼란을 진정시키십시오.”
대통령의 기계적인 명령이 사실상 임시 국무회의에 가깝게 변해 버린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떨어진 순간.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준비해 놓았던 모든 긴급 조치가 발동되었다.
북한의 모든 군벌들에게 공식적인 지위가 부여되었으며, 현지 주민을 징집할 권한과 함께 무기가 지원되었다.
휴전선 이북 지역에 한해 발동된 특수 위수령에 내포된 이동제한명령이 발효되었고, 휴전선의 군인들에게는 피난민 구호물자가 아니라 실탄이 배급되었다.
몇 년 만에 다시 정부가 통제하는 배급제가 시행되었으며, 고작 며칠도 지나지 않아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권위 민주주의 국가로의 변신을 끝마쳤다.
이 나라는 이미 한 차례의 겨울을 견뎠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황을 두 번째로 겪어보는 건 국민들 뿐만이 아니다. 정부 또한 두 번째 재앙을 맞이하는 중이다.
따라서 이 국가가 절망에 대처하는 자세는 아주 능숙하고 기계적이었으며, 동시에 냉혹했다. 잘라낼 것들을 잘라내고, 살려야 할 것들을 살려냈다.
공포를 그보다 더한 공포로 찍어눌렀고, 통계와 숫자에 의존한 정책은 효율적으로 사회를 유지했다. 그렇게 무너진 신뢰를 힘으로 이어붙였다.
최악을 차선으로 덮고, 해야 할 일을 해냈으며, 공동의 생존이라는 명분 앞에 개인의 삶은 어느 때보다 초라해졌다.
또다시,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겨울을 견뎌내고, 언젠가 찾아올 희망을 붙잡기 위해서.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런 이야기다.
* * *
부산의 시내는 싸늘했다.
닫혀버린 선양 제2게이트로 진입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좌절된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과 공포가 이 사회를 덮쳤다.
그 공포는 경제를 무너뜨리고, 치안을 무너뜨리고, 정부를 향한 신뢰를 무너뜨렸으며, 이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믿음마저도 끊어버렸다.
국가와 민족은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한민족이라기보다는, 한반도 남쪽에 태어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공교육을 받은 몽골로이드 동양인이다.
허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믿음이 사라졌으니 국가는 생명력을 잃었다. 그건 부산 시내에 즐비한 텐트촌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피채원의 눈빛이 차창 너머의 부산 시가지를 보았다.
하얀 서릿발이 땅에 내려앉자마자 염화칼슘과 진흙으로 이루어진 진창에 섞여 회색으로 변해가는 가운데, 8차선 대로는 자동차가 아니라 난민들의 텐트로 가득 차 있었다.
알록달록한 텐트 사이로 오랫동안 씻지 못한 난민들이 눈을 맞으며 목욕했고, 부산의 현지인들은 충청도에서 부산까지 내려온 난민들을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모를 폭동이나 침식에 대비해 군인들이 시가지 곳곳에 배치되었고, 배급이 이루어질 때마다 몰려드는 난민들은 질서를 잊은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피채원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이 황량한 풍경에서,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적나라한 본심이다.
살아남고 싶다는 외침, 가족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이보다는 더 나은 삶을 원한다는 소망,
그런 거창한 것들보다 훨씬 근본적인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모두가 울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삼단봉을 들고 난민들을 진압하는 경찰도, 세종시에서 시위 진압을 감독하는 공무원도,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고 도망치는 난민도, 모두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피채원은 슬픔으로 가득한 세상을 달려 나갔다.
북쪽으로, 차가운 북풍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에서도 역시나, 수많은 이들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괜찮니?”
운전대를 잡은 감 기자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피채원은 잠시 표정으로 드러난 괴로움을 익숙하게 숨기며 처연히 웃었다.
“괜찮아요.”
“같이 가줄까?”
피채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저씨는 이제부터 이 일에 관련되면 안 돼요. 내려주세요.”
감 기자는 말 없이 미소 지으며 차량을 멈추고 문의 잠금을 풀었다.
피채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거센 서릿발이 불어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소녀는 수많은 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냉혹한 북풍을 뚫고, 얇게 쌓인 눈송이를 밟으며 흙길을 걸어갔다.
그 길을 걸어가면서,
피채원은 과거를 떠올렸다.
「채원……아…….」
「빨리…… 도망…….」
수년 전, 괴수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며 죽어가던 부모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들의 딸을 걱정하며 울고 계셨다.
그러나 당신들의 딸은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냈던지라, 갑작스럽게 들리기 시작한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남아야 했다.
그때도, 모두가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도망친다면 괴수를 피할 수 있었다. 피채원은 그렇게 도와달라는, 살려달라는 외침을 경보음으로 삼아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금, 당신들의 딸은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 나가고 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세상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던 사람 때문이다.
「옥상의 문을 열면 어떻게 될까.」
「수십 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와 헬기를 붙잡을 수도, 어쩌면 괴물이 튀어나와 내 목을 조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아파트 옥상의 헬기를 등지고 고민하는 동안, 피채원은 그 목소리를 이정표로 삼아 아파트 계단을 질주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는 괴수들이 그녀를 잡아먹기 위해 침을 흘리며 쫓아오고 있었고, 아파트 옥상의 한 사람은 잠긴 문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적어도, 문을 닫아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문을 열었다.
피채원은 그 문 너머로 달려 나가 아직도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피채원은 어느새 그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가 열어준 문을 빠져나오며 달려 나가기 시작한 그녀의 인생은 아직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소녀가 이를 악물고 달린다.
북풍이 몰아쳐도, 쌓인 눈더미가 발목을 붙잡아도, 몸속의 모든 것을 토해낼 정도로 숨이 벅차올라도, 저 장벽의 너머에서 울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을 다시 잇기 위해서, 그날 밤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 차악이 아니라 최선을 거머쥐기 위해서, 이 차가운 겨울의 바람이 불어오는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 삶으로 향하는 문을 열기 위해서!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모든 슬픔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휴전선의 장벽을 지키던 군인들은 산발이 되어 달려온 여자에게 기겁하며 총구를 겨눴다.
“정지! 정지!”
* * *
개성시에서 태어난 14살 소녀 리은혜의 일생은 추방과 박탈로 점철된 삶이었다.
김일성 리용수 대신 주예수 장군에게 충성했다는 이유로 고향에서 쫓겨난 그녀의 가족은, 괴수의 아가리와 녹슨 폐허의 생업전선에서 산산이 조각났다.
그나마 허공에 물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고 부랑자 생활을 이어갔지만, 지하철에서 총칼로 쫓겨나며 그 패거리마저도 흩어졌다.
녹슨 양동이를 구해 물을 만들어 팔았지만, 초능력 쓰는 잡놈들은 남조선의 괴뢰라는 선동에 넘어간 주민들에게 얻어맞고 전 재산을 빼앗겼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몸에 걸친 누더기마저도 누군가에게서 훔친 것이다. 소녀는 오직 몸뚱아리 하나만을 남기고서 차가운 세상에 던져졌다.
난민촌 구석에서 욱신거리는 피멍을 껴안고 쪼그려 앉은 소녀는 새벽의 찬 공기에 벌벌 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장벽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남조선 정부에서 베푸는 보급품을 낚아채려는 경쟁자였다.
그마저도 배급이 중단된 이후로는 그 치졸한 삶의 형태가 바뀌었다.
운 좋게 맘씨 좋은 군인에게 구걸에 성공하며 음식을 받은 아이들은, 소년들에게 얻어맞고서 가진 것을 빼앗기고,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른들에게 배급을 상납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저 북쪽에는 지옥이 있다고. 검은 괴물이 내려오고 총폭탄 쥔 사람들이 생지옥을 만들어놓았다며 아이들을 달랜다.
하지만 누더기를 걸친 이들이 누더기 걸친 이들에게서 빼앗고, 없는 자가 없는 자를 약탈하는 이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세상 어디가 지옥이란 말인가?
신은 있는가? 김일성, 리용수, 주예수 장군은 어디 있는가?
영웅은 있는가? 선군조선의 백마 탄 영웅은 어디 있는가?
초인은 있는가? 남조선 물병 겉 포장에 그려진 강력한 초인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없었다.
전부 가짜다.
어른들의 거짓말이다.
지하실에서 주예수 믿으라고 눈물을 글썽이던 부모님도, 리용수 장군이 조선을 살릴 것이라던 군관 동지의 호언장담도, 초인들이 괴수를 격멸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던 남조선 정부의 사탕발림도.
전부 거짓말이다.
세상에 온전히 실존하는 것이라고는 상처 입은 몸뚱이와 그 앞에 놓인 거대한 장벽,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눈송이뿐이었다.
소녀는 수만 명의 난민 무리 사이에 섞여 있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외로움을 느꼈다. 몸의 상처보다 마음에 사무치는 쓸쓸함이 더욱 아팠다.
그렇게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소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감겨가던 그때.
갑자기 난민촌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기뻐 소리치며 춤을 췄다.
옆집 판자촌의 낡은 라디오 너머에서 이름 모를 정치인이 말을 이어갈 때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아이처럼 울부짖었다.
리은혜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에 열린 기적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렸다.
“……아.”
서서히 죽어가던 한 소녀의 앞에 삶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리은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주홍색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 서릿발이 휘날리는 난민촌.
누더기를 뒤집어쓴 작은 소녀가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장벽의 관문을 넘는다.
* * *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에게 말한 바와 같이, 국민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으로서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이재민들의 이동을 제한할 그 어떤 법률적 근거를 찾지 못했음을 알립니다.
따라서 헌법 제14조, 모든 국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는 조항에 의거하여 서울특별시의 위수령을 해제하고 이동제한명령을 중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