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91화
EP 44–개문 開門(10)
세상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연의 규칙이다.
하늘이 푸른 빛을 띄어야 할 의무를 지키고, 구름이 자신의 하얀 순수함을 간직하면, 아래에서 올려다 본 세상은 청명한 빛을 흩뿌리며 보는 이의 영혼을 맑게 만든다.
그러나 그 규칙이 깨지는 순간,
자연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그것은 공포로 변한다.
검은 비가 그러했다.
먹구름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흑암색으로 물든 하늘에서 먼지와 함께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세상의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이는 비가 흙을 뚫고 자라나던 여린 새싹과 ,주인이 목줄을 묶어둔 채 도망친 강아지와, 핵폭발을 촬영하기 위해 몰래 숨어든 머저리와, 먹이를 찾아 단둥 인근을 배회하던 괴수를 적셨다.
모든 생명은 해안가로 몰려든 검은 석유에 젖어 발버둥치는 바다새처럼 괴로워하다 끝내 자신의 색깔을 잃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의 육신은 아직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삶과, 영혼과, 유전형질과, 마석은 거대한 군체의식 속에 흡수되었다.
쏟아지는 검은 빗줄기를 맞으며 새롭게 태어난 괴수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괴수들은 눈에서 불길한 적색 안광을 빛냈다.
그들의 붉은 눈동자는 남쪽으로 향했다.
* * *
접촉하는 순간 상대를 침식하는 괴수가 등장했다는 소식은 대부분의 근접 계열 헌터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체내 마력을 물건에 담아 바깥으로 투사할 수 있는 초상능력자―‘나이트’들은 그나마 전장에서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 포지션을 창시한 대종사인 설진운은 대령강을 건너오는 괴수들을 저지하며 평양 수호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서걱-!
설진운을 향해 달려오던 괴수가 목이 떨어지며 힘없이 논두렁 옆으로 넘어졌다.
이제 막 생명력이 넘치는 황금색으로 서서히 물들어야 했을 논밭에 괴수의 시체가 쓰러진다. 괴수는 쓰러졌지만 검은 물은 농사를 위해 들여놓은 물에 잉크처럼 퍼지며 대지를 오염시켰다.
괴수의 시체는 심해어를 연상시키는 촉수와 이빨, 그리고 물감보다도 어두운 검은색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이라기보다는 질 낮은 공포영화에 나오는 크리쳐를 연상시켰다.
그러나 두 다리와 두 팔, 그리고 목과 얼굴의 형태가 남아 있어, 이 괴수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무엇이었는지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진운이 인상을 찌푸린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전투에서 적을 죽이기 위한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모두 약점이 되는 법이다.
아직도 강 건너편에서 무수한 검은 이들이 붉은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찢고 죽이기 위해 모든 의지를 다하고 있었으니, 설진운 또한 이에 보답해야 할 것이었다.
설진운은 익숙한 습관대로 머리를 비우고, 끓어오르는 피와 본능에 몸을 맡기며 검을 휘둘렀다. 마력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수십 미터를 가볍게 넘어 다니는 설진운이 푸른 마력이 깃든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공간이 둘로 나뉘었다.
푸른 궤적을 남기는 검로를 따라 수많은 괴수들이 토막이 나며 쓰러졌다.
저들은 피조차 검은색이었으므로, 이 전투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검은 세상을 베어가르는 푸른 곡선의 싸움으로 보였다.
실제로 하늘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던 국경없는 기사회의 르윈 슈미트체바는 일견 아름답게까지 보이는 검술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에 빠지기에는 전황이 너무나도 좋지 않다. 적은 무한하고 아군의 체력은 유한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전술적인 판단 말고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논리적인 감각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이고, 사람들의 눈빛이 만들어낸 향기이다.
“이건…….”
화약 냄새.
곳곳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도시.
끝없이 밀려오는 정체불명의 괴수들. 그리고 사회를 유지하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
르윈 슈미트체바는 정체 모를 불안감에 조급해졌다.
“칫……!”
설진운의 벗이자 스위스의 국민적 영웅이며, 절삭형 염동술에 한해서는 유럽 최강을 자부하는 소녀가 무리해서 마력을 끌어모았다.
“모두 피해!”
뤼미에르의 왼팔, 유럽의회 의원, S랭크 창술사, 그리고 르윈의 친오빠인 그윈 슈미트체바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야! 무리하지 마!”
“닥치고, 피해!”
헌터들이 뒤로 빠지자 대단위 야포 사격에 버금가는 마력 폭풍이 일대를 휩쓸었다.
휘이익-!
칼날 형태의 염력이 미친 듯이 날뛰며 일대의 벼와, 나무와, 흙과, 괴수를 갈아버렸다.
마력은 한참이나 르윈 슈미트체바를 중심으로 회오리를 만들며 폭풍을 일으킨 끝에, 주변을 평탄화시키고서야 잦아들었다.
전장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국경없는 기사회의 고위 헌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다들 괜찮아?”
그윈 슈미트체바가 모두의 상태를 살폈다. 유독 자기 동생을 과보호하는 티가 났다. 르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까칠하게 대꾸했다.
“팔에 침식형 뭐시기 묻으면 바로 말해요. 잘라줄 테니까. 어차피 팔 잘려도 포션 마시면 다시 자라나잖아요.”
하이드로키네시스, 쥬히 빌테르가 사려 깊게 설진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야 실드코어로 역장 치고 원거리에서 공략하면 되니까 괜찮지만, 나는 진이 걱정이야. 칼 들고 저 한가운데를 쏘다니면 어떡해?”
“전 괜찮습니다.”
설진운이 언제나처럼 자기 몸을 챙기지 않는 모습을 보이니 기사회의 암묵적인 2인자인 다니엘 웰링턴이 신경질을 부렸다.
품격 있는 말투 덕에 영국 국민들이 가장 애증하는 헌터인 그는 항상 착용하고 다니던 산업용 고무장갑을 벗고 있었기 때문에, 흥분할 때마다 손에서 전기가 지직거렸다.
“씨발놈아, 너 뒈지면 남한 사람들 단체로 자살하니까 설치지 좀 말라고.”
“세상에,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요, 다니엘!”
“걱정해 주시는 마음 다 아니 괜찮습니다. 싸우지들 마십시오.”
“괜찮대잖아. 쥬히.”
“정말 괜찮아서 저렇게 말하는 거겠어요? 설마 진이 동양인이라고…….”
“아니 씨발 내가 양성애잔데 인종차별을 하겠냐?”
“맞아. 다니엘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성격이 엿 같은 아저씨라고.”
“닥쳐. 르윈.”
“내 말 맞지?”
S랭크 창술사지만 이 중 최약체인 그윈 슈미트체바가 뤼미에르의 왼팔이자 암묵적 3인자인 이유는, 프랑스 요리를 전공해서 밥을 참 맛있게 한 덕도 있지만, 차분한 포용력으로 사람들을 잘 다독였기 때문이었다.
“자, 자, 휴식 타임 다 가졌으면 슬슬 일어나시죠. 말씀하시는 것들 보니까 다들 기운이 남아도시는 모양인데, 강에서 또 시꺼먼 놈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변형계 헌터, 마예드 알 무왈리드가 말했다.
“시꺼먼……?”
“침식형 변이체! 침식형 변이체가 강에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아잇, 씨팔, 언제까지 막고 있어야 하는 거야. 사탄이 딸 쳐서 태어난 사생아보다 좆같이 생긴 시꺼먼 구정물 새끼들.”
“다니엘, 제발…….”
“전술적으로 봤을 때 대령강은 이미 뚫렸다고 봐야 합니다. 사실 여기서 막고 있을 이유가 없어요. 과잉전력입니다.”
“그럼 뭐 어떡할 거야. 배리어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다가 낙진 맞고 침식되면?”
“어쨌든 강 끼고 막는 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저놈들은 물길을 타고 퍼지니까요. 우리가 너무 습관대로만 행동하는 바람에 강을 끼고 방어선을 구축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좋아. 좋아.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여긴 이만 버리자고. 이봐 군바리들! 방어선을 뒤로 뺄 거야! 장비 챙겨! 또 삽질해야 해!”
“하아, 다니엘, 좀 친절하게 말을 해봐요…….”
쥬히 빌테르가 한숨을 쉬며 일행의 뒤를 따랐다.
국경 없는 기사회의 사려 깊은 인격자이자 ‘샹메르’의 길드장이며, 헌터로서의 명성을 내세워 유명 패션 & 향수 브랜드를 런칭한 국제적 셀럽인 그녀에게는 작은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일구고 수많은 대중의 찬사를 받는 것보다, 반쯤 무너진 시가지를 떠돌며 동료들과 함께 괴수를 학살하는 게 더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혼란에 빠진 군인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사회가 무너지며 평범한 사람들은 공포에 떠는 와중.
오직 자신만이 운명의 선택을 받아 특별한 사람이 된 우월감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지울 수 없는 것이라.
쥬히 빌테르는 아주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흐음…….”
상쾌한 화약의 냄새와, 피, 땀, 그리고 눈물의 향기. 그리고 괴수의 이질적인 피비린내.
사람들의 눈빛에 담긴 혼란과 공포, 그리고 자신을 향한 의존과 경의.
이건 사람이 아니라 국가가 죽어갈 때 피어오르는 시체의 냄새였다.
* * *
유재경은 알고 있었다.
[속보,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침식형 변이체라고 명명된 검은 점액질의 괴수가 핵폭발의 낙진을 타고 북한 일대에 번지고 있습니다. 현재 극히 일부의 낙진이 남한까지 닿을 가능성이 확인되었으며, 국민 여러분께서는 즉시 밀폐된 공간으로-]
[충청방어선 이북 지역에 특수 위수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해당 지역의 국민들께서는 침착하게 당국의 지시에 따라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충청방어선 이북 지역에 특수 위수령이 선포되었습니다. 해당 지역의 국민들께서는 관계 당국의 지시에 협조하여 침착하게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MBS는 단둥 사태가 끝날 때까지 긴급재난방송을 편성하여 국민 여러분께 최대한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드릴-]
유재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세계가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게이트와 헌터의 시대는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이라는 것을.
한국이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정부에서 온갖 복지 정책과 선전선동으로 만들어낸 살얼음판 위의 환상과도 같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빠…….”
“…….”
“이거, 괜찮은 거 맞나요……?”
“그래.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란다…….”
유재경은 항상 두려워했다.
그건 아는 자의 두려움이었다.
오랜 기간 기획재정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수행하며 그는 아주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다.
그건 이 세상이 서서히 멸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은 공식적인 인구를 한 차례도 발표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추측을 내세워 멋대로 중국의 생존 인구를 예상했지만, 유재경만은 경제 지표와 무역수지를 분석해 중국 인구를 정확히 추산할 수 있었다.
맨 처음 계산에 성공했을 때는 피식 비웃으며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를 검증하고 또 검증한 끝에 마침내 확신에 이른 순간, 그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2억이었다.
14억에 달하던 인구 중 2억 명을 빼고 전부 없어졌다. 중국 정부는 고작 2억 명의 시민을 먹여 살리고 있으며, 나머지는 전부 중국 대륙 어딘가에서 괴수의 먹이가 되었거나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부산의 번영과 한국 정치의 치졸한 정겨움은 세상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전쟁을 벌인 끝에 사실상 국체國體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고, 내전에 휘말린 일본과 러시아가 선진국의 대열에서 이탈하며 인류의 생산성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인류가 종족 전체가 먹을 식량보다 훨씬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던 시절은 끝나버렸다…….
중남미 마약 카르텔은 대규모 범죄조직을 넘어 거대한 군벌국가 연맹체로 거듭나 남아메리카의 모든 민주주의 정부를 헌터 주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있다.
아프리카의 사상자는 집계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고, 하나로 뭉친 극단주의 이슬람 군벌은 중동과 석유를 장악하고 인도와 남유럽에 손을 뻗고 있다.
그나마 미국이 아직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인류 문명의 보루가 되어주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재경은 세상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유재경이 평소 느끼던 공포의 원인이었다.
이것은 형용할 수 없는 고대의 악마를 마주친 탐험가의 공포였고, 벗어날 수 없는 쓰나미 앞에 선 힘없는 개인의 공포였다.
누군가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전 세계가 멸망하던 냉전 시대의 공포가 돌아왔다. 이제 세상은 통제할 수 없는 핵무기는 물론이고, 언제 어디서 문명을 파괴할지 모르는 이계의 괴수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 이유로 세계의 경제는 점점 무너지고 있다. 식량의 가치, 마석의 가치, 화폐의 가치가 조정되며 현대 사회를 이끌어온 금융자본이 서서히 몰락하고 있다.
그리고 금융자본은 미국 정치의 주류를 지탱하고 있으며, 금융자본이 완전히 몰락하는 순간 미국의 초대형 헌터 군사기업이 지원하는 정치인들이 정권을 장악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계의 분쟁을 정치적 시각이 아니라 금전적 시각으로 볼 것이다. 금융경제는 국제사회가 존재해야 하지만, 마석경제는 오직 실물과 피로 이루어지는 산업이었으니까.
미국제일주의가 돌아온다. 먼로의 망령이, 고립주의의 망령이 돌아온다.
미국의 고립주의가 100년 만에 돌아오는 순간, 아슬아슬한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세계 각지의 분쟁이 점화되고, 국제무역과 금융시장이 완전히 붕괴하며 마석본위 경제체제가 들어설 것이며, 이러한 교체기는 인류가 겪어본 적 없는 대공황을 유발할 것이다.
오직 마석을 쥔 자들만이 살아남겠지.
이게 유재경이 짐작하는 암담한 미래였다.
절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미래…….
유재경의 예측 속에선 한국 또한 멸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헌터의 패권은 필연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카타스트로피가 반복될 때마다, 대기 중 마력 농도는 점점 상승한다.
괴수가 점점 강해지고, 생물학적 관점에서 괴수와 똑같은 헌터들 또한 점점 강해진다. 결국 어느 순간 헌터의 무력이 사회적 저지선을 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순간 대한민국 또한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유재경은 한승문에게 적극 협조하며 헌터를 공권력 안에 편입하는 일에 최대한 협조하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본인과 가족들의 행복이 최우선이긴 했지만, 그래도 멸망은 최대한 늦춰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멸망이 이토록 우연히, 그리고 참혹히 다가올 줄은 몰랐다.
유재경은 굳은 얼굴로 TV 채널을 강박적으로 돌리며 뉴스 속보를 확인했다.
그의 핸드폰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연락이 빗발치고 있었고, 사랑하는 딸인 유재영은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걱정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빠…….”
“괜찮아. 괜찮아. 잠깐 어지러운 거야…….”
이 평화가 환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게이트 사태 이전과 똑같은 일상을 누리는 것 또한 인공적인 일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온 멸망은 너무나도 가혹하고 냉정한 것이었다. 경제의 붕괴는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식량자급률 또한 아슬아슬하다.
유재경은 결단을 내렸다.
“부산에 갔다오마.”
“네?!”
“너는 네 엄마 데리고 제주도에 있어. 혹시 모르니까 지하벙커에 먹을 거 최대한 아껴 먹고. 누가 열어달라 그래도 절대로 열어주지 말고.”
“아빠……? 아빠! 가지 마!”
전부 뒈지게 생겼는데 200석이 넘는 집권여당의 당대표 따위 애들 소꿉놀이 장난에 불과했다.
유재경은 모든 것을 걸고서 부산으로 향했다.
딸에게 물려줄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 * *
“북한 난민들을 받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을 각지에 체계적으로 재배치해야 합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찾아온 유재경 전 총리, 그리고 사실상 차기 국방당 당대표가 거의 확정된 국회의원은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앞에서 강력하게 주장했다.
“난민들을 보호하는 것 또한 정부의 의무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선출한 유권자를 최우선적으로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 지켜야 할 의무 아닙니까?”
급하게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어 지하벙커 청와대로 호출된 양판석 전 대통령이 유재경에게 물었다.
“아니, 잠깐만, 자네 혹시 이북 사람들을-”
“검은 괴수는 서서히 남쪽으로 오겠죠. 그 괴수들의 진격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라도, 북한 군벌들이 피난민들을 자율적으로 징집해 민병대를 구성하고, 괴수의 진격을 저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정신이 나간 건가?!”
민주주의자, 민주화 운동가, 대법관, 헌법의 수호자, 양판석이 경악했지만 유재경은 벙커에 모인 수많은 정부 각료들의 앞에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주장했다.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지만 충청방어선 이북에 특수 위수령을 선포하셨다는 건 청와대에서도 북한 난민들을 남한에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유재경 전 총리님, 그것은 난민들을 막아내겠다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최대한-”
“지금 가식은 뒤로 밀어둡시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난민들을 받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
“양판석 대통령께서 북한을 행정권에 편입하실 때, 그때 저도 나랏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북한에 군벌들을 남겨둔 건 그나마 인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지만, 지금은 그 군벌들을 이용할 때입니다. 그들에게 주민들을 징집할 권한을 줍시다. 만약 정부에서 추진하지 않는다면 국회에서 입법 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완전히 미쳤군…….”
양판석이 조용히 읊조렸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유재경의 제안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또 효율적인 방안이었다.
군벌에게 징집권을 주는 것. 지역 폭력배가 아니라, 합법적인 권력자로 공인하는 것.
지리멸렬하게 후퇴하던 군벌들이 싸울 이유를 가지게 된 순간 많은 것들이 바뀐다.
완전히 붕괴된 북한의 행정망은 다시 정상화되고,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는 방어 기지를 북한의 각 지역에 형성할 수 있다.
그 기지는 난민 보호소의 역할을 수행하며 북한을 떠도는 유민들에게 직업을 주고, 지역 동사무소로 기능하며 도시를 만든다.
유럽 각지에 생겨난 쉘터가 극한까지 무장한 군사도시는 괴수의 대공세 속에서도 그럭저럭 자생할 수 있음을 이미 증명했다.
북한을 그렇게 개조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제가 보기엔, 생각보다 괜찮은 해결책이 될 수 있겠습니다. 북한 군벌들이 민병대를 조직하고 우리가 그걸 지원하면…….”
“강원도 북부까지 낙진 피해가 보고되었습니다. 다행히 조기에 제압되었지만, 날씨에 따라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시간을 벌 미봉책이라도 당장 시행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입니다.”
물론 북한의 군벌들이 지역을 방어하는 건 아주 어려운 과업이 될 것이다.
수많은 주민이 허름한 총을 들고 억압 속에서 전장에 내몰릴 것이며, 인권헌장은 북한에서 아무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될 터였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한이 원래부터 그런 곳이었다는 사실이 남한 측 정부 관료들의 고뇌의 무게를 덜어줬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위기의 무게와 대다수의 시민이 생존을 바라고 있다는 공적인 여론이 유재경의 제안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유재경은 그저 스피커에 불과하다. 국민은 이미 생존을 위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치인은 민심을 잘 읽을수록 출세하는 직종이었고, 이 자리에 있는 정치인들은 대통령이 직접 부른 국가의 핵심 계층이었다.
해야 할 일은 명료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관료들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자신들이 죄를 짓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충청방어선은 이미 난민 통제용으로 증축된 바 있습니다. 이를 보강하면 예산의 소모를 최적화하며 단둥 사태의 위협을 줄이는 게 가능합니다.”
“남한 청년들은 군대에 가고 예비군의 의무를 지지만, 북한 청년들은 아무런 병역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문제도 MZ세대를 분노하게 한 사회적 이슈였습니다. 국난 앞에서 남북한 청년들이 하나 되어 싸운다는 대대적인 선전으로…….”
“남한이나 북한이나 한민족입니다. 국가가 어려울 때는 의병이 일어나는 법 아닙니까? 다 같이 힘을 합쳐 이겨냅시다!”
모두가 북한 군벌이 저 괴수를 막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가끔은, 이유가 아니라 핑계가 필요한 때가 있는 법이니까.
나는 원옥분 대통령이 한참 동안 침묵한 끝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까지 지켜보고서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 * *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푹신한 침대는 편안했고, 창문 바깥의 부산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양판석에게 차명으로 받은 이 아파트는 내가 특권계급이자 상류층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시키며 자존감을 채워줬다.
수백 킬로미터 북쪽에서는 아직도 참혹한 비극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양심의 가책은 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우리는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북한에서, 위구르에서, 이스라엘에서, 나이지리아에서, 인도의 뒷골목에서, 북한 수용소에서, 백린탄으로 불타오르는 UN병원에서, 보코 하람 반군이 습격한 마을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 소년을 납치한 낡은 창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았다.
지난 평생 동안 그랬다. 게이트가 열리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바구니가 담을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적다.
평생 동안 주변 사람의 사랑도 전부 담아내지 못하고, 사람을 실망시키고 나를 실망시키며 살아간다. 삶은 그렇게 아쉬움만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 불완전한 인간이 생존의 위협을 겪을 때, 우리는 본능에 따라 가장 가벼운 것부터 버린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동정심이다.
사람의 마음은 모일수록 비정해진다.
모든 북한 사람들을 절망과 고통의 구렁텅이에 방치한다는 것.
거대한 장벽을 쌓아 저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
한 국가의 시민들을 영원히 군벌들의 아귀다툼 속에 빠뜨린다는 것.
그리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들을 괴수의 아가리에 던져넣는다는 것.
이 끔찍한 생각은 어떤 거대한 악의를 가진 독재자의 발상이 아니라, 이 국가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의지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우리는 이를 공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론에 따라 선출된 정치인은 그러한 국민적 성원에 부응하는 것이 헌법적 의무이다. 그것이 민주국가의 방식이다.
어쩌면 이에 순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시간은 흐르고, 도시의 야경은 창문 사이로 스며든다.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의족을 신고, 현관문을 열어 옆집으로 갔다.
벨을 누른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옆집에 사는 주민이 나를 반긴다.
피채원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채원아.”
“네, 의원님.”
“내가 정말 하고 싶은 행동이 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