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90화
EP 44–개문 開門(9)
노아 안-마리 뤼미에르.
Noah Anne-Marie Lumiere.
국경없는 의사회의 한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프랑스 정부의 간택을 받아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1세대 헌터 중에서도 특출난 초상능력과 정부여당에 협조적인 성품. 그리고 (본인의 강력한 주장에 따르면) 빼어난 미모 또한 그녀가 국민적 영웅이 되는 데 한몫했다.
그러나 그녀가 EU 집행위원장 따위의 세속적 지위와는 별개인 모든 유럽 헌터들의 정신적 지주로 거듭난 이유는 하나다.
그건 가장 어두운 순간에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헌터들이 전쟁의 스페셜리스트로서 드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곤 해도, 개문 사태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헌터들은 단지 각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장에 밀어 넣어진 일반인에 불과했다.
노아 뤼미에르는 그 아마추어들을 이끌고 유럽 각지를 떠돌며 수많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무리 프랑스 정부가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제공했다지만, 정작 본인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물론 수많은 헌터들이 그녀의 곁에 모인 첫 번째 이유는 선량한 영혼에서 비롯된 영향력이겠지만, 그걸 꺾이지 않게 뒷받침해준 것이 전략가로서의 통찰력이었다.
다만 노아 뤼미에르가 나폴레옹 같은 전략의 천재이거나, 사관학교를 나온 장성들보다 군사학적 지식이 뛰어난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쟁이라는 개념을 책이나 이론이 아닌 경험으로 배웠다. 그건 21세기 현대인들에게는 아주 드문 경우였다.
그러한 본능의 영역에 있는 전략적 식견은 지금까지의 모든 교리와 상식이 무의미해진 게이트 전쟁에서 빛을 발하며 단련되었다.
그리고 유럽에서의 수많은 악전고투마저도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린 지금.
전문적인 군사학적 지식까지 쌓아 올린 노아 뤼미에르는 유엔군 사령관이 되어 동북아시아의 게이트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순간.
그녀는 이번에도 활로를 찾아내었다.
“괴수들이 움직이는 경로가 기이합니다.”
* * *
UN군 사령부 집무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지도가 하나 놓여 있었다. 평양과 베이징이 가장자리에 포함된 만주의 지도다.
수많은 메모와 기호가 어지러운 선을 그려내고 있다.
이 지도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라 머리를 갸우뚱거리고 있으니 건너편에 앉은 뤼미에르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동선입니다.”
“괴수의 동선이라고요?”
“선양 제2게이트에서 나온 괴수를 인공위성으로 분석했습니다. 각지의 헌터들이 보낸 전투보고서도 참조했지만, 미군에 부탁하면 군사위성이 이런 데이터 정도는 순식간에 뽑아 주고는 하죠. 옛날에도 몇 번 신세 졌습니다.”
괴수의 동선을 표시했다고 하니 복잡하기만 했던 지도가 달리 보인다.
선양에서 시작된 검은 선은 잠시 인근을 헤메이더니 잉커우, 단둥, 베이징 방면으로 파상공세를 이어가고 있었다.
반면, 텅 빈 북만주로 향하는 괴수들은 얇고 넓게 흩어져 최대한 넓은 지역을 정찰하듯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건…… 마치 군대 같군요.”
“그렇습니다, 장관.”
노아 뤼미에르가 보기에 괴수는 본질적으로 야생 짐승과 같았다.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포식자들이다.
물론 특이한 케이스도 몇몇 있다. 여왕괴수로 불리는 지휘개체의 통솔을 받는 병정괴수나, 늑대와 비슷하게 무리를 이룬 괴수들까지.
괴수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물이고, 그 진화의 결과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무리생물의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은 적지 않았다.
괴수의 상당수가 현존하는 동물과 유사한 형태로 변이하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그 동물들은 수백 만년동안 지구 환경에 적합하게 진화한 생물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어떤 짐승이나 괴수도 이처럼 군대와 비슷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니. 이건 군대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체계적이다.
마치 모든 괴수가 하나의 정신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일찍이 인도네시아의 숨바 섬에서 이와 비슷한 경우를 봤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세뇌해 노예로 부리는 각성자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고, 국경없는 기사회 헌터들이 섬에 내리자마자 현지인들이 목숨을 도외시하며 공격을 가했지요. 물론 범인은 괴수였습니다.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기이한 괴수였지요.”
“……선양에서 출현한 괴수들도 그놈과 비슷합니까?”
“행동양식이 유사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 마리라도 피난민 일행을 발견하면 즉시 주변에 있는 모든 괴수가 달려든다는 데에서 저들이 공간의 제한 없이 즉각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고요.”
“그렇다면 지휘개체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요? 저 무수히 많은 슬라임들이 단 한 마리에 불과하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 나간…….”
“전투지능이라는 게 있습니다. 만약 저 괴수들이 제각각 다른 개체라면 숙주에 따라, 정확히는 흡수하고서 껍데기로 삼은 대상에 따라 지능이 달라야 합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이 파악한 패턴은 정반대의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잉커우에서 늑대형 괴수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활동하는 괴수와, 단둥에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활동하는 괴수가 같은 사고방식으로 싸우고 있다는 말입니다.”
뤼미에르의 푸른 눈동자는 언뜻 기이할 정도의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확신이 오만이 아니라 본능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수도 없이 증명한 사람이었다.
“만약 저 수많은 괴수의 무리가 각각의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군체라면, 마석이 없는 이유도 설명됩니다.”
“과연…….”
“물론 최악의 경우도 생각해야겠지요. 저 블랙슬라임은 마석이 존재하지 않아 약점이 없으므로 우리가 영영 대처하지 못할 최악의 괴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보인다면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직시했다. 은은하게 빛나는 마력이 후광처럼 빛났다.
“만약 제 추측이 정확하다면 게이트 저편의 본체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사태가 끝납니다. 그건 너무 매혹적인 가정이에요. 그러니 확실하진 않지만 저는 거기에 목숨을 걸어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말이 조금 이상한데요. 확실하지 않은데 왜 목숨을 겁니까?”
“그게 헌터가 할 일이니까요.”
뤼미에르는 희망을 가슴에 품은 표정으로 살풋 미소지었다. 그건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헌터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그 웃음을 겉으로는 따라했을지언정 속으로는 단단히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
누가 먼저 저 게이트에 들어갈 것인가?
* * *
여름이 끝나고 싱그러운 시절도 다 지나가 조금씩 초록빛이 옅어지던 나뭇잎에 물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우중충한 회색 하늘에서 이슬처럼 떨어지던 물방울은 이윽고 폭우가 되어 세상을 쓸어내렸다.
쏴아아, 빗소리가 세상의 모든 백색소음 위에 강렬하게 덮인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려던 찰나에 뒤늦은 장마가 찾아왔다. 거센 빗줄기가 창문에 물방울 자국을 남기며 타닥타닥 부딪혔다.
“…….”
나는 뒷짐을 지고 집무실 창가 앞에 서서 비 내리는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풍경에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부터 20세기 후반의 미국 소설가까지 수많은 문학가의 심상을 자극한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나는 저 풍경에서 공무원들이 북쪽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고 있으니 올해는 수해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올 것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살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됐다.
“올해도 천 사장이 수해 테마주를 사겠구나…….”
마찬가지로, 살다 보니 어느새 미래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농담이 우스워서 피식 웃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을 짓누르는 압박감이 내 입꼬리를 다시 끌어내렸다.
“하아…….”
얼마 전, 평양의 한-중-러 연합사령부를 유엔군사령부로 개조하고 서울로 돌아가던 날.
나는 남쪽으로 향하는 북한의 피난민들을 보며 가혹한 겨울이 다가올 것을 우려했다.
이제 막 여름이 끝났으니, 적어도 이 비상시국이 반년은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역대 최악의 감염형 개체라고 분석되던 괴수를 조기에 제압하지 못한 데다, 이미 북한 전역에 공포가 들불처럼 퍼진 상황.
같은 나라 사람인 수도권 난민들조차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마당에 북한 난민을 남한에 받아들이면 민심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래. 민심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정치인과 겸손을 논할 때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관용문처럼, 민심의 준엄한 심판이 정치인의 독선을 응징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말은 정치인 스스로도 믿지 않으면서 다른 정치인을 공박할 때나 쓰이는 고루한 관용문에 불과하다. 원래 정치인의 독선은 민심이 아니라 다른 정치인이 심판하는 것이다.
민심이 두려운 이유는 따로 있다.
개인의 양심은 모이면 모일수록 비정해진다.
나는 그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
선양게이트 사태로 떨어진 국가 신뢰도는 한국의 금융을 무너뜨릴 것이고, 경제위기의 여파는 서민 밥상부터 박살내는 법.
외교적 성과와 폭탄테러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힘 입어 200석이 넘는 거대여당을 구축한 국방당은 어떻게든 민심을 수습해야 정권심판론 처맞고 골로 가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민주국가의 정치인들은 국민의 의지를 받들어 살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난민들을 막아낼 것이고, 피난민들은 제발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한 끝에 경찰의 방패벽에 부딪혀 머리가 깨지고 밥을 굶으며 세상을 증오할 터.
결국,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조상을 둔 수천만 명의 이웃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국가의 이익을 보전하고자 하는 냉혹한 독재자의 결단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평범한 일상을 지키고 싶어하는 보통 사람들의 의지다.
이 어찌 가혹한 일이 아니겠는가?
수많은 사람이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뤼미에르의 추측이 맞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이트 너머의 본체를 끝장내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명백한 해결책.
그건 너무나도 달콤해서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공식적으로 발표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매달릴 법한 이야기였다.
연변의 부랑자부터 중국 총통까지, 모든 희망을 헌터들에게 걸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가장 먼저 정체 모를 어둠 너머로 몸을 던지게 될 것인가?
뻔하다.
지긋지긋한 인간들.
특히 홍선아와 설진운 패거리. 노아 뤼미에르가 소집령을 내리면 내가 맨날 보는 그 얼굴들이 가장 먼저 자원할 게 틀림 없었다.
이미 은퇴하고 일상으로 돌아간 헌터들조차 칼을 차고 코트를 입고서 집결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위험에 몸을 던지는 게 반쯤 관성이 된 사람들이었으니까. 여전히 서울에서 차마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생존자들이었으니까.
국제사회 또한 동북아시아의 수호라는 강력한 명분을 내세워 한국이 헌터 전력을 투입하도록 강요할 것이고, 정부가 뭐라고 하든 헌터들 본인의 의지도 강력하니 공격대는 내 예상대로 편성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괴수는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초현상의 시대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선양 게이트는 평범한 게이트가 아니라 이쪽에서 먼저 열어버린 인공적인 게이트다. 차원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저편에서 마력이 넘어오는 게 아니라, 우리 세상의 마력이 저편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색깔도 푸른색이 아니라 검은색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넘어온 괴수마저도 유독 기괴하다. 모든 것을 무한히 침식하는 괴수라니.
심지어 저게 다 한 마리일 수도 있단다. 그럼 게이트 너머에 검은 물로 이루어진 바다라도 있으면 그걸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
과연 나는 그 어둠 속으로 우리 헌터들을 밀어넣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씨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무력감에 담배 하나를 꼬나물고 의자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하늘이 무너질 듯이 비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낮임에도 불 꺼진 집무실은 어둑했다. 빗소리 스며드는 어둑한 방 안에 담배 연기만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지금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건 한국 헌터의 소모를 막아야 한다는 국가적 판단이 아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보통 사람의 두려움이었다.
지인과 친구를 잃기 싫다는 망설임이다. 애써 부정해보아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가족인 여도연, 내 아픈 손가락인 감지윤,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전우인 노아 뤼미에르, 어딘가 미숙하지만 나조차도 무언가를 배울만한 리더십을 가진 설진운. 날 위해 선거철에 우스운 조끼를 걸치고 로타리에서 춤을 추던 여다솔과 조정식. 내가 고위 헌터로 임명한 수많은 헌터들, 나를 누구보다 신뢰하는 헌신적인 지지자들, 이름을 알고 얼굴을 알고 삶의 궤적을 아는 그들,
그리고 내가 그 누구보다 큰 빚을 지고 있는 홍선아까지.
나는 어둠 속으로 그들을 밀어넣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것이 아무리 해야 할 일이라지만.
내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
쏟아지는 빗소리가 내 마음을 짓누른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비가 쏟아지는 세상이 아니라 유리에 비친 나 자신이다. 그는 충혈된 눈동자를 가진 직장인이고, 정치인답게 이마를 드러낸 머리를 한 보통 사람이었다.
한때는 도와 덕이 없어진 세상에 선을 긋는 초인이 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나는 결국 초인이 아니었다.
* * *
“신의주가 핵폭발에 휘말리겠으나 민간인의 대피를 철저하게 진행할 것을 약속한다면 단둥 폭격에 찬성하지요.”
“정말 감사한 이야기요! 한승문 시장!”
“뭘요. 애초에 국제사회가 힘을 합친 이유가 중국 측에서 만주를 인류의 공물로 쓰자는 배포를 보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일이 좋지 않게 풀려 위기를 맞았지만 그 정신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실로 한국은 중국과 1000년의 친구요!”
내 조언을 받아들인 원옥분 대통령이 입장을 뒤집어 단둥 핵폭격에 찬성함에 따라, 나는 베이징에 특사로 파견되어 중국 총통에게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고된 업무로 녹초가 되어 있던 자오펑 총통은 화색이 되어 나를 반겼고, 밀회가 끝나자마자 중국은 거침 없이 군사작전을 진행시켰다.
노골적으로 단둥 핵폭격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들 이게 상의도 없이 뭐하는 짓입니까! 유엔군이 단둥 탈환을 진행하고 있는데 핵폭격을 감행한다니요!”
“단둥은 중국의 영토이고 중국 정부가 국방권을 행사할 뿐이오. 유엔군은 당장 단둥에서 퇴거하시오.”
자오펑 총통은 이로써 동북아시아 위기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UN군에 합류한 중국군의 작전권까지 회수했다.
이는 중국제일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군벌들이 자오펑 총통을 따를 이유가 되어주었고, 총 든 인간들이 정부를 지지하기 시작했으니 중국의 불안정한 내부 사정도 조금이나마 나아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를 빌미로 대대적인 프로파간다를 감행하여 만주를 외국에게 갖다 바치는 게 아니냐는 중국 대중의 의심까지 종식시켰으니 단둥 핵폭격은 그야말로 중국 중앙정부의 전략사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이로써 명분이 생겼다.
중국은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토 주권을 주장하며 국방력을 투사했다. 강력한 정부를 원하는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여긴 내 땅이니까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다고 지랄을 한 것이다.
그러면 선양에서 나온 괴수가 한 마리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 발표된 이후에도, 게이트 공략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도.
남의 나라 헌터들에게 우리나라 좀 지켜달라고 입을 열 수 있을까?
그제서야 뻔뻔하게 외국인 헌터들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소한 자기네 헌터들을 게이트에 먼저 밀어넣어 보겠지.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명분을 쌓기 위해서.
“후우…….”
그거면 됐다.
중국 헌터들이 선양 게이트에 먼저 들어가 정찰대 역할만 해줘도, 한국 헌터들이 게이트 공략을 시도했을 때 겪을 위험이 줄어들 터.
애초에 중국보고 니네들이 먼저 들어가서 게이트 저편이 위험한지 안전한지 확인하라고 강요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복잡한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
이런 정치공작이 하루이틀도 아니었으니 중국 정부가 뒤늦게 배신감을 느낄 염려도 없었다. 저들은 내 손에서 놀아났다는 자각도 없을 것이다. 나는 저들의 욕망을 툭 밀어줬을 뿐이니까. 전부 자기 욕심으로 저지른 일인데 어쩌겠는가.
다만 뤼미에르를 속인다는 건 조금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지만, 이로써 한국 헌터들은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환경에서 게이트 공략에 임할 수 있을 터였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중국이 먼저 게이트 공략을 시도해 볼 테니까.
그래. 분명 그런 계획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사이오닉 에너지 반응이 그대로입니다. 변이체가 폭격을 견뎠습니다! 단둥의 괴수가 사멸하지 않았습니다!”
“맙소사, 신이시여…….”
“괴수가……! 괴수가 낙진을 타고 사방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핵폭격을 지켜보던 유엔사의 상황실은 충격과 공포에 휘말려 있었다.
단둥에 솟아오른 버섯구름은 아무것도 죽이지 못했다. 상식에서 아득히 벗어난 현상에 온 몸에서 힘이 빠졌다.
괴수가 핵무기로 사멸한다는 것.
그조차도 인류의 오만이었나?
대체 왜 우리는 저런 불합리에 고통받아야 하나? 대체 왜?
생존을 허락받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대체 언제까지 이런 불합리한 고난에 부딪혀야 하나? 대체 왜?
“씨발! 씨발! 씨발!”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름 모를 장군이 책상을 미친 듯이 내려치며 분노했다.
나는 그럴 기운도 나지 않아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얼어붙은 채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단둥은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도시를 떠돌던 검은 괴수들은 단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그들은 또다시 형태를 바꿨다.
액체에서 수증기가 되었다. 그리고 버섯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방사능 낙진과 함께 지상으로 떨어졌다.
검은 비가 내렸다.
또다시. 비가 내렸다.
과학자들은 그 현상을 보며 지옥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본 미치광이들처럼 발작했다.
“당장! 당장 대책을 구해야 합니다! 뭐가 됐든 일단 막아야 합니다! 당장 막아야 한단 말입니다-!”
“왜, 왜들 이러시오. 저건 더티 밤 같은 물건이 아니오. 중국중앙군사위 과학기술위원회에서 개발한 친환경-”
“낙진은 씨발 먼지니까요! 저 정도 위력이면 대류권으로 떠오른 먼지가 바람을 타고 수백 킬로미터 바깥까지 퍼질 거란 말입니다! 만약 침식형 변이체가 낙진에 붙어 있다면……!”
과학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지만 사령부에 있던 모두가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감염이, 퍼진다.
마력은 물리법칙에서 벗어난 힘이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의 상식으로 마력의 작용을 예측할 수 없다고. 국회의사당에서 발생한 불을 물로 끄지 못한 사건도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나는 그때 다리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던 거지?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전문가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이럴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나?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도박은 실패했다.
“모든 시민들을 지하로 대피시키십시오! 모든 시민들을! 중국과 한국과 일본과 블라디보스토크와 지금 라디오든 핸드폰이든 정부에서 통제 가능한 모든 시민을! 당장-!”
“유엔군 사령부에서 알린다. 현장에 있는 병력은 즉시 밀폐된 공간으로 대피하라. 이는 후퇴 명령이 아니다. 즉시 밀폐된 공간을 찾아 대피하라.”
“각하! 각하! 즉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셔야 합니다! 단둥 핵폭격이 실패했습니다! 괴수가 낙진을 타고 사방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나는 떨리는 발걸음을 간신히 내딛으며 사령부 바깥으로 나왔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뤼미에르가 거대한 빛의 역장을 퍼뜨리며 헌터들을 이끌고 평양을 지켜내고자 나섰을 뿐.
그때, 하늘을 혜성처럼 가로지르는 불꽃이 있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붉은 혜성은 점점 푸르게 변하더니 단둥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거대한 화염 폭풍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번지는 낙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S급 헌터, 홍선아가 나선 것이다.
멀리서 지켜본 그 모습은 구름 위에서 터지는 폭죽 같기도 했고, 하늘 저편에서 춤추는 불사조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혼자서 저 낙진을 전부 불태울 수는 없다. 가장 강력한 헌터인 홍선아조차 이 거대한 재앙 앞에서는 개인에 불과하다.
하늘을 쳐다보며 절망하고 있으니 어느새 뤼미에르가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장관!”
“아…….”
“절 따라오십시오! 일단 사령부 전체가 남쪽으로 대피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역장을 퍼뜨려 낙진을 막는 것도 도와주시고요!”
그녀는 여전히 나를 굳게 신뢰하며 내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기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 헌터들을 다른 나라 헌터들과 함께 선봉으로 투입했다면.
이보다는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까.
다행히 뤼미에르는 단둥 폭격이 내가 유도한 결과임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알지 못할 예정이었다. 내가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한 건 아니니까.
그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렇게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사령부에서 빠져나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피채원이었다.
양복을 입고 머리를 길렀지만, 언제나 내게 아이처럼 느껴지는 소녀는 나를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고향에서 도망칠 적에 느꼈던 기분으로, 녀석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말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던 혹독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