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89화 (289/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89화

EP 44–개문 開門(8)

게이트 시대가 열리고 시간이 지나며 바뀐 것 중 하나는 게이트 재해가 말 그대로 이계의 ‘침략’이 아닌 ‘재해’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어느 날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사람을 잡아먹는 침략자들로부터 적응했다.

이제 그들은 정체 모를 이계의 침략자가 아니라 공신력 있는 학계를 통해 이름이 붙여지고 분류된 괴수이고,

사람들은 게이트 사태 또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며 그것이 이 세상의 새로운 환경이 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게이트 사태가 특정 계절마다 불어오는 태풍이나 운 없이 터지는 화산 혹은 지진해일 따위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차이는 중대했다.

만약 국가가 침략을 당해 피를 보면 사람들은 정부를 지지하지만, 만약 국가가 자연재해를 겪었는데 피해가 심하면 사람들은 정부를 욕한다.

전자는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달라는 소망에서 비롯된 마음이고, 후자는 위기에서 왜 나를 지켜주지 못했냐는 책망이다.

중국의 경우는 후자였다.

* * *

해양괴수의 베이징 습격은 리충빈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오펑 총통의 즉위를 도왔지만, 한편으로는 리충빈과 자오펑을 비롯한 선양군벌 체제를 향한 의문으로도 이어졌다.

중국 최강의 군대라고 스스로를 선전해왔던 선양군벌은 해양괴수의 베이징 강습을 막아내지 못하고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어 수도권을 무너뜨렸다.

이에 차별과 멸시에 시달리는 농민공農民工부터 상하이의 군벌귀족까지 하나 된 목소리로 베이징 중앙정부, 즉, 선양군벌에게 물었다.

대체 왜 선양군벌이 우리를 다스려야 하는가.

만약 민주국가였다면 이러나저러나 니들이 뽑은 대통령이니까 내 임기 동안은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라고 대꾸할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중국은 공산국가를 빙자한 독재국가였고, 독재자는 어떤 측면에서는 민주국가보다도 더 지지율에 예민한 부분이 있었다.

지지율이 제로가 되면 사망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새롭게 중국 총통의 자리에 오른 자오펑 총통은 내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인지를 증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중국이 세계를 뒤흔든 만주 탈환 사업을 결행한 근본적인 이유였다.

군사적 성과로 정통성을 세우겠다는 전통적인 증명.

그게 망했으니 후폭풍은 정통으로 밀어닥쳤다

“일전 선양 탈환의 실패는 군부를 좀먹는 무사안일주의와 특정 파벌이 요직을 독점하며 생긴 장성들의 해이함에서 비롯된 참사로, 충당애국의 정신으로 충언을 올리니 총통께서는 부디 이 장 모의 조언을 혜량하여 숙고해 주십사…….”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각지 군벌들의 비난과

“광복중국光復中國 시대혁명光復中國! 공산당의 무능과 학정이 도를 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공산당을 배격해야 나라를 구할 수 있습니다!”

혼란을 틈타 민주화를 노리는 재야인사들의 맹렬한 공격과.

“선양에 열린 차원문이 선양군벌을 망하게 하였으니 선양 땅에서 일어난 왕조가 흥기를 다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청이 망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땅에 새로운 중국을 만든 것처럼, 만주에서 온 귀인은 결국 중화를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정부 규탄보다는 인터넷 수금이 목적인 사이비들의 종교적 비난까지.

위기의 자오펑 정권은 만약 민주 국가였다면 정상적인 국정 활동이 불가능해질 정도의 비난여론에 직면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중국은 일당독재국가였다.

공산당 내부에 있는 공산귀족의 핵심 이권만 보장하면 민주주의자나 사이비 따위의 말은 씹어도 됐다. 그들은 총칼이 없었으니까.

천안문에서 군대를 동원해 민중을 밀어버린 정부가 심판받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역사적 선례는 게이트 시대에서조차 중국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이 상식이 된 것이다. 역사의 관성이란 이토록 무겁다.

따라서 자오펑 총통은 아래의 비난은 총칼로 진압하고 옆에서 쿡쿡 찔러오는 비난만 적당히 수용하기로 했다.

군벌들은 하나 된 목소리로 말했다.

-총참모부와 중앙군사위원회의 특정 파벌이 전횡을 일삼으며 군무를 휘두른다면 참언과 요설에 휘둘려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

자리 좀 나눠 먹자는 소리였다.

자오펑 총통은 핵심 보직 몇 개를 뿌렸다.

사료를 받은 군벌들은 얌전해졌다.

-중화연방의 총통이 균형 있는 인사감각을 지녀 탕평의 도를 이루었으니 능히 세계화평과 인류공영을 이루고자 하는 총통의 뜻을 받들어 모시겠다.

간신히 선양 탈환 실패의 후폭풍을 수습한 자오펑 총통은 동북아시아 위기를 다루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중간에서 대체 누가 수작을 부렸는지 모두가 당황한 사이 어어 하다가 유엔군이 결성되고 작전권이 넘어가긴 했지만,

만주는 어디까지나 경제특구 개방을 약속했을뿐 여전히 명백한 중국의 영토였고,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문제의 주도권은 중국 정부가 쥐고 있어야 했다.

자오펑 총통은 이 문제를 둘러싼 군벌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자리 몇 개 던져주고서 언로를 다 막아버리면 너무 겉으로만 체면치레한 느낌이 드니까.

그러자 군벌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어놓았다.

“중국에서 발생한 일이라지만 그 여파가 비단 중국에만 미치지는 않을 터인데 기왕지사 국제연맹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진력하고 있으니 신중하게 협력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거듭된 불운으로 인민해방군의 사기가 꺾였으니 기운을 일신하고 체질을 개선하는 데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사태를 해결하고 당의 엄정함을 보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나같이 알맹이는 없는 소리들이었다.

권력 나눠 달라고 징징댈 때는 언제고 이제는 어떠한 책임도 지기 싫다고 발을 빼는 행태에 자오펑 총통은 기가 찼다.

그때, 그나마 의견 같은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었다.

“단둥을 핵으로 폭격합니다.”

그게 정신 나간 소리라서 문제였다.

전략화전군(전략로켓군)의 사령원이자 칭타오 일대의 유력가인 천쉬우 상장은 한참 전부터 주구장창 핵무기 실사용을 주장하던 인사였다.

공공연하게 미치광이라고 불리는 이이기도 했다.

국제정치학적 전략인 <미치광이 전략>을 주로 사용한다고 해서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라, 그냥 진짜로 핵무기에 미친놈 같아서 붙은 별명이었다.

자오펑 총통이 그의 별명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언급했다.

“당신 미쳤소?”

회의실의 모두는 일제히 긴장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 사람 좋기로 유명한 자오펑 총통의 입에서 욕설이 나온 것이다.

총통이 최근 일이 좋지 않게 풀려 온갖 수난을 겪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한 놈 찍어서 보내버리는 것 정도는 언제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천쉬우 상장은 주변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굳은 얼굴로 진언을 이어갔다.

“지금 당장 단둥에 불벼락을 쏟아버리자는 정신 나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급박한 정세 속에서는 언제든 과감한 전략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으음…….”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유엔군이 단독으로 선양 위기를 해결한다면 중국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인류 최초로 인공적인 차원문을 열어 대참사를 초래하고서 미국에 뒤처리를 맡긴 나약한 종자들이 되는 겁니다.”

1차 선양 탈환을 말아먹은 챠오리륀을 후원했던 광저우의 유력가 장궈후이가 점잖게 끼어들었다.

“말씀을 신중하게 하시지요. 선양 탈환의 실패는 우리 모두의 애통함일진대, 그 일을 너무나도 가볍게 언급하는 것은 죽어간 용사들을 모독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우려가 있소만.”

그러나 미치광이 앞에서는 어떤 지적도 소용이 없었다.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챠오리륀을 누구보다 아끼는 저자도 선양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체면이 깎인다고 성화인데, 세계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미 진흙탕에 처박힌 국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사태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

자오펑 총통은 이쯤 되자 이놈이 미치광이인지 아니면 주도면밀한 전략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건 다른 군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슬슬 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군요. 언제까지 국제연맹군이 중국의 영토에서 군사활동을 벌이는 것을 두고 보기만 할 겁니까.”

“설령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언제든지 우리가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 결기를 증명해야 합니다.”

단둥 핵폭격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인사들은 대개 자오펑 총통의 서방 친화적인 정책에 반대하고 중국 제일주의 노선을 희망하는 자들이었다.

아무리 만주 개발에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들 자오펑 총통의 친미 친서방 행보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면이 있다.

중국이 지난 십수 년 동안 관성적으로 유지하던 기조와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 것이다. 국가수반 노릇을 처음 해봐서 생긴 아마추어적인 실수였다.

각지의 군벌들 모두가 자기 이익만 챙기는 개돼지는 아니다. 개돼지에게도 마음이 있고 이념이 있다. 적어도 군벌 중 일부는 중국 제일주의 노선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지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오펑 총통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단둥 핵폭격을 추진해 보수주의자들의 민심을 다독일 것이냐, 혹은 핵무기 사용 같은 극단적인 카드는 최대한 숨기고 친-서방 노선을 계속 밀어붙이느냐.

따라서 UN군 사령부에 방문한 영국인 학자가 발표한 ‘저 괴수는 감염형 개체가 아닙니다’ 선언은 그저 방아쇠를 당긴 것에 불과했다.

핵폭격을 결심한 중국은 국제사회에 통보했다.

물론 국제사회는 중국의 내밀한 정치적 사정 따위는 전해 듣지 못하고, 갑자기 단둥을 핵폭탄으로 날려버리겠다는 결정만 툭 전해들었다.

* * *

미친놈들인가.

“아니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해도…….”

“이미 당 지도부 차원에서 결의된 사안입니다. 단둥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다롄과 잉커우, 그리고 베이징까지 괴수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 본국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리슈잉은 말하는 본인조차 난감한 기색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까지 당황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혹시 한 시장께서는 핵무기 사용에 반대하시는지요?”

“솔직히 말하면 곤란합니다…….”

단둥은 신의주와 붙어있다.

핵무기를 사용하면 당연히 휘말린다. 심지어 단둥-신의주는 중국과 한반도를 육로로 연결하는 관문이기까지 하다.

거길 방사능으로 지지면 앞으로 무역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대체 중국이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따져도 아무 소용 없는 노릇.

단둥 핵폭격 이슈는 워낙 예민한 문제이다 보니 비공식적인 라인으로 전달되었고, 그건 중국 국가안전부 소속인 리슈잉이 한국 야당 서울시장인 내게 연락하고, 내가 그걸 원옥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간접적인 방식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원옥분 대통령과 선양 사태 이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지하벙커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지친 기색으로 가죽의자에 기댄 대통령이 나를 맞이했다. 저번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병색이 완연해 보였다.

안면마비를 가진 대통령은 살짝 어눌하게도 들리는 말투로 내게 인사했다. 평소에도 대국민 연설 때처럼 또박또박 말하는 건 그녀에게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한승문 시장. 평양에서 한 건 했다면서.”

“독단적인 행동으로 느껴지셨다면 송구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이 시국에 독단이 어디 있어. 손에 잡히는 것부터 하는 거지. 일단 앉아.”

대통령은 의외로 내가 수작을 부려 한중러 연합사령부를 유엔군사령부로 변신시키고, 거기에 노아 뤼미에르를 총사령관으로 앉혀놓은 일을 가지고 뭐라 힐난하지 않았다.

하긴, 한국이 독재국가도 아니고 서울시장이 뭘 하고 다니든 대통령이 간섭할 건덕지가 없는 것이다.

야당 서울시장이 국제기구에 야료를 부려 유엔을 끌어들여 판을 키우고, 그 윗대가리에 지 친구를 앉혀놓은 일도 엄밀히 따지면 불법은 아니었다.

보통은 불법이라 못하는 게 아니라 어려워서 못하는 거지.

“그래…… 또 무슨 일이 터졌길래 청와대까지 달려왔어?”

“중국이 단둥을 핵폭격하려고 합니다.”

원옥분 대통령은 내 말을 듣자마자 테이블 위의 내선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대통령입니다. 지금 벙커에 있는 NSC 참석대상자 전부 집무실로 모이세요.”

지하벙커 청와대에 상시 거주하며 비상대기 중인 고위공직자들이 우르르 대통령실로 몰려왔다.

초상관리부 장관은 샤워하다가 뛰쳐나왔는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짠해진다.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에 박아넣은 임플란트가 시려왔다.

내가 자잘한 생각을 하는 동안 원옥분 대통령은 정부 내각의 의견을 들은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건 반대해야 하겠는데.”

“그렇습니까?”

“일단 핵폭탄이 괴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의문이고, 핵폭탄이 한 번 쓰이면 앞으로도 계속 쓰일 거 아니야.”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게 되겠지요.”

“문제는 우리나라에 핵무기가 없어.”

“예?”

핵무기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는 북한을 흡수하며 핵보유국이 된 게 아니었나?

원옥분 대통령과 정부 인사들은 이미 알고 있는 문제였는지, 대통령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 중 놀란 이는 나뿐이었다.

외교부 장관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저기, 한 시장님, 다름이 아니라…….”

원옥분 대통령은 집권 직후 핵무기를 두고 미국, 그리고 중국과 협상했다.

한반도에 핵무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미-중 양국의 심기에 거슬렸던 것이다.

어느 날 미친놈이 당선되서 중국이나 일본에 핵폭탄을 날릴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물론 미국과 중국 중 누구도 한국에게 핵무장을 해제하라고 압박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옥분 대통령은 동북아시아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선제적인 핵무장 해제를 제안했다.

어차피 북한산 핵무기는 상대적으로 위력이 떨어지는 구식 핵무기였던데다,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핵무기를 양산 가능한 과학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에 미국과 중국은 원옥분 대통령의 제안을 활짝 웃으며 받아들이고 암묵적으로 막대한 경제적 혜택을 줬으나…….

막상 이런 시국이 되니 국내에 핵무기가 없다는 건 아주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런 판단을 하셨던 겁니까?”

차마 대통령에게 미치셨냐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원옥분 대통령을 노려보았다.

원옥분 대통령은 자기도 머리가 아픈 모양인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그때…… 상황이 좀 그랬어. 일본이 한국이 핵무장했으니까 지네도 핵무장하겠다고 설쳤고, 심지어 그게 받아들여지기 직전이었단 말이야.”

“아.”

“차라리 우리가 먼저 나서서 핵무장 해제하고 받을 건 받아오는 게 최선이었고, 기술을 아예 파기한 게 당연히 아니니까 3개월 내로 핵무기 양산은 언제든지 가능해.”

“진짜로 핵무기 전부 다 파기했습니까?”

“그럼. 동해바다에 전부 갖다 버렸지.”

“몇 개는 숨겨 놨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원옥분 대통령이 나한테 미묘하게 구박을 듣고 있으니 외교부 장관이 난감한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우리도 핵무장을 완벽히 포기한 게 아닙니다. 외교부 차원에서 장기적인 플랜을 이미 계획해 둔 상태입니다. 베스트 시나리오는 일본의 핵무장을 저지하고 우리만 핵무장을 하는 것인데, 그건 영구적으로 한국이 일본보다 우월한 패권을 쥐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대통령 각하께서도 임기 5년 동안 일본 핵무장 저지와 한국의 단독적인 핵무장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고, 우리 외교부가 그 지침을 받고 최선을 다해-”

“그래서 지금 핵폭탄 못 쓴다는 거죠?”

“……예.”

“그럼 중국이 핵폭탄으로 단둥 날려버린다 칩시다. 괴수들이 한반도로 죄다 몰려오면 어떻게 대처할 겁니까? 순항미사일 몇백 개 갖다 부어서 숫자로 해결할 거예요?”

내 질문에 장관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그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설마 감지윤만 믿고 있었던 건……?”

“…….”

“지금 방사능 가득한 곳에 미성년자 헌터를 투입할 생각이었던 겁니까?”

초상관리부 장관이 급하게 끼어들어 항변했지만 그건 내 화를 더 돋구기만 할 뿐이었다.

“한 시장. 우리도 그 정도로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다만 감지윤이나 홍선아 헌터 같은 비대칭전력이 우리나라를 굳게 지켜주고 있기 때문에…….”

“하아…….”

“헌터 분야에서 과잉전력을 갖추고 있는 덕에 국제사회에서 선제적인 핵무장 해제라는 과감한 조치로 일본과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물론 이런 상황이 닥칠 것을 고려하지 못한 건 본 장관도 참 공교롭고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 * *

결국 청와대에서의 긴급회의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끝났다.

하지만 단둥 핵폭격은 이러나저러나 너무 급진적인 방식이다. 단둥이 반쯤 초토화되긴 했지만 아직 사람들이 저항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중국도 양아치처럼 생존자고 나발이고 핵무기부터 갈기진 않겠지만, 핵폭격이 어느 정도의 인명피해를 감수하는 방식이라는 건 변함 없었다.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평양에 다시 방문했다. 수많은 외국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평양 사령부의 한가운데에 뤼미에르가 있었다.

그녀는 각국 장성들과 지도를 둘러싼 채로 열변을 이어가고 있었다.

5, 60대 장성들을 아주 젊어 보이는 금발의 서양인 여성이 진두지휘하는 모양새였지만 그녀가 쌓은 인생은 그 모습을 부자연스럽지 않게 만들었다.

“잉커우 라인은 반드시 사수해야 합니다. 민간인 대피 후 소각으로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는 지점이 아니에요. 단둥이 뚫리면 연변이 있지만 잉커우가 뚫리면 중국과 한반도가 완전히 분리됩니다. 그건 동북아시아의 수많은 시민들에게 끔찍한 경제적 재앙이 될 겁니다.”

“하지만 루이아이러 총재, 잉커우는 선양과 평지로 이어진 곳이오. 언제까지 포화를 쏟아부으며 화력전을 펼 수는 없소. 이곳에서 모든 포탄을 소모하면, 다른 전선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테니…….”

“게이트는 헌터로 대응할 수 있지만 이 검은 점액질의 악마들은 헌터들도 대응이 곤란합니다. 접촉이 곧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포격으로 저지하는 게 최선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화력의 소모를 줄이고 싶다면 알프스 라인이나 충청방어선처럼 효율적인 화망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한참이나 토의를 이어가던 그녀는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나를 발견하고서는 방긋 웃었다.

“아! 장관! 여기까지 오셨군요! 마침 잘됐습니다. 중요한 사실을 하나 추정해 냈거든요.”

“뤼미에르. 잠깐 할 이야기가-”

“급한 일이 아니라면 제가 먼저 이야기하지요.”

“아마 제 용건이 더 급할 겁니다. 다름이 아니라 단둥에-”

“저 검은 점액질 괴수들은 한 마리입니다.”

“먼저 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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