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86화
EP 44–개문 開門(5)
문이 열렸다.
일그러진 원형의 공간 너머로 무한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곳은 인간의 지성이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공간이다.
차원학과 마력역학은 이제 막 이름이 생긴 학문이었으니 그 어떤 학자도 이 게이트가 어떻게, 왜 생성되었는지 규명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이 게이트가 그간 지구에 생성된 수많은 것들과 다른 종류의 게이트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색이었으니까.
“……어째서 푸르게 빛나지 않는 거지?”
“마치 블랙홀 같군요…….”
시퍼런 마력으로 형형하게 빛나는 기존의 게이트들과는 달리, 새롭게 열린 검은 구멍은 그 어떤 빛도 내뿜지 않고 있었다.
* * *
독재 국가 정치장교들의 조급함과 자본주의 국가 기업인의 섣부른 도전정신이 만들어낸 선양 제2게이트는 인간이 최초로 만들어낸 게이트이자 처음으로 등장한 검은색 게이트였다.
선양 탈환을 준비하던 중국군과 헌터들의 머리 위에 생긴 수십 미터 크기의 구멍은 어둠이란 개념을 한데 뭉친 것처럼 짙었다.
언뜻 보면 어딘가로 통하는 통로가 아니라, 허공에 존재하는 얇은 검은색 원반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해서 그 안을 들여다본다면,
어둠의 저편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는 것들이 이쪽 세계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직접 확인한 호기심 많은 헌터가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어?”
게이트 저편에서 나온 무언가가 소리 없이 헌터의 콧등 위에 떨어졌다. 그건 아주 작은 물방울이었다.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를 분간할 수 없듯, 검은 게이트에서 나온 검은 물방울은 언뜻 게이트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양 탈환을 준비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 장샹청 상장과 레드먼드 인더스트리의 니콜 레드먼드 대표이사, 인민해방군 전차장과 장갑차, 중기관총 사수, 낡은 트럭에 올라탄 보병 소대, 한국산 실드코어와 유럽제 티스블레이드로 무장한 상하이방 정예 헌터들, 베트남계 전술 어드바이저로 위장한 CIA 요원, 그리고 1차 선양 공략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인근 폐건물에 숨어 있던 패잔병들까지.
그들은 게이트 너머에서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점과 선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한에 가까운, 아니, 무한대로 쏟아져나오는 빗방울이 지상을 잠식했다.
검은 물방울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자신에게 닿는 모든 유기체를 잠식했다.
검은 비가 내렸다.
폭우暴雨가 시작되었다.
“아아악-! 흐아아아악-!”
“사장님, 이거 비 맞습니까? 움직이는 것 같은데…… 어? 어어? 씨발, 이거 괴수다!”
“당신! 당신 헌터지! 당장 내 손에서 이것 좀 떼어줘! 아무리 긁어내도 자꾸 커진다고!”
누군가의 손등에 떨어진 검은 물방울은 근육과 살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며 자신의 크기를 키웠다.
물방울은 몸부림치는 사냥감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도록 얇은 막이 되어 표면부터 덮었으므로, 비에 맞은 사람들의 모습은 언뜻 검은 물감을 뒤집어쓴 채로 춤추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비웃을 정도로 미쳐버린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은.
“당장 도망쳐라! 닿으면 끝장이다! 빨리 후진해! 후진하라고! 어? 아, 안 돼! 떨어져! 아악! 살려줘! 흐악! 엄마! 엄마! 아아악-!”
비가 내리는 범위에서 어떻게든 도망치려던 전차장은 끝내 머리부터 검은 비에 잠식되며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의 육신은 전차 안에 있던 모든 승무원을 감염시키며 몇 번의 발버둥 끝에 전차 내부를 검은 물웅덩이로 만들었다.
“그거 달고 오지 마! 베어버린다! 진짜 베어버린다고 했어! 이런 씨발!”
검은 비에 맞은 사람들이 무작정 헌터의 도움을 바라며 다가왔지만 헌터는 칼을 휘두르며 감염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그 헌터 또한 본인의 팔과 다리가 조금씩 검게 물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입에 들어갔어……! 나 이제 어떡해! 나 죽기 싫어! 제발, 제발, 포션! 포션 좀 나눠주세요!”
자기 입에 검은 비가 들어갔다고 착각한 인민해방군 군인은 무작정 포션을 먹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주변의 도움을 구했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이에 세상을 원망하며 죽기 전에 길동무를 만들겠다고 사방에 총기를 난사한 끝에 사살당했다. 그 시체는 바닥에 고여 있던 검은 물웅덩이에 흡수당해 액체가 되어버렸다.
쏟아지는 검은 비 속에서 수많은 인생과 삶이 몸부림치며 검게 물들었다.
그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총천연색 색깔 위에 검은색 물감을 덧칠하는 것 같기도 했다.
* * *
선양에서의 참사가 주변에 알려진 건 공식적인 보고 체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현장에 잠입한 종군기자나,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를 (관습적으로) 무시하고 핸드폰을 소지한 간부가 영상을 찍어 퍼뜨린 덕분이었다.
따라서 선양 사태의 전파는 군이 정리한 자료를 민간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니라,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진 자료를 군이 뒤늦게 접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리고 게이트 시대의 인터넷이란 음모론과 선동, 그리고 혐오의 바다다.
따라서 연합사령부는 <선양에서 레드먼드 인터스트리의 발명품이 최초로 검은 게이트를 열었는데 거기서 나온 액체형 괴수가 선양 탈환을 위해 대기하던 모든 군대를 전멸시켰다>는 이야기를 단순한 가짜 뉴스로 치부했다.
“또 병신짓해서 말아 먹었구만.”
“선양에 무슨 마라도 끼었답니까? 중국이 두 번이나 탈환에 실패하다니…….”
“SNS에 돌아다니는 6초짜리 영상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요. 혹시 선양게이트에서 감염형 개체가 나온 건 아닐까요?”
“에헤이. 그거 영상 믿을 거 못 돼요. 미국에 있는 대만 해커들이 독립운동이랍시고 맨날 중국 음모론 퍼뜨리고, 중국 엿 먹이는 가짜 뉴스, 가짜 영상 만들고 그러잖아요. 미국에 있는 중국 기업 주가 떨어뜨린답시고 하는 일이긴 한데…….”
중국 정부는 패잔병들로부터 그나마 정확한 정보를 보고 받았지만, 선양 탈환이 또다시 실패했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알려지면 어마어마한 내부적 비난을 면치 못할 테니 최대한 피해를 줄여서 발표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느라 공식 브리핑이 늦어졌다.
그나마 만주에서 활동하던 헌터들 사이의 연락망에서 중국의 정예 헌터들이 맥없이 패배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동북아시아에 만연한 반중감정으로 ‘중국 헌터들이 알고 보니 허당이었다’는 비웃음에서 그칠 뿐, 발전적인 논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결과, 연합사령부가 선양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했을 즈음에는 검은 물방울, 아니, 검은 슬라임이 선양에 있던 모든 괴수들까지 흡수해 버린 뒤였다.
* * *
서늘한 달빛이 선양의 폐허를 비추었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집념의 생존자들이 폐허 속에서 끝없이 쫓아오는 검은 액체를 피해 도망쳤지만 폐와 근육을 가진 개체는 언젠가 지치기 마련.
한때 수십 마리의 무리를 이끌었던 늑대형 괴수 또한 체력이 다해 쓰러졌고, 그 개체가 인간과 괴수를 포함해 선양에 남은 마지막 생존자였다.
피가 섞인 단말마가 늑대의 코로 빠져나왔다. 심장이 멈춘 괴수의 시신에 검은 물방울들이 달라붙어 팔다리를 녹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모든 괴수는 적응한다.
그것이 고작 검은색 액체로 이루어진 군집이라도 마찬가지다. 다른 괴수의 마석을 흡수한 그들은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건 이미 환경에 적응한 자들의 육신을 빼앗는 형태였다.
팔다리가 반쯤 녹아내린 늑대형 괴수의 몸 속으로 검은 액체가 서서히 스며든다.
검은 액체는 이미 녹아내린 괴수의 팔다리를 새로 구성했고, 한 차례 죽었던 괴수는 다시 눈을 뜨며 붉은 안광을 형형하게 빛냈다.
도시 곳곳에서 붉은 안광을 빛내는 괴수들이 새롭게 얻은 육신을 가지고 다시 일어섰다.
아니, 검은 슬라임의 군체가 괴수의 시신을 새로운 껍데기로 삼아 진화했다.
늑대의 몸을 차지한 슬라임은 이빨 대신 촉수 다발을 내보내 주변을 더듬으며 새로운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시각, 촉각, 후각, 그리고 마력을 감지하는 초감각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늑대는 붉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슬라임의 기생으로 한 차례 진화한 괴수들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무리사냥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바닥을 기어다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속도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감염시키고, 증식했으며, 다시 진격했다.
괴수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 * *
흥안령 산맥이냐 야블로노비-스타노보이 산맥이냐를 두고 맹렬한 논쟁을 거쳤던 <북부 방위선>은 결국 그보다 한참 남쪽에 설치되었다.
그 누구도 만주와 시베리아를 장악하리라고 천명했던 연합군이 고작 한반도 북부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리라.
연합군은 랴오닝과 장백산맥에 방위선을 형성했다.
랴오닝-장백산맥 라인은 ‘북부’ 방위선이라고 하기에는 우스운 위치였지만 사태는 웃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랴오닝은 선양과 평지로 이어져 있었고, 최근 베이징에서 유입된 난민들까지 포함해 1억 명이 넘게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만에 하나 괴수가 랴오닝을 습격한다면 사상 최악의 학살이 벌어질 터였다.
그리고 랴오닝이 뚫리면 베이징과 평양까지 위험에 빠진다.
“만약 보고가 사실이라면 이건…… 사상 최악의 감염형 괴수입니다.”
“최대한 빨리 선양을 봉쇄해야 합니다! 화력을 쏟아부어서 저놈들이 퍼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해요!”
“한국과 일본에 주둔 중인 미 공군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걱정 마시오. 이미 요청했소.”
“당신이 뭔데 미국에 지원을 요청해! 이건 우리 손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요!”
“나는 대한민국 국무총리로서 한반도 북부의 소요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국의 도움을 요청했소! 중국은 이 결정에 관여할 자격이 없어!”
내분으로 몸살을 앓던 연합사령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후에야 기민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군대가 배치되었고, 만주에 흩어져 있던 헌터들이 집결했다.
그렇게 모인 연합군의 배치는 장백산맥을 이용해 랴오닝 평야에 만든 봉쇄선이었는데, 방어선이라기보다는 선양 포위망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했다.
절뚝거리며 달려드는 블랙슬라임 감염체들은 자주포와 공군이 형성한 화망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만주의 평야에서 고꾸라졌다.
“이거 생긴 건 좀 꺼림칙한데…….”
“의외로 상대할 만하네요. 몸에만 안 닿으면 되잖아?”
만주를 떠돌며 괴수를 사냥하던 헌터들 또한 연합사의 부름을 받고 선양 포위망에 합류해 기동타격대 역할을 수행했다.
이미 선양에서 멀리까지 진출한 괴수들은 헌터 길드의 추적을 받고 제거되었다. 블랙슬라임의 위험성이 파악된 이후였기 때문에 헌터들 또한 최선을 다했다.
연합사령부는 봉쇄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숨 돌렸다.
“그나저나 여기서 너무 많은 예산을 써버리면 안 되는데…….”
“하여튼 중국 애들이 헛짓거리를 해가지구 여러 사람 고생시키네요.”
연합사령부의 대응은 상식적이었다.
장백산맥은 백두산이 위치한 한반도 북부의 고산지대로,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게 해준 천혜의 지형이다.
따라서 장백산맥에 소수의 전력을 배치하고, 랴오닝 평야에 대규모 군대를 배치시킨 화력공세는 망치와 모루에 기초한 정석적인 전략이었다.
하지만 괴수를 상대할 때 인간의 전략을 들이민 게 잘못이었을까.
자신이 죽인 괴수의 탈을 쓴 슬라임 군체는 거침없이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강줄기에 흘러들어갔다.
검은 액체가 압록강에 스며들었다.
압록강 하류에 있는 단둥과 신의주에 검은 액체가 퍼져나갔다. 50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괴수의 습격에 노출되었다.
봉쇄선은 그렇게 붕괴했다.
가장 먼저 후퇴한 건 한국군이었다. 최대한 사상자를 줄이라는 원옥분 대통령의 지침을 받은 국군은 망설임 없이 본국 수호를 위해 선양에서 떠났다.
그다음으로 후퇴한 건 중국군이었다. 베이징, 잉커우, 다롄이 무너지면 그 여파로 중화연방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직감한 중국 정부의 결단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이었다. 그들은 후퇴할 곳이 없었다. 그들은 영토가 있는 정식 국가가 아니다.
연변의 일부 중국인들은 물론이고 만주를 떠도는 부랑자들, 만주와 시베리아, 장백산맥 곳곳에 설치된 전초기지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엮는 믿음이 그들의 본체다.
그게 무너지는 순간 군벌 체제는 붕괴한다.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은 만주 일대의 모든 난민들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중국과 한국, 그리고 미국 또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공군지원을 해줬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선물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연합은 붕괴했다.
연합군은 건재하고 만주 탈환에 투자된 국제 자본도 공동신탁위원회에 여전히 존재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신뢰는 이미 무너졌다.
무너진 건 그뿐만이 아니다. 안전하다는 믿음이 무너진 순간 경제, 치안, 국가도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리고 평양 연합사령부 또한 붕괴를 앞두고 있었다.
* * *
사람들에게 다시 희망을 줘야만 했다.
괴수가 단둥과 신의주를 습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 나는 서울시장으로서의 업무를 일제히 중단하고 평양 연합사령부에 합류했다.
서울시장으로서가 아니라 한국 헌터 사회의 영수로서 참석한 것이라 공식적인 지위는 없었지만, 연합사는 지금 누군가의 출입을 통제할 정도로 체계가 잡힌 상황이 아니었다.
연합사령부 최심부에서는 한창 치열한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당장 단둥에 핵폭격을 해야 합니다!”
“미친 거요?! 거기 남아 있는 사람이 몇 명인데!”
“이건 내 의견이 아니라 중앙군사위원회 일각의 공식적인 제안이요! 중국이 자국의 안전을 위해 내부적 군사행동을 벌이는데 한국이 무슨 권리로-”
“개소리 집어쳐! 당신도 단둥과 신의주가 강 하나 건너라는 걸 모르지 않잖아! 그러니까 여기서 밑밥을 까는 거지! 한국도 핵폭격에 동의했다는 말을 어떻게든 받아내려고!”
“이 빌어먹을 가오리빵즈 놈이 감히 말 같잖은 소설을 써?!”
“우린 중앙군사위원회 내부의 알력다툼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소! 마찬가지로 단둥 핵폭격 따위의 끔찍한 소리는 결코 용납 못 합니다!”
“감염형 개체야! 감염형 개체라고! 당신네는 대규모 감염확산을 겪어본 적 있나? 기껏해야 북서울에서 한 번 맛이나 봤겠지! 우린 사천을 상실했소!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씨발! 이건 지금 민간인들 머리 위에 핵폭격을 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문제란 말이야-!”
나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고성을 지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혼란과 무기력이 이 공간을 잠식했다. 이런 사태를 대처해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곳에서 내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사람들을 연합사에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대표단 오늘 왜 안 왔어요?”
저번에 사소한 친분을 쌓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초췌한 얼굴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내부회의랍니다. 사실 그건 핑계고 슬슬 귀국하려는 것 같아요.”
“무조건 막으세요. 블라디보스토크든 중국이든 하나라도 떠나는 순간 연합사령부가 해체됩니다. 그건 이 사태의 컨트롤타워가 없어진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시장님……! 연합사령부는 사실상 이미 해체됐습니다! 핵심 장성들도 전부 돌아갔어요! 지금 연합사에 남아서 나불거리는 양반들은 전부 외교관이거나, 뭐라도 더 주워먹으려고 기웃거리는 장사치들입니다!”
“그런 인간들이라도 일단 데리고 있어야 해요. 어떻게든 연합사령부의 정통성을 유지해야 한단 말입니다.”
“후우…….”
나는 누더기가 된 연합사령부를 내부에서 서서히 장악했다. 한국 헌터 사회가 내 지지기반이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리충빈 총통과의 인연을 팔아가며 중국군 장성을 연합사령부에 남게 했고, 블라디보스토크 대표단을 어르고 달래며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 외교관 사이의 다툼을 합리적으로 중재하고, 미국 헌터 길드가 귀국하지 못하도록 이권을 약속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에 로비스트 역할은 질리도록 해보았으니 익숙한 작업이기도 했다.
“예. 그럼 마이어 한의 말을 믿고 저희 길드는 만주에 남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하지만…… 지금 마이어 한이 왜 이렇게 연합사를 유지하려고 하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무언가 이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혜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일 터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무슨 혜안이 있을까요.”
“그럼 대체 왜……?”
“이런 건 원래 전문가한테 맡겨야 해서 그렇습니다.”
원래 나랏일은 아주 중요한 일일수록 주먹구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높으면 높을수록 결정권자 숫자가 적어지는 탓이다.
나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중국 대표단을 일일이 설득하고 다니지 않고 아버지가 공산당 상하이방 영수인 젊은 얼치기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수많은 미국 PMC 중 회사 규모는 작아도 그쪽 업계 대선배로 존중받는 베테랑 헌터를 찝어서 포섭했다.
나를 믿는 한국 헌터들은 설득할 필요도 없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대표단이 자꾸 떠나려고 하길래 빅토르 리의 비서인 나타샤 프리마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했다.
그렇게 멘탈이 박살난 각국 대표들과 기타 핵심적인 이해관계자들을 어르고 달래며 일시적으로나마 연합사 내부의 헤게모니 주도권을 잡은 나는 모든 기자와 외교단을 불러 모았다.
“한승문 시장님! 선양에 열린 검은 게이트가 인공적으로 생성된 게이트라는 게 사실입니까? 이 또한 누군가의 테러입니까?”
“신의주에 괴수가 들이닥쳤는데 평양은 안전합니까?! 어떻게 선양에서 출현한 괴수가 신의주까지 이렇게 빨리…….”
“한 시장님! 지금 단둥과 신의주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연합사령부의 대응 방안은 어떻습니까!”
“신종 괴수가 사상 최악의 감염형 괴수라는 사실이 세간에 떠돌고 있는데-”
“모두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들의 거센 질문은 카메라 저편에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공포를 대변하고 있었다.
끔찍한 공포를 마주한 끝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무수한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채로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작게 신호를 주고 단상에서 내려가자, 내가 지금껏 준비했던 순간이 찾아왔다.
그녀가 왔다.
“…….”
푸른 바다 색깔의 헌터용 코트에 달린 무수한 훈장.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마력.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굳센 눈빛.
우레처럼 쏟아지는 셔터 소리와 사람들의 환호성을 뚫고서 다가온 야전사령관이 마침내 단상 위에 올랐다.
노아 뤼미에르의 푸른 눈동자가 카메라를 직시했다.
“존경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영향력과 권력과 대중의 관심을 하나로 모아 이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전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내가 전해준 것들을 무사히 받아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그것으로 바꾸어냈다.
“저는 세계초인기구 최고평의회의 의장으로서,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바에 따라, 1950년 7월 7일에 설립된 한반도의 UN군 사령부와 관련한 모든 권한을 이양받았습니다.”
“이에 중국, 한국,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의 무장세력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설립한 연합군사작전사령부에 지휘권 통합을 제안하였고, 연합사 사무국 임시 의장이자 산하 공동신탁위원회의 임시 위원장인 한승문 서울시장이 이를 승인하였습니다. 이로써 동북아시아 위기는 UN이 통제합니다.”
“동시에 저는 세계초인기구 최고평의회의 의장으로서 만주 일대에 동원령을 선포하는 대신, 한 명의 초상능력자로서 동포들에게 고합니다. 부디 인류 공동의 위기를 대처하는 데 힘을 모아 주십시오. 게이트 너머의 침략자가 힘없는 사람들을 포식하게 두지 맙시다. 우리는 그런 일을 너무나도 많이 겪었습니다. 막아냅시다! 우리에겐 그럴 힘이 있습니다. 저 괴물들에게 인류가 내어줄 건 칼과 총탄뿐임을 똑똑히 보여줍시다. UN군에 합류해 주십시오. 이것은 인류를 위한 성전입니다.”
그것은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