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81화
EP 43–인과응보(13)
살아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딱딱한 연필을 쥐고서 굳은 살이 배길 때까지 문제를 풀고, 하늘이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들 때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선생님은 언젠가 나비가 되려면 번데기 생활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번데기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이상하고 답답할 뿐이다.
사각사각- 흑연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만 들려오는 일상 속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내일도 오늘 같은 생활이 반복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일상의 굴레가 깨어지고, 학생과 선생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단지 사냥감이 되어 도시라는 정글 속에 내던져졌을 때.
“살려줘! 제발 살려달라고! 제발…!”
“아악! 물지 마! 저리 가! 엄마아아-!”
살아남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도시의 뒷골목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터진 쓰레기 봉투, 얼룩진 실외기, 깨진 플라스틱 조각, 담배꽁초, 시체, 물에 퉁퉁 불은 종이박스, 어지럽게 얽이고 섥힌 전선, 빨간색 나이트클럽 명함.
그런 것들을 피해가며 전력질주를 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거센 비바람이 쏟아지는 와중에는 더더욱 그렇다.
핏방울로 얼룩진 교복을 입은 세 사람은 그 사실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형견 크기의 괴수 무리가 그들을 둘러싼 와중이었다.
동대문 캠프의 수색대에게 이동과 전투는 같은 뜻이다.
“크윽……!”
굵은 빗줄기가 때때로 눈알에 정통으로 떨어질 때마다 쓰라린 고통에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소년은 눈을 부릅뜨고 앞을 보았다.
그리고 달려나갔다. 그의 임무는 언제나 길을 뚫는 것이었으니까.
“흐읍 - !”
단단한 쇠파이프를 힘껏 쥔다. 그리고 허리의 힘을 담아 휘두른다.
빠악-!
달려드는 괴수의 머리통을 부술 때마다 생명을 끊는다는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정체 모를 괴물들에게도 두개골은 있는 모양이라, 전투가 끝나면 박살난 머리통과 으스러진 뼛조각이 뒷골목에 널리곤 했다.
“설진운! 이제 어디로 가!”
백서윤이 야구방망이에 묻은 피를 초록색 체육복 바지에 닦아내며 외쳤다.
부르튼 손에 붕대를 둘둘 감은 소녀의 눈빛은 방금의 전투로 생긴 고양감과 설진운을 향한 신뢰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너무 크게 소리치지 마. 괴수들이 더 몰려오니까. 일단 부동산을 찾아봐야겠어. 지도를 확보해야 해.”
“응, 알았어.”
“그래. 조금만 더 힘내자.”
설진운은 백서윤을 잘 다독이고, 일행의 끄트머리에서 따라오던 조하진을 살폈다.
안경을 쓴 소년은 소방도끼가 자기 목숨줄인 것처럼 도끼를 품에 안고 거친 숨을 내쉬며 경련하고 있었다.
“흐으……! 흐으으……!”
세 사람 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나름 각성자들이었으니 비 맞고 추워서 벌벌 떨 일은 없다.
그러니 조하진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고 봐야 했다.
설진운이 뒷골목 담벼락에 간신히 기대고 서 있는 조하진에게 다가갔다.
“하진아.”
설진운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라 ‘정신 차려’라고 차갑게 말할 뻔했지만, 간신히 리더의 책임감을 되새기며 따뜻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니?”
“나, 나 이제 못하겠어……!”
조하진이 흐느끼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소년이 펑펑 울고 있다는 걸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졌다.
“진운아! 내가, 내가 각성하고 싶어서 각성한 건 아니잖아……!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학교에 있으면 안 돼?”
“나중에 얘기하자.”
“제발…… 제발 학교에 보내줘……! 나 너무 무서워, 이거, 이거 나 진짜 못하겠어. 어, 어, 어떻게 저 괴물들을 상대로 싸우란-”
“하진아.”
“이건 불합리하잖아-!”
조하진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설진운을 노려보았다.
괴수는 무섭지만 설진운은 무섭지 않게 여기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조하진은 쌓여 있던 불만을 토해냈다.
“내가 너한테 배식 더 달라고 따진 적 있어? 아니면 불침번 서는 거 힘들다고 징징거린 적 있어? 솔직히 다른 애들에 비하면 나는 말 잘 들었잖아!”
“…….”
“난 진운이 네가 우리 도와주는 거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해! 그래서 딴 사람들이 땡땡이치고 그럴 때,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화장실에서 똥까지 치웠어!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근데 왜 각성하고 싶어서 각성한 것도 아닌데 강제로 끌어내서 괴수랑 싸우게 하냐고! 난 죽기 싫단 말야! 싸우기 싫다고!”
“야, 쒸팔 새끼야 정신 안 차려?”
조하진은 괄괄한 성격의 백서윤이 참다 못해 끼어들어 자신을 힐난한다고 생각했다.
남자 목소리였지만 설마 설진운이 자기에게 욕을 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설진운은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동대문 생존자 캠프의 리더였으니까.
그러나 우악스런 손길로 멱살을 잡아 자신을 강제로 일으켜 세워 담벼락에 처박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설진운이었다.
“흐윽……!”
“야, 조하진, 정신 똑바로 차려. 내 눈 봐.”
폭풍우 치는 뒷골목에 들개 같은 괴수들의 시체가 널려 있다.
한 소년이 다른 소년을 벽에 밀어붙이고, 소녀는 그 모습을 침묵하며 지켜본다.
조하진이 간신히 울음을 멈췄다. 설진운은 쏟아지는 빗방울이 얼굴에 쏟아지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괴수가 무서워? 싸우기 싫어?”
조하진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진운의 매서운 눈빛이 괴수만큼 무서웠다.
“다른 애들처럼 가만히 배급이나 받으면서 말도 잘 들었는데 각성했다고 강제로 끌어내서 수색대에 참여시키는 게 억울해? 내가 왜 괴수랑 싸워야 하나 싶어?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무서워? 왜 하필 딴놈이 아니라 내가 나서야 하나 싶어?”
“흐으…… 흐으으윽……!”
“나도 그래.”
“……뭐?”
“나도 내가 어쩌다가 전교생은 물론이고 근처에 살던 사람들까지 수백 명을 이끌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처음에는 그냥 교장이랑 교감 하는 꼬라지가 좆같아서 나선 거였는데, 지금은 대체 왜 어른들이 나한테 기대는지 모르겠다고.”
조하진이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치만…… 진운이 너는 가장 처음 각성했잖아. 엄청 세잖아…….”
“그게 내가 노력해서 된 거냐? 아니야. 나도 너처럼 갑자기 각성했어.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하니까 나선 거야.”
설진운을 무슨 대단한 영웅처럼 생각했던 조하진은 그제서야 설진운이 자기 또래의 소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조하진 자신보다 키도 작았다. 살짝이지만.
설진운은 조하진을 붙잡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진아, 근데 니들이 내 심정은 신경 써줬냐? 아니지? 배고프면 나가서 밥 구해 오라고 찡찡대고, 체육이 미주 건드렸다가 나한테 잡혀서 죽었을 때, 니들은 나보고 사람 죽였다고 존나 뒷담 깠지? 응? 하진이 너는 안 그랬어? 너도 그랬잖아. 그치?”
“으흐흑…… 흐흑. 왜 나한테만 그래……!”
“그래. 그 말이 맞아. 원래 사람은 다른 사람 사정은 신경 안 써준다. 나도 네 사정 일일이 신경 써주는 사람 아니다. 부모님이 계시면 모를까 내 부모님도, 네 부모님도 이미 괴수한테 죽었어. 우리는 이제 알아서 살아가야 해. 그 사실을 받아들여. 네가 억울하다고 투정 부려도 그거 들어줄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어. 교복 입고 있다고 학생이라고 착각하지 마. 넌 이제 어른이야. 억울해도 꾹 참고 현실적으로 행동해. 냉정하게 생각해 봐. 지금 내 말을 듣는 게 맞냐? 아니면 싸우기 싫다고 드러누워서 질질 짜는 게 맞냐?”
“……아.”
“자, 이제 다시 생각해 봐. 각성한 게 억울해? 아니면 이 와중에 각성이라도 했으니까 다행인 것 같아?”
“다…… 행인 것 같아…….”
조하진이 눈물을 뚝 그치자 설진운이 평소처럼 친절하게 웃었다.
“그래. 정신 차렸으면 됐다. 여기서 낭비할 시간 없어. 오늘 무조건 식량이 남아 있는 마트를 찾아야 해. 안 그러면 다 굶어.”
조하진이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다시 일어서자, 괴수가 다가오나 경계하던 백서윤이 씨익 웃으며 소년들을 바라보았다.
“다 끝났어?”
“끝나긴 뭐가 끝나.”
백서윤은 개구지게 웃으며 비에 젖은 설진운의 앞머리를 쓸어냈다.
“우리 진운이 많이 힘들었구나?”
“뭐,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진운이 마음 다- 알아! 응! 힘들면 나한테 다- 말해도 돼! 내가 다- 들어줄게!”
풋풋한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어른 노릇을 하게 된 세 명의 학생은 빗줄기를 뚫고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 * *
게이트 너머의 어둠 속에서 설진운이 떨어졌다. 그는 담벼락에서 뛰어내린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지상에 착지했다.
어느새 취재진이 현장을 둘러싸고서 카메라를 세팅해두고 있었고,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던 길드장은 허겁지겁 설진운에게 달려갔다.
“설 대장! 어떻게, 게이트 처리는 잘 됐습니까?”
“응. 잘됐어. 하진아.”
“에이씨! 왜 갑자기 반말을 하고 그래요? 징그럽게.”
“그냥. 옛날 생각 나서.”
설진운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주변을 둘러싼 카메라가 그 눈웃음을 담아내려고 플래시를 터뜨리는 가운데, 길드장 조하진은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안경을 매만졌다.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5명의 헌터와 1명의 서포터는 영혼까지 털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저래요?”
“으응. 게이트 안에서 자꾸 싸우길래 조금 혼내줬지.”
“이미지 관리 포기했어요?”
“사람들이 나 보살이라고 그러잖아. 언론에 폭로해도 오죽하면 나한테 욕을 먹었겠냐고 그러지 않을까?”
“……그거 혹시 나한테 하는 소리예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하진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
조하진 길드장의 어이가 가출했다가 돌아온 사이, 설진운은 홀가분하게 웃으며 현장을 떠났다.
바깥에서 대기하던 미군이 게이트 내부 특이점에 정확히 설치된 게이트버스터를 원격으로 터뜨리자, 하늘에 있던 푸른 게이트는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렸다.
그 게이트 안에서 있었던 일도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만 고즈넉하게 흘러갈 뿐이다.
* * *
“노량진 S급 게이트가 폐문되었다고 합니다.”
“시장님, 지하철에서 생활하던 북한이탈주민 소개疏開가 완료되었습니다.”
“김포국제공항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경관 조성이 끝났습니다. 실제 건물은 아니지만 국빈들 상대로 퍼레이드가 가능할 정도로 꾸몄다고 합니다.”
정상회담을 향한 준비는 차근차근 끝나가고 있었다. 촉박한 기한이었지만 모든 행정력을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행정적 조치일 뿐.
정치적 조치는 서울시가 아닌 내가 직접 나서서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그건 국민당 대표 청중엽이 예정된 선거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청중엽 대표님, 갑자기 찾아오겠다고 억지를 부려서 미안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안 그래도 시장님 모시고 식사라도 할 날을 잡고 있었는데, 먼저 와주셨으니 잘된 일이죠.”
청중엽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자택에서 나를 맞이했다.
그 또한 양판석과 같은 종류의 지방 토호였기 때문에 준재벌이었고, 거대한 단독주택 내부에는 가정부와 경호원이 즐비했다.
“집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부끄럽지만 물려받은 가산이 조금 있어서요. 자, 앉으시죠. 급하게 준비한 바람에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대표님. 설마 제가 이걸 보고 모자라다고 하겠습니까?”
“하하! 너무 속 보였나요?”
“젊은 애들 말로는 조금 플렉스 하셨네요.”
“하하하!”
급하게 식사를 준비했을 텐데도 식탁은 풍성하다 못해 화려했으며, 자리에 앉았을 때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벽 너머로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북쪽으로는 푸른 바다가 보였다.
청중엽은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이었건만, 정작 제주도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을 물리고 아름다운 제주도의 노을을 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전라도 의원이 서울 살고 그런 관행이 있었긴 한데…… 지역구 주민들이 섭섭하다고 안 그러세요?”
“그런 얘기 많이 듣지요. 그래서 부산에도 집 한 채 사두긴 했는데, 제주도 공기를 못 맡으면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역시 전직 제주도지사답게 애향심이 몸에 배어 계시는군요?”
“하하! 칭찬 고맙습니다.”
내가 꺼낸 이야기지만 애향심은 개소리다.
청중엽이 제주도지사 임기를 마친 지가 한참이 지났지만 제주도는 아직도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현직 제주도지사조차 청중엽의 눈치를 보며 지방정부를 운영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당연히 청중엽에게 충성한다.
물론 정치라는 게 그렇듯 대놓고 월권을 저지르는 건 아니었다.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우라 같은 거라 오히려 대놓고 학정을 저지르면 소위 말하는 가오가 떨어진다. 그리고 가오가 안 살면 피라냐 같은 작자들이 달려든다. 어디 가서 할 말은 아니지만 깡패의 논리와 흡사한 면이 있다.
청중엽이 휘두르는 영향력도 이런 아우라 같은 것이었다.
청중엽이 제주도지사에게 누굴 임명하라고 일일이 지시하는 건 아니지만, 제주도지사가 서귀포 시장을 교체할 때 눈치껏 처신해 청중엽과 친한 사람을 임명하는 식이다.
그런데 정작 청중엽 또한 제주도 재벌들의 지시를 받는 인물이었으니, 이미 제주도가 재벌들에게 넘어간 게 아닌가……
그런 걱정도 가끔 든다.
어쨌든 국민당이라 놔두고는 있지만 말이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본론을 꺼내들었다. 해가 어중간하게 저물어 불을 키지는 않은 탓에 집 안은 조금 어둑했다.
“청중엽 대표님, 같은 당이니만큼 허심탄회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정상회담 날짜가 총선 선거일 직전 아닙니까. 국민당의 선거 패배는 기정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설득을 시작하려던 찰나.
청중엽이 의미심장하게 웃음지었다.
“아아, 예. 그거 때문에 오셨구나. 정상회담 초칠 생각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제가 엎고 싶다고 엎어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하하!”
“이미 생각을 정해두셨습니까?”
“공당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집권에 최선을 다하는 게 의무이긴 합니다만, 정작 국익을 해치는 건 주객전도이지요.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시점이니 정부를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좋게좋게 돌려 말하긴 했지만 못 알아들을 수가 없다.
청중엽의 스폰서인 재벌들이 만주에 건물 올리고 시베리아에서 괴수 때려잡을 생각에 눈이 돌아가 있는데, 선거 이기겠다고 재벌들 밥상을 엎는 건 주객전도라는 뜻이다.
예상은 했지만 아주 노골적이었다.
청중엽은 살짝 굳은 내 표정을 보더니, 능글맞게 웃으며 역으로 날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번 총선은 망할수록 이득입니다.”
“뭐라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시장님. 차기 당권은 난민운동권이 장악하는 게 기정사실인데, 국민당이 힘이 강할 필요가 있습니까?”
“…….”
긍정을 의미하는 침묵이었다.
청중엽은 살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크게 져도 어차피 정상회담 때문에 지는 거라 현 지도부가 능력을 의심 받을 일은 없습니다. 차라리 식물야당으로 만든 다음에 난민운동권이 잠깐 소꿉놀이나 하게 두는 게 낫지요. 특히 한승문 시장님은 서울시 재산 복원하라는 헛소리에 시달리실 텐데, 그 목소리가 작을수록 좋은 일 아닙니까.”
이건…… 정말…….
굉장히 계산적이고 정확한 셈법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저절로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선거 패배하고 현 지도부 총사퇴하면 난민운동권 비대위 체제가 1년 정도 있을 거고. 그럼 다음 전당대회 때 당권을 곧바로 다시 받아오면 되겠네요.”
“하하! 그렇죠. 난민운동권이 당권 잡아봤자 데모밖에 더 하겠습니까? 아마추어 정치에 피로감을 느낀 당원들은 비대위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결국 우리를 찾게 될 겁니다.”
해가 완전히 저물었기 때문에 청중엽의 단독주택 내부는 어두웠다.
나를 보며 조용히 웃고 있는 청중엽의 뚜렷한 이목구비는 어둠 속에서 날 지켜보는 가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정치적 모략을 쑥덕거리기에는 드라마틱할 정도로 적절한 분위기였지만, 뭔가 찝찝한 것은 이게 전형적인 악당들이나 할 짓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샌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변해 있었다는 게 조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허허. 애국하기 힘드네요.”
“하하! 애국이라면 애국이군요. 시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그때, 청중엽의 단독주택이 자동으로 전등을 킨 덕에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났다.
“아, 오신 김에 2층에서 주무시고 가시겠습니까? 저녁에 술도 한잔하시고……”
“죄송합니다. 일정이 있어서……”
나는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주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 *
그날이 밝았다.
중국 총통과 러시아 극동군벌 총사령관이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들은 깃발이 달린 리무진을 타고서 공항에서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폐허가 된 서울에서 카퍼레이드가 가능해진 건, 서울시가 최선을 다해 도시의 경관을 복구시킨 덕이다.
물론 북한 스타일이다.
카메라에 잡히는 부분만 멀쩡하고, 뒤쪽은 페인트칠도 안 되어 있다. 하지만 그걸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괜찮다.
취재에 나선 외신들도 눈치껏 도시의 아름다운 부분만 찍었다.
게이트 시대의 언론통제는 정부의 일방적인 검열이 아니라, 실의에 빠진 대중을 응원하기 위한 언론과 정부의 합작품이다.
물론 국민들은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가끔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때가 있을 뿐. 국민들은 결코 멍청하지 않다.
“와아아아아-!”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중국 총통과 러시아 극동군벌 총사령관이 탄 차가 지나갈 때마다 수많은 시민들이 꽃다발과 깃발을 흔들며 환영했다.
물론 서울에는 거주민이 없었으므로 저들은 모두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어째 자꾸 북한이 떠오른다면 착각이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러시아 극동군벌 총사령관은 이 축제 분위기에 고무되었는지 차 뚜껑을 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옆에 앉은 비서인지 참모인지 모를 여자가 기겁하며 만류했지만, 빅토르 리 상장은 서울 시민(알바)들을 향해 환히 웃어주었다.
무섭게 생긴 것과는 정반대의 행실이었다.
중국 총통은 그런 쇼맨십을 보이지 않고 행사장에 가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인민복이 아니라 군복을 입은 중년인이 굳은 표정으로 카펫을 밟으며 차에서 내렸다.
“반갑습니다. 원옥분 대통령.”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평소 권위주의 물 빼겠다고 병아리 색깔 옷만 입고 다니던 원옥분 대통령이 아주 오랜만에 권위주의 스타일로 코디네이트를 하고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옛날 무시무시했던 권한대행 시절처럼 (공화당 민심을 모으기 위해) 박정희가 연상되는 국방색 옷과 선글라스를 낀 건 아니고, 아무래도 외신들도 주목하는 자리인 만큼 국제적 인지도가 높은 마가릿 대처 코스프레를 했다는 게 느껴졌다.
일반적인 행사였다면 귀빈들이 나서서 축사도 하고 그랬겠지만, 국가수반 세 명이 모인 마당에 어느 누가 감히 그 앞에서 행사가 잘 풀리길 바라니 어쩌니 덕담을 하며 재롱을 떨까.
세 명의 국가수반은 행사장 석상 위로 올라갔다.
그 뒤로 겉모습만 복원된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였다.
정치인 한승문의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었다.
“존경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이 자리에…….”
원옥분 대통령이 축사를 시작했지만,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귀빈석에 앉아 국회의사당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중국 국기와 러시아 국기 사이에 있는 태극기는 위풍당당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어엿한 강대국이 된 것이다. 국가의 실력을 향상시켜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가 망한 와중에 멀쩡히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래. 살아남았다.
생존했다.
저기 보이는 국회의사당 천장에 괴수가 떨어졌을 때부터, 나는 생존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해 노력했다.
처음엔 나의 생존을 위해, 이후에는 나와 내 친구들의 생존을 위해, 그 다음에는 우리 나라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우리는 살아남았다.
항상 깨끗하고 밝은 길을 걸어온 건 아니었다. 최악과 차악의 사이에서 결코 최선은 아닌 길을 택했고, 종종 손에 피를 묻히기도 했다.
그러나 해야 하는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래. 모든 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을까?
그렇게 번뇌하는 내 손을 누군가 붙잡았다.
피채원이었다.
“채원아……”
그래. 그래도 나와 함께해준 사람들 덕에 버틸 수 있었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역시 피채원이다. 피채원은 언제나 내 곁을 지켰고, 지금도 내 옆에 앉아 있었는데,
중요한 자리인만큼 긴 생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피채원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어?
“채원아, 어디 아프니?”
“시장님, 지금 경호 책임자한테 빨리 전달해야 할 내용이 있는데- 빨리요. 빨리.”
“대통령 경호처장? 잠깐만. 저기, 저기에 있는 것 같은데.”
“저 사람이라고요? 지금 저 사람이……!”
피채원은 세 명의 국가원수가 연설하는 단상 아래 구석에 앉아 있는 대통령 경호처장을 보며 기겁했다.
주변에서 자꾸 떠드는 우리를 못마땅한 눈치로 보았지만, 피채원은 대통령 경호처장을 삿대질하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곧장 알 수 있었다.
대통령 경호처장이 자리에서 스윽 일어나 저벅저벅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나는 방송사고고 뭐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막아! 저 새끼 잡아!”
혹시 몰라 영어와 중국어로도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대통령 경호처장은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가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고 외쳤다. 그건 스위치였다.
“주체 조선에 영광있으라! 조선 독립 만세-!”
폭탄 조끼가 터졌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