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78화
EP 43-인과응보(10)
괴수는 포로를 잡지 않는다.
게이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괴수는 포로를 잡지 않는다. 그러니 점령은 곧 죽음이다.
[후퇴하라.]
따라서 러시아 연방 총참모부의 명령은 아직 도시에 남은 7만 명의 주민들에 대한 사형선고와도 다름 없었다.
“…동부군구 근위전차사단 사단장 대리 빅토르 리 중령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가?”
[그렇다. 신속히 후퇴하여 기갑전력을 보존하라.]
빅토르 리는 러시아의 평범한 장교였다.
친척의 후광으로 입대한 다음 라인을 잘 타서 승진해 적당히 세금을 해처먹었다는 뜻이다.
당연히 목숨을 바쳐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사명감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오히려 직장인의 마인드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개 (부패) 장교였다.
그러나 7만 명의 목숨이 저울 위에 올라가자 가장 부패하고 생각 없이 살던 군인조차 생명의 무게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조국과 국민 중 무엇이 우선인가.
군인의 의무는 복종인가 수호인가.
지휘관은 시민을 지켜야 하는가 병력을 보존해야 하는가.
그런 복잡한 고민도 잠시일 뿐. 사람은 결국 관성대로 사는 짐승이다.
빅토르 리는 갑작스러운 시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를 상부에 맡겼다.
“전부 퇴각한다!”
선택의 대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누더기가 된 병사들이 간신히 도시에서 빠져나와 도망치던 길, 그들의 뒤에서 거대한 폭음과 섬광이 터져나왔다.
“이, 이게 무슨-!”
회색 하늘을 가로지르는 제트기의 엔진 소리와 함께, 도시는 수많은 피난민을 집어 삼키며 불타 오르고 있었다.
* * *
하늘에 열린 게이트.
괴수들과 뒤섞인 피난민.
공습 명령.
도시 봉쇄령.
구조 포기.
네이팜.
식량난.
식인.
헬기로 도망치는 부자들.
폭동.
진압.
은폐.
그리고,
덮쳐오는 괴수의 아가리.
“이런, 씨발…….”
간밤 내내 끔찍한 환영에 시달리던 빅토르 리 중령은 극동군구 총사령관 빅토르 리 상장이 되어 잠에서 깨어났다.
땀에 흠뻑 젖은 이불을 걷어내자 충실한 참모장이자 첩보관인 나타샤 프리마코프가 걱정과 애정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은 악몽을 자주 꾸나 봐요?”
빅토르 리 상장은 부드러운 손길로 나타샤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그게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이라고 할 수 없다. 이건 꿈이 아니라 기억이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것뿐이다.
차라리 이게 악몽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위에서 시키는 대로 시위대를 전차로 밀어버리던 과거가, 애초에 말 같지도 않은 괴생명체들이 튀어나온 이 현실 자체가, 한낱 악몽에 불과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으로 악몽보다 더한 현실에 약간의 우스움을 느끼며 빅토르 리는 군복을 차려 입고 안전가옥을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냉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이 그를 반겼다.
미약하게 섞인 생선 비린내는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간 어부들의 결실이었다.
“충성! 좋은 날입니다, 사령관님!”
“그래, 오늘도 수고가 많네. 동지들.”
안전가옥을 둘러싸고 있던 경비들은 사령부로 출근하는 상장에게 촘촘하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빅토르 리는 인의장벽을 뚫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민들에게 서슴 없이 다가갔다.
낚시를 하는 노인에게 안부를 묻고, 시장통 상인들의 물건을 사 주고, 시베리아로 출발하려는 수색대를 붙잡고 덕담을 늘어놓았다.
현대 정치인의 선거유세와 중세 영주의 지역민 관리 사이에 있는 이 미묘한 처세는 나름대로 빅토르 리의 커다란 자산이었다.
러시아인 3할, 몽골인 2할, 중국인 4할, 소수민족 1할이 섞인 ‘러시아 극동군벌’ 혹은 ‘블라디보스토크 정부’를 하나로 묶는 건 빅토르 리의 개인적인 인기였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피부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난과 망명, 그리고 구조활동을 통해 극동에 모인 수천 만명의 시민들은 아주 다양한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었다.
캄차카 반도의 소수민족과 연변의 조선족, 모스크바의 엘리트 장교와 몽골의 정치인이 한 데 모여 살아가는 곳이 블라디보스토크다.
그 영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로 이어지는 생활권과, 캄차카 반도를 중심으로 연안보급선이 이어진 오호츠크 해의 해안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한 몽골 대통령과 그 망명정부를 지지하는 몽골 유민들, 러시아 극동군벌에 복종한 만주의 군벌(혹은 도적떼)들.
그리고 드넓은 시베리아 이곳저곳에 지어진 전초기지 겸 민간인 대피소까지.
물론 군벌 체제라는 게 다 그렇듯 영향력은 느슨하지만, 계산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의 보호를 받는 인구는 1억 명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인원이 빅토르 리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아래에 모여 있었으니, 나타샤는 빅토르 리가 겁도 없이 시민들에게 다가갈 때마다 ‘푸틴 암살 성공한 인간이 왜 자기는 암살 걱정을 안 하느냐’고 따졌지만, 한편으로는 빅토르 리의 그런 포용력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느슨하게나마 하나로 뭉쳐 있는 것이었다.
물론 빅토르 리의 지도력이 한 번도 시험받지 않은 건 아니다.
사실 도움을 받는 쪽인 민간인들은 그를 지지하는 게 당연하다.
반면, 도움을 주는 쪽인 군부가 빅토르 리 상장을 지지하는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특히 식량 문제를 중국에 의존하게 되며 이런저런 일로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 생기면서, 군부 내부에서는 빅토르 리의 사임 요구까지 몇 차례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
사령부에 입성한 빅토르 리 상장을 바라보는 군인들의 시선은 존경과 신뢰로 가득했다.
“충성! 근무 중 이상 무!”
“충성! 러시아에 영광을!”
북부 방위선 계획이 공개 되면서 식량 문제와 안전 문제가 최종해결을 앞두게 되자, 군부의 지지가 하늘 끝까지 치솟은 것이다.
지난 몇 년간 군부의 그림자 속에서 맴돌던 ‘핵무기 수백 개를 쥐고서도 모스크바에 날리지 않은 겁쟁이’라는 험담은 쏙 들어가고, 빅토르 리는 이제 살아있는 현인신으로 격상되었다.
“노고가 많다. 동지들. 간밤에 특이사항은 없었나?”
“네! 보고드립니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 폐허 일대에 두 차례의 전술핵을 발사했습니다.”
“쯧.”
핵무기 사용 보고에도 빅토르 리는 혀만 한 번 차고 말았다.
한때 인류 역사상 단 두 차례 사용된 최종병기 취급을 받던 핵무기는 이제 무력도발용 미사일에도 들어갈 정도로 자주 쓰인다.
이 말을 들은 미국인들은 기겁하겠지만, 아무튼 러시아의 상식은 그렇다.
물론 도발에도 정도가 있지 모스크바의 핵무기가 블라디보스토크 군벌의 ‘사람’을 죽인 건 아니었다.
이르쿠츠크는 완전한 무인지대이며, 오히려 바이칼 호를 중심으로 괴수들의 생태계가 조성된 몬스터랜드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괴수보다 무서운 게 유라시아를 떠돌아다니는 수백만 단위의 괴수 군집이었으니, 괴수에게 핵무기를 사용한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따로 있다.
“핵폭발에 놀란 괴수 무리가 동쪽으로 향하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치타 사령부가 보고하기를, 울란바토르 진출을 위한 울란우데 전초기지 건설을 중단하고 긴급히 대피 중이라고 합니다.”
“얼어 죽을 새끼들 같으니…….”
모스크바에서 날린 핵무기에 담긴 의미는 총 3가지다.
1. 이르쿠츠크의 괴수 군체를 동쪽으로 몰아줄테니 어디 한 번 잘 막아봐라.
2. 바이칼 호는 이제 방사능으로 오염되었으니 새로운 식수원을 찾아보던가 해라. 몽골 근처에 전초기지 짓지 말란 뜻이다.
3. 바이칼 호 서편은 모스크바 정부가 지배 중이니 우리가 우리 핵무기로 우리 영토의 괴수를 잡은 거니까 신경 꺼라. 그리고 바이칼 호가 국경이니까 절대 넘어오지 마라.
“후우…….”
편지로 보내도 될 내용을 핵무기 두 방에 담은 마음씨가 참으로 곱디 고왔다.
이게 괴수로 핑퐁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빅토르 리도 당하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답장을 돌려주기로 했다.
“우랄 산맥에 정밀 폭격 한 번 날려주게나. 빛나는 미사일이 예카테린부르크의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도록.”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핵폭탄이 터질 때, 예카테린부르크의 시민들이 섬광을 볼 수 있는 적당한 위치에 세팅하게. 괴수들이 깜짝 놀라 인근 군 기지로 향하면 더 좋고.”
“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실시간으로 도청 중이던 CIA가 핫라인으로 연락해 대체 왜 핵미사일을 기싸움 용도로 쓰냐고, 대기 중 방사능 농도 높아지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양측에 사정했지만 러시아인들은 미국인들의 항의를 쿨하게 씹고 넘어갔다.
왜냐하면 러시아인이었으니까…….
* * *
정상회담은 만나서 무언가를 합의하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합의된 사항을 발표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국가수반끼리 만나서 얼굴 붉히는 건 체면 상하는 일이었으니, 네가 옳니 내가 옳니 옥신각신 다투는 건 아랫것들이 미리 해두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 정상회담은 두 달 뒤지만, 외교관들의 전쟁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
한국 외교단이 베이징의 명사들을 찾아 다니며 여론을 살피는 중이고, 중국 외교단은 부산을 돌아다니며 밀실 회담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외교 전략의 정석 중의 정석은 현지 뿌락치, 아니, 협력자를 찾아 정보와 도움을 구하는 것.
중국의 외교관들은 한국의 대표적인 ‘친중’ 정치인을 찾아왔다.
근데 그게 나였다…….
“한슁원 시장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뵙게 되어 정말로 영광입니다!”
“한 시장님! 저 인민해방군 국방부장 웨이펑허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세 번 만나면 친구라던데 벌써 두 번째군요! 허허…….”
중화연방의 총통을 맡은 이는 전직 북부전구 사령관 자오펑이다. 리충빈 총통이 생전에 지정한 후계자였다.
따라서 현재 중국 중앙정부에서 한 자리씩 차지한 인간들은 전부 리충빈 시절 사람들이고, 리충빈 총통과 개인적 친분도 있었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한 나는 그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검증된’ 사람이었다.
무엇이 검증되었는가? 중국을 향한 애틋하고도 따뜻한 마음이 검증되었다. 내 의사와는 다르게도…….
어쨌든 쏟아지는 방문의 목적이야 뻔하다.
정보는 권력을 만든다. 권력은 돈이 된다. 그게 중국인이 보는 세상이다. 그리고 나는 권력과 정보를 쥔 사람이었다.
“원옥분 대통령이 필리핀을 중국에 넘겨주면서 미국을 동남아에 끌어들였다는 소문이 혹시 사실입니까?”
“혹시 한국 외교부에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례는 섭섭치 않게…….”
“제 처남이 북부전구에서 일하다가 옛날에 실수로 북한 군벌 몇십 명을 사살했는데, 이게 차후에 문제가 되지 않게 해주시면…….”
“제 아내가 상하이에서 가장 큰 헌터 길드를 운영하는 뤼뱌오 사장의 친자매입니다. 혹시 감지윤 양을 영입하려면 시세를 얼마나…….”
“만주에 대규모 토건사업을 벌인다는 분께서 개인적으로 시장님을 통하고 싶으시다고 하는데, 제가 나중에 자리를 마련해도…….”
엄청난 로비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돈에 관련한 청탁부터, 아예 대놓고 매국하라는 제안까지 아주 가지가지였다.
속이 뻔히 보인다. 어차피 옆 나라 정치인이니 보복당할 걱정은 접어두고 무례하든 말든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라는 심정으로 찔러 보는 거겠지.
“…….”
여기에 대한 내 대응은 간단했다.
“여러분 혹시 청중엽이라고 아십니까? 사실 그분이 원조 친중인데…….”
* * *
청중엽을 제물로 바쳐 사악한 중국인들의 마수로부터 빠져나온 나는 세종시 서울시청(이 미묘한 명칭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으로 돌아와 서울시장으로서의 업무에 착수했다.
귀찮은 일은 부시장단에게 맡기고 시장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뜻이다.
애석하게도, 시장은 가만히 있어도 일거리가 밀려오는 자리였다.
“노량진 S급 게이트 토벌을 두고 대형 길드끼리 대판 붙었습니다!”
“그…… 지하철에서 생활하던 북한이탈주민들이 서울시 자치경찰을 과잉진압으로 고소했는데요……?”
“시장님! 시장이이임! 관악구에 지은 초고층 빌딩이 부실공사로 휘청거린답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이 사고를 쳐대는 익살꾸러기들 덕분에 서울시장은 심심할 틈이 없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초상사회가 열리면서 사람들이 쳐대는 사고의 바리에이션도 대폭 늘어난 느낌이다.
물론 중간중간 ‘북부 방위선’을 둘러싼 외교전을 확인하기도 했다. 수틀리면 야당인 내가 나서서 판을 엎어버려야 했으니까.
대통령은 협상이 불리하게 돌아가도 정책연속성이나 국가 위신의 이유로 협상을 뒤엎지는 못하지만, 야당인 내가 나서는 건 괜찮지 않은가?
“저기, 혹시 지금 협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죄송합니다, 외교 기밀은 함부로 누설할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미안합니다.”
물론 대한민국 외교관들은 프로패셔널한 전문가들답게 야당 서울시장 앞에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오히려 테크노크라트의 자존심을 굳게 지키며,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는 나를 키득키득 비웃기도 했다.
국가 기밀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지만 니들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다 방법이 있었다.
피채원? 그건 너무 무식한 방법이다.
나는 양판석 정부의 외교부 장관이었던 이태영 전 장관을 대동하고서 외교부에 처들어갔다.
“어어, 잘들 되가나?”
“서, 선배님……!”
“에헤이, 일어나지 마. 일어나지 마. 편하게 앉아들 있어.”
이태영 전 장관은 외교부에 입성하자마자 현직 장관의 보좌를 받으며 모든 외교관을 일제히 기립시켰다.
양판석 정부나 원옥분 정부나, 따지고 보면 똑같은 국방당 정권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야당 서울시장 앞에서도 송죽 같이 굳은 절개를 굳게 지키던 외교관들은, 하늘 같은 선배님의 준엄한 질문에 어쩔 수 없이 입에 걸린 자물쇠를 풀었다.
흥미로운 정보가 줄줄 새어 나왔다.
“오호……. 중국 측에서 우리더러 민족의 고토를 되찾았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말라고 했다고요? 아예 언론이랑 인터넷도 자체적으로 검열하고?”
“예……. 만주를 외국에 할양한 게 아니라 인류 공익을 위해 개방한 건데, 한국에서 만주를 되찾았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그게 인터넷으로 중국에 전달되면, 정권 지지율에 영향이 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안 그래도 만주를 외국인들에게 넘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했는데…….”
“불난 데 부채질하지 말라 이거군요.”
쓸데 없는 자존심 싸움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정보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캐냈다.
만주를 괴수로부터 수복해 농업과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만들고, 북부에 방위선을 형성하겠다는 ‘북부 방위선’ 계획…….
블라디보스토크에게는 생존이 걸린 일이고, 한국에게는 돈과 북한 치안이 걸린 일이지만, 중국에게는 확실히 ‘정권 지지율’이 걸린 일인 모양이었다.
즉, 중앙정부를 향한 중국 인민의 지지가 비틀비틀거린다는 것.
아무리 독재국가라지만 인민들이 정권에게서 돌아서면 야심가들이 달려들어 독재자를 끌어 내리기 마련이다.
특히 집단지도체제 하에서는 정권 교체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힘 있는 사람들끼리 밀실에서 쑥덕거리면서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 * *
“결론은 미국이 중국 정부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거죠.”
부산 GS 그룹 본사 지하벙커에 있는 천 사장의 집무실. 그곳에는 비밀 방이 하나 있다.
나는 천 사장이 실제로 거주하는 생활감 넘치는 방에서 밀담을 나눴다.
“중국 정권의 지지도가 생각보다 낮다면, 미국은 수틀리면 중국 정권을 갈아치울 수도 있습니다. 여론 선동이나 군벌 포섭으로 언제든지요.”
“흐음……? 너무 많이 나간 것 아녜요?”
“전복시킬 예정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미국의 손패에 카드 한 장이 더 들어왔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 사장에게도 사업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은 좀 어려웠는지, 그녀는 조금 오랫동안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민했다.
내가 그녀의 냉장고에서 과일 탄산주 몇 개를 꺼내서 가져올 즈음, 천 사장이 싱긋 웃으며 정답을 이야기했다.
“미국도 만주에 오겠네요?”
나는 그녀에게 탄산주 캔을 건네며 웃었다.
“정답입니다.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오피니언 리더가 되는 걸 걱정하지 않고, 자기네 기업들을 마음껏 풀어놓을 거에요. 미국의 초대형 PMC들을 말입니다.”
이제부터는 사업의 영역이었으므로 천 사장의 생각이 내 생각보다 한 걸음 더 빨랐다.
“한국 길드랑 미국 길드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피 터지게 치고 받겠네요…….”
“그렇죠. 그러면 중국은 평화롭게 만주에 비료나 뿌리고 농사나 지으면서 한국과 미국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만 기다릴 겁니다. 민간 영역에서 부딪히면 정부끼리도 껄끄러워지니까요.”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원옥분 대통령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챙겨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리슈잉에게 한국 헌터들을 만주에 적극적으로 진출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긴 했지만, 철회해야겠군요. 만주는 기회의 땅이 아닙니다.”
만주가 기회의 땅이 아니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천 사장이 해맑게 웃었다.
그녀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어봤다.
“자기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지금 마석재벌이랑 토건재벌이랑 극적으로 화해한 건 알아요?”
안다. 서울 탈환을 놓고서 극한까지 대립했던 마석재벌과 토건재벌은 언제 싸웠냐는 듯 화해했다.
만주는 두 세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건설호황과 마석호황은 동시에 찾아올 수 있다.
그 가능성은 본 기업가들은 ‘가자! 북으로!’를 외치며 눈이 돌아가 있었다.
모든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이 만주로 가야 한다고 외칠 때, 나는 만주가 기회의 땅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해봐요. 왜 만주가 기회의 땅이 아니란 거죠?”
“그러는 천 사장님은 왜 웃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이랑 똑같은 생각을 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아핫……!”
천 사장은 박수를 치며 깔깔거렸다.
“맞아요…… 만주 탈환이니, 북부방위선이니…….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중국 정부가 짜놓은 판이에요. 도박장이 도박장 주인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구조로 운영되는 것처럼, 중국 정부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만주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배를 불려줄 거에요…….”
“이미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이 얘기하러 온 거라서요. 만주 진출에 올인하지 마시라고.”
“저를 다른 금붕어들과 동급으로 생각했다니 기분 나쁘지만, 그래도 걱정해 줘서 왔다니 용서해 드릴게요…….”
“참,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