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67화
EP 42-정통 헌터 아카데미(5)
한국에서 가장 강한 헌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감지윤이라 답한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설진운이라 답한다.
홍선아는 그 사이에 있었다.
규격 외의 마나감응력으로 한계를 모르고 성장하는 감지윤보다는 출력이 약했고, 세계적인 유명인사이자 ‘나이트’라는 포지션을 창시한 설진운보다는 덜 유명했다.
그러나 아무도 홍선아를 2인자라고 폄하하지 않는다.
홍선아는 감지윤보다 약한 게 아니라 감지윤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헌터였고, 설진운의 동대문파보다 영향력이 강한 압구정파의 지도자였다.
덩달아 홍선아는 핵폭탄을 직격당하고도 생존한 유일한 헌터였고, 순간이동과 광범위한 화염폭풍을 사용하는 다중능력자였다.
누구도 홍선아의 몸값을 제대로 책정할 수 없다.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홍선아는 부산 시내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에서 살았다.
* * *
콘크리트로 지은 회백색의 아파트는 제주도에 나날이 들어서는 초호화 마천루에 비교하면 허름했지만 사람들 인심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홍선아가 이 집에 살게 된 건 데이비드 김의 사망 이후 외딴곳에 숨어 살던 그녀를 설진운이 어렵사리 세상 속으로 끌어낸 노력의 결과다.
“…….”
한국 최고의 화염술사는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번쩍 눈을 뜨자마자 하루를 시작했다.
모든 물건이 깔끔하게 정돈된 집에는 거울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울 없이도 익숙하게 옷매무새를 다듬고 집에서 나왔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을 윤기 있는 은발로 염색한 건 덤이다.
“룰룰루…….”
홍선아는 가벼운 콧노래를 흘리며 출근길에 올랐다. 아파트에서 나오자마자 그녀의 주위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안녕하세요!”
“어머, 선아 씨 안녕? 고춧가루 줄까?”
아파트 복도에서 고추를 말리는 아주머니와 인사하고.
“민주 안녕!”
“안녕하세요, 언니…….”
엘리베이터에 기대 비몽사몽 비틀거리는 학생과 인사하고.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 홍 회장님. 오늘도 수고하세요.”
아파트 입구를 청소하는 경비아저씨와도 인사하고.
“……안녕.”
“…….”
편의점 창가에서 흐릿하게 홍선아를 쳐다보는 김춘식과도 인사했다.
집에서 나온 이후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홍선아의 표정이 잠시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그녀는 미소를 되찾았다.
“룰룰루…….”
헌터협회장에서 물러난 홍선아였지만 그녀의 생활은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애초에 한승문이 앉힌 허수아비였기 때문에 출근도 심심할 때만 했다.
그렇다고 괴수를 잡으러 다니지도 않는다. 마석이 돈이 안 되는 시절에는 혹사당했지만, 막상 마석이 돈이 되는 시대가 오니 홍선아가 나서기도 전에 사람들이 전장으로 향했다.
홍선아의 직장은 따로 있다.
“안녕하세요!”
“선아 씨 왔구나? 오늘도 얼굴에서 빛이 난다. 빛이 나. 메이크업이 필요가 없겠어.”
“PD님 저한테 뭐 부탁할 거 있어요?”
“크흠! 딱히 바라는 게 있어서 칭찬한 건 아니지만 혹시 한승문 시장님 한 번만 더 우리 프로그램에-”
“지금 순간이동으로 납치해 올게요!”
“거기까진 안 바랬어…….”
홍선아가 출근한 곳은 방송국. 그녀가 고정 출연하는 토크쇼가 제작되는 곳이다.
서울에서 탈출한 직후부터 방송가에서 활동한 홍선아는 미모와 재담, 권력과 초상능력을 모두 보유한 S급 연예인이었다.
방송국 사람들은 언제나 홍선아에게 친절했으며, 설령 홍선아를 아니꼽게 보더라도 그녀의 눈앞에서는 친절하게 웃었다.
“저기, 홍선아 헌터님.”
“네?”
“제 전화번호입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나중에 연락주세요.”
가끔은 친절이 너무 과도할 때도 있지만 홍선아는 그럭저럭 연예계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렇다고 연예인 노릇이 적성에 맞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심심했다. 정확히는 인생 자체가 심심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정자세로 앉은 홍선아는 텅 빈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아직도 버텨내야 할 하루가 몇 시간 남아 있었다.
“…….”
그녀의 삶에는 목적이 없었다.
한때는 홍선아에게도 신념 비슷한 것이 있었다. 공동의 생존을 위해 헌터가 무작정 희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이는 압구정파의 분열을 초래했고, 결국 데이비드 김의 사망에 기여했다. 그 이후 홍선아는 모든 정치적 판단을 한승문에게 위임했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돈 모으는 재미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쉬웠다.
마석은 정제 기술이 발달할수록 가치가 상승하는 재화였고 홍선아의 재산은 대부분 마석이었다. 불로소득이 근로소득을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다.
최정상급 헌터에게 웬만한 괴수는 시시하고, 정치는 해봤다가 비극으로 끝났고, 예능도 나갈 만큼 나갔고, 나이는 젊은데 연애도 딱히.
그나마 심심할 때마다 찾아가서 귀찮게 해도 되는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한승문과 설진운은 괴롭힐 만큼 괴롭혔고 다른 압구정파 헌터들은 제각각 위치를 찾아갔다.
그러나 진정으로 홍선아의 영혼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먹는 괴수에게 둘러싸인 아파트에서 조금씩 고갈되는 물과 식량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촛불 앞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견딘 시간.
세상이 무너지자 가장 먼저 양심을 내려놓은 짐승들에게 살해당한 친구의 육신을 옥상에서 손수 불태우며 삼킨 눈물.
비 내리는 골목길에서 모든 마력을 소모한 채 생존본능에 몸을 맡기고 벽돌로 괴수의 머리를 내리치며 발악하던 간절함.
잿가루와 매연으로 이루어진 어둠 속에서 끝없이 달려드는 괴수를 불태우며 기나긴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만끽한 해방감.
그리고 언제나 홍선아와 그 동료들을 이끌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지옥으로 뛰어들던 한 사람.
그런 것들이 없어진 홍선아의 삶은 너무나도 공허했다.
의사는 이를 PTSD나 아드레날린 중독 따위의 단어로 정의했지만, 홍선아는 약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이 공허함을 호르몬의 농간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과잉생존이다.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고 또 발버둥쳤지만 너무 지나치게 살아남아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싸울 이유조차 없어져 버렸다.
홍선아는 생존자다. 그러나 생존할 대상이 없어져 버린 세상에서는 무엇으로부터 생존해야 하는가. 지금은 그것을 찾지 못해서 자기 파괴의 욕구로부터 생존하는 중이다.
그녀는 생존하기 위해 냉장고에서 컵밥을 꺼냈다. 그리고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 동안 오도카니 그 앞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바깥에서 보여준 웃음과 활력에 무색하게도 집안에서의 홍선아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인형 같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일을 만들어 기계적으로 수행했다. 이는 순간이동을 사용하지 않고 걸어서 이동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하다.
삐뚤어진 오리 조각상을 정방향으로 놓고, 손수건 하나를 위해 세탁기를 돌리고, 먼지 하나 없는 바닥을 닦기 위해 청소기를 돌렸다.
간신히 쥐어 짜낸 생활감으로 공허한 일상을 메꾸던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홍선아가 빙긋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언니. 무슨 일이에요?”
한때 홍선아는 GS 아이기스의 대표직을 맡은 적이 있었으므로 전화기 너머의 재벌을 언니라고 부를 수 있었다.
[선아 씨…… 우리 회사로 올 수 있어요?]
그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끊기자마자 홍선아는 GS그룹 사장실에 나타났다.
“왜요?”
홍선아는 언제나 나른하게 퍼져 있던 천금순이 기겁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돌고래 소리를 닮은 비명이 들려왔다.
* * *
수면바지 차림으로 방문한 홍선아에게 천 사장은 자신의 예비용 양복 세트를 하나 주었다. 평소 하얀 양복을 즐겨 입었으므로 두 사람 다 하얀 정장 차림이 되었다.
그 덕에 GS그룹을 방문한 한승문은 천금순과 홍선아가 엇비슷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 자기 눈을 비볐다.
“……천 사장이 증식한 줄 알았네요.”
“자기야.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녜요…….?”
“어떤 점에서 심하다고 생각하셨죠?”
“이 세상에 나처럼 똑똑한 사람은 하나뿐이니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한승문은 에구구 소리를 내며 소파에 앉았다.
천 사장의 사무실은 언제나 미묘한 혼돈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앉기 전에 소파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치워야 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홍선아가 해맑게 웃으며 한승문에게 질문했다.
“왜 홍선아가 두 명으로 늘어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요!”
“왜 불렀냐고 물어보기 전에 그 질문부터 하는 이유는 뭡니까?”
“홍선아가 좋다! 천금순이 좋다! 하나, 둘, 셋!”
“자, 오늘 모임을 소집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승문이 시선을 집중시키며 책상을 두드렸다. 그는 벌써부터 기가 빨린다는 듯 약간 지쳐 있었다.
“제가 두 분을 급하게 모신 건 새로 선출된 헌터협회장 헌영진의 급진적인 정책에 대응할 방안을 숙고하기 위함입니다.”
“담구자고요?”
“그건 너무 세련되지 못한 표현이네요.”
아니라고는 안 했다. 홍선아와 천금순은 이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한승문은 자기 의족을 지팡이로 툭 툭 건드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팡이가 의족에 닿을 때마다 딱딱한 소리가 났다.
“1세대 헌터가 장악한 헌터 사회를 혁신하겠다는 헌영진 협회장의 말에 일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헌터 업계의 양극화는 어느 직업군보다 심해요.”
강한 헌터는 강한 괴수를 잡으며 빨리 강해지고, 약한 헌터는 약한 괴수를 잡으며 느리게 강해진다.
자연적으로 각성한 1세대 헌터는 소량의 마석으로도 빠르게 강해지지만, 각성제로 인위적으로 각성한 헌터는 흡수효율이 낮아 마석을 흡수하는 것보다 파는 게 이득이다.
심지어 마석 세법조차 고위 헌터의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 그 결과는 철저하게 1세대 헌터가 업계를 주도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건 자연스럽게 조성된 환경이 아니다. 홍선아는 이 모든 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일까요?”
“하하…….”
머쓱하게 웃는 절름발이 정치인이 이 모든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제1대 초상관리부 장관이었으니까.
안전한 곳에서 마석을 캐며 호화 생활을 즐기던 하위 헌터들은 세금 폭탄을 맞고 급수를 올리기 위해 위험에 몸을 던져야 했고, 목숨을 걸 용기가 없는 헌터들은 건설현장과 일반 사회로 돌아갔다.
각성했다고 귀족 취급을 받던 시대는 잠깐 꽃피었다가 잽싸게 사라졌다.
이건 누구나 인위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한 나라에서 헌터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고, 그 모든 일에 배후에는 한승문 장관이 존재했다.
홍선아가 그 부분을 지적했다.
“3세대 헌터들은 그렇다 쳐요. 각성제 먹고 수명도 안 깎이고, 교육도 제대로 받고서 자기 진로 찾아가니까. 그런데 2세대 헌터들은 나라가 힘들 때 희생하라고 수명 깎이는 각성제 마구잡이로 풀어 놓고, 정작 나라가 괜찮아지니까 세금 폭탄 때려서 쫓아낸 거잖아요.”
“으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물론 그때 저도 동의하긴 했어요. 2세대 헌터의 대다수가 나라를 위해 싸운 게 아니라 안전한 데서 찔끔찔끔 마석이나 캐면서 돈 잔치 했으니까. 범죄율도 높았고, 비각성자들이랑 빈부격차도 심해서 국민들 전체가 각성제에 미쳐 있었고……. 그런 상황을 해결하려면 어느 정도 충격요법도 필요하긴 했죠.”
“충격요법을 사용했으면 그 뒷감당을 하라 이 말씀입니까?”
“헌영진은 1세대 헌터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켜서 협회장 선거에 이용한 악당이긴 하지만, 헌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2세대 헌터들이 겪고 있는 피해의식을 이용해 집권한 사람이에요. 그 인간을 날려버릴 거면 2세대 헌터들에게 무언가를 줘야 해요. 그것만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저도 전적으로 협조하죠.”
S급 헌터이자 전직 헌터협회장이 할 만한 정론이었다. 한승문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홍선아가 약간 기특하고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그가 아는 홍선아는 언제나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선아 씨 이번 총선 나갈 생각 있으십니까?”
“심심하긴 한데 정치는 할 생각이 없네요.”
“아니죠. 정반대죠. 원래 돈 많고 심심한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겁니다.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홍선아는 약간 솔깃했다. 한승문이 그걸 눈치채고 입을 털어보려던 찰나, 천 사장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정치보다는 시원하게 돈이나 땡기는 게 백배 낫죠…… 선아 씨. 혹시 매니지먼트 대표할 생각 없어요?”
“매니지먼…… 트요?”
“3대 길드 해산됐잖아요. 이제 우리 같은 대기업은 직접적으로 헌터 길드를 가질 수 없어요. 그래서 헌터들 뒷바라지해주는 회사로 업종을 변경했는데, 홍선아 씨가 연예인 겸 헌터니까 자기가 우리 회사 대표로 딱인 것 같아서요.”
“헌터로 아이돌 그룹 만들어도 되나요!”
“그런 정신 나간 아이디어……. 내가 책임 지고 밀어줄게요.”
“쓰읍……! 회사 이름은 뭘로 할까요?”
“대표 명함 파기도 전에 김칫국 마시는 거……. 진취적이라 좋네요.”
“GS 매니지먼트는 너무 고루해요! 히어로 매니지먼트? 한바다 매니지먼트? 아니면 심플하게 골든실드?”
“골든실드……. 좋네요. 진행시키세요. 홍 대표.”
“네! 사장님!”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는 가운데 한승문이 끼어들어 산통을 깼다. 그의 지팡이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골든실드고 금순실드고 뭐고 홍선아 씨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만.”
“싫은데요! 내가 시장님 믿고 헌터협회장했다가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
“후우……. 서울 헌터 아카데미 교장선생님이 하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할게요.”
“……!”
한승문이 난데없이 던진 미끼에 순식간에 홍선아가 낚여 들었고, 천 사장은 갑자기 확 풍겨온 아찔한 돈 냄새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울 헌터 아카데미요…….?!”
“제가 오늘 여러분을 모은 이유가 이겁니다. 헌영진이가 좀 아니꼽긴 해도 선거로 뽑힌 사람이에요. 처참하게 날려버리는 대신에 우리가 똘똘 뭉치자 이거죠.”
시정부가 발표한 서울형 초상혁신도시계획은 쉽게 말해 게이트를 폐문하지 않고서 도시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곳곳에 산재한 게이트를 주기적으로 청소할 수많은 헌터가 필요하고, 그 헌터들이 서울에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 해답이 헌터 아카데미입니다. 작정하고 지역 하나를 대학가로 만들어서 헌터들을 끌어모으는 거예요. 자체적으로 헌터를 키우고, 고위 헌터나 외국 헌터들도 교수로 채용해서 데려오고…….”
한승문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고서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마수는 홍선아에게로 향했다.
“선아 씨 요즘 심심했죠?”
“네!”
“진운 씨가 지금 저한테 빚진 게 좀 있거든요? 교장 홍선아 교감 설진운 라인업 만들어 드릴 테니까 적당히 가지고 노세요.”
홍선아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설진운을 살살 놀려먹을 생각으로 사악하게 씨익 미소지었다.
‘소드마스터’라는 별명을 면전에서 불러줄 때마다 귀가 빨개지는데 그걸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가볍게 홍선아를 낚은 한승문은 자연스럽게 천금순을 살살 녹이기 시작했다.
“천 사장님. 이거 보통 사업 아닙니다. 고작 대학교 하나 짓고 끝이겠습니까?”
“아카데미가 들어오면 헌터 전용 훈련소도 짓고, 초현상 연구소도 필요하고, 기숙사랑 대학가 상권도 조성되고, 헌터 길드 본사도 거기 모일 테니 고층 빌딩도 올려야 하고, 마석거래소랑 괴수 부산물 가공 공장도 지어야 하고, 돈 많은 헌터들이 사치 부릴 백화점까지…….”
“어디 그뿐입니까? 헌터들이 쓸 장비도 대줘야죠. 세계 최고의 헌팅 디바이스 업체인 GS 아이기스 같은 곳이면 좋겠네요.”
“세계에서 몰려들 헌터들에게 우리 제품을 맛보기로 사용하게 하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겠네요. 학교에서 쓴 무기가 평생 손에 익을 테니까.”
“바로 그겁니다. 사학법인은 원칙적으로 비영리지만 돈은 다른 곳에서 벌면 되지요. 아카데미가 있는 도시 자체에 어마어마한 돈이 몰려들 겁니다.”
한승문은 사람 좋게 웃으며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본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학비는 무료입니다. 물론 학생들이 나중에 헌터로 일하면서 조금씩 갚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학생 시절에는 GS그룹이 대신 후원해 줄 거에요.”
“내가요?”
“예.”
“왜요?”
“우리는 세계 최고 명문으로 끝까지 군림할 겁니다. 아카데미 졸업자들은 세계 헌터 업계에서 최고급 인력으로 대우받을 수 있게 만들 거에요. 기부입학? 없습니다. 철저하게 능력주의로 갑니다.”
“그럼 서울시 예산은 어디다 쓰고요?”
“그건 연말에 보도블록 갈아엎는 중대사업에 쓰여야 해서 헌터 아카데미 장학금 따위로 쓸 수 없어요. 그거 얼마나 한다고 망설이십니까? 16억도 껌으로 보시는 분이…….”
천 사장은 화를 내는 대신에 행복하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어린이날 사탕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순수하게 웃었다.
“나랏돈으로 안 하겠다는 건…… 완전히 우리가 먹자는 거구나?”
“지자체 출연 사학재단으로 하면 서울시장 바뀌는 순간 홀랑 넘어갑니다.”
“그런 참사는 막아야죠. 암요……!”
두 사람이 단꿈에 젖은 와중, 홍선아가 제정신을 되찾고 한승문에게 따져 물었다.
“잠깐만요. 그러면 제주 헌터 아카데미는…….”
“그런 2등 학교를 뭐하러 거론합니까?”
“아.”
교장 홍선아, 교감 설진운, 학생 감지윤, 특별강사 노아 뤼미에르, 학교와 아무 관련없지만 수상할 정도로 자주 찾아오는 정치인 한승문, 그리고 재단 이사장 천금순.
심지어 대부분의 1세대 헌터가 압구정파와 동대문파의 기치 아래 모일 테니, 제주 헌터 아카데미는 끔찍한 인력 빼가기에 시달릴 예정이었다.
그리고 현재 초상관리부와 초인지원청의 예산 상당수가 제주 헌터 아카데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한승문은 헌영진 협회장이 조금 대들었다고 정부 부처 하나를 반병신으로 만들어버린 거였다. 심지어 자기가 옛날에 만들었던 기관을…….
약간 섬뜩해진 홍선아가 끝까지 한승문을 검증했다.
“교육이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요, 부모 잃은 각성자를 어릴 때부터 세뇌해서 공무원으로 키운다고…….”
“완전한 음해입니다! 어떻게 민주사회에서 그런 일이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죠?”
“다만, 게이트 사태로 부모님을 잃은 어린 초상능력자들에게는 특수한 입학전형을 만들어 줄 수 있겠죠. 맞춤형 전인교육이 포함되는 기숙사 생활까지 제공할 의향이 있습니다.”
“아.”
산전수전 다 겪어본 홍선아가 잠시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그러나 천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는 일이네요!”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원옥분 대통령이 국민의례도 70년대 스타일로 바꿨는데 사람들이 좋아했잖아요? 조국과 민족 운운하는 게 요즘 트렌드인데 애들 교육 정도야, 뭐…….”
“그럼 저는 서울에 헌터 아카데미를 짓는다고 승인만 하고 빠지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사학법인이 주체로 하는 사업이에요.”
“저는 사학법인이 없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학교 이사장은 따로 있습니다.”
“흐음…….”
돈은 돈대로 내고 학교 이사장 자리도 못 얻어먹은 천 사장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한승문이 말한 이사장 후보자를 듣고서는 납득하며 미소지었다.
* * *
상록수로 둘러싸인 호숫가에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무들이 푸른 손을 흔들며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상록수는 사시사철 푸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새들이 지저귀는 호숫가는 관광명소로 소문날 법한 곳이었지만 호수는 고요했다. 이곳이 누군가의 사유지였기 때문이다.
어젯밤 내린 비로 나뭇잎이 젖어 짙은 흙냄새가 올라오는데, 골고루 양념을 바른 장어구이 냄새가 물비린내를 몰아냈다.
등산복 차림의 전직 대통령이 흐뭇하게 웃으며 산속에서 먹는 장어구이를 음미했다.
“으음……. 그나저나 사학재단이랑 대통령은 너무 궁합이 안 맞는 단어가 아닌가?”
“어디까지나 전직 대통령이시잖습니까.”
“그래도 좀 뻑적지근한데. 말년에 빵 들어가는 거 아냐?”
진지하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양판석은 한 번도 검찰 수사를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는 판사 출신 정치인이었고, 법원행정처에서도 요직을 맡은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
즉, 검찰이 아무리 기소를 해도 법원에서 영장을 안 내주고, 설령 재판까지 가더라도 솜방망이 처벌이 반쯤 확정된 법복귀족이었다.
심지어 검찰 출신 사위까지 두고서 검찰 내부에 자기 친위대를 박아 두고 있었으니, 검찰은 양판석의 발끝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맘 편히 양판석에게 서울 헌터 아카데미의 이사장을 맡아 달라 부탁했다.
“대통령 임기 잘 마치시고 요즘 적적하시잖습니까. 나라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신다고 생각하시고 좀 도와주십쇼.”
“아-이거, 참, 고민되는구만. 원래 대통령은 은퇴하고 사회활동 잘 안 하는데…….”
“그럼 남은 평생 자서전 쓰시면서 농사 지으실 겁니까? 밭일은 하실 수 있으세요?”
“나는 저기 유튜브나 할 생각이었는데 말야. 벌써 편집자까지 다 구해놨다구. 우리 손녀가 많이 기대하는 중이었는데…….”
“이사장 하시면서 유튜브도 찍으시면 되죠.”
“아니 그런 방법이?”
양판석의 고민이 끝났다. 그는 흐뭇하게 웃으며 숯불 위의 장어를 뒤집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고. 내가 조건이 딱 하나 있어.”
“예.”
“이사장 할 테니까 유튜브 시작할 때 나와.”
사실상 수락하겠다는 선언이었고, 우리는 즐겁게 웃으며 캔음료를 부딪혔다. 양판석이 건강을 염려해 술 대신 먹는 제로칼로리 탄산음료였다.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으니 이야기는 실무적인 문제로 흘러갔다. 양판석은 내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자네, 재단 문제는 확실히 하고 가야 해. 아무리 정치인들이 사학재단 끼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는 해도, 애초에 관련법이 워낙 오래되고 지저분하게 꼬여 있어서 잘못 걸리면 훅 간다구.”
“아까 말씀하셨듯이 ‘정치인’이랑 ‘재단’은 궁합이 잘 안 맞는 단어기는 하죠.”
“좀만 파고 들어가면 알겠지만 워낙 오까네가 돌아다니는 분야다 보니까 법이 완전 엉망이야. 심지어 국회의원들이 한 발 담그고 있는 분야다 보니까 잘 바뀌지도 않어.”
“괜찮습니다. 법적인 문제는 깔끔해요.”
낚시의자에 몸을 기대고 경치를 구경하던 양판석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어떻게? 지자체 출연재단으로 하면 자네 뜻대로 할 수야 있겠지만 시장 바뀌면 말짱 헛거 되는 거 아냐?”
“괜찮습니다. 지자체 출연재단으로 안 해요.”
“흐음……. 애들도 가르치고, 연구도 하고, 괴수도 때려잡는 재단을 원통이 미쳤다고 승인해주겠어? 사실상 방위산업체인데?”
“이미 승인받았습니다.”
“뭐? 언제?”
“옛날에요. 서울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전부 가지고 있던 계엄사령관한테요.”
장어를 향해 내려가던 양판석의 젓가락이 우뚝 멈췄다.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래…… 그 양반이 있었지.”
“괴수피해복구재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부디 이사장을 맡아 주세요.”
“거기 이름이 한승문 재단 아니었나?”
“뭐……. 일부러 이름을 복잡하게 지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게 만들긴 했습니다.”
“하하!”
양판석은 갑자기 뭐가 그리도 웃긴지 하늘을 쳐다보며 즐겁게 웃었다. 고요한 호숫가에 난데 없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록수로 둘러싸인 호숫가에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무들이 푸른 손을 흔들며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상록수는 사시사철 푸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