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62화 (262/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62화

EP 41-적응(5)

한국의 ‘헌터급수제’는 각성자의 능력과 상관없이 업적에 따른 점수를 쌓아 승급하며, 고위 헌터로 인증되는 7급부터는 아예 헌터협회와 초상관리부 장관의 별도 심사까지 거친다.

사람의 주관적인 평가가 개입되는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헌터와 헌터 길드를 개목줄을 채운 것처럼 통제할 수 있게 만들긴 했지만, 슬슬 수작질을 눈치챈 헌터들이 헌터급수제를 적폐로 치부하며 반발하는 중이다.

반면 북미-유럽의 랭크 제도는 철저히 마력량에 기초한다. 사람의 판단이 아니라 기계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다.

물론 서양이 동양보다 더 공평해서 그런 건 아니고, 마력 측정 기술을 저쪽에서 먼저 개발해서 그렇다.

우리는 이미 마력 측정 기술 분야에서 뒤처졌으니 꼼짝없이 미국 물건을 사서 써야 한다. 랭킹 시스템이 세계표준으로 자리 잡을수록 모든 나라가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제품을 사서 써야 하는 구조다.

따라서 만악의 근원으로 불리는 초대 초상관리부 장관이 도입한 헌터급수제는 어쩌면 사악한 귀축영미의 경제침략에 맞서고자 한 한민족의 얼이 담긴 게 아닐까?

하지만 게이트만큼은 급수제가 아니라 랭킹제가 맞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데 심사위원회가 게이트의 등급을 재고 앉았나. 그냥 기계로 삑- 찍어보고 마력량 높으면 바로 경비계엄 때려야지.

그런 의미에서 서울에 S급 게이트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대단히 객관적이고 산술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당장 서울에 있는 모든 사람한테 재난문자부터 돌리세요! S급 헌터 아니면 전부 해당 지역에서 대피하라고!”

* * *

게이트 사태 대응의 컨트롤 타워는 청와대지만 그건 서울시장이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세종정부청사에 도착하자마자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로 향했다. 노란 잠바를 입은 공무원들이 사색이 되어 몰려드는 중이었다.

원래는 중대본과 서울특별시 재난안전대책본부가 따로 있어야 하지만, 게이트 사태를 겪으면서 공직사회는 관료주의의 묵은 때를 조금이나마 벗어 던졌다.

일단 세종시에 있는 사람은 전부 중대본에 왔다. 높으신 분 기다릴 것도 없이 월권을 행사하며 사태를 진두지휘하던 행안부 차관이 나를 반겼다.

“한승문 시장님!”

“행안부 장관은 어디 갔어요?”

“장관님 지금 부산에 계십니다! 총리님이랑 초상관리부 장관님도 마찬가지고요. 지금 컨트롤 타워를 맡으실 분이 시장님뿐입니다. 도와주십시오!”

그는 내가 야당 서울시장이라는 사실은 신경도 안 쓰고 내게 방향키를 넘겼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앞의 행안부 차관은 나보다 공무원 물을 수십 년도 넘게 먹은 아저씨였다. 내가 이 사람을 대체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경찰청이랑 소방청 직제도 모르는 제가 어떻게 지휘합니까? 옆에서 도와드릴 테니까 같이 합시다. 뭐부터 도와드릴까요?”

“서울시 자치경찰은 제 임의로 국가경찰이랑 같이 투입했습니다. 소방관들도 민간인 대피에 투입했고요. 그런데 서울시 어디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몰라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길을 헤매고 있답니다.”

“공사판 위치요? 그건 우리 2부시장이 달달 외고 있으니까 바로 전화해서 물어볼게요. 세종시까지 못 오겠으면 문자로라도 자료 보내라고 하지요. 어? 아니지! 아니지! 저번에 제가 받은 서울 재개발 사업 구상도가 있는데, 그거 보면 굵직한 건설현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지금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저번에 이메일로 받았으니까 메일함 뒤지면 나오죠. 여깄네요. 보내드릴 테니까 주소 보내주십쇼.”

‘서울 탈환’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은 사람이 사는 도시가 아니라 괴수에게 점령된 ‘탈환’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서울시장도 전국선거로 뽑았고, 서울시의회도 없다.

그러나 현재. 강남 일대에는 건설노동자와 그들을 대상으로 음식을 파는 소상공인, 폐허의 잔해를 치우는 중장비 운전기사와 그들을 경호하며 괴수를 소탕하는 헌터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목숨이 우리에게 달려 있었다.

세종시에 있는 공무원들이 그 사람들을 직접 구출할 수는 없지만, 만약 여기서 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지휘체계가 혼선을 빚거나, 고위공직자가 현장 구급요원에게 전화해 쓸데없이 질문폭탄을 쏟아내며 시간을 끌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름 모를 공무원이 행안부 차관과 내게 다가와 패드를 건넸다.

“현재 S급으로 추정되는 게이트는 노량진에 열린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방금 국군에서 드론으로 현장 영상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거 봐봐요.”

행안부 차관의 지시에 공무원이 패드를 넘겼다. 동영상을 통해 확인한 게이트에서는 꿈틀대는 살덩어리들이 물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건 개문 사태 당시 국회의사당 위에 열린 게이트와 똑같은 유형의 게이트였으니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저건 분류상 고정형 게이트였고, 그곳에서 쏟아지는 살덩어리들은 급가속변이체, 혹은 I타입 뮤테이션이라고 불리는 괴수 분류에 속했다.

내가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 있으니 행안부 차관이 긴장하며 물었다.

“이 영상에서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찾으셨습니까?”

“아뇨. 비교적 흔한 유형의 게이트입니다. 다만 개문 사태 당시에 열린 게이트랑 같은 유형이라 좀 그렇네요.”

내게 패드를 건네준 공무원이 그 말을 듣자마자 끼어들었다.

“저게 무슨 게이트인지 아십니까?! 지금 전문가가 없어서 보도자료에 제대로 된 정보를 못 올리고 있습니다!”

“저건 고정형 게이트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게이트입니다. 열리자마자 괴수를 어마어마하게 쏟아내고 나면 좀 잠잠해져요. 그때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특이점에 게이트버스터를 갈기면 문이 닫힙니다. 문제는 게이트가 아니라 괴수예요. 이거 잘못하면 일이 더럽게 굴러갈 수도 있겠습니다.”

깜짝 놀란 행안부 차관이 내 어깨를 잡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 무슨 문제인데요?”

나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대답했다.

“저건 I타입 괴수입니다. ‘Instant’의 I죠. 흐물흐물한 살덩어리 상태로 지구상에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변이를 시작합니다. 여의도 게이트에서 나온 놈들이 저거였어요. 하필이면 게이트가 허공에서 열렸으니 날개가 달린 놈으로 진화하는 개체들도 많을 겁니다. 한강에 기어들어 간 놈들은 슬라임처럼 변하거나 수생류가 될 수도 있고요…….”

“제가 나이 먹고 머리가 굳어버려서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조금만 풀어서 설명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게이트가 노량진에 열렸다고 했지요? 괴수가 한강 물길 따라 퍼질 가능성도 미리 고려해야 합니다. 비행괴수가 퍼질 가능성도 염려해야 하고요. 다행히 I타입 괴수는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에는 비교적 약한 상태이니, S급 게이트라고 쫄지 말고 A급 헌터들도 달려가서 때려잡아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장 한강과 연결된 지역에도 경고하고, 대통령님께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 * *

게이트 사태가 발생하면 대통령은 즉시 해당 지역에 경비계엄을 선포한다.

계엄령은 치안 유지를 위해 군인을 투입하겠다는 명령이므로 당연하게도 군인들 또한 즉각적으로 투입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초현상 신속대응사단에 소속된 군 헌터들은 노량진 일대에 봉쇄선을 형성하는 중이었다.

염동력으로 가로등을 무너뜨리며 골목을 틀어막고 있던 임윤빈 대위에게 서현찬 중위가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쳤다.

“대위님! A급까지 전부 투입 명령 떨어졌습니다!”

“뭐? S급 게이트라며! 아니었어?”

“S급 게이트 맞습니다! 그런데 A급 헌터까지 전부 투입하라고 합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초현상 신속대응사단의 주요 임무는 헬기나 염동술사를 통해 날아가 신속히 게이트를 포위하는 것이다.

괴수를 직접 상대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은 헌터가 모자란 나라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S급 게이트를 상대로 A급 헌터들까지 돌격시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현장 지휘관으로서는 상부의 판단이 잘못된 게 아닐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에다 대고 개길 순 없으니 아래에 대고 성질냈다.

“아니 S급 게이트가 왜 S급 게이트야! S급 헌터만 제압할 수 있으니까 S급이지! 왜 A급 헌터까지 가서 싸우래!”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임윤빈 대위는 성질을 내는 와중에 재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A급 헌터가 투입되도 될 만큼 상황이 좋거나, A급 헌터를 투입해야 할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고.

현장 인원 중 유일한 A급 헌터였던 대위가 명령했다. 일단 마력부터 측정해 보고 상황에 맞춰 행동할 심산이었다.

돈도 못 받고 의무복무 중이었으니 나라에 목숨까지 바칠 생각은 없다.

“서 중위, 삑삑이 틀어봐.”

“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개발된 국산 마력측정기는 일명 ‘삑삑이’로 통했는데, 촌스러운 디자인은 물론이고 서양식 랭크제가 아닌 한국식 등급제로 마력 농도를 표시하는 불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삑삑이는 별명에 걸맞게 삑삑거리며 마력 측정을 시작했다.

“몇 등급 나왔어?”

“이거 측정하는 거 되게 오래 걸리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빨리 측정해!”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임윤빈 대위는 만약 마력 농도가 낮게 나오면 당장 달려가서 한 마리라도 더 때려잡아 마석을 챙길 생각이었고, 마력 농도가 높게 나오면 절대로 봉쇄선 안쪽으로 발을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침내 마력 측정이 완료됐다.

“떴냐!”

“…….”

“왜 대답이 없어?”

서현찬 중위는 기묘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임윤빈 대위가 중위를 툭 건드렸다.

“몇 등급 나왔냐니까?”

대위는 인상을 찌푸리며 직접 기계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생전 처음 보는 수치가 담겨 있었다.

마침내 대위마저도 얼음처럼 굳어버렸을 때, 서현찬 중위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12등급 사이오닉 에너지가 감지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꼼짝도 못 하고 굳어 있던 그때, 부대원 중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상공에 뭔가 있습니다!”

대위와 중위가 식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작은 그림자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씨발……!”

그러나 하늘에 있는 무언가가 괴수가 아니라 작은 소녀라는 걸 식별한 순간, 대위와 중위의 얼굴에 가득했던 절망은 곧장 희망으로 바뀌었다.

거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릴까 봐 얼굴만 쏙 나올 정도로 후드티 모자를 꽉 조인 소녀가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력측정기가 치직- 소리와 함께 꺼져버리는 동시에, 구름이 반으로 갈라지며 보이지 않는 힘의 파도가 게이트의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

한국 최강의 초상능력자, 감지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공간이 구겨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힘이 하나로 압축됐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요동치는 염동력은 정확히 게이트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지상으로 떨어지던 괴수들이 중력이 뒤집힌 것처럼 하늘로 딸려 올라갔다. 그리고 토네이도에 휘말린 것처럼 빙빙 휘돌며 가운데로 뭉쳤다.

콰직-!

게이트에서 떨어지는 괴수들이 발버둥치다가 고스란히 파도에 휘말려 으깨졌다.

물컹이는 살덩어리들이 피분수를 내뿜으며 짓이겨졌지만 그 핏방울마저도 지상에 떨어지지 못하고 소용돌이의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게이트 아래에는 고기로 된 구체가 생겼다.

게이트에서 떨어지는 괴수들은 고스란히 소용돌이에 휘말려 가운데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발버둥친 끝에 짓이겨져 괴수의 시체로 된 공의 일부가 되었다.

구체는 끊임없이 괴수의 파편을 흡수했지만, 크기가 늘어나는 일 없이 일정한 질량을 유지했다. 어마어마한 중력의 파도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감지윤은 오늘 저녁까지 저 상태를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누군가 딸기우유만 제때제때 가져다준다면 말이다.

* * *

“우와아아아-!”

“됐습니다! 이제 끝났어요!”

“만세! 만세! 만세!”

세종정부청사 중대본은 축제 분위기였다. 끊임없이 괴수를 쏟아내던 S급 게이트가 허무하게 제압된 덕분이었다.

노란 점퍼를 입은 공무원들이 서류를 머리 위로 던져대며 기뻐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그중에는 나와 행안부 차관도 있었다. 행안부 차관이 못마땅하게 상황을 지켜보다가 자기 부하에게 턱짓했다.

행안부 차관의 명령에 자리에서 일어난 고위공무원이 고함을 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들입니까!”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지금까지 튀어나온 괴수들이 다 잡혔어요? 한강에 들어간 괴수들이 다 잡혔냐고요!”

당연하게도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괴수들이 국민들을 공격하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상황 아직 안 끝났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행안부 차관의 이름 모를 부하가 중대본의 기강을 잡는 동안, 나는 행안부 차관과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렸다.

“감지윤 헌터가 앞으로 몇 시간은 버텨줄 겁니다. 이 틈에 민간인 대피시키죠. 그리고 청와대에서 내려온 오더는 따로 없습니까?”

“지금 길드장들 전부 소집해서 게이트 공략조 편성하는 중이니까, 중대본에서는 지역 봉쇄에 만전을 기하라고 하십니다. 재량권도 허락받았고요. 한데 한강 따라서 내려간 괴수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네요. 시장님, 혹시 그 괴수들이 물에서 번식할 수도 있습니까?”

“I타입 괴수가 까다로운 이유가 그겁니다. 진화가 너무 빨라요. 며칠만 지나면 환경에 적응한 2세대 괴수가 나올 겁니다.”

“하아……. 며칠 내로 전부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건 강줄기를 전부 틀어막아도 불가능한 일인데…….”

행안부 차관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반쯤 쥐어뜯는 수준이었다. 야당 서울시장인 내 앞에서 저러는 건 지금 멘탈이 많이 흔들린다는 거였다.

“하아, 미치겠습니다. 민간인 대피도 시키고, 피해 규모도 산정하고, 공격대 오기 전까지 포위망도 유지해야 하는데, 한강에 숨어든 괴수까지 전부 찾아내야 한다니. 당분간 퇴근은 꿈도 못 꾸겠군요.”

“저도 상황이 공교롭게 됐네요. 당분간 서울에 아파트 짓자는 소리는 아무도 못 할 겁니다. 서울 재개발 올스톱이에요.”

급한 불은 꺼졌지만 정치인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말에 사람 다섯이 있으면 그중 한 명은 우둔한 자가 있다고 하였으니, 군대-경찰-소방청-초인지원청이 우르르 움직인 마당에 뭔진 몰라도 ‘반드시’ 어디선가 개 같은 뻘짓을 했을 것이다. 기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그거부터 숨겨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S급 게이트 터지자마자 나락으로 떨어진 코스피를 영차영차 끌어올려야 하고, ‘서울 개박살’의 트라우마가 재발해 라면과 생수를 사재기하는 국민들에게 ‘여러분! 이제 서울은 안전합니다! 모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라고 입을 털어야 했다.

내가 초상관리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치면서 게이트 사태 대처해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딱 보면 견적이 나온다.

다행히 지금은 힘없고 불쌍한 야당 서울시장일 뿐이었지만, 하필 내 나와바리에서 사고가 터졌으니 대통령이 알아서 하라고 놔둘 수도 없는 노릇.

마석재벌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울을 그냥 사냥터로 쓰자고 선동할 테고, 토건재벌은 어떻게든 재개발을 밀어붙이기 위해 강남에 괴수가 설치는 와중에도 공사를 강행하려고 할 터.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세무조사의 칼날을 휘두르며 돈미새들의 폭주를 제압해야 할 예정이었다. 벌써부터 시장 집무실에 쳐들어와 징징거리는 헌터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괜찮다. 악역은 익숙하니까…….

“저기, 시장님. 그리고 차관님.”

“아, 예. 무슨 일이시죠?”

행정안전부 차관의 부하직원이 암담한 미래를 상상하며 탄식하던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1차적인 피해 상황 조사가 끝났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38명입니다. 국군 사망자는 3명, 경찰 사망자는 2명, 나머지는 전부 민간인 피해입니다.”

“…….”

차갑게 굳어버린 행안부 차관의 입은 열리지 않았지만, 나를 향한 착잡한 눈빛 속에는 일말의 안도가 담겨 있었다.

그건 피해가 생각보다 적다는 뜻이었다. 옛날이었으면 큰일 날 생각이었지만 애석하게도 피해가 적은 게 사실이었다.

게이트와 헌터의 시대는 산업재해로 하루에 대여섯 명이 죽던 옛 시대와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하루 평균 30여 명 이상이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헌터 대신 마석을 캐는 비각성자 짐꾼이 죽고, 서울에서 근로하던 건설노동자가 잔해 속 괴수에게 기습당해 죽고, 풋내기 헌터가 태백산맥을 벗어나 북한 깊숙이 들어갔다가 조선인민군 잔당의 총에 맞아 죽는다.

여기에 게이트 사태로 인한 사망자까지 포함하면 하루 평균 사망자 수치는 아득히 올라간다.

그러니 방송사에서도 보도 관행상 100명 이하의 피해는 비판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망자의 숫자는 그냥 대충 뭉개고 넘어간다.

따라서 오늘의 사건은 ‘S급 게이트가 열렸음에도 정부가 선방했다’는 논조로 보도될 예정이었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규칙이었다. 수십 명 단위의 피해까지 일일이 보도하면 뉴스에서는 하루종일 사람 죽는 이야기만 나올 것이다.

이건 정부의 언론 통제가 아니다.

국민과 정부, 그리고 언론의 암묵적 합의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다. 러시안룰렛을 돌리는 것처럼 무작위로 대형 인명사고가 일어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점점 마음에서 무언가를 덜어낼 수밖에 없다.

산업재해 사망자 숫자처럼, 이따금 뉴스 자막에 작은 글씨로 스쳐 지나가는 숫자처럼, 어떤 숫자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진다.

그렇게 모두가 조금씩 적응하는 중이다.

“……알겠습니다. 민간인 대피 철저히 마무리해서 최대한 피해를 줄이도록 하세요.”

“네, 차관님.”

부하직원을 돌려보낸 행안부 차관은 울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퍽 사무적인 말투였다.

“1차 조사로 38명의 사망자가 확인됐으니……. 다 해서 100명은 넘지 않을 것 같네요. 언론에서도 그리 독하게 굴지는 않을 듯합니다. 시장님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대략 예순 명의 사망자를 예상하는 중이었지만, 그 대신 다른 대답을 돌려줬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차관님. 이건 자연재해입니다. 숫자는 중요치 않습니다.”

“……예. 제가 잠시 그걸 망각하고 있었네요.”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처받은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겁니다. 차근차근 해야 할 일을 합시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대한 신중하게 정제해서 발표하고, 잘한 사람과 잘못한 사람을 가리고, 유족들을 위로합시다. 그게 우리 업무니까요.”

“……고맙습니다.”

“그것도 체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잠시 숨 좀 돌리십시오.”

행안부 차관은 고개만 작게 끄덕이고 자기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피곤해서 눈을 붙이는 건지, 신에게 기도하는 건지 모를 태도였다.

“하아…….”

역시 게이트와 헌터의 시대에 정치인을 한다는 건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차관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모, 모르고 계셨습니까? 행정안전부 차은수 차관입니다.”

“차 차관님이셨구나.”

유독 담배가 당기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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