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61화 (261/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61화


EP 41-적응(4)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실이지만 사실 한국에는 공식적으로 S급 헌터가 없다. 대신 1급부터 9급까지 올라가는 헌터 급수제가 있다.


사기업이나 언론에서는 A랭크니 S랭크니 하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이지만, 현행법은 7급 이상의 헌터를 고위 헌터로 인정하며 해외 랭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헌터 랭크 측정이 이원화된 이유는 못돼먹은 초대 초상관리부 장관이 정책을 이렇게 설정했기 때문이었다.


북미-유럽에서는 단순히 능력만 좋으면 각성하자마자 S급을 찍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3급부터 시작이다.


미친 재능의 소유자도 3급, 헌터 아카데미 수석도 3급, 헌터협회와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는 특수한 인재(재벌)도 3급부터 시작이다.


그리고 급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공공기관에서 발주하는 의뢰를 수행하는 게 가장 많은 가산점을 준다…….


그렇다! 이 헌터 급수제는 헌터를 돈이 아니라 가산점으로 부려 먹기 위한 초대 초상관리부 장관의 음모인 것이다.


착하고 정직한 서울시장인 나는 차마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악한 계책이었다.


[현행 초상능력자 급수 인증 제도는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근데 왜 헌터등급제가 욕을 먹을수록 내 마음이 아픈 걸까. 이상한 일이다.


뉴스에서는 오늘도 과거의 적폐가 되어버린 급수 제도가 신명나게 까이고 있었다.


[심사 과정도 정성평가 비중이 지나치게 높을뿐더러, 이제 한국 헌터들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만큼 국제 표준에 맞추어 기준을 일원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후보자님은 현행 헌터 등급제를 개선하시려는 것인지요?]


[개선이라기보다는 청산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건 전형적인 탁상행정에서 비롯된 적폐입니다. 제가 헌터협회장이 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싹 갈아엎겠습니다!]


초상관리부 장관이 임명하던 헌터협회장이, 각성자들이 직접 선출해서 뽑히는 자리로 바뀌자마자 ‘수상할 정도로 준비가 잘된’ 후보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헌터라는 단어부터가 지나치게 정치적입니다. 초상능력자로 각성했으면 무조건 괴수를 잡는 헌터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초능력이 있다고 무조건 군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산업현장과 생업전선에서도 얼마든지 활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치중립적 단어인 ‘각성자’라는 단어가 더욱 적절할 것입니다.]


[그럼 후보자께서 당선되신다면 헌터협회가 아니라 각성자협회로 이름이 바뀌겠군요?]


[그렇습니다. 사실상 유명무실했던 헌터협회와는 달리, 각성자협회는 헌터 길드가 아니라 각성자 개개인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누가 봐도 국방당 색깔이 묻은 허수아비는 대놓고 이름만 거론 안 했지 온종일 ‘한승문 개새끼’를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자기가 벌써 당선된 것처럼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정치 신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든지 ‘이미숙’ 신세로 만들어줄 수 있었으니까.


지금 내가 가장 먼저 다독여야 할 사람은 나 때문에 헌터협회장 출마가 무산된 전직 초상관리부 장관 양일호.


……의 아내인 이호정 국민당 원내대표였다.


“오빠,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녜요?”


양일호와 이호정이 거주하는 부산 수영구의 오션뷰 아파트.


토끼 수면바지와 토끼 티셔츠를 입은 이호정이 내게 삿대질했다.


“저번에 ‘양일호 헌터협회장 만들기 작전’까지 같이 짜놓고 이렇게 배신하면 안 되죠. 어떻게 원옥분이랑 통화하면서 그렇게 쉽게 불출마 약속을 해줘요?”


“미안하다. 동남아에서 사람이 죽는다는데 원옥분 대통령 그 못된 인간이 자꾸 밍기적거리지 뭐냐.”


“그래도 그렇지. 일호가 아직도 오빠 보좌관이 아닌데 그렇게 남의 거취를 함부로 결정하시면 안 되죠.”


자기 남편을 어떻게든 헌터협회장으로 만들어 정계에 집어넣으려던 이호정은 대놓고 내게 불만을 드러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이었다면 양일호가 쩔쩔 매며 싸움을 말렸겠지만, 그렇게까지 엄중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거북이 수면바지와 거북이 티셔츠를 입은 양일호가 핸드폰으로 배달음식을 고르며 가볍게 웃었다.


“괜찮아요. 처음부터 나가려고 했던 선거도 아니고,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마음도 대충 반반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고맙긴 한데…….”


“제가 전직 장관이라도 결국 양판석 정권 사람이잖아요. 지금 헌터협회장 당선됐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걸요? 눈칫밥만 먹었지…….”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야당도 야당 나름이지 양일호는 예외다.


내 친구이자 보좌관 출신이라서가 아니다. 초상관리위원회 국회의원과 제2대 초상관리부 장관을 역임해서도 아니다. 아내가 국민당 원내대표여서도 아니다.


바로 1세대 헌터들과 친분이 있어서다. 양일호는 ‘길드’라는 단어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헌터 업계에서 활동했다.


그때 양일호에게 마석을 건네주고 흰 봉투에 월급 받아가던 헌터들이 지금은 길드장이 되었으니, 양일호가 헌터협회장에 당선됐다면 손쉽게 헌터 사회의 지지를 얻었을 것이다.


“좋은 기회였는데 나 때문에 놓친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하네.”


“정말 괜찮다니까요.”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젓는 양일호는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헌터협회장 자리 따위는 아쉽지도 않나 보다.


하긴, 애초에 양일호가 돌연 은퇴한 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더 이상 사람 죽는 일에 관여하기 싫어서였다.


그러니 본인에게 정치적 야심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남편의 번아웃을 치료하려던 이호정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이호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일호를 설득했다.


“야, 일호야. 차라리 다다다음달에 국회의원 선거를 나가는 건 어떠냐?”


“또요?”


직전까지 사람 좋게 웃던 양일호가 표정을 구기며 질색했다.


“나이 어리다고 무시당하고, 정부에서는 빨리 입법하라고 일거리 던져주고, 난민 운동권은 재산 복구시켜 달라고 국회에서 빡빡이쇼 하는데 저보고 또 거기 들어가서 구르라고요?”


“그때는 내가 너무 바빴잖아.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 근데 너 변호사 자격증도 있는 놈이 초상관리부 장관까지 해놓고 진짜로 정계 은퇴할 거야? 커리어가 안 아까워?”


이호정은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양일호는 나와 이호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정치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는 거였다.


나는 양일호의 고민을 끝내주기로 했다.


“이호정이랑 청중엽 대표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아. 총선 끝나면 당권 잡으려고 드잡이질할 거라고. 그때 니가 지켜줘야 하지 않겠냐?”


이호정이 끼어들었다.


“아, 뭐 그런 얘기까지 해요?”


이호정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양일호는 살짝 충격받은 모양이다.


“당내 갈등이 그 정도예요?”


“난민운동권 힘 빠지면 청중엽 대표랑 호정이랑 세게 한 판 붙을걸? 청중엽은 대통령 하고 싶어하는데, 얘는 청중엽 같은 사람은 절대 대통령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잖아. 그걸 서로 본능적으로 아는 거지.”


“알았어요. 출마할게요.”


가족 걱정으로 태도를 바꾼 양일호가 결연하게 표정을 굳혔다.


이호정은 어쨌거나 양일호가 정계에 돌아온다니 기쁘게 웃으며 남편의 팔뚝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양일호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개문 사태 훨씬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두 명이 스킨십하는 걸 보니까 살짝 매스꺼웠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단 말이다.


구겨진 내 표정을 본 양일호가 황급히 이야기를 정리했다.


“아, 아무튼 이제 겨우 출마하기로 다짐했는데 벌써 당선된 것처럼 좋아하면 안 되죠. 국민들 앞에서 겸손해야 하니까.”


“아니야. 일호야. 너는 이미 당선됐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직 어디 출마할지도 안 정했는데요?”


“넌 강원도 속초에 출마할 거야. 강원도는 태백산맥이랑 북한을 오가는 헌터들이 모인 곳이고, 마석 유통과 마석 정제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모여 살지. 식당도 헌터들 상대로 장사하고, 공무원도 헌터들 관리하고, 백화점도 헌터들 무기 팔고…….”


농촌에 농부만 사는 건 아니지만 농부 마음을 사로잡으면 선거에서 이기는 것처럼.


강원도에 헌터만 사는 건 아니지만 헌터 마음을 사로잡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니가 강원도에서 선거유세를 할 때, 이 친구가 지지연설을 할 거야.”


나는 한참 전부터 잔뜩 긴장한 채로 내 옆에 앉아 있던 설진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호정과 양일호는 S급 헌터를 물끄러미 쳐다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겼네.”


“선거 끝났네.”


* * *


그렇게 동남아시아를 걱정하는 설진운, 헌터 협회를 먹고 싶은 원옥분, 자기 남편을 어디든 출마시키고 싶은 이호정 사이의 이권을 깔끔하게 분배하면서 S급 헌터의 민원을 해결해 줬다.


이 청렴하고 욕심 없는 서울시장이 얻은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나섰던 거니까.


절대로 설진운을 추종하는 동대문파 헌터들의 민심을 잡기 위해 나선 게 아니다.


그렇게 S급 헌터를 돌려보내고 며칠 후.


오늘도 한국은 여느 때와 같았다.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국회에 불이나 싸지르는 헌터들은 정치를 하면 안 돼’라는 뉘앙스의 망언을 지껄인 국회의원은 나락으로 떨어져 활활 불타고…….


한편 나는 서울시 공무원 망언을 수습할 시간을 벌어주었던 방송국 사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방송국에서 예능을 촬영하고 있었다.


밝은 조명이 비추는 통나무집 컨셉의 스튜디오. 수십 개의 카메라가 주목하는 나무 원탁에 둘러앉은 연예인들이 나를 쳐다보며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한승문 서울시장님 실제로 보니까 많이 젊어 보이시네요? 방송용 메이크업까지 받으니까 완전 대학생이에요! 대학생!”


“감사합니다.”


“사실 TV에서 뵐 때마다 어마어마한 노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정치권에서 비교적 젊으니까 조숙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다른 분들은 일부러 젊게 보이려고 넥타이도 안 매고 그러시는데…….”


“그거 기만 아닌가요?!”


“근거 없는 네거티브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예능이라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프로그램은 아니고, 그냥 매주 게스트 한 명씩 불러서 패널 네다섯 명과 노가리 까는 흔한 토크쇼였다.


정석적인 포맷이었지만 연예인을 전부 A급으로 깔아놔서 시청률도 잘 나오는 편이었다. 사전에 방송국 사장의 지시가 있었는지 대화 흐름은 정치가 아닌 일상으로 흘러갔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출연했던 예능이라고는 첫 출마 당시 민주당 유튜브에서 기획한 정치예능이었으니까. 그마저도 15초 나오고 끝이었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출세한 정치인의 베일에 싸인 일상을 궁금해했고, 그 호기심은 시청률을 뽑아내고 싶은 PD들에 의해 정제되어 연예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평소에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서울시 업무를 봅니다. 거주자가 없는 지자체다 보니 대부분이 서울 탈환과 재개발 사업에 관련한 사무입니다.”


“아아, 평소 쉬실 때요.”


“쉴 때요? 집에 들어가면 바로 자는데…….”


“그렇다면 따로 취미 같은 건?”


“딱히…….”


“아, 오늘 방송 쉽지 않네요!”


절망적인 내 토크 실력에 A급 연예인들이 좌절하던 그때, S급이 나섰다.


S급 연예인이 아니라 S급 헌터. 이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자인 홍선아였다.


“우리 한승문 시장님이 원래 낯을 좀 가려요. 맨날 딱딱한 게 디폴트지만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우스운 모습도 자주 보여주죠.”


“아! 선아 씨는 그럼 친합니까?”


“전우죠. 브라더스 인 암즈.”


홍선아는 쟁쟁한 연예인들 사이에서 현란한 완급 조절을 보여주며 토크를 주도했다.


역시 게이트 사태 초기부터 예능에 출연해 불쇼를 선보이고 다닌 베테랑다웠다.


“압구정 탈출작전 당시에 현장에서 계획을 세운 사람이 한 시장님이에요. 매직펜을 가져와서 지도를 직직 그으면서 이러면 탈출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했죠. 제가 그때 직접 봐서 기억해요. 장난 아니었어요!”


“한승문이라는 헌터가 얼마나 세냐구요? 능력도 워낙 특이한 데다 전투경험도 많아서 아주 강력하죠. 한 시장님 같은 경우를 해외에서는 싱크로 능력자라고 부르는데 육체계도 아니고 정신계도 아닌 제3분류에 속해요. 아주 희귀하죠. 미국에 한두 명 정도 있나? 근데 그 사람들은 여기 계신 분처럼 어마어마한 출력을 끌어내지는 못하죠. 어쨌든 자기 능력은 없고 남의 능력 빌려서 쓰는 각성자라 어떤 능력이든 컨트롤은 이미 달인 수준이에요. 가끔은 저보다 제 능력을 더 잘 쓴다니까요? 감지윤의 감각을 알아서 그런가…….”


“정치인 한승문은 헌터들에게 일종의…… 보증서 같은 사람이에요. 이 사회가 헌터들을, 각성자들을, 이 세상에 새로 등장한 새로운 인종을 배척할 생각이 없다. 우리 같은 초능력자도 얼마든지 안심하고 살아도 된다. 그냥 존재 자체가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거죠.”


알아서 나 대신 과거 썰도 풀고 감동적인 무드도 조장하는 홍선아였다.


나는 약간 감동한 상태로 그녀에게 말했다.


“카메라 앞이라고 너무 칭찬만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제부터 욕할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제가 욕할 게 뭐가 있다고요?”


“또, 또 이러신다. 어디 한 번 풀어볼까요? 자신 있으세요?”


“미안합니다.”


일단, 실권 하나도 없는 헌터협회장으로 앉혀서 몇 년 동안 온갖 욕을 처먹게 한 시점부터 나는 홍선아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재밌는 그림을 찾아낸 패널들이 홍선아 앞에서 꼼짝도 못 하는 서울시장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나를 옭아매려던 찰나, 피채원이 경직된 표정으로 스튜디오에 난입했다.


“시장님.”


“왜? 무슨 일이야?”


스태프와 연예인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피채원이 내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서울에 S급 게이트가 출현했습니다.”


“…….”


나는 잠시 멍을 때렸다. 그러나 911 테러 소식을 듣고도 7분 동안 멍을 때렸던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무려 수십 년 동안 두고두고 푸짐하게 욕을 퍼먹었다는 사실을 곧장 기억하고 몸을 일으켰다.


“홍선아 씨. 지금 세종시까지 순간이동 가능해요?”


“못할 건 없죠.”


홍선아의 순간이동은 공간을 이동하는 게 아니라, 사실 몸을 불꽃으로 만들고 압축시켜서 해당 좌표까지 고속이동하는 것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아느냐? 혹시 몰라서 같이 연습해 봤다. 즉, 홍선아만 있으면 나도 순간이동을 쓸 수 있었다.


“세종정부청사로 갑시다. 지금 당장.”


홍선아가 내 손을 붙잡은 순간, 우리는 짧은 섬광과 함께 한 줌 불꽃이 되어 스튜디오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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