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59화 (259/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59화

EP 41-적응(2)

자카르타의 모두가 난민촌에 사는 건 아니다. 판자촌은 도시 외곽에 형성되어 있고, 도심부는 상류층을 위한 편의시설도 존재했다.

고층 빌딩과 호텔이 늘어선 모습은 세계 어느 곳에 있는 대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슬슬 해가 저무는 와중에도 도시는 불야성처럼 밝았다.

헌터들의 숙소는 당연히 도심부의 정중앙에 있었다. 시정부는 비즈니스 호텔 하나를 통째로 헌터들에게 기증했다.

설진운이 호텔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이 활짝 웃으며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녕아세요!”

설진운은 당황스럽지만 일단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통역가가 첨언하기를, 그가 바로 자카르타의 시장이었다.

“아, 네……. 안녕하십니까.”

“쩌음 뱁겠슴니다!”

자카르타 시장이 아는 한국어는 여기까지였는지 그는 영어로 말을 이어갔다. 대충 자카르타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이야기였다.

자카르타 시장은 억센 손길로 악수하며, 그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기자들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자기 SNS에 올릴 셀카도 찍은 다음, 설진운을 미군에게 넘긴 뒤 쪼르르 도망쳤다.

다행히 미군에서 보낸 안내원은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반쯤 한국인이기도 했다.

“반갑습니다. 설진운 헌터. 조나단 박입니다. 조나단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조나단.”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인사말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정말로 반갑습니다.”

설진운은 이런 과도한 환대의 이유가 딱히 의아하지는 않았다. S급 헌터는 어딜 가나 이런 대접을 받았으니까.

특히 세상에서 가장 열악한 곳만 돌아다니다 보면 현인신 취급을 받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대접은 열악함에 정비례했다.

조나단 박이 거의 예수님을 영접한 표정을 하는 걸 보니 설진운은 이 동네도 어지간히 빡세겠구나 싶었다.

“여기서 조금만 활동하셔도 알게 되시겠지만, 정말, 정말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이죠?”

“대부분 난민 문제입니다. 원래 1천만 명이 살던 도시에 6천만 명이 모여들었으니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하겠지만요.”

한국도 난민 문제가 심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의 난민 이슈는 정치적 문제였다.

난민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차별, 난민 거주지의 치안 약화, 총기 미반납, 양극화, 게이트 사태 이전 난민들의 재산을 복원해달라는 사안에 대한 논쟁, 이 정도였다.

그러나 자카르타의 난민 이슈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밥과 집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해본 자카르타 시정부는 최후의 대책을 내놓았다.

“자카르타 시정부에서는 이미 난민들의 숫자를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식량 문제와 거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요.”

“……뭐라고요?”

“도시의 외곽을 따라 세워진 난민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살인, 강도, 식인, 성범죄, 인신매매, 조직범죄…….”

“그게 말이 되나요? 정부는 뭘 하고 있고요?”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는 보르네오 섬 누산타라에 있습니다. 여기서 1,400km 떨어진 곳이죠. 물론 거기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다만 중앙정부가 이곳을 돕지 않는 진짜 이유는 아까 만나신 요사팟 시장이 본인이야말로 적법한 인도네시아의 국가원수라고 주장하는 까닭이겠지만요.”

동대문 캠프를 이끌며 살인까지 불사한 난민지도자였던 설진운의 지론이 오늘도 적중했다. 괴수보다 사람이 더 무서웠다. 게이트와 헌터의 시대에도 지옥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애석하게도 S급 헌터는 사람이 아니라 괴수를 베는 직업이었다. 설진운은 일단 가장 잘하는 일부터 하기로 했다.

“그래서 괴수는 어딨죠?”

* * *

보고르 시 일대에 알을 까고 도시를 침식하던 거미 군체의 무리어미가 목이 달아났다.

자카르타 남부지구 난민촌의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슬럼에 똬리를 튼 도마뱀이 도륙났다.

자바 섬 정글 최심부에 열려 있던 7개의 B급 게이트와 4개의 A급 게이트가 폐문됐다.

그리고 자카르타 만에 상륙해 도시로 올라오려던 수생거북형 해양괴수가 참격에 맞고 반으로 갈라져 죽는 순간…….

설진운은 자카르타의 수호신으로 등극했다.

“쏘드마스터어어어! 젠자아앙!”

“여기 평생 살아줘! 내가 뭐든지 할게!”

“제발 돌아가지 마! 제발!”

설진운이 탄 차가 지나갈 때마다 광기에 가까운 군중들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일제히 소드마스터를 외치며 차량에 달려들었다.

경찰들이 몽둥이로 군중들을 마구 후려쳤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난민들이 겪고 있는 감정은 신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물론 괴수를 잡는다고 허공에서 쌀이 생기거나, 부패한 관료가 회개하고 난민을 위해 일하지는 않는다.

자카르타 인근의 고등급 게이트가 전부 닫히면서 괴수의 위협이 상당히 줄어들긴 했지만, 난민들의 일상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설진운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 괴수가 전부 사라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그렇게 설진운은 자카르타의 영웅이 됐다.

“…….”

얼마 전까지 캄보디아의 영웅이었고, 싱가폴의 영웅이었고, 팔렘방의 영웅이었고, 이제는 자카르타의 영웅이 된 설진운은 차에서 조용히 눈을 붙이고 있었다.

“잘 자네.”

“그러게.”

그 옆에는 매튜와 애쉴리가 있었다. 그들은 지난 몇 주 동안 설진운과 함께했다.

그리고 설진운이 획득한 마석을 전부 흡수하며 강해졌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이곳을 지킬 수 있도록.

자신이 얻은 마석을 현지 헌터들에게 흡수시키는 건 설진운에게 주어진 수많은 명예 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자카르타의 모든 헌터들이 설진운과 함께하기를 청했지만, 설진운은 난민들의 오물이 섞인 진창을 누비며 가장 낮은 곳에서 싸우고 있었던 두 명의 헌터를 선택했다.

조금씩 흔들리는 캠핑카에서 설진운은 칼을 껴안고 쪽잠을 자고 있었고, 애쉴리와 매튜는 그런 설진운을 구경하며 소곤거렸다.

“암만 봐도 역시 S급 헌터 치고는 너무 어리단 말이지.”

“얼마 전까지 고등학생이었다잖아.”

“학도병이라니. 진이 한국 사람이었던가? 좆같은 빨갱이 새끼들…….”

“농담이지?”

“당연히 농담이지.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응우옌이나 찾는 머저리로 보여?”

매튜는 애쉴리의 욕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설진운을 관찰했다.

헌터용 코트 차림의 설진운은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소년에 가까웠다.

얼굴에 자잘한 흉터가 조금 있었지만, 조금만 손 보면 미국 하이틴 드라마에 주인공의 베스트 프렌즈인 동양인 1로 출연시켜도 괜찮을 정도였다.

매튜 본인이 헌터가 되기 전에는 드라마판에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 있는 평가다.

매튜가 잠든 설진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애쉴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매튜의 옆구리를 툭 쳤다.

“뭐야? 반했어?”

“아니. 드라마에 내보내면 어떨까 싶어서.”

“직업병이란.”

매튜는 루이지애나 사람이었고, 설진운은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주입식 영어교육을 10년 넘게 받은 덕은 아니고, 그냥 외국에서 자주 구르다 보니 말문이 트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칼을 껴안고 잠들어있던 설진운이 눈을 번쩍 뜨며 대답하자 그를 구경하던 두 헌터가 깜짝 놀라 흠칫했다.

이내 매튜가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아뇨, 방금은 1차로 마스크 정도만 통과한 거고, 이제 2차로 연기력이랑 발성을 봐야죠. 드라마 출연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애쉴리도 거들었다.

“자는 척하면서 계속 엿듣고 있던 거에요? S급 헌터 치고는 은근히 취미가 요상한데…….”

설진운이 두 사람의 협공에 힘없이 웃었다.

“S급 헌터는 무슨 취미를 가져야 하죠?”

“공격적으로 한 말은 아녜요. 그냥 설진운 헌터가 다소…… 우리처럼 서민적이라서 농담 한 번 해봤어요. 제가 아는 S급들은 커다란 타워팰리스 꼭대기에서 와인잔을 손에 들고 파티장에서 정치인 후원 모금에 참여했거든요.”

“참 특이하네요. 제가 아는 S급 헌터는 치즈떡볶이에 삼각김밥 비벼 먹는 게 낙인데…….”

“톡- 복- 기?”

“한국 최고의 헌터가 3달러짜리 참치 마요네즈 샌드위치만 먹고 산다고 이해하세요.”

“그건 좀 괴짜같네요.”

“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핫!”

애쉴리가 해맑게 웃었고, 설진운도 한국 어딘가에 있을 화염술사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때 차가 멈춰서고, 캠핑카를 운전하던 미군 통역사 조나단 박이 호텔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고맙습니다. 조나단.”

“별말씀을요. 저는 이만 기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당분간 게이트 토벌 일정은 없으니 푹 쉬셔도 됩니다.”

설진운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경찰에게 막혀 다가오지 못하고 있던 난민들이 슈파스타를 마주친 팬들처럼 함성을 질렀다.

“자카르타의 영웅! 자바를 지켜줘요!”

“너 가면 우리 다 죽어! 너 없으면 우리 다 망해! 제발 여기서 평생 살아-!”

“요사팟 그 개새끼보다 네가 더 낫다! 설진운을 자카르타 시장으로! 설진운을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

“고마워요! 소드마스터! 힘내요!”

설진운을 반기는 건 난민들만이 아니었다. 지역 신문과 외신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기자들이 설진운의 입에 마이크를 들이댔다.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언제까지 자카르타에 머물 것인지, 다음 행선지는 어디인지, 요사팟 자카르타 시장과 어떤 관계인지, 팬들에게 해줄 말은 없는지…….

썩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

기자들이 귀찮아서가 아니다. 난민들의 환호성이 부담스러워서도 아니다. 들인 수고에 비해 너무 많은 보상을 받아서였다.

그들은 설진운을 영웅이라 부르지만 진짜 영웅은 이미 그들 곁에 있었다. 매튜와 애쉴리처럼 부와 명예를 버리고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영웅들이 이미 그들 곁에 있었다.

헌터만 영웅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라리아와 싸우는 의료진, 독재자의 제노사이드를 추적하는 언론인, 난민촌을 돌아다니며 이웃에게 빵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들 곁에 있었다. 어쩌면 게이트 사태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그러나 마지막에 박수를 받는 건 언제나 자신이었다. 단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설진운은 이럴 때마다 환호성을 훔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

설진운은 경찰에게 얻어맞으면서까지 한 발자국이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군중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괴수를 베고 또 베어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대체 언제까지 고행을 자처해야 할까? 세상의 모든 괴수가 사라질 때까지?

그가 떠나도 난민촌 외곽에선 소외된 자들이 비참하게 죽을 것이고, 구호물자는 부패한 관료의 주머니로 들어갈 터.

바뀌는 건 없다. 이 끔찍한 도시의 수명이 조금 더 연장됐을 뿐.

결국, 지난 몇 주간의 노력은 부패한 정치가의 권력 연장을 위해 부역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설진운이 칼집에 손을 올렸다.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을 베어야 할지 모르겠다.

난민을 방치한 자카르타 시장을 베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가 이 지옥 같은 도시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의 책임자라고 볼 수 있는가?

그는 난민들의 참상을 방치한 악마 같은 정치인인가? 아니면 끝까지 외국으로 도망치지 않고 도시를 지킨 애국자인가?

그를 베어버리고 나면 누가 자카르타를 이끌지? 방위군 사령관? PMC를 거느린 기업가? 난민 대표?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총독? 그들이 과연 지금 시장보다 더 나을까?

끊임없는 물음표가 설진운의 마음을 갉아먹었지만 설진운도 이제는 답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이런 고민도 이제는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그렇게 결국 조금씩 적응해 간다.

설진운이 카메라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귀가 멍해질 정도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 * *

샤워를 마친 설진운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매트가 출렁이며 몸을 감싸안았다.

물방울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창문 너머로 거센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희뿌연 물안개가 군데군데 빛이 들어온 빌딩 사이를 부유하며 도시의 불빛을 희미하게 어지럽힌다.

은은한 빗소리를 감상하며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도 있겠으나, 설진운은 쏟아지는 빗줄기만 보면 양동이를 바깥에 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괴수에게 잠식당한 서울의 한복판에서 생존자 캠프를 꾸려본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식량은 목숨을 걸고 구해야 하는 자원이었다.

그러니 비가 내리면 동대문역 인근 고등학교에 숨어 살던 모든 사람이 분주해졌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규칙도 존재했다.

일단 모든 인원이 박박 닦은 대걸레 바구니부터 플라스틱 필통까지 물을 받을 수 있는 모든 물건을 바깥에 걸어놓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최대한 숨죽여 샤워를 한다.

경비를 맡은 인원은 교문과 뒷문, 담벼락을 예의주시하고, 남녀 거주구역을 오가는 사람이 없도록 철저하게…….

“똑! 똑! 안에 있어요? 진?”

입으로 내는 노크 소리에 추억을 되새기던 설진운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애쉴리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요?”

“로비에서 누가 찾아요.”

“네. 곧 내려갈게요.”

시정부가 헌터들을 위해 통째로 기증한 호텔 로비는 우아한 접객의 공간이 아니었다. 최전선 사령부에 가까웠다.

이곳저곳에 붕대나 아스피린 따위가 가득한 구호물품 박스가 널려 있고, 녹초가 된 의료진이 상자에 기대어 꾸벅꾸벅 쪽잠을 잤다.

비에 쫄딱 젖은 헌터들은 마석 분배를 두고 말다툼을 벌였으며, 유리 탁자에 지도를 펴고 작전을 계획하는 미군 장교도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인도네시아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다국적 PMC가 마석을 철저히 독점하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러나 현지인 헌터가 마석을 흡수하며 강해진다면 그 지역에 강력한 자경단이 생기고, 그러면 지역 정부가 외국 PMC를 고용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국적 거대기업이 세운 진입장벽 앞에서 약소국 헌터들은 조국의 국적을 포기하고 기업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정치인이나 범죄 조직 혹은 둘 다 겸하는 유력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로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서양인이었으며, 그 사이에 있는 한국인들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민호 씨?”

“어! 설 대장! 여기에요!”

자기 매니저들과 진지하게 대화하던 ‘태산’ 길드 이민호 대외사업부장은 설진운 앞에서 동대문 캠프 경비원으로 돌아왔다.

“이게 대체 얼마만이에요!”

“오랜만입니다, 민호 씨.”

“아차! 내 정신 좀 봐. 내가 대장님한테 인사도 안 올렸네! 인사도 안 올렸어! 충성! 근무 중 이상 무!”

“아, 아하하…….”

설진운이 다니던 고등학교 인근 고시원에서 자살을 고민하고 있던 공시생은 동대문 캠프에 구출된 이후, 어정쩡한 유머센스와 뜬금없는 호들갑으로 모두의 빈축을 사곤 했다.

그러나 무거운 책임감으로 일행의 전위를 지켰다. 부러뜨린 대걸레로 괴수의 앞을 막아서던 공시생은 여전히 순수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설진운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 * *

자카르타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는 한쪽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다. 이민호가 비 내리는 회색 도시를 바라보며 한탄했다.

“이야, 이 동네는 비가 진짜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네요. 동대문에서 버틸 때 비가 이렇게 내렸으면 물 걱정은 없었겠는데…….”

“저도 아까 그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 역시 여전하시네요. 그때도 못난 어른들 먹을 거, 마실 거 챙겨준다고 엄청 고생해 놓고 아직까지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그러게요. 아직도 마음은 거기 갇혀 있는 거 같아요. 밤마다 사방에서 괴수들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고등학교에…….”

이민호가 내심 연모하던 국어교사가 마지막까지 학생들을 대피시키다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을 뒤늦게 기억한 설진운이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자카르타에서 볼 줄은 몰랐네요. 언제 여기까지 오신 거죠?”

“하하! 저는 원래 여기 쭉 있었습니다. 설 대장님이 여기로 오신 거죠.”

“네? 그러면 진작 연락이라도 하시지…….”

“그게, 자바 섬에 오셨다는 뉴스를 듣고 미군한테 물어봤는데 워낙 신출귀몰하게 돌아다니신다고 해서 방해하기가 좀 그랬습니다. 회사 일도 너무 바빴고요. 진짜예요!”

설진운이 모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알았어요. 민호 씨 말이니까 믿어드릴게요. 회사 일이 급하면 저 따위는 까먹을 수도 있죠.”

“아! 진짜! 제가 어떻게 우리 설 대장을 버립니까! 옛날에 제가 편의점에서 재채기했다가 주변 괴수들 전부 몰려왔을 때만 해도…….”

그들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한쪽이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으므로 설진운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이게, 동남아는 중국 애들이랑 우리나라가 꽉 잡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서양 애들이 옛날에 여기를 식민지배한 적이 있으니까, 지역 정부가 민심을 고려해서 아시아 헌터들을 더 선호하거든요. 우리 나와바리라 이거죠.”

“그렇다기엔 자카르타에서 한국인 헌터들을 별로 못 봤는데요.”

“아, 아하하하……. 좀 부끄러운 이야긴데, 사실 여기가 기피 구역이에요. 면적에 비해 괴수가 너무 적은 데다, 난민들도 너무 많아서 잘 안 가려고 하더라고요.”

“기피 구역이라…….”

”그렇잖아요. 날씨도 별로고 치안도 안 좋고, 심지어 소형 괴수 한 마리 잡으려고 난민촌을 몇 시간 동안 뒤적거려야 하는데 누가 선뜻 나서겠어요? 사실 회사 차원에서도 채산성이 떨어져서 파견을 잘 안 보내죠.”

“그럼 대체 어디 있다는 건가요? 아, 죄송합니다. 너무 추궁하는 말투였네요.”

“아닙니다! 아니! 우리 설 대장이 저한테 그렇게 불편해하고 그러시면 오히려 제가 섭섭하죠! 그 비좁은 고시원에 갇혀서 벌벌 떨고 있는데 우리 대장님이 영화처럼 딱! 나타나서 같이 가자고 그랬을 때, 이 이민호, 평생 충성을…”

“그래서 한국인 헌터들이 어디서 활동을 한다고요?”

“아, 그렇지. 보통 게이트가 포함된 지역에 방위계약을 체결하고 주둔하면서 주기적으로 게이트 내부를 싹 청소합니다. 알짜 지역에만 박아 놓는 거죠. 사실 게이트 바깥에 있는 괴수는 부수입이고, 게이트 내부에서 캐는 마석이 주수입이에요. 어휴, 게이트마다 공략팀 하나씩 박아놓고 마석 우다다다 벌어 오는 게 참 노다지였는데…….”

그는 말하다가 잠시 뜸을 들였다.

“쩝, 이제는 좋은 시절 다 갔네요.”

“무슨 일인데요?”

“사실 이제 자카르타를 떠나게 돼서 인사라도 하려고 찾아온 겁니다. 본사에서 귀국 명령이 떨어졌어요. 갑자기 왜 사업장 접고 돌아오라는 건지 이유도 말을 안 해주고…… 그냥 닥치고 귀국하래요.”

이민호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주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건 비밀인데…….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에요. 동남아에서 한국인 헌터들 싹 다 빠진대요. 뉴기니 애들도 귀국 중이고, 말레이시아랑 태국 애들도 전부 본사에서 귀국 명령 받았어요. 이미 3대 길드가 다 빠졌는데 우리처럼 자잘한 길드가 어떻게 여기서 살아남아요? 지금 헌터들 난리 났어요. 밥줄 끊겼다고.”

“그게 대체 무슨……?”

“들리는 소문에는 높으신 분들이 결정했다나 뭐라나……. 어디 가서 말하지 마요. 이거 고급 정보니까.”

설진운은 고급 정보고 나발이고 귀에 안 들어왔다. 망치로 정수리를 맞은 기분이다.

동남아시아는 중국과 한국 헌터들이 대략 반반 정도로 방위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한국이 전부 빠진다면?

그곳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괴수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지 모른다.

이제 누가 힘없는 주민들을 지키지?

정치인? 그들은 사병을 거느린 지역 토호다.

관료? 그들은 정치인의 일가친척이다.

군인? 그들은 대통령을 꿈꾸는 군벌이다.

헌터 길드? 그들은 마석을 본국으로 보내며 지역 헌터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자경단이 커지면 PMC를 고용할 이유가 없으니까!

자경단? 헌터 길드가 마석을 독점하는 바람에 얼치기 각성자가 대다수다. 대형 괴수 한 마리만 출몰해도 전부 쓸려나갈 것이다.

“하아…….”

설진운은 짙은 무력감을 느꼈다. 괴수를 베고, 또 베었지만, 정치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동남아시아의 영웅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지금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 뿐이라서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설진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는 정치의 영역이었다.

아마 괴수 백 마리를 잡는 것보다 정치인 한 명을 설득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특히 한쪽 다리가 없는 정치인을 말이다.

고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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