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57화 (257/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57화

EP 40-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3)

“청와대 이미숙 민정수석에 대한 공세를 멈추자고요?”

“여기서 더 해봤자 몸집만 불려주는 게 아닌가 싶네요. 물론 제 생각만은 아닙니다.”

“흐음.”

국민당 당대표 청중엽은 이호정 원내대표의 말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물론 못 알아들은 건 아니다. 한승문 시장과 원옥분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이거겠지. 이제부터 청중엽 너 혼자 지랄발광해 봤자 지원사격 안 할 거라고.

“뭐, 일단 알았어요.”

“네. 그럼…….”

이호정 원내대표는 ‘안녕히 계시라’는 말도 안 하고 당대표실에서 휙 나가버렸다.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금세 사라졌다.

청중엽은 혀를 쯧 차고서 대표실 가죽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고 계산기를 두들겼다.

‘여기서 멈추면 조금 약한데…….’

‘자연인 청중엽’은 청중엽의 소유지만, ‘정치인 청중엽’은 일종의 주식회사처럼 수많은 재벌들이 조금씩 나눠 가진 형태였다.

청중엽은 ‘주식회사 청중엽’의 CEO로서 투자자들을 만족시킬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제주도의 재벌들이 원하는 건 GS 그룹을 산산조각내고 나눠 가지는 것.

하지만 청와대 민정수석의 기획이 실패한 이상, 이제는 손절하고 물러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판을 흔든다면?

이미숙 민정수석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서 ‘청와대 GS 그룹 하명수사’ 사건을 이번 총선의 핵심 이슈로 몰고 간다면.

GS 그룹 주가를 바닥에 처박고, 무엇보다 국민당이 총선에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총선을 승리로 이끈 당대표가 되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유재경을 누르고 대권을 잡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까?

판단을 마친 청중엽 당대표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호방한 웃음소리.

“하하! 아이고, 박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이번에 상심이 크셨겠어요.”

[어어……. 대표님. 어인 일로…….]

“하하……. 별건 아니고 이미숙 민정수석한테 자금 전달한 친구가 누군가 해서요.”

[우리 그룹에서 하긴 했는데……. 써먹게요?]

“대관담당자야 커트하면 되는 거 아녜요?”

[아…… 원옥분 대통령 독한 인간인데…….]

“어차피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은 부품 같은 거라서 사고 터지면 한 번씩 갈아줘야 합니다. 우리가 그래도 야당인데 가끔 한 명씩 갈아주고 그래야 나라가 매끄럽게 굴러가죠. 박 회장님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쇼.”

[아니, 뭐, 대표님이 저한테 이해까지 시킬 필요는 없고요. 자료는 조만간 보내겠습니다.]

“하하! 좋습니다! 좋아요……. GS 일 정리하면 홀이나 한 번 도실까요?”

[요즘 팔꿈치가 좀 아프긴 한데……. 대표님이 부르시면 가야죠. 오랜만에 노인네들 모시고 바람이나 한번 쐬십시다.]

“하핫! 그래요. 알겠습니다.”

청중엽은 언제나처럼 호방하게 웃으면서 핸드폰을 툭 내려놓았다.

그러나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어느 순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박 회장…… 너무 건방져졌어.’

박 회장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이대로 이미숙 민정수석에 대한 공세를 계속한다면 전면전이 벌어질 공산이 컸다.

하지만 괜찮다. 청와대는 청중엽을 찍어서 보내버리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청중엽이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안다.

아마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조종사에게 칼을 쑤시겠지.

하지만 거기서부터는 알 바 아니다. 박 회장이 감옥에 들어간다고 해도 다른 재벌들은 눈꼽만큼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GS그룹을 빼앗는 데 실패했다면……. 박 회장이라도 토막 내서 던져 줘야 제주도의 상어떼가 배를 불리지 않겠는가?

청중엽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 째깍째깍 움직이는 부산 도심의 풍경이 보였다. 차는 도로에, 사람은 인도에, 그리고 청중엽은 드높은 마천루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나라는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관과 민정수석이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부품이라면, 재벌 또한 부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기계와도 같은 도시를 내려다보던 청중엽은 언제나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언젠가 꼭두각시 신세에서 벗어날 날만을 꿈꾸며.

* * *

이미숙 민정수석이 천금순을 잡기 위해 움직인 건 제주도 재벌들의 의뢰를 받고 움직인 거였지만, 실패한 이상 제주도의 재벌들이 조만간 사라질 민정수석 따위를 신경 써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폐품이 된 민정수석을 재활용해서 GS 그룹 주식을 떨구면 좋은 일이다. 그만큼 많이 주워 담을 수 있으니까. 아니면 이 정보로 선물옵션을 걸던가.

재벌들은 이미숙 민정수석이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를 청중엽에게 보냈다. 본인들이 준 뇌물이었으니 자료는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청중엽 당대표는 이미숙 민정수석에게 들어간 정치자금을 폭로했고, 대관담당자 몇 명이 검찰에 들어감과 동시에 이미숙 민정수석 또한 조사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미숙 민정수석의 조사를 맡은 검사는 그녀보다 한참 후배인 새끼 검사였다.

검찰 지도부에서 이미숙을 잡아 조질 의사가 없다고 표시하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검찰조사는 검찰조사다.

이미숙 민정수석은 이제 총선 출마가 불가능해진 건 물론이고, 전 국민에게 얼굴이 팔리며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뇌물을 받은 정치인으로 말이다.

“이 후레자식들 같으니……!”

뇌물을 받은 사람은 조리돌림당하지만 뇌물을 준 사람은 그걸 신고하고서 정의의 편인 양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있다.

이미숙이 천금순을 잡아넣으려고 했던 건 따지고 보면 재벌의 사주를 받은 거였다.

그런데 실패하자마자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이미숙의 원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장 화병으로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숙은 검찰 물을 수십 년 단위로 먹은 사람이다. 바위에게 싸움을 건 계란이 얼마나 처절하게 몰락하는지는 잘 알았다.

설령 화병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재벌에게 개기면 안 된다. 자식들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숙 민정수석은 참아도 원옥분 대통령은 참지 못했다.

“이 새끼들이 아주 기본적인 도리도 엿 바꿔 먹었구만!”

“각하……! 고정하십시오……!”

“정신 똑바로 박힌 인간들은 서울에서 전부 뒈지고 어디 병신 같은 것들이 재벌이랍시고 꺼드럭거리고 있으니 꼬라지가 그 모양이지!”

대통령의 폭풍 같은 패드립이 지하벙커 청와대에 작렬했다. 반쯤은 진짜 분노였고, 반쯤은 계산된 분노였다.

원옥분의 최측근 중 최측근인 이미숙이 이렇게 처절하게 몰락하면 아무도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애들 싸움은 어른 싸움이 되었다. 원옥분은 공직사회와 재계의 기강을 잡기 위해 칼을 뽑아 들었다.

“청중엽이랑 가장 친한 놈이 누구야.”

“그게…… 박 회장이라고…….”

* * *

제주지검 검사들이 출동해서 청중엽의 대표적인 후원자, 박 회장을 긴급체포할 즈음.

모든 사태의 원흉인 GS 그룹 천 사장은 부산 그룹 본사의 지하벙커에 마련된 사장실에서 벽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벽을 보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벽면을 모니터가 가득 채우고 있었고, 모니터에 주가 그래프가 표시되고 있었으니까.

“뭔가 이상한데……?”

자꾸 GS 방위대행사 주가가 비정상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분명히 한승문이 대통령과 담판을 지었는데도 주가가 떨어진다는 건, 외부 세력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다는 뜻.

누굴까? 천금순의 머리에서 자신에게 원한을 품었을 법한 여러 사람의 이름이 스쳤다. 다만, 너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녀가 회사를 뺏은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 가끔은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선택한 길이니 악으로 버텨야지 어쩌겠는가. 적어도 회삿일 때문에 팔려가듯 결혼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근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 정략혼 상대가 한승문이었는데……. 그땐 지금에 비하면 권력도 거의 없었으니까 완전히 저점에서 매수하려던 거였다.

어쩌면 아버지와 오빠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던 게 아닐까?

오랜만에 가족들 생각이 난 천금순이 경호팀장을 호출했다.

“유 팀장?”

비정상적으로 덩치가 거대한 양복쟁이가 사장실 문으로 들어오려다가 천장에 머리를 한 번 박고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네,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 아버지랑 오빠들은 잘 지내요?”

“요즘 자꾸 탈출하시려고 하는데 저번에는 거의 성공하실 뻔했습니다.”

“이런…… 자기가 좀 분발해 줘요. 내가 지금 가족들까지 신경 쓸 형편이 아니라서…….”

“네. 맡겨 주십시오.”

천 사장의 아버지와 오빠들은 제주도 별장에서 ‘요양’ 중이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보고를 보니 완전히 쾌유하기까지는 아직도 오랜 시간이 남은 것 같다.

하나 그들의 육신은 별장에 있었지만, 그들의 비자금은 여전히 어딘가에 숨어 호시탐탐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얼마나 꼭꼭 숨겨놨는지 천 사장이 몇 년째 찾아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요즘 별장에 드나드는 사람 없어요?”

“비데가 망가져서 수리기사가 한 번 다녀갔습니다만, 대화 내용도 특이사항 없었고,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몸수색도 철저하게 진행했습니다. 다시 잡아올까요?”

“아뇨. 그럴 필요까진 없어요. 근데 안에서 무슨 지시나 부탁을 받았을 수도 있으니까 별장에 들어갔던 기억은 싹 지워버려요.”

경호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 사장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렸다.

“아, 그리고 앞으로 똥은 휴지로 닦으라고 그래요. 비데 기사인지 뭔지 들어갈 건수를 주지 말라구요…….”

“조치하겠습니다.”

“으음. 별 미친 세상이니까 투명인간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입구에 열 감지 카메라가 있습니다만…….”

“미국에서 마력 감지 카메라가 개발됐다고 하던데 쓸만해 보이던걸요? 그거 사서 본사랑 별장이랑 우리 집에 달아요…….”

“사장님 댁에도 말입니까?!”

“어떤 미친 초능력자가 저를 토막살인하고서 저로 변신해서 그룹을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녜요? 자기는 혹시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닙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24시간 모니터링하겠습니다!”

“감시 인원은 동시에 교대하지 말고 1명씩 순차적으로 교대할 수 있게 일정을 짜세요. 야근수당도 잘 챙겨주고요. 안 챙겨주는 건 쪼끔……. 갑질 같으니까.”

천 사장은 손을 휘적거려 경호팀장을 내보내고는 이번엔 비서실장을 호출했다.

천목그룹 시절부터 천 사장에게 충성하던 비서실장이 후다닥 사장실에 달려왔다.

폐활량이 떨어지는 나이라 그런지 살짝 헐떡이고 있었다.

“박 실장?”

“예……!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이거요.”

천 사장이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모니터가 있었고, 모니터는 주식 시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주식 시장에서는 여전히 적대세력이 GS 방위대행사 주가를 최대한 떨구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었다.

GS그룹 비서실장이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분명 한승문 서울시장이랑 원옥분 대통령이 합의를 봤다고 들었는데요……. 무차입은 당연히 막혔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그만큼 현찰이 많은가 보죠. 자기는 어떻게 생각해요? 아빠 비자금인 거 같아요? 아니면 외국 돈?”

“회장님 비자금을 제가 관리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현금 형태는 아니었습니다. 증권가로 움직였다면 그룹에서 미리 알았을 겁니다.”

“우리 그룹이 무능했다면요?”

“제 목을 걸고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목을 걸고 ‘단언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아니면 ‘단언하겠다’는 거예요?”

“당연히 단언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저도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데 목을 덜컥덜컥 걸어버리다 실직하면 애들 등록금은 조상님이 내주신답니까?”

“그건 그렇죠……. 조상님은 경제활동이 불가능하죠.”

천 사장과 비서실장은 서로를 바라보며 낄낄 웃었다. 가족들도 오지 않은 천 사장의 초등학교 졸업식 때 유일하게 왔던 게 당시 운전기사였던 비서실장이니 목을 걸고 농담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이럴 시간이 없다. 헤실거리던 천 사장이 정색했다.

“박 실장.”

“네. 사장님.”

“지금 피아식별 끝났어요?”

“숏포지션 잡은 곳은 대강 세 곳 정도 추렸습니다. 동조적 방관자는 아직 파악 중입니다만 굵직굵직한 회사는 전부 찾았고요.”

“걔네들 지금 사내유보금 없겠죠?”

“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러면 지금 가지고 있는 돈 전부 공매도 때리는 회사 주식에 쏟아부어요.”

“예?!”

“어차피 주가 방어에 올인해 봤자 3대 길드 해산 소식 올라가면 절대 못 막으니까…….”

“그렇지만 사장님. 그러면 미국에 짓고 있던 마천루는…….”

“팔아요.”

“미국 진출은 해외사업부에서 몇 년 동안 준비한 숙원인데…….”

“지금 본진이 털리고 있는데 미국에 신경이 써져요? 그러면 향상심만 있고 애사심이 없는 거지…….”

“아닙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수첩에 지시사항을 메모하던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런데 사장님. 이러다가 정말로 GS 방위대행사가 다른 기업에 넘어가면…….”

“그 전에 중국에 팔아버리면 되지요?”

“예?!”

비서실장이 머리를 붙잡고 휘청거렸다.

“아이고, 두야…….”

“미친 소리 같겠지만 다 계획이 있어요.”

물론 그러면 헌터들은 전부 떠날 것이다. 어차피 GS 아이기스 제품 25% 할인으로 끌어들인 헌터들이었으니 의리는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방위대행사에는 아직 동남아시아 곳곳을 일정 기간까지 방위해 준다는 계약서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건 중국이 자기 헌터들을 동남아 곳곳에 파견시킬 수 있는 명분이 될 수 있다. 아마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들이겠지.

하지만 동남아시아 미-중 대립에서 한국이 조용히 미국에게 붙었는데, 정작 한국 대기업이 중국에 회사를 팔면?

상황이 아주 복잡해진다.

다행히 청와대도 그걸 안다. 천금순이 노리는 건 그 지점이었다.

“회사 중국에 넘어가는 꼬라지 보기 싫으면 국민연금에서 막아야지 어쩌겠어요. 일단 해외 사모펀드가 GS 방위대행사를 인수합병하려고 한다고 보도자료부터 돌려요. 미운 놈 떡 주는데 명분이라도 우리가 만들어 드려야지…….”

“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하면 못할 게 없지요. 우리한테 공매도 건 놈들도 전부 동시에 공격하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밟아요. 사실 한 명만 먼저 박살내면 나머지가 백기 들 것 같긴 한데…….”

“그 부분은 저에게 혜안이 있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좋아요! 그나저나 민정라인에서 나 구치소에 집어넣으면 GS 아이기스에서 주총 열고 나 날려 버리려고 했다면서요?”

“예. 아주 질이 나쁜 인간들입니다. 사장님께서 그간 베푸신 은혜도 모르고…….”

“쁘락치는 전부 찾았고요?”

“물론입니다.”

“으응……. 알죠?”

비서실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 * *

제주도에 사는 GS 아이기스 이사들 일부가 며칠 실종되었다가 다시 나타나 횡령, 배임 혐의를 자수하며 경찰서에 들어갈 즈음.

오랜만에 제주도에서 휴양을 보내던 유재경 전 국무총리도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동네가 갑자기 왜 이렇게 흉흉하게…….”

옆집 살던 GS 아이기스 강 전무가 며칠 없어졌다가 절뚝거리면서 나타나더니 경찰서로 들어가 횡령 혐의를 자수하지를 않나…….

앞집 살던 심우그룹 박 회장이 집에 영장 들고 처들어온 검사들에게 붙잡혀 제주지검에 끌려가 구금되지를 않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비록 서울시장의 꿈은 토건재벌 돈 먹은 언론에게 저격당해 처참하게 박살나고 제주도에서 은인자중하던 중이었지만, 막상 한량으로 살아보니까 이 생활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제주도 한라산 둘레길을 산책하는 것도, 유재경이 떴다는 소식에 얼굴이라도 비춰보려고 등산복을 입고 뛰쳐나온 제주도 국회의원들이 굽신거리는 것도, 백화점에서 딸이랑 쇼핑하는데 재벌 3세가 몸소 찾아와서 VIP 라운지로 안내하는 것도, 호텔 연회장에 학교 선후배들을 모아놓고 와인 한 잔 마시며 즐거운 경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을 새우는 것도, 제주 헌터 아카데미 입학식에 연사로 초청되어 새내기 헌터들 앞에서 덕담하는 것도, 현직 기재부 장관이 찾아와 형님 저 요즘 미칠 것 같다고 엉엉 우는데 등을 두들겨 주는 것도,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마주친 토건 계열 재벌이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하는 것도, 국민당 청중엽 대표가 때때로 찾아와서 제발 우리 당으로 전향해 달라고 읍소하는 것도,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아는 사람을 전부 불렀더니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사람이 몰리는 것도, 집에서 놀고 있는 딸을 어느 으리으리한 집안이랑 이어주겠다고 사정하는 뚜쟁이들을 대쪽같이 내쫓는 것도, 약속 장소에 경차를 끌고 갔더니 호텔 경비직원이 ‘실례지만 선생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보길래 ‘전직 국무총리’라고 대답하는 것도, 딸이 운동 좀 하라고 보채서 헬스장을 끊었는데 그 이후 수상할 정도로 헬스장에 고관대작들의 가입신청이 몰리는 것도, 해외 굴지의 연구기관에서 경제 관련 자문을 이메일로 요청해오는 것도, 정치인들이 은근히 차기 대통령 취급을 하며 쩔쩔매는 것도, 국방당 당대표가 기자들 앞에서 유재경 전 총리님은 우리 당의 귀중한 보물이라며 띄워주는 것도, 시장에서 마주친 열성 지지자가 타코야끼를 공짜로 주는 것도, 어떤 행사에 참여하든 가장 먼저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듣는 것도, 너무 달콤했다.

그런데 이 행복한 일상이 무너진다니. 유재경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제주도 유력가들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숙청되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제주도 아닌가. 나라의 모든 부와 권력이 모여 있는 곳이 제주도인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원옥분 대통령이 재벌을 해체하고 국가주도성장을 밀어붙이려고 제주도를 휩쓰는 건가? 아니면 한승문 서울시장이 작정하고 마석재벌과 손잡고서 토건재벌을 갈가리 찢어버리려는 건가?

유재경이 서재에 앉아 린드버그 물소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식은땀을 흘리던 그때.

“아빠!”

사랑하는 딸, 유재영이 사태를 파악하고 달려왔다.

유재영은 아빠와 똑같은 모양의 안경을 치켜세우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한승문의 비서를 했던 경력 덕분에, 피채원에게 문자로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가 무슨 일인지 알아냈어요!”

“어서 말해보렴!”

“시작은 이화학 연구소에서 개발된 마석 정제기술이었는데…….”

원옥분과 미국의 빅딜, 3대 길드 해산, 그 틈에 GS를 노린 이미숙 민정수석의 음모, 민정수석을 날려버린 한승문 서울시장, 휴전을 어긴 청중엽 국민당 대표의 여야 강경 대치, 격노한 원옥분 대통령의 제주도 숙청…….

그간의 모든 사정을 전해들은 유재경이 떨리는 손으로 린드버그 물소뿔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놨다.

진짜 나라에 미친 새끼들만 있는 것 같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그는 멍한 얼굴로 한탄했다.

“국록을 먹는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소리지만……. 이 애비도 가끔 이 나라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나라 꼬라지가 말 같지도 않다는 말을 점잖게 돌려 말한 거였다.

정치 덕후인 유재영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냈다. 이 혼란 속에서 아버지가 어떤 묘책을 낼까 기대하면서.

본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정치 칼럼니스트 중 하나인 유재영의 머리에서 온갖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어떤 결단을 내릴까? 한승문과 연대해서 고립된 원옥분 대통령을 압박하고 국방당 당권을 가져올까?

청중엽과 협상해서 국민당으로 전향한 다음 공동선대위원장 자리를 약속받아 총선 승리를 이끌고 차기 대선에 출마할까?

아니면 세종시 난민운동권에게 손을 내밀어 국민당에서 대규모 탈당을 시전하게 만든 다음 충청도를 완전히 장악할까?

어쩌면…… 신당 창당? 제3의 길?

유재영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진중하게 침묵을 지키던 유재경이 결단을 내렸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예?”

“아무것도 안 할 거라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오랜 공직생활의 노하우였다. 유재경은 진짜로 아무것도 안 했다.

다음 주, 유재경은 차기 대통령 후보 선호도 조사 1등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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