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56화 (256/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56화

EP 40-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2)

[특정 기업인을 향한 표적수사를 암시하는 청와대 민정수석의 녹취록이 공개되었습니다. 국민당 지도부는 일제히 규탄성명을 내며…….]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이 불거지며 핵심 연루자인 이미숙 민정수석이 사임 의사를…….]

[표적수사의 당사자로 지목된 GS 그룹 천금순 사장이 오늘 오전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의견을 밝혔습니다. 천금순 사장은 눈물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억울하다는…….]

* * *

인재가 귀한 세상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 인사들은 헌신짝처럼 쫓겨나는 게 한국 정치판 규칙이었지만, 서울이 박살나고 끔찍한 인재난을 겪은 이후로 문화가 조금 바뀌었다.

따라서 양판석 정권의 인사들 또한 요직은 아닐지언정 청와대 이곳저곳에서 실무를 보고 있었고, 나는 양판석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청와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얻어걸렸네.”

뉴스에서 떠드는 녹취록의 원본이 담긴 USB가 내 손아귀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이내 안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청와대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가 매일 녹음기를 들고 다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내 지령을 전달받은 똘똘한 행정관 하나가 녹음기를 품고 다니다가 월척을 낚았다.

그 이후는 뻔하다.

행정관은 당연히 나한테 제보했고, 나는 예쁘게 포장해서 방송국에 쐈다. 솔직히 얻어걸린 느낌이었다. 민정수석이 너무 노골적으로 말했으니까.

“대체 왜 이걸 입으로 줄줄 말했지?”

“누가요. 민정수석이요?”

“이해가 안 되네…….”

스마트폰 녹음은 물론이고 안주머니에 고음질 녹음기, 그리고 넥타이핀 모양 소형 녹음기, 마지막으로 의족에 내장된 녹음기까지 항상 풀장착하고 다니는 녹음 매니아인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몇몇 지인들은 나더러 강박증이 있다고 비난하지만, 그건 ‘정알못’들의 변명일 뿐.

물론 운전할 때 무조건 양손을 핸들 위에 올려야 속이 편한 강박증이 진짜로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녹음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아마도.

“하여튼 대놓고 표적수사 하겠다고 선언했으니 자폭했다고 봐야지. 검찰을 하도 오래 해서 그런가 커먼센스가 부족하다니까.”

그러나 이번 녹취록으로 이미숙 민정수석이 정치적으로 사망한 건 아니었다.

아마 얼굴에 철판 깔고 원옥분의 충신을 자처하며 총선에 나올 것이고, 어쩌면 당선될 수도 있다. 이제 전국민이 그녀의 이름과 얼굴을 연결시킬 수 있을 테니까. 원래 선거는 인지도가 깡패다.

어차피 청와대 하명수사는 매년 서너 번 폭로되는 게 일상이었다. 밝혀지지 않은 하명수사는 셀 수도 없다.

거기다 대통령이 검찰 출신이라 중앙정부가 사정기관을 완벽히 장악했으니 대통령은 최강이고 청와대는 무적이었다.

뭐, 이미숙 민정수석을 완전히 고꾸라뜨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잽 정도는 될 것이다.

인터넷에 ‘하명수사’라는 불길한 단어가 도배된 순간 대통령 지지도 1~2%가 증발한 거였으니까.

어쨌든 이제 내 턴이 끝났으니 이제 저쪽 반응을 기다려야겠지. 협상이든 전쟁이든 상대할 준비는 되어 있다.

“이크.”

나는 낑낑대며 휠체어 바퀴를 밀었다. 국회에서 자빠지며 발에 깁스를 한 탓이다. 여분의 발이 없으니 영락없이 휠체어 신세다.

피채원이 쪼르르 달려와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지만 손을 휘저어 내쫓았다.

“화장실 가려구.”

“앗.”

장애인용 화장실에서 나는 생각했다. 권력이 역시 만능은 아니라고.

권력이 있어봤자 다리가 없으면 집에서 리모컨을 집기 위해 바닥을 기어 다녀야 하고.

권력이 있어봤자 인망이 없으면 누군가의 녹취록 한 방에 골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사람들로 가득했으니, 세상이 요지경이었다.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손을 씻고 복도로 나오니 지나가던 제2행정부시장이 휠체어를 밀어줬다.

“고맙습니다.”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권력에 관심이 많은 제1행정부시장과는 달리, 제2행정부시장은 비교적 말 없고 초탈한 인물이었다.

굳이 출신성분을 분석하자면 유재경이 꽂아준 건설 계열 모피아였는데, 권력이나 공직사회 친목질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빌딩 하나하나가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인 면이 있었다.

“아, 2부시장님. 그러고 보니 관악구 괴수 청소가 끝났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그렇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정관계에서는 대학교만 주목하지만, 관악구야말로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평야의 최남단이죠. 드디어 여기서부터 본격으로 삽을 뜨기 시작해서 강서구까지 쭉 밀고 올라갈 예정입니다. 사실 서울이 굉장히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라 건축학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게이트 사태라는 비극을 딛고서 아주 미래적인 형태의 메가시티로 다시 태어난다면 앞으로의 세대에게 초상사회의 건축이란 이런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 몇몇 비전문가들이 서울을 괴수들 사냥터로 쓰자는 무지한 의견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한승문 시장님께서 현혹되지 않고 현명하게 잘 풀어가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 그…… 넵.”

* * *

원옥분 대통령이나 국방당이 엿을 먹으면 한승문이 범인인 경우가 열 중 아홉이다. 참고로 나머지 하나는 괴수다.

이번에 터진 사고 또한 아쉽게도 괴수가 아니라 한승문의 소행이었다. 녹취록을 폭로한 청와대 행정관이 방긋방긋 웃으며 국민당의 품에 안긴 게 증거다.

“이건, 뭐, 숨길 생각도 없다 이거지.”

“죄송합니다…….”

원옥분 대통령의 한숨에 똑바로 서 있던 이미숙 민정수석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통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젊은 시절 사시미칼이 스치고 지나간 얼굴 반쪽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기괴한 웃음소리가 났다.

“허허, 뭐해? 얼차려라도 하게?”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누를 끼쳤습니다. 사적인 원한 때문에 잠시 눈이 멀었나 봅니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얘. 머리꽁지에 피도 안 마른 시다바리가 녹음기 들고 다니는 줄도 모르고…….”

“바로 사임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승문 서울시장에게는 개인적으로 방문해서 제 실수를 인정하고 정부에는 해가 가지 않도록-”

“됐어. 그놈한테 미숙이 니가 자존심 굽혀서 뭐해? 걔가 니 아들보다 한참 어린놈이야. 나는 그 꼴 못 본다.”

“각하……!”

원옥분 대통령이 넓은 책상 구석에 있는 약병에서 알약 두 개를 꺼내 삼켰다. 그리고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옛날 같았으면 애들 시켜서 개망신 주고 보내버렸겠는데…….”

만약 양판석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럴 수는 있구?’라고 약을 올렸을 것이었다.

원옥분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한숨이나 푹푹 내쉬면서 한탄했다.

“그래도…… 한승문이가 나라에 필요한 놈이기는 해.”

“허면…….”

“내가 그놈한테 뽀찌 좀 쥐여주고 설치지 말라고 할 테니까 니가 제주도 내려가서 다 정리해. 사실 이게 이렇게 될 상황이 아니잖아. 우리랑은 상관없이 제주도 애들이 천금순 잡아 조지겠다고 너한테 사주한 거 아니야. 너도 원한이 있으니까 콜한 거고. 내 말이 틀려?”

“맞습니다…….”

“그럼 그렇게 정리해.”

이미숙 민정수석이 송구스러운 티를 팍팍 내며 집무실에서 나가자, 원옥분 대통령이 늙은 몸을 의자에 뉘었다.

칼을 뽑았으면 단칼에 베던가. 어영부영 거리다가 발목 잡혀서 신세를 망치다니……. 아끼는 동생이라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일단 천금순만 체포해서 검찰 손에 잡아뒀으면 직접 나서서 사면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한승문과 협상해 줬을 텐데…….

하여튼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어휴…….”

대한민국은 대통령제 국가다. 그것도 명백한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다. 중앙정부에 사실상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원옥분은 제왕이 된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제왕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나라의 모든 일이 그녀의 책임이고 일거리였으니까.

특히 중앙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고뭉치가 몇 명 있었는데, 이 새끼들만 얌전히 살면 인생이 조금 편할 것 같다고 느끼는 원옥분이었다.

일단 양판석 전 대통령. 국방당 내부 민주당계는 물론이고 판사 출신임을 내세워 사법부와 끈끈한 유착관계를 자랑한다.

그리고 유재경 전 국무총리. 지금은 국방당 최고위원이지만 그를 추종하는 모피아는 전통적으로 기재부, 국세청, 공정위, 금감원, 금융위를 장악한 한국 최고 엘리트들이다.

청중엽 국민당 대표도 새로 떠오르는 사고뭉치다. 그의 본거지인 제주도가 재벌들이 우글거리는 마굴이 된 이후, 청중엽이 재벌의 대변인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헌터 사회를 장악한 게이트 전쟁영웅 한승문 서울시장.

이놈은 전과도 몇 번 있다. 차재균 계엄사령부에 들이박았고, 12인 국회에도 들이박았다.

그리고 들이받은 정권이 둘 다 무너졌으니 굳이 따지자면 프로 역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였던 원옥분 대통령은 이를 갈 기운도 없어서 무기력하게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한승문은 기이할 정도로 전화를 잽싸게 받는 버릇이 있었는데, 아마 보좌관 시절에 생긴 습관이 아닐까 싶었다.

“나요.”

[아, 네. 대통령님.]

“민주당 종자라 그런가 각하라는 호칭은 절대 안 쓰네?”

[에……. 민주당 종자는 맞습니다만 지금은 국방당 탈당하고 국민당 소속이니-]

“그때 합당한다 어쩐다 쇼하면서 나 엿먹였던 거 조금이라도 기억하면 그 얘기는 그만하지?”

[죄송합니다.]

그래도 죄송하다는 말은 하는군, 원옥분은 속으로 진절머리가 났지만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쯤 하고 끝내지. 민정수석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저지른 일이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녹취라도 할 것 같아? 나는 한다면 국정원 시켜서 도청을 하는 사람이야. 치졸하게 녹취 같은 거 안 한다고. 녹취는 한승문 시장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녹취지.”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저는 잘…….]

“3대 길드 해산은 절차대로 갈 거야. 미국이랑 이미 합의했으니까 이거 훼방 놓으면 자네 국가 반역이야. 명심해.”

[제가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은 안 합니다.]

“알아보니까, 이 수석이 GS 방위대행사 해산을 무대뽀로 밀어붙이다가 문제가 생긴 것으로 아는데, 천금순이가 자네한테 부탁했지? 둘이 무슨 사이인가? 뭐……. 젊은 애들 소위 말하는 썸이라도 타는 거야?”

[농담이 심하십니다. 대통령님.]

“내가 평소 아끼는 동생이 지금 병신 되가지고 좀 속상하니까 그러려니 해. 하여간 천금순이 지금 집행유예 걸려 있지? 그거 터지면 좀 오래 살아야 하고……. 내가 그거 날 잡아서 사면해 줄 테니까 방위대행사 정리하라 그래.”

[그래도 3대 길드 중 하나인데 사람 욕심에 그게 되겠습니까? GS 아이기스가 그래도 세계 최대의 헌팅디바이스 업체입니다. 근데 방위대행사 해산된다고 치면, 변변한 헌터 길드도 못 끼고 있는 헌터장비업체가 말이 됩니까?]

“군산분리법 그거 초안은 자네가 올린 거잖아. 그 취지를 한 시장 입으로 부정하면 어떡하나. 내가 그것까지 설명해야 해?”

[아뇨, 아뇨, 대통령님. 그런 말씀이 아니라…….]

“자꾸 뭐가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거야. 녹취 걱정한다고 몸 사리는 건 알겠는데 이건 예의가 아니지. 말 절지 말고 똑바로 말해.”

[제가 군산분리법을 국회에 던졌을 때는 장전읍 사태로 시끌시끌해졌던-]

“연막용 법안이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다?”

[후우……. 그럼 이렇게 하시죠. 3대 길드는 일단 해산시키고, 군산분리법에 한 번 더 손을 대셔서, 몇 달 있다가 총선 직전에 국방당에서 쏘게 하시지요. 그러면 국민당에서 원안 적당히 쳐낸 다음에 그대로 올리겠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데.”

[앞으로 산업자본이 보유할 수 있는 민간군사기업 주식은 10%에서 짜르시고…….]

“은산분리보다는 널널하네.”

[이게 핵심은 아니구요. 아무리 3대 길드 해산이 요식행위라지만, 대기업이 헌터를 직접 컨트롤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잖습니까.]

“그럼 대기업 보안팀에 A급 헌터가 우글거리는 상황이 정상인가? 직접 고용이 아니라 자회사인 보안회사 소속이라지만 그게 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

[예. 저도 어느 정도 혁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매니지먼트는 풀어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매니지먼트? 딴따라, 아니, 텔런트들 다니는 연예기획사 말하는 건가?”

[네. 헌터 길드를 대강 분류하면 3종류로 나뉩니다. 군대, 자경단, 연예기획사.]

생소한 이야기라 원옥분 대통령은 살짝 당혹했다. 가끔은 이렇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한승문 시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최고의 헌터 전문가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었으니 믿을 만했다.

[일단 군대처럼 운영하는 데는 기존 민간군사기업처럼 데스크에서 어딜 박살내달라거나 누굴 지켜달라는 의뢰를 받고 인력을 파견하는 식이고요, 자경단 스타일은 그냥 아는 헌터들끼리 모여서 주먹구구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뎁니다. 마지막으로 연예기획사 스타일은 헌터들 일정 관리하고 일감 잡아주는 에이전시나 매니지먼트 형태인데…….]

“…….”

[대기업이 군대나 자경단을 직접 보유하면 문제가 되지만, 매니지먼트는 어디까지나 헌터와 개별로 계약해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기업이지, 민간군사기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군산분리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그렇죠. 헌터들이 위약금만 내면 회사에서 나갈 수 있으니까 기업이 무력을 컨트롤하기 어렵고, 헌터들도 나름대로 최고의 서비스를 받으니까 좋죠. 이게 문민통제도 확실합니다. 헌터들이 직접 회사를 굴릴 순 없을 거 아니에요. CEO를 뽑아서 갖다 앉히지……. 그러면 또 장점이 있는 게 만약 정부에서 세무조사로 회사 박살내는 경우가 생기면 헌터들은 소속만 옮기면 장땡이니까 정부에 괜히 데모하지도 않을 거고…….]

“이거 머리가 좀 굴러가는구만.”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그런데 자네 친구가 운영하는 GS 방위대행사는 어떤 형태지?”

[매니지먼트입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어쨌든 이미숙 민정수석은 이제 노터치하는 걸로 알아듣겠어. 국민당 애들한테 적당히 하라고 말이나 해.”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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