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55화 (255/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55화

EP 40-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양판석 전 대통령은 본래 민주당 운동권 출신 인사로, 노태우 정권을 상대로 화염병을 던지며 정치권에 데뷔했다. 386의 늦깎이 성골 라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범죄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던 스타 검사 원옥분에게 체포되기도 했고, 수많은 시위와 가두행진을 기획하고 인권유린 규탄성명을 발표하며 명성을 쌓았다.

이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판사로 임용되었고, 후일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는 옛 동지였던 386을 본인 손으로 축출하며 유재광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이처럼 양판석의 정치 인생은 운동권과 깊게 연결되어 있고, 또 본인의 소탈한 면모(혹은 이미지 관리) 때문에 잘 부각되지 않았지만, 사실 양판석은 지방 토호였다.

평생 광주에서 정치를 했고, 항상 ‘광주의 아들’이라고 자랑하고 다녔지만, 그건 갓난아기 양판석이 울음을 터뜨린 산부인과가 광주에 있었을 뿐.

그는 언제나 자기 고향을 전라북도 전주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의 집안 또한 ‘수상할 정도로 일제강점기에 재산이 늘어난’ 전주의 토호 가문이었다.

따라서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양판석은 전주의 본가에서 휴식 중이었으며, 저택 또한 준재벌 수준인 그의 재산에 걸맞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한옥과 양옥이 반쯤 섞인 형태의 대저택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널찍한 방.

양판석 전 대통령은 편안한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소파에 반쯤 누워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어이구, 나라면 안 저러는데…….”

드라마 주인공은 미국 대통령이었는데, 살인과 협잡질을 밥 먹듯이 하는 개새끼였다. 항상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상이다.

그러나 양판석은 같은 직종 업계인으로서 뭔가 공감되는 부분이 있는지 자꾸 추임새를 넣으면서 드라마에 몰입했다.

“그렇지,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드라마를 보는 모습을 보면 나이가 무색했지만, 나는 어느새 삐쩍 말라버린 그의 팔뚝과 주름살을 보며 마음이 숙연해지곤 했다.

국가, 성별,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대통령의 숙명이 그렇듯,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양판석은 아주 많이 늙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흑채 뿌리고 부분가발 장착한 다음 방송국에서 분칠까지 하면 아슬아슬하게 중년으로 봐줄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하게 노년에 이른 것이다.

나는 관심도 없는 드라마보다는 양판석의 옆모습을 관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드라마 한 편이 끝나고 양판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쿠. 오늘은 여기까지 봐야겠어. 이러다가 온종일 드라마만 보다가 하루 보내게 생겼다니까.”

“자꾸 혼잣말이 튀어나오시는 걸 보면 드라마 중독입니다. 옛날처럼 요트 몰고 낚시는 안 가시렵니까?”

“어이고? 경제가 이 모양인데 전직 대통령이 요트를 몰고 나간다? 나이 먹고 노망들었다는 소리 듣기 딱 좋은 짓거리구먼.”

“아직 정무 감각이 날카로우시네요. 국회의원 한 번 더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에잉! 말 같은 소릴 해야 들어주지!”

양판석은 껄껄 웃으며 냉장고에서 제로칼로리 탄산음료를 꺼냈다. 그는 내게도 한 캔 건네주며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

“크으……! 그나저나 천금순이 그 친구를 도와주기로 했다고?”

“예. 당분간 그 일에 집중할 것 같네요.”

노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십 년간의 정치활동을 마무리한 이후로 유독 내게 관심이 많아진 그였다.

“잘됐구만. 자네 요즘 정치가 너무 심심하다며.”

“심심한 건 아니구요. 목적의식이 없어진 거죠. 조금만 삐끗하면 나라가 망하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왔는데…….”

“왔는데?”

“막상 평화로운 시절이 찾아오니까 제가 이제 뭘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좀 했습니다. 원옥분 대통령이 의외로 나라를 잘 운영하기도 하고요. 이제 제가 이 나라에서 할 역할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동력이 없어졌다?”

“예, 동력이 없어진 것 같네요. 딱히 정치를 계속할 이유를 못 느끼겠습니다.”

제로칼로리 캔음료를 홀짝이며 내 말을 경청하던 양판석 전 대통령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결혼을 안 해서 그래.”

“또, 또, 그 말씀…….”

“하긴……. 나도 자네처럼 그런 시절이 있었어. 정치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

양판석은 아련한 얼굴로 과거를 추억했다.

“나름대로 큰 뜻을 세워보겠다고 법봉을 놓고 출마해서 당선까지 됐는데……. 지역구가 광주다 보니까 본선보다 당내 경선이 더 치열하잖나? 그러니까 의정활동보다 잔대가리나 굴리는 일에 집중하게 되고, 그 와중에 다 큰 자식은 클럽에서 뽕이나 맞으면서 흔들어 제끼다 기절해서 간신히 수습하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나- 싶었지.”

그건 나도 아주 잘 안다. 클럽에서 약 빨면서 흔들어 제끼다가 기절한 양판석의 아들 양정석을 경찰 몰래 빼돌린 보좌관이 나니까.

그 사건 당시, 양판석의 얼굴은 분노보다 허탈함이 더 커 보였다. 의원실에서 심란한 얼굴로 담배를 얼마나 피워 대던지…….

“그때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결국 우리도 직장인이다 이거야. 어떤 특별한 종류의 직업이 아니라고. 정치를 어떤 거대한 무언가를 이뤄내고 성취하는 수단으로 보면 안 돼. 그냥 우린 이걸로 돈 버는 정치 자영업자고, 연예인이고, 월급쟁이고, 공무원이라니까? 그냥 자네 인생을 살아. 가족이 있으면 더 좋고.”

“그러면 스트레스를 덜 받나요?”

“아니. 돈 들어오는 것만 생각하면서 버티라 이거지. 그때 가족이 있으면 도움이 많이 돼. 내 경우를 보게. 호로새끼들이지만 자식들이 있었고, 우리 이쁜 손녀가 있었고, 그러니까 잘 버텨내지 않았나.”

“그, 그거 말고 다른 팁은 없습니까?”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지.”

“취미라! 그거 좋네요. 제가 등산을 좀 다니긴 하는데…….”

양판석이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단발적인 레저 활동 말고.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부업을 하란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감이 잘 안 오는데요…….”

“내 경우에는 사람을 키웠지. 어떤 절름발이 놈이 대뜸 지를 운전기사로 채용해 달라고 면접을 봤는데……. 아주 웃기는 놈이더라고.”

“어이고, 다리 장애인이 운전기사를 해요?”

“자기는 한쪽 다리는 의족이지만 교통사고 경험이 있어서 운전에 목숨을 걸 테니까 괜찮고, 또 요즘은 PC가 대세니까 장애인 하나 채용해서 SNS에 광 팔고 다니면 도움 될 거라고 지껄이지 뭔가?”

“아주 정신이 나간 놈이네요.”

“난 좀 재밌더라고. 그래서 비단잉어 키우는 기분으로 몇 년 데리고 다녔는데 나중에 국회의원 선거도 당선되고 그랬지.”

* * *

인기 많은 전직 대통령 집에 놀러가기, 기자들 앞에서 경제정책 비판하기, SNS로 여당 당대표 디스하기, 반정부 시민단체 집회 허가하기, 등등.

현직 대통령 배알 꼴리는 짓거리는 죄다 하고 다녔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다 못해 정무수석이 문자로 ‘한 시장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라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상하다…….”

말이 3대 길드 해산이지 사실상 청와대가 GS 그룹을 찍어서 조지려는 거다. 그런데 이런 무반응 무대응은 예상 밖이었다.

정치적 문법이라는 게 있다.

상식적으로, 재벌 그룹 하나를 수술하려면 몇 주 전부터 언론에서 슬슬 노동자 인권 문제, 노사 갈등, 재벌 개새끼론, 낙수효과 무용론을 펼치며 밑밥을 깔아야 한다.

그러다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결정적인 스캔들을 터뜨려서 압수수색으로 화려하게 조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민들은 시원하게 사이다를 터뜨리고, 재벌 회장은 비루한 모습으로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두한다.

물론 그 시점에 물밑 협상은 전부 끝났다.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다.

벌금은 대충 얼마고, 누구랑 누구는 감옥에서 몇 년 살고, 회장님은 1심에서 징역 받았다가 2심에서 집유로 풀려나고, 언론인 누구누구는 괘씸하니까 당분간 입 좀 닥치게 만들고…….

모든 수사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재벌을 조질 때는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한 법이었다.

재벌의 경제적 영향력과 로비 파워를 생각하면 후폭풍이 어마어마하기도 했고, 대한민국은 엄연한 신분제 국가라는 건 ‘상식’ 아닌가?

어쨌든 이 분야 최고 전문가가 검찰이고 원옥분은 검찰 출신 대통령이다.

하지만 언론은 잠잠했다. 이미 대통령 비서실장이 GS 그룹에 헌터 길드 해산하라고 최후통첩을 때린 것치고는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이건 결국 기습적으로 GS 그룹을 때려서 조지겠다는 소리가 된다. ‘니들은 짖어라. 나는 내 식대로 하겠다’ 이거다.

집권한 지 1년도 안 된 대통령이니 가능은 하겠지만, 재계의 암묵적인 방조가 없다면 불가능한 짓거리였다.

청와대가 재계와 손잡고 천금순과 GS 그룹을 조지려고 하다니…….

나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원 대통령이 원래 이렇게 막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 인간 스타일이 아니었다.

“몸통이 따로 있는 건가……?”

* * *

이미숙 민정수석이 지하벙커 청와대의 복도로 나가자 거의 모든 행정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는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행정관들 사이를 뚜벅뚜벅 걸었다.

모든 정권에는 실무자들을 월권에 가깝게 통솔하는 실세가 있고, 보통은 비서실장 아니면 민정수석이 파워피플이었다. 공식적 2인자인 국무총리는 대체로 허수아비다.

현 정권의 실세는 이미숙 민정수석이었다. 원옥분 대통령이 아끼는 검찰 후배인 그녀는 원 대통령이 사석에서 ‘얘. 미숙이 이리 와봐’라고 부르면 ‘네, 언니’라고 대답해도 될 정도로 대통령과 친분이 깊었다.

둘 다 여자는 재떨이나 들고 있으면 된다고 여겨지던 시절에 커리어를 시작해서, 아직까지 살아남아 권력의 핵심에서 버티고 있었으니 친분이 깊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친분은 원옥분이 대통령에 당선된 순간부터 고스란히 권력으로 변했다.

지하벙커 청와대에 상주하는 국정원장이 고개를 유연하게 숙이며 이미숙 민정수석에게 느슨하게나마 ‘보고’했다.

“어제 한승문 서울시장이랑 GS 천금순 회장이 만났답니다.”

“언제요?”

“새벽 1시 즈음에……. 생각해 보니까 그러면 어제가 아니라 오늘이네요.”

“뭐야. 둘이 정분이라도 났답니까?”

“단둘이 만난 건 아니고 정무부시장 감 씨랑 피채원이도 같이 있었다네요.”

“그 인간 측근들은 다 모였네. 홍선아 협회장이랑 여도연 치안관은요?”

“여도연 치안관은 지금 북한 쪽에 있는 걸로 알고, 홍선아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순간이동까지 쓰는 헌터를 우리 보고 어떻게 모니터링하라는 거예요? 목숨 걸고 위치추적기라도 붙여봐? 총선 직전에 민간인 사찰 터지면 나만 모가지 날아가는데…….”

“알았어요. 알았어. 하여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머리 굴리는 인간들만 데리고 모였으니까 또 흉악한 수를 쓰겠지.”

“그래요. 수고하십시오, 이 수석.”

“바쁜데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흐느적거리는 국정원장을 대충 쫓아 보내고, 이미숙 민정수석은 회의실에 민정수석실 행정관들을 집합시켰다.

행정관들은 서슬 퍼런 민정수석의 권위 앞에 단단히 긴장한 상태였다. 이미숙이 검찰 시절에 이미 굳은 고압적인 어투로 말했다.

“오늘 새벽에, GS 그룹 천금순 회장이 한승문 서울시장과 밀회했다. 이건 뭐, 우리랑 한 판 해보겠다는 거지? 안 그래요? 응?”

한승문의 예상과는 달리, 원옥분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서 아예 빠져 있었다. 이미숙 민정수석이 이번 기획의 브레인이다.

아오모리현 일대를 방위하는 중규모 헌터 길드로 위장한 국정원 요원들이 일본 이화학 연구소에서 신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첩보를 수집하며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 신기술을 놓치면 마석에너지 산업 전체가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원옥분 대통령은 외교부 장관은 물론이고 산업자원통상부 장관까지 비밀리에 출국시켰지만…….

관동 정부와 관서 야쿠자 세력의 불안한 동거를 깨고 전면적인 내전을 촉발시켜 일본 전역의 치안을 박살 낸 양판석 정부의 업보 때문에 당연히 신기술 입찰에 실패했다.

신기술을 미국에 팔아넘긴 일본 정부가 ‘제발 한국 마석에너지 산업 죽여주세요’라고 로비했지만, 이에 원옥분 대통령은 중국과 접촉해 [필리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분간 신경 끄겠다]고 선언.

중국은 당연히 국가안전부 헌터들을 움직여 필리핀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경악한 미국 정부는 한국에 손을 내밀어 신기술을 공유하는 대신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이 보호하던 지역들을 전부 넘기라고 제안.

원옥분 대통령이 여기에 응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이미숙 민정수석이 개입했다.

‘3대 길드를 해산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갑자기 뭔 소리야. 마석 잘 캐오는 애들을 왜 들쑤셔.’

‘각하. 이대로 재벌들이 무력까지 쥐고 있으면 전망이 안 좋습니다. 미국을 보십시오. 초기에 공권력이 헌터를 장악하는 데 실패해서 7대 길드니 뭐니 하는 초대형 PMC들이 백악관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적 드문 중부에서는 게이트 소유권을 놓고 기업끼리 전쟁도 벌인다고…….’

‘그래서.’

‘제 명의로 진행하겠습니다. 법제적 정당성은 이미 완벽합니다. 한승문 서울시장이 초상관리부 장관 시절에 군산분리법을 올렸고, 양판석 정권에서 이미 개정안이 통과됐으니…….’

‘그러니까, 누가 표적이냐고. 변죽만 올리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말해봐요. 내가 그 정도도 못 들어주는 사람이야?’

‘……사실, GS그룹 천금순이를 잡아넣으려고 합니다. 어차피 나머지 3대 길드는 우리가 밥그릇을 지켜줬으니 협상이 가능하고, 사실 직접 소유하지 않고서도 헌터 길드를 가지는 방법은 많지 않습니까.’

‘치적은 되겠네. 재벌이 어깨들 부리고 있다고 은근히 불안해하는 국민들도 달래주고. 근데 한승문 그 지독한 놈한테 서울까지 떼어주고 간신히 진정시켰는데, 천금순이가 한가 놈한테 달려가서 안 일러바친다는 보장은 있고?’

‘제 명의로 진행시키겠습니다.’

‘큰 거 한 방 때리고 사임한 다음에 총선 나가겠다는 소리를 참 당당하게 한다. 쯧. 정 그러면 나는 모르는 일이다.’

‘감사합니다.’

‘진행시켜.’

이미숙 민정수석이 원옥분 대통령에게 읍소하면서까지 천금순 사장을 감옥에 집어넣으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뒤를 봐주던 후원자 겸 형부의 회사가 게이트 사태로 휘청거릴 때, 천금순이 인수합병으로 회사를 훔쳐 간 것이다.

재계에서 이런 식으로 천금순에게 당한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천 사장에게 천목그룹 막내딸이라는 ‘혈통적 정당성’이 없었다면 진즉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를 보지는 않을지언정 천금순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그녀의 그룹을 갈기갈기 찢어 나눠 먹고 싶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오직 천금순 하나를 조지겠다는 수많은 이들의 염원이 이미숙 민정수석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행정관들에게 지시했다.

“원래는 헌터협회장 바꾸면서 스무스하게 진행하려고 했는데……. 한승문이가 대응하면 속전속결이 불가능해집니다. 이번 주말에 기습적으로 강제해산부터 때려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제주도 쪽이랑 얘기 끝났으니까 괜찮아요. GS그룹 하나만 노리는 거니까. 그리고 천금순이도 바로 영장 쳐서 집어넣어.”

“어떤 사안으로 말입니까?”

“노조 해산 묵혀둔 건수 하나 있잖아요. 요즘 제주도에 가둬둔 자기 애비랑 오래비랑도 한 따까리 했다고 들었는데 그거 파보면 아랫놈들끼리 피 좀 봤을걸? 근데 로얄패밀리들끼리 제주도에서 지지고 볶는 건 어지간하면 안 건드는 게 관행이니까…….”

“금융범죄로 넣으면 어떻겠습니까? 유권해석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러면 유재경 전 총리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 양반이 알아도 딱히 할 건 없겠지만 어지간하면 그쪽에 손 벌리진 말자고. 무슨 말인지 알지?”

“검찰 선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걸 굳이 입에 담지는 말고.”

“죄송합니다.”

이미숙 민정수석이 언제나처럼 못마땅한 눈치로 행정관들을 흘겼다. 평소에 하도 잡아댔더니 살짝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이미숙은 큰 건 앞두고 검찰 수사관들 격려하던 가락으로 행정관들에게 연설했다.

“뭐……. 여기 계신 분들 상당수가 율사 출신에다가 양식이 있으신 분들이니까 내 얄팍한 속내 정도는 금방 눈치채셨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고약한 아지매가 재벌 하나 갈아마시고서 총선 나가려고 환장했다고 생각하겠지요?”

“아닙니다! 수석님!”

“절대 아닙니다! 그게 무슨 황망한 말씀……!”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아요. 나 천금순이 수술하고서 사표 쓰고 출마할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자존심 적잖게 상한 것도 알고 있어요. 청중엽이는 용돈이라도 받았지 여러분들은 내 욕심 때문에 제주도 심부름하는 거잖아?”

충격요법으로 모두를 집중시킨 이미숙이 즉석연설을 이어갔다.

“근데 나도 검찰이고, 또 사람이에요. 정의감이라는 게 아주 없지는 않다고. 천금순이 그 금융범죄자는 이쯤에서 누가 제동을 걸 필요가 있어요. 그런 경제사범이 3대 길드 소유주랍시고 PMC를 들고 있으면 언젠가 아무도 통제 못 할 때가 올 겁니다. 그러면? 바로 미국 꼴 나는 거야. 재벌들이 헌터들 끼고서 공무원 좆으로 아는 꼬라지 보고 싶은 사람 있어요? 응? 우리가 미리 예방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요?”

“그렇습니다!”

“나 여기에 목숨 걸었어요. 실패하면 내가 전부 책임집니다. 각하도 여기에 대해서는 아예 몰라. 내가 몸통이에요. 그러니까 다들 조금만 더 힘내자고.”

이미숙 민정수석이 데스크를 탕탕 두드렸다.

“자! 자! 천금순 그 인간만 구치소에 묶어두면 끝나요. GS 방위대행사 해산 때리고 우호지분 붕 뜨면 GS 아이기스도 주총 열고 천금순이 완전히 날릴 거라고. 우리는 딱 법적인 절차대로 군산분리법 개정안에 의거해서 3대 길드를 해산하고, 천금순 사장을 합법적인 사유로 체포하면 됩니다. 그때부터는 재벌애들이 알아서 매타작을 할 거고……. 아시겠지요?”

그러나 검찰 물을 수십 년 단위로 먹은 청와대 민정수석의 혼을 담은 기획수사는 그날 저녁에 무너졌다.

지금 한승문이랑 친한 행정관 하나가 안주머니에서 녹음기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편집되어 뉴스 속보로 올라온 이 녹취록에는 이런 제목이 붙었다.

청와대 하명수사, 이미숙 게이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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