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54화 (254/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54화

EP 39-상실의 시대(4)

병실 벽면의 디지털 시계는 새벽 2시 37분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천 사장이 추가로 시킨 피자가 병원 입구에 도착했다는 문자에도 아무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천 사장만 긴장감 없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다. 그건 그녀가 야행성 인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온다.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지만 물 먹을 겨를도 없었다.

“일본에서 기술을 넘겨주지 않으면……. 우리 마석산업체가 전부 망하는 게 확실합니까?”

내 질문에 감 기자가 애타는 마음으로 덧붙였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지요! 고작 정제효율 8%가 뒤처진다고 회사가 파산하겠습니까?”

그러나 천 사장은 단호했다.

“아뇨. 망해요. 폭삭 망해요.”

“아니, 왜……?”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죠. 미국이랑 영국산 에너지배터리가 훨씬 저렴한데 왜 한국산 배터리를 쓰겠어요?”

감 기자가 손에 땀을 쥐며 반론했다.

“그러면 우리도 싸게 파는 대신 국가 예산으로 기업을 지원하면 되잖습니까!”

소용없다. 초상관리부 장관이었던 나는 이미 안다. 마석산업의 규모 자체가 어마어마할뿐더러, 국가 예산으로 마석산업을 지원하는 행위부터가 이미 하고 있는 짓이다.

이 상황에 마석 정제 효율이 깡으로 8% 늘어나고, 우리만 그 혜택을 못 받아서 뒤처진다? 한국의 양대 마석산업체인 삼성 사이오닉과 LG 이노베이션은 사업 접어야 한다.

그리고 두 회사가 망하면 2차 경제공황이 닥칠 것이다. 게이트 사태 이후 폭삭 망해 버린 경제를 간신히 회복했건만.

만약 일본에서 개발된 신기술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아아…….”

전기가 끊기며 회색 도시가 되어버린 부산, 일자리를 달라는 피켓을 목에 걸고 거리를 떠도는 실업자, 자동차에 넣을 에너지 배터리가 없어 텅 빈 도로, 뒷골목마다 골판지를 깔고 드러누운 홈리스, 반정부시위와 화염병, 최루탄,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폐지를 줍고 다니는 5살짜리 어린아이…….

이 모든 풍경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구국의 결단을 내릴 시간인가.

“홍선아 씨 데리고 도쿄에 가야겠네요.”

감 기자가 덥썩 내 팔을 붙잡았고, 피채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어, 시장님, 그러지 마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감 기자님? 제가 도쿄에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홍선아 씨를 데리고 간다고 그러셨잖습니까!”

“S급 헌터를 데리고 외교 현장에 가면 안 되는 겁니까? 제가 무슨 도쿄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지금 도쿄를 불태운다고 그러셨어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일 기술협력 차원에서 친선 도모만 하고 오겠습니다.”

“기술을 안 내놓으면 도쿄를 불태우겠다고 협박하는 건 미친 짓입니다!”

“저는 그럴 생각이 거의 없습니다.”

감 기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피채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채원에게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간절한 눈빛으로 물어봤다.

땀을 뻘뻘 흘리던 피채원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저지를 수도 있어요…….”

“아! 시장님! 제발!”

감 기자가 복장이 터져 소파에 드러눕고, 피채원이 다급히 여도연과 양판석에게 카톡을 보내던 그때, 이 개판을 구경하던 천 사장이 나긋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국은 이미 신기술을 확보했으니까…….”

“그걸 왜 이제 말씀하시는 거죠?”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 * *

한국이 일본에 파견한 협상단이 텅 빈 소회의실에서 종이컵에 찬물을 대접받고 벌컥벌컥 끓는 속을 식히던 시각.

미국의 대통령은 백악관에 참모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똑 부러진 목소리로 참모들에게 통보했다.

“마석 정제 기술을 확보했지만 어디까지 공유할지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자꾸 이런저런 말이 나도는 모양인데 나는 여기서 전략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자 막힌 둑이 뚫린 것처럼 참모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일본 돈을 먹은 사람은 일본 편을 들었고, 한국 돈을 먹은 사람은 한국 편을 들었다.

“당장 남한의 마석산업을 죽이고 세계 시장을 독점해야 합니다. 영국 마석산업은 반쯤 우리 소유니까 그렇다 쳐도, 남한이 마석에너지 분야에서 더 성장하면 위험합니다.”

“무슨 소립니까! 당연히 남한에 기술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우방국이 아닙니까? 동맹을 배신하면 국가 신뢰도에 치명타로 작용할 겁니다!”

“글쎄요. 남한의 ‘양’ 대통령은 북한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중국 국가안전부의 도움을 받았다는 정황이 확보되었습니다. 계획은 우리와 세워놓고 실행은 중국의 힘을 빌린 겁니다. 그런 자들을 우방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겁니다. 남한이 중국의 세력권에 편입되는 순간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 전체가 중국에게 잠식될 겁니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인 ‘원’은 과거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시절부터 친미 인사였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발생한 감염형 개체의 연구 자료를 우리에게 전달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은 노골적으로 기술을 미국과 영국에게만 판매했다. 한국 마석산업을 죽여달라는 뜻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이 회의는 단순히 ‘마석 산업 신기술을 한국에 공유해도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한국의 관계 정립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주제로 나아갔다.

“남한이 각성제 제조 기술을 독점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습니다. 슬슬 각성제를 우리 손으로 제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맙소사! 저들은 연준 같은 겁니다! 우리가 기술력이나 첩보력이 부족해서 각성제를 못 만드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러면 앞으로도 각성제가 필요하면 한국에게 요청해서 받아올 겁니까? 영원히? 그러다가 저들이 각성제 공급을 끊어버리면?”

“그럴 일은 없어요. 한국은 앞으로도 무조건 우리가 요청하는 수량만큼 각성제를 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각성제를 확보하는 게 가장 안정적이에요. 만약 일반인을 초능력자로 각성시킬 수 있는 약품을 우리 미합중국 정부가 직접 찍어낸다면……. 빌어먹을 초대형 PMC가 의원들에게 로비해서 무한대로 각성제를 받아낼 겁니다! 어쩌면 자기들이 직접 각성제를 생산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초능력자가 무한대로 늘어나고…… 저들의 병력도 무한대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요!”

“지금 자국의 기업인들을 반란분자로 취급하신 겁니까? 대통령님의 면전에서 시답잖은 음모론을 말하다니!”

“대기업이 무력을 소유하고 각지에서 할거하는 이 상황이 봉건제와 다를 게 뭡니까!”

“그걸 우리는 연방제. 혹은 지방자치라고 부릅니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라고도 하지요. 줄이면 U.S입니다.”

“저는 조금 거시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지요. 남한 남부 지역은 세계적으로 아주 드물게 게이트 사태로 피해를 받지 않은 도시권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금융의 허브이고, 명백히 친서방 민주주의 세력에 속해 있지요. 전 세계가 게이트 사태로 고통받는 와중에 그곳에 경제 위기를 일으키는 건 인류의 손실입니다.”

“그들에게 마석산업 신기술을 넘겨주지 않는 판단이 남한의 경제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시각은 동의합니다만, 우리가 경제위기를 일으켜서 한국을 박살낸다는 건 지나친 피해망상입니다. 한국 마석산업을 무너뜨려서 어느 정도 길을 들이는 대신, IMF 구제금융으로 경제회복을 도와주면 되는 일 아닙니까. 한국인들은 지난 1997년에도 구제금융의 긴급조치를 전향적으로 받아들이며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룬 바 있습니다. 이번에도 IMF가 구제금융을 제안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 회의실에 동석해있던 미국 대통령의 남편이 말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마시오. 내가 그때 대통령을 해봐서 아는데 한국인에게 IMF는 트라우마 수준입니다. 그 지랄을 하면 한국은 차라리 공산화를 선택하고 중화연방에 가입할 거요.”

“그 정도입니까?”

“알고서 지껄인 거면 재미없는 농담이었다고 대답할 거고, 정말 몰라서 지껄인 거면 사표 쓰고 나가라는 대답을 돌려주겠습니다.”

대통령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제가 감히 대통령 각하께 답변 드려도 되겠습니까?”

“장난치지 말고.”

“흐음. 유럽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을 저버리는 건 외교적 실책이지만, 한편으로는 3대 차세대 전략산업으로 꼽히는 헌터 산업, 헌팅 디바이스 산업, 마석 에너지 산업을 한국이 주도하고 있는 이 상황은 좀 부담스럽지.”

“장점과 단점이 각각 있다?”

“모든 일이 그렇지.”

“당신은 어느 쪽 장점이 더 크다고 보는데?”

“나는…… 이번 기회에 남한 힘을 좀 빼고 일본에 힘을 실어줘서, 동북아시아에서 두 나라가 미국의 신뢰를 더 얻기 위해 경쟁하는 그림을 만드는 것도 괜찮다고 봐. 그리고 나서 남한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북한에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면서 자연스럽게 한반도에 진출하는 거야.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착한 큰형님 행세를 하면서 국제사회의 긴장감을 낮추는 거지. 마침 중국은 집단지도체제로 변했고, 러시아는 분열됐잖아? UN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표를 던지지도 못할 거라고. 국제개발을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세계 경영의 주체를 UN으로 변경하면서 영향력을 퍼뜨리면, 저 빌어먹을 괴물딱지들을 지구에서 쫓아내고 세계정부 수립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너무 과도한 상상인데.”

“하지만 망상은 아니지. 이 시점이 아니면 인류 역사상 전 세계가 하나로 모일 날이 있을까? 지금 미국이 당면한 과제는 게이트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거야! 인류 공동의 적이 나타난 바로 이 순간에!”

“당신 임기는 한참 전에 끝났으니까 적당히 해.”

“미안. 여보.”

대통령은 쌀쌀맞게 대답했지만 내심 남편의 대답이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옛날에 비서하고 바람을 피긴 했지만 머리는 좋은 인간이었으니까.

“좋아요. 남한에는 신기술을 공유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했습니다. 이제부터 토라질 남한을 적당히 달래고 회유할 방안을 생각해 와요.”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백악관 참모들이 일제히 명을 받들기 위해 흩어졌으나, 대통령은 곧 그 결정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배후에 있는 쿠데타였다.

* * *

대한민국의 청와대는 이제 지하에 있다. 제2차 한국전쟁을 대비해 만들어진 이 벙커는 양판석 전 대통령의 개조와 보수를 거치며 더 완벽해졌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모니터에는 한국 전역의 전략지도가 표시되어 있고, 그 지도엔 자잘한 글씨로 각종 데이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최신 문물에 익숙하던 양판석 전 대통령의 색깔이 드러나는 택티컬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원옥분 대통령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전 대통령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니고, 깡패의 회칼에 베인 한쪽 눈이 멀어서 시력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칼자국 사이의 희뿌연 눈동자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원옥분이 짤막하게 말했다.

“저거 치워.”

“알겠습니다, 각하.”

대통령 비서실장이 칼같이 대답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원옥분은 그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다.

요즘은 권위주의 물을 뺀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병아리 색깔 옷을 입고 다니는 원옥분이었지만 그녀의 성격은 조금 마초적이었다.

원래부터 그런 건 아니고, 검찰에서 수십 년을 버티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원옥분이 비서실장에게 하문했다.

“결국 미국 애들이 신기술은 안 넘겨주기로 했대매?”

“예, 미국통인 우인모 원내대표가 미 하원의원장과 접촉해서 최대한 설득했지만-”

“지랄 났군.”

비서실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원옥분 대통령은 하얀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한 상태였지만, 이렇게 지친 몸을 의자에 깊게 뉘일 때면 무기력한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육신은 노쇠했지만 두뇌만큼은 아직 기민했다.

“지금 중국 총통 노릇하는 인간이 북부전구 총사령관 자오펑 아니야. 리충빈 총통이 죽기 한참 전부터 직접 찍은 후계자.”

“예, 하지만 중국은 사실상 집단지도체제로 선회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지도자 한 명에게 모든 권한이 쏠리지는-”

“그건 나도 알아. 중요한 건 그 인간이 리충빈이 후계자라는 거고, 그러면 우리랑 리충빈 사이에 있던 핫라인도 이어받았을 거 아니야. 미국이 모르는 통신망.”

“그……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핫라인 열려 있으면 그거 쓰고, 아니면 최대한 미국에 비밀로 하면서 중국 국가안전부에 접촉해서 이렇게 전달하라 그래.”

원옥분 대통령이 중국에 비밀 메시지를 전했다.

“당분간 필리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끄겠다고.”

그리고 중국은 필리핀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처음 일으킨 쿠데타는 아니었다. 개문 사태 이후 필리핀 정권은 몇 차례 전복된 적이 있었고 대부분 중국이 관여한 정변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이전처럼 정치인이나 군인이 아니라 헌터가 주축이 된 쿠데타였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아마추어였고, 과격했으며, 서툴렀다. 따라서 그만큼 중국인 ‘자문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중국은 그렇게 필리핀을 집어삼켰다.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둔 미-중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 * *

“아니, 잠깐.”

나는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천 사장의 이야기를 끊었다. 듣다 보니까 남 이야기가 아닌 부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 일어났다는 쿠데타……. 그거 얼마 전에 헌터들이 주축으로 들고 일어난 그거 말하는 겁니까?”

“네. 그런데요?”

그 사건은 나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필리핀에서 들어오는 마석이 뚝 끊기자 발작하는 헌터들이 나한테 찾아온 적이 있었으니까.

근데 그게 국정감사 전 이야기니까…….

“이거 요즘 이야기가 아니라 완전 옛날이야기였네?”

“옛날은 아니죠. 한 달도 안 됐으니까.”

젠장. 여당이었다가 야당이 되니까 들어오는 정보량이 확 줄었다. 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데도 눈치를 못 채다니.

사실 대통령에게 전권을 넘겨받은 비서실장과 야당 서울시장의 정보력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긴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원옥분 대통령이 미국이랑 거래했어요. 그렇게 신기술을 확보했죠.”

필리핀이 중국에 넘어갔다면 미국의 태도가 우호적으로 바뀔 만도 하다. 그것도 평소처럼 친중 정치인을 꽂은 게 아니라 아예 공산당 꼭두각시를 박아 놨으니까.

아마 필리핀은 친중 정부에서 점점 괴뢰 정부로 변신할 거고, 조만간 아예 중화연방에 공식적으로 가맹할 터.

미국은 간신히 괴수로부터 탈환한 호주 북부에 공군기지를 지으면서, 이제 막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빨갱이들의 붉은 깃발이 스멀스멀 다가온다면?

무조건 한국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물론, 한국도 대가를 지불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이다.

“원옥분 대통령은 신기술을 받아오는 대가로 한국 헌터 길드가 방위하고 있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전부 미국에 넘겼어요.”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국방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섬이 너무 많고, 사람도 너무 많고, 군벌도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외국 PMC가 작게는 마을 단위, 크게는 지방 단위로 방위계약을 체결하고 그 지역을 괴수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는데, 지리적 위치상 동남아시아 헌터 시장은 한국과 중국이 양분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파이를 넘겨받은 미국의 동남아시아 영향력은 순식간에 50%에 가깝게 상승한 셈.

“그러면 앞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친중 정치인이 종종 실종되겠군요. 우연찮게 이득을 보는 건 친미 정치인이겠고요.”

“그렇다고 봐야죠.”

동남아시아 각지에 헌터를 파견해서 마석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이 지원하는 정치인이 암살당하지 않을 수 있게 막을 수 있고, 한국을 싫어하는 정치인이 며칠 정도 사라졌다가 얼굴에 멍이 든 채로 다시 나타나면 친한파로 변신하는 마술을 부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중국의 주특기였다. 하지만 이 개짓거리의 원조는 역시 영국, 그리고 그 불꽃 같은 의지를 계승받은 미국이다.

이제 동남아시아에서는 피바람이 불어올 예정이었다.

천 사장이 이야기를 정리했다.

“마석산업을 지키는 대신 동남아시아 헌터 시장을 넘겨주는 것. 이게 원옥분 대통령의 판단이에요. 우리한테도 나름 합리적인 딜이라고 봐야죠. 마석 에너지 산업이 무너지면 2차 경제공황이 올 테니까요. 동남아시아 헌터 시장을 넘겨주는 건 큰 희생도 아니에요.”

국가적 입장에선 원옥분이 큰일을 했다.

마석 산업 신기술을 확보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인 삼성 사이오닉과 LG 이노베이션을 지켜낸 것이다.

그걸 위해 동남아시아 헌터 시장을 넘겨주는 건 작은 희생에 불과하다. 헌터 산업도 중요하지만 마석에너지 산업은 벌어들이는 돈의 자릿수가 달랐으니까.

이제 대충 그림이 보인다.

“대놓고 넘겨주진 못하니까 아무 핑계나 잡아서 3대 길드 해산 때린 다음에 한국 헌터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철수하면, 미국이 자연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거죠?”

“정확해요.”

일본에서 개발된 신기술을 얻기 위해 미국에 동남아시아 사업장을 싹 넘겨주고.

근데 중국 눈치도 보이니까 3대 길드 해산이란 핑계로 동남아 방위 계약을 전부 청산하면서 헌터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고…….

“이러면 그림이 좀 예쁘게 나오네요. 앞으로 미국이 동남아에서 캔 마석을 수입할 테니까 좀 예쁘게 봐달라는 의미도 있고, 이 김에 대형 헌터 길드들 힘도 좀 빼고…….”

원옥분 대통령의 깔끔한 외교술이 빛을 발했다.

일본은 좋은 기술을 적당한 가격에 팔아서 좋(?)고.

중국은 필리핀을 중화연방에 편입해서 좋고.

한국은 미국에게 일본산 신기술을 넘겨받아서 좋고.

미국은 한국이 방위하고 있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고스란히 넘겨받아서 좋고.

“근데 우리는 별로 안 좋네요.”

“그렇죠?”

천 사장이 빵긋 웃었다.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한국인이 좆됐을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었다. 조금 무서웠다.

“생각해 보세요. 동남아시아에 있던 헌터들이 전부 실직자 신세가 됐는데……. 다 누구한테 항의하러 오겠어요?”

“나요.”

“그죠? 서울에 아파트 짓지 말고 게이트 그대로 열어 두고 사냥터로 쓰자고 하겠죠?”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회피기동을 펼칠 수 있었다. 짬이 얼만데 이 정도 위기에 휩쓸리겠는가.

당장 홍선아가 제안했던 ‘헌터아파트’도 대안이 될 수 있었고, 이 기회에 ‘가자 북으로!’를 외치며 강남에서 경기도 북부까지 쭉 밀고 올라갈 수도 있었다.

아니면 서울시 예산을 탈탈 털어 실업자들을 전부 고용해서 건설 현장에 투입할 수도 있었고, 미친 척하고 ‘이게 다 원옥분 때문이다!’라고 선동하면서 대통령 지지율을 개박살내며 전면전을 선포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진짜로 좆된 건 내가 아니다. 원옥분 대통령의 빅딜로 동남아 헌터 시장과 3대 길드가 없어지며 가장 큰 피해를 볼 사람은…….

바로 천금순이다.

천 사장의 GS 그룹(구 천목그룹)은 헌터 길드인 GS 방위대행사와 헌팅 디바이스 제조사인 GS 아이기스가 주축이다.

천씨 가문의 근본이자 지주회사인 천목해운을 필두로 식품, 유통, 등 여러 계열사가 있지만, 결국 차세대 신산업을 이끄는 두 회사가 그녀의 날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방위대행사가 없어지면 괴수 부산물을 자체적으로 얻기도 힘들어지고, 그러면 GS 아이기스에서 만드는 각종 무기와 방어구 생산에도 차질이 생긴다.

그녀는 절대로 3대 길드 해산을 받아들일 수 없다.

“다른 3대 길드들…… 그러니까 삼성 수렵대행사나 LG 헌터스는 해산을 받아들일 거예요. 삼성 사이오닉과 LG 이노베이션이 벌어들이는 돈은 자릿수가 다르니까. 그리고 대기업이 무력까지 가졌다는 국민들의 반발이 슬슬 무섭기도 했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 천 사장님은 마석산업체가 없잖아요.”

“그죠. 나한테는 지킬 게 없어요. 언제든지 미친년이 될 수 있죠. 그래서 청와대가 나한테 총구를 먼저 들이민 거예요. 일단 미친개는 몽둥이로 때려잡아야 말을 들을 테니까.”

“젠장…… 대책은 있습니까?”

“물론이죠.”

“그나마 다행이군요. 대체 무슨 대책이-”

천 사장의 손가락이 내 볼을 쿡 찔렀다.

“나구나.”

“이럴 때 써먹으려고 그동안 돈을 퍼부은 거 아니겠어요.”

“에효.”

내가 GS 그룹과 끈끈한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서울시장이라는 위치에 묶인 상황.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재개발 사업을 관리감독하는 와중에 특정 그룹을 비호하는 건 내게도 큰 부담이다.

그러나 나는 천 사장을 도와야 했다.

“도와줄 테니까 손가락이나 치워요.”

국민당 창당 자금을 대줘서가 아니다. 내 정치후원금 통장을 매달 꽉꽉 채워줘서가 아니다. 세계 최고의 헌팅 디바이스 회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직된 웃음으로 불안감을 숨기고 있는 천 사장의 손가락 끝에서는 다이소에서 산 붙임손톱에 붙은 큐빅이 반짝거렸다.

남들은 아마 이 큐빅을 보고 어떤 명품 회사에서 산 보석인지 한참을 고민할 것이다. 천 사장은 그걸 구경하며 속으로 비웃겠지.

그녀는 이처럼 어딘가 꼬인 사람이었다. 어릴 적 ‘자기야’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던 애완 강아지 뽀삐가 회장님의 골프채에 맞아 죽은 이후로 그렇게 됐다.

그녀의 아버지. 천 회장은 천금순에게 돈 들어오는 여자애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는 그녀가 천 사장이라는 호칭을 끝까지 고집하는 이유가 되었다.

어머니에게도 딱히 원한은 없다고 하지만 천금순은 혼외자였고, 어릴 적 자기 어머니에게 상습적으로 폭행당한 전력이 있었다.

나이는 나와 동갑, 빈혈과 집중력 결핍이 살짝 있고, 잠을 잘 못 자서 다크써클이 짙으며, 말도 또박또박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조곤거린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어휴, 원옥분 대통령 성질 까다로운 인간인데, 참…….”

“그래서 안 도와줄 거예요?”

“우리 천 사장님 자꾸 마음 고생하다 골병 들면 큰일나죠. 검증된 의사인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한 선생님……. 제가 요즘 잠을 통 못 자요.”

“조만간 발 뻗고 주무시게 해드릴게요.”

원옥분 대통령을 조질 건수가 뭐가 있지?

과거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북한 인민무력상의 쿠데타를 돕기 위해 최고위원장이 숨어 있던 벙커를 터뜨렸던 것?

북한 인민무력상과의 관계를 위해 남쪽으로 도망친 백두혈통과 개성시 반란군을 그대로 북송했던 것?

아니야. 이건 원옥분 대통령에게 지나친 치명타로 작용한다.

나는 원옥분 대통령을 싫어하지만 나름대로 존경하는 편이고, 그녀와 사생결단을 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정치적인 이유로 쳐내는 건, 내가 그은 선을 넘어가는 짓거리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할 건, 원옥분 대통령을 위한 못된 장난에 가까울 것이다.

“아…… 뭐부터 하지.”

무심코 튀어나온 속마음에 천 사장은 해맑게 박수치며 웃었고, 감 기자와 피채원은 오들오들 떨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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