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53화
EP 39-상실의 시대(3)
피채원은 내게 서울에서 구출된 이후로 쭉 내 보좌 역할을 했다.
국회의원 시절엔 수행비서고, 초상관리부 장관 시절엔 장관보좌관이고,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엔 부속비서관이고, 서울시장을 하는 지금은 수행비서관이었다.
존재 자체를 최대한 숨기긴 했지만 미성년자 고공단을 찍은 후엔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 피채원은 나와 엮인 음모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였다.
내 애인이라는 개소리는 네거티브 할 때마다 꼭 등장하고, 여도연보다 강력한 강체술사라는 설도 있고, 순식간에 수십 명을 해치울 수 있는 암살자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양판석 전 대통령이나 원옥분 대통령처럼 알 만한 사람들은 피채원이 독심술사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말할 수 없다.
괴수를 잡아 수익활동만 하지 않는다면 미등록 초상능력자가 불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장려되는 행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충청도 슬럼가에서 활개치는 대부분의 범죄조직 두목이나, 제주도 재벌들이 고용한 사냥개들이 대부분 미등록 헌터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천 사장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에 관련한 브리핑은 앞으로도 없을 거고, 저는 그런 질문에 대해 공식적으로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을 겁니다.”
“NCND? 적절한 대응이네요. 물론 질문을 던진 순간 피채원 양이 어깨를 흠칫거리면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요.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좀 귀엽네요. 저보단 아니지만…….”
피채원과 감 기자가 귀를 의심하고 있을 때, 나는 이미 그녀의 기행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태연하게 질문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그런 질문은 왜 했습니까?”
“이제부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건데 내보내야 하나 결정하려고요. 내보내봤자 소용없을 테니까 그냥 같이 들으라고 하죠…….”
피채원은 남의 속마음을 척척 읽는 게 아니라, 귀로 듣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공감하는 초상능력자라고 굳이 설명하진 않았다.
“그러면 감 기자님은 왜 안 내보내고……?”
“내가 자기한테 뭐 부탁하면 결국 감석 씨한테 도와달라고 할 테니까 처음부터 같이 설명하는 게 낫죠.”
감 기자가 끼어들었다.
“석이는 제 아들이고 저는 감철입니다만…….”
잠깐 침묵한 천 사장이 나를 보며 이해가 간다는 듯 말했다.
“……자기가 맨날 감 기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네요.”
“그렇죠? 이거 맨날 헷갈린다니까요?”
“진짜 두 분 다 너무하십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장 이득을 본 건 피자는 물론이고 피클까지 뇸뇸거리며 흡수한 피채원이었다.
천금순이 피자를 먹으려다가 박스가 텅 빈 걸 보고서 피채원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본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국정감사 봤어요. 국회에 불나서 묻히긴 했지만……. 국방당 김혜민이가 광진구 수렵사업권 물어뜯었죠?”
나는 [예. 3점 차이로 GS 방위대행사가 떨어졌던 사업을 내가 도로 붙여준 그거요]라고 대답하지는 않고 고개만 살짝 까딱거렸다.
녹취록 대비는 기본이니까.
그러나 천 사장은 또 이상한 포인트에서 열이 받은 모양이다. 갑자기 급발진한다.
“자기는 왜 이렇게 담이 작아요? 금천구 정경유착 일감 몰아주기 비리는 뭐랄까……. 우리의 끈끈한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상징하는 거잖아요?”
“미치셨습니까?”
“그냥 당당하게 말하란 말이야……. 이 비리가 내 비리다! 이 여자가 내 스폰서다! 왜 말을 못 해! 왜 말을 못 하냐구!”
감 기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수군거렸다.
“이분 원래 이래요……?”
“유머 감각이 좀 이상하긴 합니다. 금수저가 다 그렇죠 뭐.”
천금순이 심호흡하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휴우……. 금수저라 그런 건 아니고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이라고 해두죠. 그나저나 어디까지 얘기했죠?”
“제가 오늘 국정감사에서 국방당 김혜민 의원님께 광진구 민간사업자 선정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받았던 일을 이야기했죠.”
“우리 한 시장님 자나깨나 녹취록 조심하면서 이빨 터는 거, 내가 한결같아서 참 좋아하는 거 알죠?”
“하던 말씀이나 계속하시죠.”
내가 턱짓하자 그녀가 설명을 이어갔다.
“국정감사에서 GS 그룹이 거론됐다는 소식에 우리 회사 임원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상황을 파악했지요. 김혜민 의원을 사주한 사람을 거꾸로 추적하니까 청와대가 나왔어요. 아예 숨길 생각도 없던데요?”
“광진구 건을 건드려서 GS를 긁은 게 정부였다고요? 토건재벌이 아니라?”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알아봤는데, 조만간 정계는 물론이고 사방팔방에서 GS를 융단폭격할 예정이더라고요. 벌써 증권가에서는 수상할 정도로 현금이 많은 유령회사가 GS 방위대행사 주식을 사들이고 있고요…….”
“그러면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숨통을 끊어야지 왜 오늘 경고장을 날린 겁니까?”
“정부가 이미 머리통에 총구를 겨누고 있으니까 순순히 항복하라 이거죠. 우리 쪽 대관 담당자가 청와대 비서실장의 메시지를 받았어요. 조만간 GS 방위대행사 지분관계 청산하고 PMC에서 손 떼라고.”
“허.”
GS 방위대행사는 3대 길드 중 하나다. 그걸 이렇게 어거지로 해산시키는 건 아무리 봐도 독재자나 할 짓인데…….
“……왜지?”
“그러게 말이에요. 내가 게이트 터지자마자 개박살난 주식시장에서 헐값된 기업체 마구 쓸어 담기를 했어요? 아니면 국민당 창당자금을 대주기를 했어요? 대체 왜 원옥분 대통령이 날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우리 회사 노조를 해산시킨 것도 아니고, 탈세를 한 것도 아니고, 나라 휘청거릴 때마다 환치기를 한 것도 아니고…….”
“그…… 우리 천 사장님이 국가적으로 명성이 높은…… 씹새끼인 건 저도 아는데요. 왜 갑자기 이 타이밍에 찍어 누르냐 이거죠. 대통령 된 지 1년도 안 됐는데 재계랑 각을 세우니까.”
“아, 그걸 물어보신 거구나?”
천 사장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에요. 원옥분 정부에서 조만간 3대 길드를 강제 해산시킬 거예요.”
“그게 도대체 무슨……!?”
그때 내 동물적인 감각은 원옥분 대통령의 기묘한 특기를 떠올렸다.
검찰 원옥분은 무대뽀였지만, 정치인 원옥분은 천재적인 라인 갈아타기로 롱런했다.
그런 그녀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해먹으면서 개화시킨 신묘한 재능.
외교.
중국이 지랄하면 북한 옆구리를 찔러 핵폭탄 갈기겠다고 협박하고, 세계 유일의 헌터각성제를 보유했지만 미국에게 빼앗기지 않은 기적적인 외교 능력.
물론 그런 외교력을 뽐내기 위해 손에 피를 어마어마하게 묻히지만, 원옥분 대통령의 외교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니 원옥분 대통령이 갑자기 돌발행동을 보이면 아마 어떤 외교적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판단은 빨랐다.
“3대 길드 해산시켜서 어디랑 딜을 하려고 하는 겁니까?”
“우와……. 벌써 거기까지 읽은 거예요?”
“급하니까 빨리.”
“천천히 들어요. 시간 많으니까.”
천 사장은 나긋이 웃고서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일본에서 개발된 신기술이었어요…….”
* * *
개문 사태 직후, 일본은 모든 국토를 방위하는 데 실패했다. 해상자위대에 밀려 투자가 소홀했던 육상자위대가 처절하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도쿄의 중앙정부가 지켜주지 못한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무력집단’이 자경단을 자처하며 지방정부를 장악했다.
“언제까지 무능한 정부의 지시만을 기다릴 것인가! 총이 없다면 칼이라도 들고 일어나라! 저 괴물 놈들의 먹이가 될 수는 없다!”
“오사카 시민 여러분! 한 번만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결사의 각오로 아귀를 토벌하고 시민을 보호하겠습니다!”
“멍청한 놈들이 초상능력자에게 목줄을 채우려고 한다지? 지금이 기회다. 조금이라도 초능력을 쓸 줄 안다면 억만금을 줘서라도 포섭해라!”
조직폭력단, 야쿠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 육상자위대의 패잔병과 게이트 사태 이후 새롭게 등장한 각성자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렇게 일본에는 관동 중앙정부와 관서 야쿠자 지방정권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다. 야쿠자의 시대가 수십 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불안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야쿠자들은 한때 북한과 손잡고 장기밀매 사업을 펼칠 정도로 세력을 떨쳤으나, 장전읍 사태 당시 남한에 적발되며 분쇄되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극단주의자들이 야쿠자를 통해 북한에서 한국인 각성자의 장기를 빼돌려 각성촉진제의 개발 비법을 알아내려고 했다는 사실마저 들킨 순간.
일본 정부는 꼬리를 자르기 위해 야쿠자를 덮쳤다. 안 그러면 한국군이 범죄 조직 퇴치를 목적으로 해협을 건넜을 테니까.
“관서 지방 일대를 무력으로 점거하고 시민을 위협하던 불법 조직폭력단체가 완전히 해산되었습니다. 아울러 국가적 위기를 틈타 각지에서 범죄를 일삼던 지정폭력단이 정부의 특수작전을 통해 무장해제되는 중이며…….”
그렇게 촉발된 일본 내전은 순식간에 중앙정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정부 측 헌터가 상당수 줄어들면서 일본 정부는 당분간 전 국토의 게이트 사태를 대처할 전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타국의 PMC들이 일본 각지에 방위 계약을 체결했고, 지리적 위치상 수많은 마석이 한국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 마석으로 한국은 경제 정상화에 성공했지만, 일본은 타국 헌터가 각지에서 괴수를 사냥하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게이트 위기 대응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다른 분야에서의 저력은 여전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야쿠자와 타협하면서까지 수도권을 지켜냈다. 비록 도쿄의 상당 부분이 게이트 사태로 폐허가 되었지만, 관동 지방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대도시권이다.
인구는 산업으로, 산업은 자본으로, 자본은 금융으로, 금융은 투자로, 그리고 그건 일본 이화학 연구소의 쾌거로 이어졌다.
“다나카 박사? 마석 정제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예! 장관! 국제 표준 에너지 배터리를 기준으로 8% 상승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해양괴수가 바닷길을 장악하며 석유의 시대가 끝난 현재, 마석을 에너지 배터리로 가공하는 마석산업은 인류의 심장을 뛰게 하는 핵심 산업이다.
마석이 에너지 배터리가 되고, 에너지 배터리는 자동차, 비행기, 손전등, 컨테이너선 등에 장착되어 전기를 공급한다.
이런 천문학적인 자본이 오가는 전략 산업에서 8% 효율이 높아진다는 건 마찬가지로 천문학적인 이윤이 창출된다는 의미.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기술이 없는 경쟁업체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 독점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기술이 없는 놈들은 전부 죽겠구만!”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세계 마석에너지 산업을 평정하고 압도적인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는 일은 없었다.
정작 일본에 마석산업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이트 사태로 지구가 반쯤 박살난 마당에 마석을 에너지배터리로 가공할 수 있을 정도로 기반시설이 멀쩡하고 기술력이 발달한 나라는 오직 미국, 영국, 그리고 한국뿐.
내전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일본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신기술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것뿐이었다.
“도대체 왜 이 기술을 팔아치우는 겁니까! 대체 왜-!”
“어쩔 수 없다. 다나카 박사…….”
“차라리 팔아넘길 거면 일시금으로 팔지 말고 사용료라도 받으십시오! 의료기기 기업에서 하는 것처럼! 이 기술을 사용할 때마다 일정량의 비용을 받으란 말입니다! 대체 왜 무식하게 일시불로 파는 겁니까!”
“그건……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대량의 외화 수혈이 필요하다는 총리대신의 판단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그냥 순익의 0.5%만 떼어달라고-”
“닥쳐라! 다나카! 지금이 헤이세이平成 시절로 보이는 거냐! 그따위 짓을 했다간 신기술 따위 힘으로 빼앗길 거다! 자네가 납치당할 수도 있어!”
“그……! 그게 말이 됩니까……! 21세기에……!”
“미국의 마석산업체는 초대형 PMC의 소유물이고, 그 초대형 PMC는 거대기업의 소유이며, 거대기업은 금융자본의 소유이고, 금융자본은 미국 정부와 한 몸이란 말이다!”
“치……! 칙쇼! 칙쇼-! 아악! 아아아악-!”
“때려죽여도 한국에는 안 팔 거니까 진정해라.”
“아, 그럼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