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247화 (247/296)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247화

EP 38-불꽃이 튀기는 국정감사(2)

오늘도 서울시청(세종정부청사 4층)은 평화롭다.

내가 지금까지 겪은 직장 중에는 여기가 최고인 것 같다.

첫 직장인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정치인, 보좌관, 기자, 민원인들로 북적거렸고, 한국 정치의 중심이다 보니 돌발 이벤트가 너무 많았다.

국회의원끼리 싸우고, 보좌관이랑 국회 직원이 불륜하고, 기자가 몰카 가지고 들어오고, 민원인이 화염병 던지고, 하늘에서 괴수도 떨어지고…….

정말 거기서 별꼴을 다 봤다.

두 번째 직장인 2차 한국전쟁 대비용 지하 국회에서는 칼날 위를 걷는 시기를 보냈다. 차재균한테 붙었다가 양판석에게 붙었다가, 목숨 걸고 기자회견하고, 대국민 폭로극도 벌이고…….

그리고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절뚝거리면서 계단을 왕복했다.

결국 양판석이 대통령이 된 이후 전쟁용 지하 국회에 엘리베이터를 달았다. 앞으로 쓸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세 번째 직장은 지하벙커 ‘청와대’였다. 지하벙커 이름이 청와대다. 좀 꿉꿉하고 냄새가 나긴 했지만 넓고 편했다. 대규모 인원의 장기 거주를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라 그런가.

안전이 보장된 곳이라 당시 합참의장은 가족들까지 데려와서 살았던 거 같은데, 나는 잠은 이모네에서 자고 출퇴근만 했다. 그래도 나름 괜찮았던 곳이다.

그러나 세종정부청사는 차원이 다르다.

“채원이 머리하고 왔네?”

“네.”

정부청사에 미용실이 있다.

카페테리아, 병원, 체력단련실, 어린이집, 농협은행, 문구점, 종합 매장, 세탁소, 안경원, 약국, 제과점, 휴대폰 판매점, 식당, 등등.

전부 있다.

물론 수영장처럼 대놓고 여가 시설인 건 국민들 눈치 보여서 못 지었지만, 반대로 세금으로 지을 수 있는 ‘명분’이 있는 건 죄다 있다.

그리고 업무 관련해서도 아주 편하다.

‘이거 행정안전부 데이터랑 통계청 데이터가 다른데요? 전화로 문의할까요?’

‘아랫층이잖아. 직접 가서 따지고 와.’

‘그게 효과가 확실하긴 하죠.’

이곳에서는 공무원들의 돌려막기가 통하지 않는다. 자기 소관 아니라고 떠넘기면 즉시 소회의실 빌려서 삼자대면이 가능한 것이다.

기획재정부, 환경부, 외교부,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등…… 전부 세종정부청사에 있었다.

이처럼 부서 간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우니 가끔 일손이 딸리면 인재를 납치해 올 수도 있다.

‘어라?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자, 장관님? 아니, 시장님?!’

‘이제는 차관님 되셨다면서요? 마침 초상관리부 협조가 필요한 사안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잠시 제 집무실로 오실까요?’

‘그게…… 저도 지금 일이 있는데…….’

‘하하,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이면.’

업무 ‘협조’와 부서 간 ‘소통’이 쉬우니 행정업무를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다.

거기다 집무실은 햇빛도 잘 들어오고 풍경도 좋다.

넓고 모던한 서울시장 집무실에서 잠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지며 먼 산을 쳐다보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

아늑한 원수산 산기슭 아래에 있는 호수공원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참으로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렇다.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가끔 게이트가 열려대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의 멸망이 눈앞에 어른거리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세계적인 추세가 그렇다. 인류 멸망의 고비는 이제 넘겼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괜한 고민이 들곤 했다. 이제 평화를 되찾은 한국에서 정치인 한승문의 역할이 다한 게 아닐지…….

혼란스러운 시대에 헌터들을 공권력에 편입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하극상을 일삼고, 외교가를 쏘다니며 도박수를 던져대는 좌충우돌 정치인의 소명이 이제 끝난 건 아닐지…….

이제 한승문이라는 정치인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인지. 정치인 하나가 헌터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민주주의와 모순되는 건 아닐지.

헌터 사회를 살아가는 정치인으로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빠지곤 한다.

그 탓에 정치에 대한 의욕도 옛날만 못하다. 그냥 관성으로 하고 있다. 언젠가 양판석이나 원옥분이 힘없이 웃으며 자조했던 것처럼.

이제 나도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일까. 이 평화에 안주하며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걸까.

그러나 내 마음을 몰라주는 하늘은 여전히 맑고, 구름은 새하얗고, 호수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어 보인다.

복잡한 마음에서 벗어나 동네 경치나 구경하고 싶은 욕망이 입에서 저절로 새어 나왔다.

“경치 좋다…….”

“그러게요…….”

혼잣말에 나긋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겁해서 커피를 쏟을 뻔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확인했다.

헌터협회장 홍선아가 소파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선아 씨?”

“네?”

“언제 왔어요?”

“방금이요.”

“나는 들어오는 거 못 봤는데.”

“순간이동으로 왔으니까요.”

“으응. 그랬구나…….”

나는 손가락으로 집무실 입구를 가리켰다.

“나가.”

* * *

신성한 서울시장 집무실에 엉뚱한 떡볶이 냄새가 풍겼다. 범인은 놀랍게도 홍선아다.

무려 편의점 치즈떡볶이에 마요네즈랑 삼각김밥을 야무지게 비벼 먹고 있었지만, 보좌관들은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못했다.

국내에서 몇 안 되는 9등급 초상능력자를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을까. 핵폭탄을 처맞고도 살아남은 이력이 있는 최상위 헌터를 말이다.

그녀는 핵폭탄 직격의 대가인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서, 떡볶이를 먹다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시장님도 드실래요?”

“그래도 눈치는 보이는 모양이네요. 다행이에요.”

“싫음 말구…….”

홍선아가 냠, 하고 떡볶이를 삼켰다. 다행히 그녀의 허리춤에 기관단총은 없었다.

“그래도 총은 안 들고 왔네요. 직원들이 기겁할 뻔했는데.”

“저번에 들고 왔다가 나중에 국정원 직원이 찾아와서 뭐라고 막 그랬어요. 혼내줘요.”

“왜 들고 다니는 건데요?”

으음. 홍선아가 짧게 고민하고 답했다.

“제가 서울에서 생존자 캠프 꾸리면서 약탈자들 상대하느라 사람 좀 태웠잖아요?”

“그랬죠.”

나는 그녀가 총에 맞아 죽은 친구들의 시신을 태운 걸 알지만, 이를 모르는 직원들은 기겁하며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에서 도망쳤다.

“경험상 대체로 각성자보다는 총이 더 강한 것 같애. 그래서 들고 다니는 거예요.”

“쓴 적은 있고?”

“아뇨. 그냥 마음의 안정을 주는 부적 같은 거랄까. 아! 물론 괴수들 상대로는 자주 써요. 코너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면 분무기 뿌리듯이 그어버리는 거죠. 이거 성능 확실하거든요.”

홍선아는 떡볶이 종이컵을 탁탁 정리하고 내 집무실로 들어가며 눈짓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집무실에 들어간 다음에 철컥 문을 걸어 잠갔다.

“그나저나 총 들고 다니는 헌터들 은근히 많아요. 이쪽 분야 대표인 다솔이는 총이 자기 오빠 유품이라 예외로 쳐도, 3대 길드에서도 헌터들에게 사격을 가르치는 추세라구요. 물론 제 어드바이스를 듣고서요. 전 어딜 가나 환영받는 사외이사 겸 전략고문이니까!”

“다솔이요? 여다솔 치안관보?”

“으음. 이 얘긴 그만하고.”

그녀가 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헌터협회장 짤렸어요.”

“저런.”

“청와대 정무수석이라는 아저씨가 와서 좋게좋게 이야기했는데, 이제 헌터 협회장을 선거로 뽑을 거니까 슬슬 나가라더라고요.”

이건 상당히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동시에 당연한 이야기기도 했다. 홍선아는 내가 초상관리부 장관을 하던 시절에 임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원옥분 정부에서 지난 정권의 사람들을 쳐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홍선아가 앞으로 헌터 협회장 자리를 유지할 줄 알았다.

그녀는 압구정파의 리더였으니까.

여전히 대한민국 헌터 업계의 주류를 양분하고 있는 압구정파와 동대문파. 그 양대 세력 중 하나의 영수였으니까.

“정무수석이 뭐라고 그랬는데요? 자세히 좀 이야기해봐요.”

“초상관리부 장관이 임명하는 헌터 협회장이 사실상 명예직이었는데, 헌터들이 직접 협회장을 뽑게 하는 대신에 실권을 몰아준다는데요?”

나는 살짝 뜨끔했다.

헌터 협회장을 초상관리부 장관이 임명하는 허수아비로 만든 게 당시 장관이었던 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회장이 허수아비인 거지, 헌터 협회가 힘이 없는 건 아니었다.

헌터 협회는 국내 모든 헌터들의 등급과 랭크(웃기는 소리지만 별개의 개념이다)를 책정하며 PMC를 직간접적으로 컨트롤한다.

사실상 정부가 헌터 업계를 관리하는 핵심적인 무기인 셈이다.

홍선아가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사실, 이번 총선에서 국방당으로 출마하면 헌터 협회장 연임하게 해주겠다고 하긴 했는데, 잘 거절했어요. 이건 한승문 시장한테 절대 비밀로 하라고 그랬으니까,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알죠, 알죠. 절대 비밀.”

나는 입에 자크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홍선아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흐흣. 사실 그쪽에서는 제가 한승문한테 반감이 심할 줄 알았나 봐요. 거절하니까 쪼끔 당황하더라구.”

“이런, 선아 씨가 저를 미워할 일이 뭐가 있죠?”

“……그걸 몰라서 물어요?”

그녀가 그간 허수아비 협회장 노릇 하면서 욕먹은 앙심을 담아 나를 째려봤다.

내가 시선을 피하며 몸을 사리자, 피식 웃고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퇴임 인사는 했어요. 나 갈게요. 뿅.”

“뿅?”

그녀의 발끝에서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기름 먹인 종이가 불타오르듯, 불꽃이 되어 화르륵- 사라졌다.

“언제 봐도 신기하다니까.”

* * *

필리핀 쿠데타로 인한 마석 공급 대란의 후폭풍을 나한테 떠넘긴 것도 그렇고, 홍선아를 대뜸 잘라버린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청와대에서 나를 슬슬 긁기 시작한 모양이다.

전국민이 알다시피, 원옥분 대통령과 내 사이는 조금 껄끄러운 편이다. 서로 엿을 자주 먹였으니까.

그러나 아예 철천지원수 사이는 아니었는데, 국가적 위기 상황에는 손을 잡은 적도 많았던 데다, 호적수 사이의 리스펙트도 존재했다.

그런 맥락에서 원옥분이 대통령 당선에 성공하고, 내가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후로는 암묵적인 휴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좆같은 새끼. 서울시장 당선되는 거 방해 안 할 테니까 중앙정계에서 꺼져라.’

‘고맙수다. 근데 전 정권 적폐청산한다고 양판석 대통령 건드리면 재미없는 거 아시죠?’

‘서울 떼어줄 테니까 거기서만 놀아.’

원옥분 대통령과 나 사이에는 이런 암묵적인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런데 요즘 그 휴전선을 넘어서 원옥분의 군세가 침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리핀 마석 대란 하나만 짬 때렸으면 모를까, 홍선아까지 짜른 건 선 넘었다.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제기랄. 또 선거철이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총선이네요.”

“한국은 이게 문제야. 매년 선거철이야! 총선 끝나면 대선이고, 대선 끝나면 지선이고, 지선 끝나면 보궐선거하고, 보궐 끝나면 총선이라고. 선거에 미친 나라 같으니…….”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목숨 걸고 싸우는 총력전인 대선보다는 못해도, 국회의원 밥줄이 달린 만큼 전면전 정도는 됐다.

국회의원 뽑는 총선에 서울시장이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 싶겠지만, 나는 국민당을 창당한 사람이었고, 현직 국민당 원내대표인 이호정이 내 보좌관 출신이고 친구였다.

그 탓에 국방당을 위시한 원옥분 세력의 주요 타깃에 속한다. 이 말이다.

안 봐도 뻔하다. 한승문을 때리면 국민당 원내대표가 다친다? 이거 타격감 죽이는데? 이러면서 막 달려들 거다.

물론 정치가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국방당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당해 만든 정당이었고, 구 민주당계 의원들은 양판석의 직계인 나에게 대체로 온정적이었다.

그러나 지난 동북아시아 카타스트로피 당시, 양판석의 친아들인 양정석이가 민주당계를 이끌고 지랄을 하다 폭발사산한 덕에 국방당 당권은 공화당이 장악했다.

게다가, 타이밍도 상당히 절묘하다.

피채원이 걱정스레 나를 불렀다.

“시장님. 그러고 보니까…….”

“아무래도 이번 국감은 좀 빡셀 것 같다.”

이번 주부터 국정감사 시즌이었다.

국회가 합법적으로 행정부를 조지는 게 장려되는 기간이다.

그리고 그 행정부의 범위에는 현직 서울시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 * *

국정감사.

매년 한 번씩 국회가 정부를 조지는 연례행사. 매 시즌마다 고위공무원 몇 명이 화성으로 날아간다.

국정감사는 국회에서 한다. 그리고 국회는 부산에 있다. 그러므로 국정감사를 받으려면 세종시에서 부산까지 가야 한다.

KTX 타면 2시간이다.

“꽃 피는- 동백섬에-”

나는 피채원을 비롯한 서울시 간부들과 함께, 흐느적거리며 기차역에 내렸다.

“돌아왔다- 부산항에-”

“노래 부르지 마시죠…….”

“어디이- 보자아…….”

개문 사태 이후, 사실상 한국의 수도가 된 부산은 올 때마다 풍경이 바뀔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못 보던 고층 빌딩 하나가 새로 생겼다. 그 옆에는 빌딩 하나가 올라가고 있었는데, 하늘의 점처럼 보이는 염동술사가 둥지 짓는 새처럼 건설 자재를 올리고 있었다.

“옛날에는 아래에서 벽돌만 올려주던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공중에서 건물 조립을 하네. 대단하다 정말.”

“지윤이가 저런 걸 참 잘했죠…….”

“채원이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델리만쥬 사줄까?”

“시장님…….”

내가 피채원을 아이 취급하자 우리를 둘러싼 서울시 간부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간부들은 대체로 연령대가 있는 편이라 딸뻘인 피채원을 예뻐라 하는 편이었다.

낙하산을 향한 질투도 나이 차이가 이 정도로 심하면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피채원은 한승문이 수상할 정도로 싸고도는 인물이었다.

연인 관계라는 찌라시를 진지하게 믿는 고위공무원은 엘리트 자격이 없다. 정관계 내부에선 압도적인 능력의 미등록 헌터라는 게 정설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명을 도륙할 수 있는 암살자라는 찌라시도 있다.

어쨌든, 서울시 고위공무원 중에 피채원을 가장 예뻐하는 건 언론인 출신의 정무부시장 감철이었다.

“감 기자님, 아니, 감 부시장님. 아이코, 맨날 호칭을 틀리네.”

“하하, 그냥 편한 대로 하시죠. 사실 저도 시장님보다는 의원님이라는 호칭이 제일 잘 붙습니다.”

“그래도 가장 높게 불러드리는 게 관행인데…….”

“시장님이랑 제가 관행 따져야 할 사이였습니까? 이거 섭섭한데요? 채원아, 안 그래?”

“으음. 섭섭할 만한 것 같네요.”

“그치?”

감기자는 피채원이 농담을 던지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함께 게이트 사태를 헤쳐 나오고, 차재균의 생체실험을 파헤치던 전우애가 있는 것이다.

감기자의 가족은 부모를 잃은 피채원을 돌봤고, 피채원은 감지윤의 언니가 되어 충격적인 일을 겪은 어린아이가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이제 가족이었다. 한국에도 이제 ‘꽌시’라는 개념이 있다. 엄혹한 세월을 견디기 위해 사람들은 이제 혈족 이상의 울타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일행의 가장은 나다. 감기자와 피채원이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며, 난 오늘도 정치판에서 미끄러지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 찾았다.

“국정감사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잠깐 각자 자유시간을 가지시죠.”

“예? 하지만, 시장님…….”

“정 불편하시면 먼저 국회로 가셔서 준비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게 벼락치기도 아니고 직전에 메모만 달달 외운다고 되겠습니까? 국정감사의 본질은 서울시 공직자들이 국민 앞에 얼마나 성실한 자세로 임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고, 저는 우리 간부들을 믿습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긴장해야 하는 날이니까, 지금은 각자 바닷바람도 쐬고, 길거리에서 달달한 것도 먹고, 그럽시다. 그러고 몇 시간 있다가 국회에서 다시 봅시다.”

상식적이지 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서울시 간부들 중 마음에 낭만이 남아 있는 몇몇은 약간 감동한 기색으로 이 기회에 해운대나 산책하면서 마음을 비워보겠다고 떠나갔고.

공무원 마인드를 장착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형식적으로 네네 하고는 바로 국회로 가서 대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눈치 빠른 소수는, 어떻게든 내 옆을 지키겠다고 충성심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서 떠나갔다.

그러자 내 곁에 남은 건 피채원과 감기자 두 사람뿐이었다.

감기자는 내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감 기자님이랑 채원이는 따지고 보면 서울 사람 아닙니까.”

“그렇죠.”

“저는 통영 사람이긴 한데, 뭐, 어릴 때부터 부산 자주 다녔으니까 넓은 의미에서 부산도 고향으로 쳐주기로 하고…….”

살짝 부끄러워서 말을 더듬었다.

“그냥 여기 두 사람하고 내 고향 바닷바람이나 맞으면서 잠깐 걷고 싶었습니다.”

감 기자가 배를 잡고 폭소했고, 피채원은 아주 오랜만에 입꼬리를 올렸다. 검은 생머리가 바닷바람에 고즈넉이 흩날렸다.

“의원님.”

“응?”

“약간 아저씨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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